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리버드’는 지난 세기의 산물

16호 (2008년 9월 Issue 1)

나는 대중을 상대로 강의를 자주 한다. 그런데 강의하기가 특히 어려운 집단이 있다. 우선 최고경영자(CEO)들을 대상으로 강의할 때다. 나름대로 웬만한 강의는 다 들어봤다는 표정으로 올려다본다. 한번 해보라는 식이다. 매번 애먹는다. 두 번째는 교수들만 모인 곳이다. 교수들은 앉아서 나를 심사한다. 도무지 내 강의에 빠져들지 않는다. 그러나 CEO나 교수보다 훨씬 어려운 대상이 있다. 고위 공무원이다. 우리나라 중앙 부처의 국장급들이 교육받는 과천의 중앙공무원교육원에서 강의하다 보면 정말 숨이 콱콱 막힌다. 어떠한 반응도 없다. 그래서 중앙공무원교육원을 강사들의 무덤이라고 한다. 도대체 왜 CEO·교수·고위공무원들을 대상으로 한 강의는 이렇게 힘이 드는 것일까?
 
의사소통의 기본이 되는 ‘순서 바꾸기(turn-taking)’가 망가졌기 때문이다. 모든 의사소통은 끊임없이 순서를 주고받는 행위다. 내 순서가 있으면 반드시 상대편의 순서가 있다. 강사 혼자 이야기하는 강의에서도 이 ‘순서 바꾸기’는 예외 없이 일어난다. 물론 이야기는 강사 혼자 한다. 그러나 뛰어난 강사일수록 중간 중간 청중의 반응을 유도하고 확인한다. 이때는 표정·몸짓·어투와 같은 다양한 수단이 동원된다. 아줌마들은 이러한 비언어적 신호에 민감하게 반응한다. 환호하거나 박수를 치거나 고개를 끄덕이며 자신들의 순서에 충실하게 반응한다. ‘순서 바꾸기’는 젖먹이가 가장 먼저 배우는 의사소통의 원칙이다. 엄마는 아무 생각도 없는 아기를 안고 끊임없이 이야기를 건다. 아기가 반응을 하지 않으면 엄마는 아예 아기를 흔든다. 그리고 이를 마치 자신의 이야기에 대한 대답으로 받아들인다. 이런 시간이 얼마간 지속되면 아기는 언제 자신이 반응해야 하는가를 알아차린다. 웃거나 소리를 낸다. 모든 의사소통에는 ‘순서 바꾸기’가 있고, 자신의 순서가 오면 반응해야 한다는 원칙을 알게 된 것이다.
 
그렇다. 모든 의사소통에는 ‘순서 바꾸기’라는 원칙이 있다. 그러나 한국의 사회를 이끌어나가는 리더일수록 ‘순서 바꾸기’라는 의사소통의 기본원칙을 무시한다. 자기의 순서만 있다고 생각한다. 상대방의 순서를 인정하지 않는다. 상대방이 주도하는 ‘순서 바꾸기’는 참기 어렵다. 그래서 CEO·교수·고위공무원을 대상으로 강의하기가 그토록 어려운 것이다.
 
노무현정부의 실패는 바로 이 ‘순서 바꾸기’에 있다. 자신이 도덕적으로 옳으니 국민들은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야만 한다고 했다. 국민들은 계몽의 대상에 불과했고, 의사소통의 상대자로 여겨지지 않았다. 성난 국민들은 5년마다 한 번 돌아오는 자신들의 순서에 철저히 복수했다. 노무현 정부의 흔적조차 남기지 않은 것이다. 이명박 정부는 노무현 정부가 지닌 의사소통 실패의 산물이다. 그런데 이명박 정부의 가장 큰 문제를 ‘소통 부재’라고 사람들은 지적한다. 도대체 노무현 정권의 실패로부터 무엇을 배운 것인가.
 
정치에서 ‘순서 바꾸기’는 한 박자씩 쉬어가며 국민들의 반응을 살피는 일이다. 자신을 지지한 이들의 반응을 살피는 일이 아니다. 이명박 대통령은 약 60%의 투표율과 약 50%의 득표율로 당선된 사람이다. 다시 말해 전체 국민의 약 30%만이 이명박 대통령의 지지자란 이야기다. 이명박 정부는 자신을 지지하지 않은 나머지 70%와 소통할 수 있어야 한다. 이들은 반대편의 지지자거나 별로 신경 쓸 필요 없는 정치냉소주의자들이 아니다. 소통해야 할 국민이다. 광우병 사태의 본질은 ‘순서 바꾸기’가 철저히 망가졌다고 느낀 이들의 저항이다. 이는 지난 선거에서 노무현 정부를 흔적도 없이 날려버린 이들의 저항이기도 하다. 소통적 ‘순서 바꾸기’가 어떻게 가능할까를 고민할 때 어설픈 실적주의로 인한 조급함은 사라진다. 그러나 이명박 정부의 이 성급함은 웬만해선 고쳐지기 어려울 듯하다. ‘아침형 인간’ 때문이다.
 
새벽부터 벌떡 벌떡 일어나면 성공한다는 ‘얼리버드’적 사고는 지난 세기의 산물이다. 노동하는 시간만큼 가치가 창출되는 노동집약적 산업사회에서나 통한다는 이야기다. 21세기는 지식기반 사회다. 정보화 사회다. 그런데 여전히 새벽부터 열심히 일하자고 한다. 한국사회 문제의 본질을 몰라도 정말 모르는 이야기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들 중에서 한국인의 평균노동시간이 가장 길다. 그러나 생산성은 꼴찌다. 이 모순을 해결하자면서 새벽부터 일어나 더 열심히 일하자고 한다. 답답한 노릇이다. 우리는 열심히 일하려고 사는 게 아니다. 행복하려고 산다. 그러나 이명박 정부에서는 삶의 목적은 사라지고 열심히 일해 경제를 성장시키자는 수단만 강조된다. 목적이 분명해야 열심히 일한다. 사는 게 행복하고 재미있는 사람만이 창조적으로 일할 수 있다. 참고 인내하는 얼리버드는 영원히 행복할 수 없다. 삶의 목적이 불분명하기 때문이다.
 
이명박 정부는 앞서가는 유럽 선진국들이 한목소리로 부르짖는 ‘일과 삶의 조화(work-life-balance)’ 정책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자신의 사적인 삶과 노동이 서로 균형을 이루는 문화에서 창의적 노동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길고 깊은 불황의 늪에서 헤어난 일본정부가 지난해부터 죽어라 하고 부르짖는 정책도 ‘일과 삶의 조화’다. 사는 게 즐겁고 행복한 국민만이 21세기적 무한경쟁에서 살아남는다는 사회심리학적 원리를 깨달았기 때문이다. 이명박 정부에서 화두로 삼아야 할 원칙은 ‘월화수목금금금’과 같은 뜬금없는 새마을운동이 아니다.
   

정부정책의 목적부터 분명히 해야 한다. 다시 한 번 말하지
만 대통령이 반복해서 부르짖는 ‘경제성장’은 수단이다. 목적이 분명해야 수단도 정당화되고 힘을 얻는다. ‘행복’ ‘삶의 질’ ‘일과 삶의 조화’ ‘여가문화’와 같은 미래지향적 철학들이 정책적 비전으로 구체화되어야 한다. 구호가 아니라 구체적 액션플랜이 나와야 한다는 이야기다. 그래야 국민들도 정부의 정책을 신뢰할 수 있다. 목적 없는 경제성장은 사회적 불평등으로 이어진다는 뿌리 깊은 피해의식이야말로 현 정부의 가장 큰 장애물이기 때문이다. 정말이다.
 
이명박 정부는 이 땅에서 사는 이유에 대해 국민에게 끊임없이 질문을 던져야 한다. 국민에게 순서를 주라는 이야기다. 국민 스스로 행복하고 재미있는 삶의 내용을 구체화하도록 ‘순서 바꾸기’를 해야 한다. 그래야 ‘경제 살리기’라는 수단이 정당화되고 힘을 얻는다. 정부와 국민 간의 ‘순서 바꾸기’를 통한 원활한 소통은 문화정책을 통해 구체화될 수 있다. ‘경제 살리기’를 이야기하려면 반드시 무엇을 위한 경제 살리기인가를 동시에 이야기해야 한다. 이제는 구체적인 문화정책을 통해 ‘국민행복’을 이야기할 때다. 제발 부탁한다. ‘아침형 인간’은 이제 정말 아니다!
 
필자는 고려대 심리학과를 졸업하고 독일 베를린 자유대학에서 문화심리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명지대 사회교육대학원 여가경영학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으며, 휴먼(休MAN)경영연구원장도 맡고 있다. 저서로는 <휴테크성공학> <노는 만큼 성공한다> <일본열광> <애무>(역서)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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