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se Study 朝鮮: 숙종의 환국정치

숙종, 극단적 대립 구도로 붕당정치 망쳐

233호 (2017년 9월 Issue 2)



Article at a Glance

구성원들의 출신과 성향이 점점 다양해지면서 의사소통 과정에서 일상적으로 발생하는 갈등이 조직 문화 전체를 해칠 위험이 커지고 있다. 한쪽 편만 들지 않고 구성원들의 창의적인 아이디어를 끊임없이 자극하면서 최선의 의사결정을 하는 리더 역할이 중요하다. 조선시대 왕들도 정파 사이의 갈등을 조정하는 리더십을 발휘해야 했다. 숙종은 한 붕당에서 다른 붕당으로 주도 세력을 전면 교체하는 ‘환국’ 정치를 실시하면서 정파 간 갈등을 극단적인 대립 구도로 밀어붙였다. 하지만 일방적 편들기와 과도한 탄압으로 점철된 세 번의 환국은 당파 간 감정 갈등을 극단으로 밀어붙여 붕당 정치가 혁신적인 타협의 정치로 발전할 기회를 빼앗았다.

편집자주

조선에서 왕이 한 말과 행동은 거의 모든 것이 기록으로 남아 있습니다. 여러 가지 기록 중 비즈니스 리더들이 특히 주목해봐야 할 것은 바로 어떤 정책이 발의되고 토론돼 결정되는 과정일 것입니다. 조선시대의 왕과 마찬가지로 기업을 이끄는 리더들 역시 고민하고 판단하며 결정을 내리고 살기 때문입니다. 또한 이미 해당 정책이 성공했는지, 실패했는지 알 수 있는 상황이기에 더욱 면밀히 성공과 실패의 요인들을 분석할 수 있습니다. 조선시대에 정통한 연구자인 김준태 작가가 연재하는 ‘Case Study 朝鮮’에서 현대 비즈니스에 주는 교훈을 찾아가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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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적(숙종 6년 5월11일), 윤휴(숙종 6년 5월20일), 송시열(숙종 15년 6월3일), 김수항(숙종 15년 윤3월 28일). 숙종 때 목숨을 잃은 남인(南人)과 서인(西人)의 영수들로 괄호 안의 날짜는 사약을 받았다고 기록된 날이다. 이들이 어떤 사람이었느냐, 과오가 있느냐, 없느냐를 떠나서 이처럼 각 붕당을 대표하는 인물이 연이어 죽임을 당한 것은 그때껏 없던 일이다.


그러면 먼저 허적과 윤휴가 죽은 1680년(숙종 6년)으로 가보자. 3월28일, 공조판서 유혁연과 광성 부원군 김만기, 포도대장 신여철이 임금의 호출을 받았다. 세 사람이 모두 모이자 숙종은 “재앙과 이변이 계속 나타나고 불안한 의심이 생겨나며 거짓말이 떠들썩하므로” 한양과 궁궐을 호위하는 군영(軍營)의 지휘관을 교체하겠다고 선언한다. 그러면서 유혁연이 겸임하고 있던 훈련대장은 김만기에게, 총융사는 신여철에게 맡겼다. “유혁연은 삼조(三朝: 인조, 효종, 현종)를 섬긴 장수이므로 내가 매우 의지하고 중히 여기지만 20년이나 오랫동안 이 임무를 맡아온 데다 근력이 이미 쇠했으니 우선 해임하고자 한다”고 말하긴 했지만 김만기와 신여철에게 즉시 임무를 수행하라고 지시한 것으로 볼 때 문책성 인사에 가까웠다. 더욱이 유혁연은 남인을 대표하는 무장이고 신여철은 서인을 대표하는 무장이었다. 김만기는 서인의 중심인물로 숙종의 첫 번째 왕비 인경왕후의 아버지였다. 즉, 이날의 인사이동은 임금이 남인에게 주었던 병권을 거둬들여 서인에게 준 것으로 남인이 실각하고 서인이 집권하는 경신환국(庚申換局)의 시발점이 된다.


숙종은 이어서 귀양을 가 있던 서인의 영수, 전 좌의정 김수항을 복권시켰고 남인 대신 이조판서 이원정을 삭탈관직1 했다. 3월30일에는 의금부, 승정원, 사헌부, 사간원의 주요 포스트를 서인계 신료로 교체했다. 사태가 심상치 않다는 것을 깨달은 남인들이 사직을 청하니 이를 모두 수리했고 마침내 4월3일, 서인으로만 구성된 조정을 출범시킨다. 숙종은 이 과정을 신속하지만 매우 치밀하게 진행시켰는데 1) 병권을 빼앗아 남인을 제압할 수 있는 힘을 확보하고 → 2) 서인의 영수를 복권시켜 정국을 전환하겠다는 시그널을 보냈으며 → 3) 이조판서를 바꿈으로써 인사권을 장악하고 → 4) 의금부와 사헌부, 사간원을 교체해 남인을 탄핵하고 수사, 처벌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한 뒤 → 5) 조정을 전면 교체하는 환국을 단행했다. 이와 같은 숙종의 조치에 남인 정권은 손써볼 새도 없이 무너져버린다.


<실록>에 따르면 남인에서 서인으로의 정권 교체를 촉발시킨 결정적인 계기는 ‘허견의 옥사’였다. 남인의 영수이자 영의정 허적의 서자 허견은 평소 참람하고 무도한 행동으로 악명이 높았다. 그가 복선군2 과 결탁해 역모를 꾸몄다는 것이다. 이들은 사병을 양성하고 체부(體府)3 를 통해 병력을 동원하려 했는데 체부는 남인들 건의에 따라 설치된 것인 데다가 체부의 책임자인 도체찰사가 바로 영의정 허적이었기 때문에 이와 관련돼 있는 남인 대신들에게도 역모 혐의가 씌워졌다. 허적과 함께 체부의 설치를 처음 주장했던 윤휴가 사사됐으며 유혁연도 사약을 받았다. 이밖에도 이원정이 장살4 되는 등 많은 남인 신하들이 목숨을 잃는다.


이후 9년이 지난 1689년(숙종 15년), 조정에는 다시 한번 폭풍우가 몰아친다. 이번에는 반대로 서인이 축출당하는 기사환국(己巳換局)이 벌어졌다. 경신환국을 초래한 직접적 원인이 ‘허견의 옥사’였다면 기사환국을 가져온 발단은 ‘원자정호(元子定號)’ 문제였는데, 1688년 10월 희빈 장씨가 아들(훗날 경종)을 낳자 숙종은 곧바로 ‘원자’의 호칭을 부여했다.5
 원자란 임금의 맏아들을 부르는 말로 통상 적장자가 세자에 책봉되기 전까지 갖는 칭호이다. 희빈 장씨의 아들을 원자로 정했다는 것은 곧 이 아들을 후계자로 삼겠다는 뜻이었다.


그러자 2월1일, 서인의 영수 송시열이 ‘원자정호’를 부정적으로 평가하는 상소를 올린다. “(송나라) 철종은 열 살인데도 번왕(藩王)6 의 지위에 있다가 신종이 병이 들자 비로소 책봉해 태자로 삼은 것”은 “제왕의 거조는 항상 여유 있게 천천히 하는 것을 귀하게 여기기 때문”이며 “여러 신하들이 정후(正后, 왕후)께 경사가 있을 때를 거론하는 것은 사전에 주밀해야 한다는 생각이 있어서”라고 밝힌다.7 아직 나이가 젊은 인현왕후가 적자를 출산할 가능성이 충분하니 성급하게 결정하지 말고 기다려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서인들 다수가 공유하던 생각이었는데 적장자를 원자로 삼는 것이 예법인 데다 희빈 장씨가 남인계 인물이고 이미 희빈 장씨를 중심으로 남인세력이 결집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를 우려했다고 볼 수 있다.


숙종은 송시열의 상소에 격노한다. 이미 결정한 것에 대해 반론을 제기한 것도 못마땅했지만 왕위계승의 문제를 언급한 것을 왕권에 대한 도전으로 받아들였다. 숙종은 다음 날로 조정을 남인으로 재편하고 5월2일에는 왕비 민씨를 폐하여 서인으로 삼았다. 그리고 경신환국 후 영의정으로서 조정을 이끌었던 김수항과 서인의 정신적 지주 송시열에게 사약을 내렸다.


그런데 환국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1694년(숙종 20년) 갑술환국(甲戌換局)이 일어나면서 서인이 재집권한 것이다. 4월1일, 숙종은 남구만을 영의정으로 하는 서인 조정을 출범시키고, 남인 재상 권대운과 목내선을 유배보냈으며 민암을 사사했다.8 갑술환국은 김춘택·한중혁 등의 ‘폐비복위운동’이 계기가 됐는데 남인 정권은 이것을 역모로 몰아 서인의 잔여 세력까지 제거하려 했지만 숙종이 개입해 상황을 반전시킨 것이다.


이상 경신환국, 기사환국, 갑술환국 등 숙종 대에 이뤄진 세 번의 환국을 살펴봤다. 앞에서 직접적인 원인이 된 사건을 중심으로 서술했지만 실상은 간단치 않다. 붕당 간 대결과 갈등, 가치관의 차이, 왕권과 신권의 대립, 왕권 강화를 위한 임금의 정치적 목적, 집권당파의 실책, 집권당파에 대한 임금의 염증, 왕비 자리를 둘러싼 권력 투쟁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했기 때문이다. 이 사건들의 의미에 대해서는 보다 정밀한 분석을 필요로 하므로 여기서 다루지는 않는다. 이번 글은 숙종의 리더십에 주목한다. 환국정치라는 이전까지는 시행된 적이 없던 숙종의 정국 운영 방식이 어떤 결과를 낳았는지 검토해 보고자 한다.


무릇 ‘환국’이란 한 붕당에서 다른 붕당으로 조정의 주도 세력을 전면 교체하는 것으로서 조선 왕조에서는 처음 시도된 방식이다. 숙종이 통치하기 전까지만 해도 붕당은 갈등하고 대립했을지언정 서로를 죽이고 상대방을 괴멸시키려는 극단적인 대결 양상을 보이지 않았다. 선조 때 동인이 대거 해를 입은 ‘정여립의 옥사’에서도 조정 내에 동인 세력은 유지되고 있었으며 인조 대에는 남인 영의정 이원익이 서인 대신들을 이끌기도 했다. 효종 대에는 서인 재상 김육이 남인 대신 허적과 협력해 대동법을 추진했고, 현종 대에 이르러 남인 허목이 서인 송시열과 예송 논쟁을 벌였으나 어디까지나 공존 속에서 진행된 이론 경쟁이었다. 심지어 2차 예송논쟁에서 현종이 남인의 손을 들어줌으로써 남인 정권이 출범했지만 서인 외척 청성 부원군 김석주(현종의 왕비 명성왕후의 사촌오빠)와 광성 부원군 김만기가 여전히 건재했다. 또 남구만, 유상운 등 서인계 인물들이 한성부 좌윤과 대사간 등 고위직을 맡고 있었다.


그러나 숙종이 한 붕당 일색으로 조정을 채우는 환국정치를 단행하면서 공존은 깨져 버린다. 숙종은 환국 때마다 지난 정권의 주요 인사들을 죽이고 실각한 붕당을 과도하게 탄압했다. 환국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기존의 집권세력을 불충한 신하, 역심을 품은 신하로 내몰았다. 예컨대 경신환국 당시 ‘허견의 역모’는 역모라고 하기에는 매우 어설펐다. 복선군이 허견과 친하게 지내며 불순한 마음을 품었던 것은 분명해 보이나 구체적인 행동에 나선 것은 아니었고9 허견도 자신의 혐의를 인정하기는 했으나 사병이라는 것은 건달들이 모인 수준이고 군사를 동원한다는 계획도 엉성했다. 능력과 인품이 모두 변변치 못한 두 사람이 권력에 대한 헛된 야망을 품고 입으로만 떠든 저열한 모사(謀事)에 불과했던 것이다. 물론 조선 사회에서는 역모를 행동에 옮기지 않았어도 꾸민 것만으로도 처벌하는 것이 법이기 때문에 이들에 대한 처벌 자체가 잘못됐다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역모와 관련됐다는 증거가 없었음에도10 남인 대신들 상당수를 여기에 연루시켜 목숨을 거둔 것은 다름 아닌 숙종이었다. 기사환국 때도 마찬가지다. 송시열과 김수항이 임금의 뜻에 반론을 제시하긴 했지만 그들은 자신들의 가치관에 입각한 주장을 한 것일 뿐 불충했다거나 사약을 받을 만한 잘못을 저지른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숙종은 두 사람이 흉악한 죄를 지었다며 사사한다.


숙종의 이런 조치는 서인과 남인을 서로 원수로 만들고, 자신들의 붕당이 생존하기 위해서라도 상대 붕당을 공격하는 행태를 낳게 했다. 자당의 영수를 죽인 것은 다름 아닌 왕이지만 왕을 비판할 수는 없는 노릇이고 대신 영수를 죽이는 데 참여한 상대 당에 원한을 키워간 것이다. 또 임금의 변심에 따라 언제 다시 정권이 뒤바뀔지 알 수 없는 상황이기 때문에 아예 상대 당의 싹을 뽑아놓겠다며 무리수를 두게 된다. 김수항이 오시수의 죽음에 개입한것,11 전익대가 김익훈의 사주를 받아 남인이 역모를 꾀했다고 허위로 고변한 것,12 남인정권이 송시열을 죽인 것, 남인이 인현왕후 복위운동을 역모로 몰아 서인의 잔여 세력을 제거하려 한 것 등이 대표적이다.


또 숙종은 이 과정에서 자신의 판단 착오나 잘못을 대부분 인정하지 않는다. 본인이 송시열을 죽이라고 결정했으면서 송시열을 죽게 만든 것은 남인이라고 책임을 전가하는 식이다. 이러한 숙종의 스탠스는 붕당들로 하여금 임금을 믿지 못하도록 만들었고, 독자적으로 힘을 구축하는 데 집착하고 상대방을 배척하는 데 매달리도록 만들었다. 그리고 이것이 임금의 눈에는 전횡과 오만으로 비쳐 염증을 느끼게 하는 악순환을 가져오게 된다.


결국 서인과 남인은 돌아올 수 없는 다리를 건너게 되는데 이와 같은 파국을 가져온 1차적인 책임은 살펴본 바와 같이 숙종의 갈등 조장에 있다. 원래 갈등은 그 자체로 나쁘기만 한 것은 아니다. 특히 ‘인지적 갈등(cognitive conflict)’, 즉 서로의 기분이 상해 벌어지는 감정적인 갈등이 아니라 관점과 생각, 가치관의 차이로 인해서 벌어지는 갈등의 경우 다양한 대안을 도출해 사고의 폭을 확장시킴으로써 의사결정의 질을 높일 수 있다. 문제는 이것을 잘 관리해야 한다는 것이다. 적절한 수준에서 갈등을 조장함으로써 건전한 경쟁을 유도함과 동시에 갈등이 심화돼 대립이 격화되는 일이 없도록 조율해야 한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서인과 남인은 학문적, 이념적 차이를 가진 집단이다. 학통과 정치적 배경이 다를 뿐 아니라 성리학적 세계관인 이기론(理氣論)에 대해 근본적인 견해 차이를 보인다. 왕권과 신권의 역할을 두고도 다른 생각을 갖고 있으며 사회질서인 ‘예법’에 대한 이론도 서로 다르다. 따라서 이들이 국정과 민생의 주요 문제들을 처리하는 방식, 제시하는 대안에도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다. 만약 숙종이 임금으로서 서인과 남인의 갈등을 조장하면서도 ‘선명성 경쟁’ ‘정책 경쟁’을 통해 누가 더 나은 붕당인가를 두고 겨루도록 이끌었더라면 조선 후기 정국의 양상은 상당히 달라졌을 것이다. 각 붕당이 상대 당의 존재를 인정하는 가운데 균형 잡힌 논쟁을 벌일 수 있도록 환경을 조성했더라면 ‘창조적 마찰(creative abrasion)’이 구현될 수 있었다.


그러나 숙종은 인지적 갈등을 심화시켜 감정적 갈등까지 촉발시킴으로써 상대 당을 존중하기는커녕 전멸해야 할 대상으로 보는 극단적인 대결 정국을 만들어버렸다. 인조에서 현종 대에 구현됐던 붕당 간의 타협 정치, 혁신적이고 능동적인 개혁 정치가 사라진 채, 나는 옳고, 너는 틀렸다는 정쟁이 심화된 것은 환국정치가 낳은 그림자다. 이후 영조와 정조가 탕평정치를 통해 숙종의 그림자를 걷어내려고 노력한다.  
 



김준태 성균관대 동양철학문화연구소 연구원 akademie@skku.edu
 
필자는 성균관대와 동 대학원에서 정치외교학과 한국 철학을 공부하고 성균관대 유교문화연구소를 거치며 10여 년간 한국의 정치사상과 우리 역사 속 정치가들의 리더십과 철학을 연구했다. 특히 현실 정치에서 조선시대를 이끌었던 군주와 재상들에 집중해 다수의 논문을 썼다. 저서로는 주간지에 연재한 역사 칼럼 ‘세종과 정조의 대화’를 보완해 엮은 '왕의 경영', 올바른 리더십의 길에 대해 다룬 '군주의 조건' 등이 있다.

동아비즈니스리뷰 326호 The Rise of Resale 2021년 08월 Issue 1 목차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