1956년 대전역 앞 천막에서 찐빵 장사로 시작한 성심당은 튀김소보로, 딸기시루 등 메가 히트 상품을 개발하며 전국에서 입소문 난 대전 명물 빵집으로 성장했다. 영업이익 기준으로는 SPC그룹 계열사 중 파리바게뜨를 운영하는 파리크라상(199억 원)과 CJ그룹 계열사 중 뚜레쥬르를 운영하는 CJ푸드빌(214억 원)을 뛰어넘었다. 성심당이 위기를 딛고 전국에서 사랑받는 장수 빵집으로 거듭날 수 있었던 성공의 ‘비밀(BE MIL)’은 지역 정체성을 바탕으로 한 로컬 브랜드로 자리매김하고 모든 이해관계자를 포용하는 EoC 경영을 실천한 점이다. 일본 벤치마킹 투어 등 인재 양성에 투자하며 제품을 꾸준히 혁신하고 고객 가치를 우선하며 가성비 제품을 선보이는 데 집중한 점도 사랑받는 브랜드를 만드는 데 한몫했다.
“우리 가족이 살아난다면 평생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살겠습니다.”
폭파되는 흥남부두를 바라보며 기도했다. 1950년 6·25 전쟁 중 피란민을 실은 마지막 배, ‘메러디스 빅토리호’가 부두를 출항한 직후였다. 아내와 네 딸이 무사히 살아남는다면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살겠다고, 가장은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를 올렸다. 이틀간 바다를 달린 배는 12월 25일 경상남도 거제도에 무사히 도착했다. ‘크리스마스의 기적’이었다.
거제를 거쳐 경남 진해에 머물던 가족은 냉면을 삶아 팔며 생계를 이어갔다. 전쟁 통에 하루하루를 보내는 것이 기적에 가까울 정도로 힘든 시절이었지만 메러디스 빅토리호에서 올린 기도를 잊지 않았다. 하루 장사가 끝나면 남은 냉면을 주위의 배곯는 이웃들과 나눴다. 그렇게 3년을 버티니 평화가 찾아왔다. 전쟁이 멈추고 새 생명도 찾아왔다. 첫아들 영진이었다.
1955년 서울로 가는 기차가 개통되고 이듬해 영진의 가족은 서울행 열차에 몸을 실었다. 남한에서 가장 큰 도시, 서울로 가 새로운 기회를 찾을 요량이었다. 그러나 열차는 대전에서 멈춰 섰다. 당시엔 기차가 한번 고장 나면 고치기 어려웠기에 기약 없이 기다려야 했다. 영진의 가족은 기차에서 내려 역사를 빠져나왔다. 눈앞에 펼쳐진 대전역 광장은 생각보다 활기찼다. 사람도 많고 노점도 즐비했다. 영진의 가족은 당초 목적지였던 서울까지 가지 않고 대전에 남기로 마음먹었다.
대전 정착을 결심하고 가장 먼저 찾은 곳은 성당이었다. 영진의 가족은 북한 공산주의 정권의 종교 박해에도 신앙을 지킬 정도로 신실한 가톨릭 신도였다. 이들이 찾은 대전역 인근 대흥동 성당에는 대전 지역 고아들의 아버지라 불린 오기선 신부가 주임신부로 있었다. 흥남에서 피란길에 오른 후 이곳까지 오게 된 그간의 사정을 설명하자 오 신부는 밀가루 두 포대를 영진의 가족에게 건넸다. 며칠 후 부부는 대전역 앞에 천막을 치고 선물 받은 밀가루로 찐빵을 쪄서 팔기 시작했다. 밀가루로 쉽게 할 수 있는 장사가 이것이었기 때문이다. 천막 기둥에는 가게 이름을 적은 팻말도 비스듬히 세웠다. 예수님의 마음을 기린다는 뜻의 ‘성심당(聖心堂)’이었다.
15,000개의 아티클을 제대로 즐기는 방법
가입하면, 한 달 무료!
걱정마세요. 언제든 해지 가능합니다.
김연성motbeol@inha.ac.kr
인하대 경영학과 교수·한국경영학회 회장
김연성 교수는 서울대 경영대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생산관리 전공으로 경영학 석사와 박사학위를 받았다. 한국생산관리학회 회장, 한국품질경영학회 회장, 한국고객만족경영학회 회장, 행정안전부 지방자치단체 정부혁신평가단장, 산업통상자원부 국가품질상 심사위원장, 국민은행경제연구소 중소기업연구실장, 인하대 연구처장 겸 산학협력단장, 기획처장, 정석학술정보관장 등을 지냈으며 2024년 3월부터 한국경영학회 회장을 맡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