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R4. 세종의 전쟁 리더십

예측하며 대비, 기회오면 빠르게
위기상황 때 더 돋보인 ‘강한 리더’

254호 (2018년 8월 Issue 1)

Article at a Glance
세종은 소통하는 군주였고 신중한 개혁자였다. 이런 스타일의 리더에게는 군사 분야가 바로 시험대다. 손자는 실전에서는 ‘모험적인 속공’이 필요하다고 했는데 세종은 왠지 그것과는 거리가 멀어 보이는 임금이었다. 파저강 토벌, 여진 정벌과 4군6진 개척을 놓고 보면 세종은 이러한 극한의 위기상황, 즉 전쟁 상황에서 자신만의 스타일대로 리더십을 발휘했다. 평소보다 훨씬 강력했지만 사례 연구와 치밀한 준비, 인재 육성 등 자신의 리더십과 통치 스타일을 녹여 자신만의 전쟁 리더십을 만들었다. 미리 국제정세를 공부하고 예측하며 시나리오를 써뒀다가 기회가 오자 빠르게 토론에 나섰고, 토론에서 반대론자들을 제압했으며, ‘전쟁’이라는 위기 상황의 특성에 맡게 평소보다 강하게, 심지어 독단적으로 보일 정도까지 밀어붙이기도 했다. 전쟁과 같은 위기 상황에 처한 현대 기업의 CEO들이 음미해볼 대목이 꽤 많아 보인다.
 
개혁 군주 세종이 일하는 법
간혹 조선시대 왕 중에서 제일 훌륭한 왕이 누구라고 생각하느냐는 질문을 받는다. 세종이라고 대답하면 대부분 서운한 표정이 역력하다. 좀 특이한 대답을 기대했거나, 세종에 대한 찬사를 너무 많이 들었거나, 그 찬사가 ‘어질다, 현명하다, 백성을 사랑했다’ 등등 너무 완벽한 용어로 채워져 있기 때문일 것이다. 세종도 통치자이자 정치가이다. 모든 사람을 만족시킬 수 있는 법과 정치가 있을까? 그럴 수 없다는 것을 우리는 이제 너무나 잘 안다. 지배자의 베풂과 나눔이라는 것도 결국은 민중이 현실의 체제에 순응하도록 만드는 수단이 아닌가? 맞는 말이다. 그러나 세종이 신분제를 지지했다고 비판하는 것처럼 15세기의 통치자에게 21세기의 가치관을 들이대는 것도 현명한 방법은 아니다. 그리고 세종이 위대함은 그런 진부한 단어 속에 들어 있지 않다.

세종의 진정한 장점은 국왕이라는 지위에 대한 책임감, 국가의 미래에 대한 사명감이다. 그러나 책임감과 사명감이 충만하다고 훌륭한 왕이 될 수 없다. 감정의 과잉은 아집과 자기 확신을 낳아 엉뚱한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다. 세종은 이 위험을 두 가지 방법으로 극복했다. 첫째는 과거의 제도에 대한 철저한 분석과 연구다. 세종이 집현전을 세운 이유는 이론에 집착하는 학자를 양성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과거의 법과 제도를 분석하고, 그 데이터를 가지고 현실 개혁에 적용하기 위해서였다. 당연한 이야기 같지만 현재도 우리 사회에서 제일 안 되는 부분이다. 사회 문제가 벌어질 때마다 명분과 감성을 앞세워 호들갑을 떨기만 하지 전문적인 분석이나 준비는 소홀히 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전문가를 양성하고 연구에 투자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정해진 답을 말할 수 있는 전문가를 데리고 와서 ‘지금 내가 하는 일이 옳다’는 확답을 해주길 원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이걸 그대로 기업에 적용해보라. 아마 결론은 다르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알다시피 세종은 집현전을 통해 진정한 전문가를 양성하고, 그들을 제대로 활용하기를 원했다. 현안이 발생하면 집현전에 연락해서 역대 왕조의 제도를 정리해 보고하게 했다. 이를 토대로 관료들과 대단히 학구적인 토론을 벌였다. 그러나 절대로 현실을 떠나지 않았다. 세종은 이론에 경도돼 어느 왕조의 제도가 제일 훌륭하다거나 과거의 제도를 그대로 적용하자는 태도를 싫어했다. 반대로 현상에 매몰돼 ‘이런 문제가 있으니 당장 이렇게 고치자’는 식의 주장도 싫어했다. 역사를 통해 근본적 문제와 지엽적 문제를 구분하기를 원했고, 아무리 그럴듯한 제도라도 우리 현실에 맞춘 창의적인 적용, 책임감 있는 적용을 요구했다. 모든 제도는 장단점이 있고, 완벽한 제도는 없다. 그러나 이 말이 관료의 무책임과 무능의 변명이 돼서는 안 된다. 현실에 적용할 때는 최선을 추구해야 하며 후유증을 예측하고 대비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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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도의 장점과 단점, 후유증을 논의할 때도 항상 근본적이고, 구조적이고, 장기적인 입장을 견지했다. 눈앞의 이익, 정치적 목적으로 제도를 만드는 것을 극도로 싫어했고, 기만적인 정치를 배격했다. 조선은 법전을 편찬하고 법에 의한 통치를 추구했다. 그러자 백성들이 법을 알면 약아지고, 법을 악용하는 사람이 나온다는 주장이 나왔다. 그러니 일반 백성들이 법을 알아서는 안 된다는 이론이다. 세종은 그런 통치는 사기라고 반대한다. 그러고 보니 백성들에게 법을 효과적으로 고지하는 수단이 필요하다는 데에까지 생각이 미쳤다. 어려운 한자를 대신할 수 있는 수단, 이것이 세종이 한글을 창제한 이유 중의 하나다.

개혁을 추구하는 사람들의 공통적인 병이 신념의 과잉과 유연성의 부족이다. 개혁은 숭고하고 어려운 것이라고 제풀에 비장해지다 보니 현실에서 문제가 발생하면 반개혁적 요소로 단정하고 배척한다. 그러나 도대체 누가 사회라는 거대한 유기체를 속속들이 알 수 있을까? 개혁 정책은 자신의 이론을 증명하는 과정이 아니라 궁극적인 가치를 이루는 방법을 찾고 완성해 나가는 과정이 돼야 한다.

사실 세종의 개혁도 언제나 장애에 부딪혔다. 예상치 못한 후유증이 발생하면 세종은 ‘내가 생각이 주밀하지 못했다’고 자책했다. 대신들이 ‘누구도 완벽하게 예상할 수 없고, 대신들이 문제없는 제도는 없다’고 위로를 해도 세종은 고민을 지속하고, 몇 번이고 실태 조사와 수정안을 요구하곤 했다. 덕분에 세종의 거시적인 자세와 어울리지 않게 오히려 “조선의 공사는 3일이다”라는 말이 돌 정도로 법이 자주 바뀐다는 비판도 나왔다. 하지만 세종의 사례들을 보면 천 년을 갈 수 있는 궁극적인 제도에 도달하려면 아집과 이론에 사로잡히는 위험을 경계하고, 개방적인 자세로 시행착오를 수정하며, 궁극을 향해 나아가야 한다는 생각을 지니고 있었다고 생각된다.

세종의 신중한 개혁 자세는 교과서적이지만 한 가지 우려가 되는 분야가 있다. 바로 군사 분야다. 손자는 “실전에서는 모험적인 속공이 완전을 추구하는 신중함을 이긴다”고 말했다. 평소의 태도를 보면 모험적인 속공이야말로 세종에게 어울리지 않는다. 군사 분야는 세종에게 위험한 시험대였다. 세종은 그렇다면 어떤 방식으로 가장 극단적인 위기 상황인 ‘전쟁을 기획하고 실행하는 일’을 처리했을까? 결론부터 말하면 이것조차도 세종다웠다. 아버지인 태종이 ‘군사권’을 여전히 쥐고 있던, 이른바 ‘인턴 왕’ 시절 체험했던 대마도 정벌 과정에서의 문제점을 학습하고 당시의 교훈을 중심으로 자신만의 전쟁 리더십을 확립했다.

‘사실상 실패’로 돌아간 대마도 정벌 1

세종 즉위 첫해, 사실상 태종의 명령과 지휘로 수행된 대마도 정벌은 겉보기에는 성공한 것 같지만 그 양상을 자세히 뜯어보면 ‘사실상 실패’로 봐도 무방할 정도다. 일단 대마도 정벌의 발단과 전개부터 살펴보자.

세종 재위 원년인 1419년 지금의 충남 서천 지역에 왜선 50여 척이 출몰한다. 이때 태종과 세종은 황해도로 온천 여행을 떠난 상황이었다. 태종은 사실 온천을 매우 좋아하는 왕이었지만 왕자의 난부터 시작해 집권 후 조선을 다시 안정시키느라 바빴던 나머지 오랜 시간 제대로 편하게 온천을 즐기지를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우여곡절을 거쳐 셋째 아들인 충녕, 즉 세종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나서야 처음 편안한 마음으로 온천을 향했던 것으로 추측되는데, 이때 왜구가 출몰했다는 비보를 접한 셈이다. 왜선 50여 척은 적은 수가 아닌데 한 척에 200명씩 타는 큰 배로 계산해보면 거의 1만여 명가량이 침략해왔다고 볼 수 있다. 태종과 세종은 5월13일에 부랴부라 서울로 돌아와 밤샘 토론을 벌인다. 신하들의 논쟁을 지켜보던 상왕 태종은 “그동안 우리는 오면 치고, 돌아가면 잡지 않는 방식으로 왜구를 대했다. 그러나 물리치지 못하고 항상 침노만 받는다면 중국이 흉노에게 욕을 당한 것과 무슨 차이가 있느냐”며 왜구의 근거지가 되는 대마도 선제공격을 명한다. 전형적인 ‘빠르게 결단하고 공격을 감행하는’ 태종 스타일의 정치였다. 곧바로 출정 명령이 떨어진다. 그러나 이런 출정 명령에도 불구하고 출정은 다소 지체되는데, 명령을 받은 장수 이종무가 잠시 출정하는 듯하다가 풍랑 때문에 돌아오고 나서는 좀처럼 나서지 않았기 때문이다. 5월20일이 돼서야 거제도에 있던 조선군의 배 10여 척이 대마도로 떠난다. 이종무 등은 대마도 상륙 전에 귀화했던 왜인 등을 보내 대마도주 도도웅화에게 빨리 항복하라고 권유하지만 도도웅화는 이를 따르지 않는다. 오히려 정벌 총사령관 이종무에게 “7월에 폭풍이 많으니 오래 머물지 말라”고 협박하기에 이른다. 그 와중에 먼저 대마도를 치러 나섰던 장수 박실은 군사를 잃고 패전했다는 소식이 들려온다. 결국 원정군이 돌아오고 토벌은 중지되며, 도도웅화에게 ‘항복해달라’고 정중히 요청하는, 아니, 거의 사정하는 편지가 가게 된다. 이처럼 대마도 정벌은 얼핏 보면 성공한 것 같지만 실질적으로 보면 준비가 부족한 상황에서 일방적인 태종의 지시에 의해 진행되면서 왜구를 잠시 위축시키는 수준에서 끝나고 말았다.

실패에서 배운 교훈, 파저강 토벌과 여진 정벌 성공의 발판이 되다
세종시대는 사실 준전시 상태였다. 믿기 어렵겠지만 사실이다. 성공이라 보기 어렵지만 그나마 형식적인 대마도 정벌로 왜구의 기세는 다소 꺾인 상태였지만 여진과의 갈등은 악화일로였다. 태종 때에는 여진족이 경원을 침공해서 절제사를 살해하는 대사건이 터졌다. 세종이 여진 공격과 4군6진의 개척을 결심한 시기는 명확하지 않지만 평화정책만으로는 여진의 습격을 막을 수 없다는 생각은 일찍부터 굳힌 듯하다. 그러나 태종이 대마도 정벌을 명령했듯 그렇게 감정적이고 공격적으로 조급하게 움직이진 않았다.

당시 우리의 예상과 다르게 문신과 무신을 가리지 않고 조정에서는 평화론이 우세했다. “무력 충돌은 보복의 악순환을 낳을 뿐”이라며 “현재의 국경을 유지하고, 방어를 튼튼히 하고, 여진족에게 회유와 설득을 지속하면 언젠가는 평화가 정착할 것”이라고들 했다. 적이 자주 공격하는 곳이면서 동시에 방어가 어려운 지역에서는 철수하자는 의견도 우세했다.

그럴듯해 보이지만 여진족이 통합돼 있거나 야심이 없을 때에 가능한 이야기다. 여진족은 수많은 집단으로 분리돼 있고 약탈적인 생활을 영위하는 부족도 많았다. 안정된 집단에는 야심가들이 있었다. 우리 눈에는 부족들이지만 그들도 과거에는 중원을 지배한 적도 있었고, 그 시절을 꿈꾸고 있었다. 회령에 거주하던 건주위의 추장 동맹가첩목아(아이신기오로 먼터무)는 후금을 세운 누르하치의 6대조다. 건주여진의 다른 일파인 이만주는 더 노골적인 야심가였다.

관료들이 국경 문제에 평화를 부르짖는 데는 내부적 문제도 있었다. 군비 확충은 재정 확대를 요구한다. 증세를 하고 병력을 증강하려면 부유층을 건드려야 한다. 더 큰 문제도 있다. 조선은 농본억말(농업만 중시하는 상업 억제 정책)이 경제신조였다. 전쟁은 여러 가지 이유로 상업과 무역, 공업과 광업의 발전을 요구한다. 무신들의 권력이 커지고, 신진세력이 확대되는 것도 걱정된다.

조선의 관료군을 형성하는 사대부들도 선조를 추적해 보면 고려 후기에 무반직을 얻어 관계에 진출한 사람들이 상당수다.
기득권 세력 치고 사회가 역동적이 되고 인재풀이 증가하고 세습적 특권보다 능력이 중시되는 사회를 원하는 사람은 드물다. 이런 모든 계산이 국경 주민의 안전과 영토, 여진족의 성장 위험을 무시하고서라도 평화를 유지해야 한다는 주장 속에 녹아 있었다. 세종은 이러한 여론을 뚫고 북방의 척박한 환경에서 적진까지 들어가는 원정 전쟁을 수행하는 게 보통 일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래서 오랜 시간 준비를 해야겠다고 마음먹은 것 같다.

1) 파저강 토벌, 10년을 준비하고 관료주의를 깨다
파저강 토벌로 알려진 군사작전은 1433년(세종 15)에 시행되지만 세종은 10년 이상 준비를 했다. 세종이 먼저 추진한 일은 10년 후의 전쟁을 감당할 신진 인사를 키우고 준비하는 일이었다. 충성스러운 장수 한두 명을 뽑아 곧바로 출정 명령을 내렸던 태종과 비교되는 대목이기도 하다.

1422년 국경에서 작은 충돌이 있었다. 대신들은 지역병만으로 진압이 충분하다고 말했지만 세종은 “한 명의 용사가 승부를 바꾼다”고 주장하며 중앙군을 파견했다. 이렇게 한마디로 신하들의 의견을 무시하는 경우는 드문 일인데 세종의 속셈은 현지의 지형과 사정, 실전 경험을 갖춘 인재 양성이었다. 이때 지휘관으로 파견한 김효성이 1433년에 최윤덕과 함께 북방으로 파견된다. 이외에도 축성 상태 점검, 지형 파악, 사건 조사, 여진 추장 접견 등의 명목으로 사신들을 자주 파견했다. 이때도 세종은 각 분야에 적성이 맞는 신진 인사들을 선발하고 전문 영역을 만들어 주려고 노력했다. 지금 기준으로는 당연해 보이지만 당시 조선의 관료제 운용 방식으로 보면 쉽지 않은 일이었다. 10년 이상 이런 인재 양성이 있었기에 1433년의 원정과 4군6진의 개척, 여진족의 집요한 반격을 막아낼 수 있었다.

‘관료주의’도 해결해야 할 과제였다. 조선의 관료제는 장점도 많지만 규정에 집착하고, 보신주의적 경향이 강했다. 이것이 융통성과 임기응변을 요구하는 전시 체제에는 적합하지 않다. 1422년 여진족 400명이 여연군을 급습했다. 군수 이안길이 절반의 병력으로 싸워 성을 사수했다. 그러나 다음이 문제였다. 도절제사 윤하는 이안길이 전공만 보고하고 피해 상황을 숨겼다고 이안길과 수하 군관을 잡아 문초했다.

윤하의 행동도 이유가 있다. 법에는 기습을 허용해 군사와 백성이 피해를 입으면 지휘관을 처벌하게 돼 있다. 그러나 전시에 이 규정을 그대로 적용하면 무사할 지휘관이 없다. 세종은 전공을 세운 장군과 병사를 그런 식으로 몰아붙이지 말라고 윤하에게 엄중한 경고를 보냈다.

조정의 대신과 관료들의 반대도 뚫어야 했다. 세종은 즉위 초기의 젊은 시절부터 지도자의 신념이 아무리 강력해도 관료들의 자발적이고 헌신적인 협조가 없다면 정책의 성공은 불가능하다는 생각을 신조처럼 지니고 있었다. 세종의 일대기를 읽다 보면 지치고 실망스러울 때가 종종 있다. 그렇게 준비하고 노력했던 정책을 마지막 한 단계를 넘지 못하고, 관료들에게 양보하는 경우가 종종 있기 때문이다. 이런 세종의 태도에 실망감을 크게 느끼는 독자일수록 신하들을 위협하면서 밀어붙이는 세조에게 매혹되곤 하는데, 세조 자신도 아버지의 이런 모습에 자주 낙담했던 것 같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세종이 이룬 것이 세조가 이룬 것보다 훨씬 많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세종의 성취는 그만큼 많은 것을 양보하거나 전진과 후퇴를 반복하면서 신하들의 동참을 이뤄냈기에 가능했던 것이었다.

그러나 양보와 타협의 전술 역시 평시와 전시가 같을 수는 없다. 여진정벌과 4군6진 문제로 오면 세종의 정책 추진 방식 역시 많이 바뀐다. 1420년대 중반이 되면 명나라와 여진족 간에도 타협이 이뤄지고, 명과 조선에 우호적인 부족과 적대적인 부족이 명확해졌다. 그러자 조정에서는 점점 더 평화론이 우세해 진다. 우호적인 부족과 교류를 확대하고, 이들을 이용해 적대 부족의 침공을 저지하고, 국경에 평화를 안착시키자는 것이었다. 그래도 약탈과 침공이 줄어들지 않자 침공이 잦고 방어가 어려운 경원과 여연을 포기하고 국경을 물리자는 의견까지 대두했다. 세종은 경원은 자신의 선조들이 묻혀 있는 조상의 땅이라고 말했지만 그 말조차 먹혀들지 않았다. 에둘러 표현하기는 했지만 관료들은 경원이 왕실에 중요한 것은 함경도 토호 시절의 이야기이고 지금은 한양에서 왕 노릇을 하고 있는데, 그곳이 왜 중요하느냐고 생각하고 있는 듯했다.

2) ‘강한 리더’의 면모를 보이며 전쟁을 개시하다
1420년대 중반 여진과의 전쟁에 대해서 세종은 거의 고립무원의 상태였다. 조정 대부분이 평화 정책을 주장했다. 세종은 전에 사용하지 않던 방법을 썼다. 측근을 불러 대신들을 설득하게 하고, 대신들이 반대하면 퇴직한 관료들을 불러 자문을 받았는데, 사전에 자신의 뜻을 전하게 하고, 은근히 동조를 요구했다. 별로 새로울 것이 없는 수단 같지만 평소에 이런 방법을 잘 사용하지 않던 세종이 노골적으로 이런 방법을 사용했다는 것이 중요하다.

그래도 세종은 더 이상의 강요는 하지 않았다. 정치적 수단은 리더의 의지를 알리는 데까지였고 강요는 없었다. 어디까지나 자발적인 동의와 참여를 요구했다. 그런 점에서 세종은 끈질겼고, 전쟁과 같은 국가의 대사일수록 이런 원칙을 더 고수하려고 했다.
5년 이상 인내의 시기를 보낸 뒤 마침내 결정적 사건이 터졌다. 1432년 겨울 일련의 여진족이 여연과 강계로 침입해 주민을 납치해 갔다. 파저강에 거주하던 건주여진의 추장 이만주가 약탈자를 발견하고 주민 일부를 탈취해 돌려보냈다. 그러나 세종과 일부 대신은 약탈이 건주여진의 소행이라고 확신했다.

그러나 군대를 출동하려면 먼저 대신들을 설득해야 했다. 대신들을 소집한 세종은 두 가지 논거를 제시했다. 첫째는 이번에도 정토를 하지 않으면 적의 도발은 끝이 없을 것이라는 논지다. 평화정책도 힘 있는 자가 강요할 때 의미가 있다. 힘이 없는 자, 무력을 사용할 수도 없고, 사용하지도 않는 자의 평화론은 평화정책이 아니라 호소일 뿐이라는 논리였다.

두 번째는 역시 고전과 역사에서 근거를 끄집어냈다. 중국 역대의 전쟁고사를 제시하고, 『맹자』에 “적과 외환이 없으면 나라가 망한다(無敵國外患者, 國恒亡)”는 구절을 인용했다. 이 구절 역시 감상적인 평화주의를 비판한 것이다. 적이 없어서 군대가 긴장하지 않고, 실전 경험이 없어지고, 나아가 군비를 소홀히 하게 되면 나라가 망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대신들도 굳건했다. 나중에 파저강 전역을 지휘하게 되는 최윤덕마저 소극적인 반대론 내지는 최소한의 군대 동원을 주장했다. 세종의 의지가 점점 강력해지자 대신들의 반대도 강해졌다. 1433년 2월15일 조정회의에서 대신들은 거의 반대했다. 세종은 결론을 유보하고 깊이 고민해 보겠노라고 한다. 그다음 사정은 이상하게 기록이 없다. 며칠 후면 갑자기 전쟁이 기정사실이 돼 있다. 세종이 대신의 의견을 무시하고 독단적인 결정을 내렸기에 실록에서 의도적으로 빼버린 것인지도 모른다.

이 미스터리는 해결하기 쉽지 않지만 세종의 독단이라기보다는 세종 리더십의 승리라고 봐야 한다. 어떤 국가나 조직이 전쟁과 같은 모험적인 결단에 전체적인 동의를 구하기는 어렵다. 결단이 필요한 순간이 와도 관료들은 적극적인 동조보다는 만약의 사태에 책임을 지지 않으려는 행동을 하게 된다. 세종은 긴 시간 노력을 통해 군대를 양성하며 군사 행동을 준비했고, 만약의 사태가 벌어지면 응징하겠다는 의지를 충분히 제시해 놓았다. 2월15일의 회의에서 대신들의 발언도 세종의 결심을 꺾으려는 시도가 아니라 원칙론과 책임지지 않으려는 태도가 섞인 진술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결국 리더에겐 독단이 필요한 것일까? 이 사건의 진면목은 그것이 아니다. 세종은 오랜 기간 전쟁을 준비하고 설득했다. 최후의 순간에는 책임은 모두 내가 진다는 태도로 전쟁을 관철했다. 그리고 전쟁이 결정되자 관료들은 모두 최선을 다해 협조하는 태도로 바뀌었다. 전략전술의 검토, 군수 지원, 사후 대책 등에 전문가와 북방 행정의 경험자들이 한마음이 돼 조력을 다 했다. 세종은 자유로운 의견을 무한정 허용했지만 분위기가 이미 주전론으로 돌아섰기에 굳이 자신의 의견을 제시할 필요 없이 관료들의 의견 중에서 합당한 것을 골라 선택하면 됐다. 독선은 사라지고 조정회의는 다시 민주적 양상으로 돌아갔다. 그래도 온갖 의견이 난무하다 보니 꽤 어수선했지만 세종은 이때의 분위기에 상당히 만족했고 토론 중에 신하들의 성향과 능력, 적성을 분석하는 여유까지 보였다.

관료들의 마지막 저항선은 규모의 최소화였다. 최윤덕과 김효성이 평안도로 파견될 때만 해도 작전의 규모가 1000에서 3000명 정도라는 암묵적인 합의가 있었다. 그러나 현지에 부임한 최윤덕이 현지 사정을 본 결과 3000명도 불가능하며 1만 명은 있어야 한다는 충격적인 보고를 해 왔다.

증원 규모를 놓고 회의가 벌어졌는데 500명에서 1000명 정도 증원하자는 안이 대세였다. 이 마지막 위기를 세종은 한 가지 논리로 돌파했다. “전쟁은 시작하면 현지 지휘관에게 맡겨야 한다. 천 리 길이 떨어진 조정에서 왈가왈부 논할 사안이 아니다”라는 것이었다. 이것은 독선이 아니라 확고한 진리다. 4차 중동전에서 승리를 목전에 두었던 시리아군이 실패한 결정적 이유는 최고사령부가 후방에 자리 잡고 과도한 지휘권을 행사했기 때문이었다. 시리아 사령관이 전쟁의 원칙을 몰랐던 것이 아니다. 그러나 건국 이래 수십 번의 쿠데타가 발생했던 시리아로서는 “결정을 현장 지휘관에게”라는 슬로건을 실행할 수가 없었다.

조선은 달랐다. 이번에는 조선 관료제의 승리였다. 세종의 10년에 걸친 무장과 전문 집단의 양성은 이런 슬로건에 반대할 수 없는 분위기를 조성해 놓았다. 최윤덕의 의견은 100% 수용되고 병력은 순식간에 1만 명으로 증원됐다가 다시 1만5000명으로 증원됐다.

지금까지 파저강 토벌전쟁의 개전과 승리에 이르기까지 세종이 보여준 리더십을 정리해보자. 세종은 즉위 첫해, 아버지인 태종이 준비 없이 일방적으로 개전을 시작한 대마도 정벌이 사실상 실패로 끝나는 과정을 보면서 자신의 스타일로 전쟁 리더십을 발휘할 방법을 찾았다. 국제정세를 미리미리 예측해가며 시나리오를 짰고, 그에 따라 인재부터 키웠고 기회를 봤다. 기회가 오자 빠르게 토론에 나섰고, 토론에서 반대론자들을 제압했으며 ‘전쟁’이라는 위기국면의 특성상 평소보다 강하고 심지어 독단적으로 나가기도 했다. 미래의 시나리오를 그리며 전쟁과 같은 위기 상황에 처한 기업의 CEO들이 어떤 식으로 기업 내 반대여론을 돌파하고 리더십을 발휘해야 하는지 많은 시사점을 주는 대목이다.

여진정벌, ‘세종다움’에 대하여
1433년의 원정은 조선이 4군6진을 확립하고, 압록강과 두만강을 국경으로 확충하는 계기가 됐다. 이 원정의 성과에 대해서는 비판적인 의견이 있다. 스스로 문치주의자라고 말하던 세종이 갑자기 전쟁론자로 돌변한 이유도 궁금하다.

먼저 원정의 성과에 대해 군사적 성과가 적었다는 비판이 있다. 1437년 2차 원정은 규모가 더 컸지만 가시적인 성과는 적었다. 더 가혹한 비판은 왜 강을 건너 북진해서 고구려의 고토 회복을 추진하지 않았냐는 주장일 것이다. 이 부분에 대해서 이 글에서 상론하기는 힘들다. 다만 세종이 이 전쟁을 벌인 이유를 분석함으로써 두 의문의 답을 찾아본다.

국왕으로서 세종의 최대의 장점은 국가의 근본을 알고, 장기적인 안정과 완벽성을 추구했다는 점이다. 이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구조적인 완결성도 중요하다. 지도자가 정치, 경제, 사회, 국방에 대한 균형 감각을 상실하고, 이들 간의 연관성을 경시하면 개혁은 반드시 실패하고 국가는 혼란에 빠지거나 멸망한다. 그런 사례는 역사에서 수도 없이 찾을 수 있다.

이 중에서 국방은 인류 문명이 발생할 때부터 국가의 존재 근거였다. 민중이 누군가에게 자신을 후려칠 수 있는 권력을 부여하고, 힘들여 얻은 생산물의 일부를 바치는 이유는 자신의 생명과 재산에 대한 ‘안전보장’의 대가였다. 국가의 국방 정책은 세 가지 실체 속에서 이뤄져야 한다. 국제정세에 대한 분석을 통해 국가를 위협하는 적을 명확히 설정해야 한다. 국경을 확정하고, 적에 대항할 수 있는 지형과 전술, 군대를 양성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국가의 능력을 파악해 전술을 지탱할 수 있는 경제적, 사회적 능력을 확보해야 한다.

당시 여진정책에 대한 논의를 보면 현상적인 문제에만 집착할 뿐 이런 구조적인 인식이 불투명하다. 경원 철수 논쟁도 ‘여진과의 분쟁’ 차원에서만 다뤄졌고, ‘지켜야 한다’는 이유로 제시한 ‘조상의 땅’이라는 말도 지엽적인 논리일 뿐이다. 근원적인 문제는 국제정세, 주적, 조선의 능력에 맞는 최적의 방어지형이 어디냐는 것이다.

관료 중에도 이런 사고를 지닌 사람들은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종종 관료들은 책임, 관료주의, 보신주의라는 벽에 막힌다. 그것을 뚫어주고, 이끌어 주는 것이 지도자의 혜안이자 능력이고, 책임이다. 세종은 그것을 해냈고, 국왕으로서 자신의 존재를 증명했다. 그것도 실패를 통해 얻은 교훈을 토대로, 자신만의 방식으로 전략을 짜서 실행했다.

군사 분야의 업적이 세종의 최고의 업적인지는 논자에 따라 다를 것이다. 비판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리더의 자격과 자세라는 점에서 보면 세종의 최고의 면모와 교훈을 발견할 수 있는 분야인 것은 분명하다.

필자 소개 임용한 KJ인문경영연구원 대표 yhkmyy@hanmail.net
임용한 대표는 연세대 사학과를 졸업하고 경희대에서 한국사 전공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조선국왕 이야기』 『전쟁과 역사』 『세상의 모든 전략은 전쟁에서 탄생했다』 『명장, 그들은 이기는 싸움만 한다』 『뇌물의 역사』 등 다수의 책과 논문을 저술했다.
동아비즈니스리뷰 345호 Fake Data for AI 2022년 05월 Issue 2 목차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