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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EO를 위한 인문고전 강독

수렵인 vs 농경민, 삶의 질은?

김원철 | 85호 (2011년 7월 Issue 2)

편집자주 21세기 초경쟁 시대에 인문학적 상상력이 경영의 새로운 돌파구를 제시해주고 있습니다. DBR은 ‘CEO를 위한 인문고전 강독’ 코너를 통해 동서고금의 고전에 담긴 핵심 아이디어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인류의 사상과 지혜의 뿌리가 된 인문학 분야의 고전을 통해 새로운 영감을 얻으시기 바랍니다.
 
수렵사회보다 농경사회의 삶이 고달팠다는 재미있는 연구결과가 최근 학계에 보고됐다. 상식의 눈으로 보면 수렵사회의 삶이 훨씬 고달팠을 것처럼 보인다. 추위는 둘째치고라도 맹수들에 대한 공포로 매일 밤을 떨었을 것이다. 먹을 것은 또 어떠했겠는가. 사냥터에서 빈손으로 돌아오는 날이 부지기수였을 것이고 요행히 사냥에 성공한 날이라도 무리 중 힘센 이가 아니라면 배불리 먹지도 못했을 것이다. 이러한 상식적 견해에 대해 전문가들은 이렇게 말한다.
 
“당신들은 수렵·채집사회의 인류를 마치 오늘날의 노숙자처럼 바라보고 있는 것은 아닌가? 그들은 비위생적이고 불규칙한 식사로 인해 만성적인 소화불량을 앓지도 않았으며, 낙오자라는 심리적 압박으로 인해 대인기피증에 시달리지도 않았다.”
 
맞는 말이다. 한 데서 잠을 청할지언정 수렵인들은 현대인처럼 정신적인 스트레스를 받지는 않았을 것이다. 수렵인이 농경민보다 잘 살았음을 보여주는 과학적인 근거들도 있다. 일례로 부시맨들은 초기 농경사회의 일인당 노동시간보다 훨씬 적은 주 12∼19시간의 노동을 했을 뿐이다. 그들은 하루 2140 정도를 섭취했는데 이는 20세 이상 한국인 남성 권장량인 1800∼2500에도 맞먹는 것이다.
 
하지만 상식의 반문은 계속된다. 몇 가지 수치만으로 어떻게 삶의 질을 평가할 수 있다는 말인가? 설령 영양섭취 측면에서는 수렵사회가 농경사회보다 나았다고 하더라도 삶의 안정감이라는 측면에서는 후자가 월등히 낫지 않았겠는가? 삶의 안정감을 과학적으로 측정하기가 어려운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이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은 없다. 다들 경험적으로 알고 있다.
 
이처럼 과학과 상식이 맞서는 경우 우리는 어느 쪽에 손을 들어줘야 할까? 조르주 캉길렘 (Georges Canguilhem, 1904∼1995)이라면 아마도 상식 쪽에 손을 들어줄 것이다.
 
그는 ‘정상적인 것과 병리적인 것’에서 “의학은 사람들이 아프다고 느끼기 때문에 존재한다. 의학이 존재하기 때문에 자신이 어떻게 아픈지를 아는 것은 어디까지나 이차적인 일이다”고 설명했다. 캉길렘의 이러한 주장을 문외한의 호기 정도로 치부하지는 마라. ‘정상적인 것과 병리적인 것’은 그가 스트라스부르대에 제출했던 의학박사 학위논문이었다.
 
정상적인 것과 병리적인 것을 구분하는 기준은 무엇인가? 일상적으로 두 용어는 선악이나 미추처럼 상호대립적인 의미로 사용된다. 그렇다면 병리적인 상태를 비정상적인 상태라고 말해도 좋을까? 성인의 정상적인 심박수는 60-100bpm이라고 한다. 심박수가 60bpm 이하나 100bpm 이상인 사람들은 분명 비정상적이다. 그렇다고 그들이 질병을 앓고 있다고 말할 수는 없다. 요가 수행자들의 사례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비정상적인 심박수가 오히려 건강한 생명력을 보여주는 징표가 되기도 한다. 
 
정상과 병리의 구분이 모호해지는 이유 중 하나는 ‘정상’과 ‘평균’을 혼동하기 때문이다. 실증주의 생리학자들이 이러한 혼동을 부추긴다. 그들은 과학이라는 이름으로 모든 생리현상을 산술적 수치로 나타내기를 선호한다. 아시아인의 평균 수명, 20세 이상 성인 남성의 평균 심박수, 체내 포도당의 평균 수치 등등. 이런 류의 평균에 부합하는 사람들은 정상으로 분류되며 거기서 벗어나 있는 사람들은 비정상으로 분류된다. 그러나 한 가지 해결되지 않은 문제가 여전히 남아 있다. 어느 정도의 편차가 정상과 비정상을 가름하는 기준인가? 불행히도 산술적 통계 자체는 이에 대해 아무 말도 해주지 않는다.
 
실증주의자들의 입장을 따르면 살아 있는 유기체에서 병리적 현상이란 대응하는 생리적 현상의 많고 적음에 따른 양적 변이의 이상 아무것도 아니다. 환자 자신이 느끼는 정상적인 상태와 병리적인 상태의 질적 차이는 여기서 철저히 무시된다. 하지만 이 차이가 없었더라면 의학이라는 것도 탄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정상과 병리, 두 상태의 질적 차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생명의 의미부터 재정의해야 할 것 같다. 살아 있다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단순히 제 기관들이 잘 작동하고 있음을 의미하지 않는다. 생명은 어디까지나 전체로서 유기체의 활동과 관련된 것이다. 따라서 생명의 핵심은 기관들의 조화를 통해 신체가 최적의 상태를 지속적으로 유지하려는 노력에 있다. 생물학에서는 이를 ‘항상성(homeostasis)’이라 부른다. 이상적 체온, 혈압처럼 어떤 측정치에 관해서 가장 적합한 단 하나의 수준, 혹은 상태가 있다는 말은 아니다. 그런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신체의 최적 상태란 상황에 따라 변하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맹수에게 기는 원시 사냥꾼을 예로 들어보자. 살기 위해서는 죽을힘을 다해 뛰어야 한다. 최대한 빠른 시간 안에 더 많은 양의 에너지를 근육에 전달하는 일이 시급해진다. 이를 위해 교감신경계가 발 벗고 나선다. 아드레날린이 다량 방출되고, 그 결과 심박수, 혈압, 호흡량이 급격히 증가한다. 반면 성장과 생식활동에 관련된 모든 활동들은 잠정적으로 중단된다. 죽느냐 사느냐가 문제인데 먼 미래를 위한 대비가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생리학적으로만 보자면 수렵인의 신체 상태는 분명 비정상적인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생존을 위한 최선의 전략인 셈이다.
 
한 생명체가 건강하다는 말은 결국 환경의 변화에 맞춰 해야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을 잘 알고 있다는 뜻이다. 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을 지정해주는 것을 우리는 보통 ‘규범’이라고 부른다. 같은 의미에서 캉길렘은 ‘생물학적 규범들(normes biologiques)’이 존재한다고 본다. 우리가 어떤 상태들을 정상적인 것으로 판단할 때 생물학적 규범들에 따라 그렇게 하는 것이다. 상황이 바뀌면 규범도 바뀐다. 그렇지 못하다면 생명체는 큰 장애에 부딪친다. 맹수에게 기는 사냥꾼의 경우 그것은 죽음을 의미한다. 자신의 뒤를 는 맹수가 없는데도 아드레날린을 계속 방출한다면 이 역시 규범에 문제가 생긴 경우이다.
 
정상적인 것과 병리적인 것을 평가할 때 순수하게 의학적인 차원에 한정할 필요는 없다. 어떤 상황 속에서 사람들은 기형이나 질병을 갖고서도 아무런 문제없이 생활할 수 있다. 난시나 근시를 가진 사람들이라도 농업이나 목축사회에서는 스스로를 정상이라고 보았을 것이다. 하지만 항해술이나 항공술이 발달된 사회에서 난시와 근시는 정상이 아니라 이상(異常)으로 느껴진다. 자신에게서 어떤 장애를 느낀다는 것은 할 수 있다고 여겨지는 활동들을 더 이상 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이다.
 
가치를 뜻하는 ‘Value’는 라틴어로 건강하다를 의미한다고 한다. 변화된 상황에 따라 무엇을 할지 결정하는 일은 말 그대로 새로운 가치를 만들어내는 일이다. 만약 인간이 단순히 환경에 종속돼 살아갈 뿐이라면 ‘생물학적 규범’이라는 것은 존재하지도 않을 것이다. 그러한 규범이 존재함으로 인해 인간은 자신의 환경을 스스로 설정함과 동시에 자기 자신에게 정상적인 상태가 어떤 것인지를 스스로 규정할 수 있게 된다. 반대로 병리적인 것은 한 가지 규범에 고착된 상태를 말한다. 환경의 변화를 수용할 수 없을 뿐더러 다른 생명의 규범으로 스스로를 변화시킬 수도 없는 열등한 상태이다.
 
수렵인의 삶이 더 열등했을까, 아니면 정착생활을 했던 농경민의 삶이 더 열등했을까? 삶의 질이 진정으로 문제라면 정답은 없다. 수렵사회는 수렵사회의 방식으로, 농경사회는 농경사회의 방식으로 환경을 설정했으며 거기에 맞게 삶의 가치를 결정했을 것이다.
 
누가 더 못 살았느냐는 질문이 흥미를 끄는 이유는 다른 곳에 있다. 과학의 이름으로, 혹은 상식의 이름으로 어느 한쪽을 선택했다면 그것은 현재 당신이 느끼는 삶의 가치를 투영시키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어떤 것이 도드라져 보이는 까닭은 그것이 비정상적이어서가 아니라 비정상적인 것이라고 판단되기 때문이다.
김원철 철학박사 won-chul-kim@hanmail.net
 
필자는 고려대 철학과를 졸업하고 벨기에 루벵대에서 철학 석사 학위를, 파리 고등사회과학원(E.H.E.S.S)에서 스피노자 철학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고려대 등에서 강의를 하고 있다. 특히 윤리학의 역사, 스토아철학, 아우구스티누스에 관심을 갖고 관련 분야를 연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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