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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란...반란...잔혹한 진압으로 권력 다졌다

김영수 | 50호 (2010년 2월 Issue 1)

즉위, 그리고 노심초사
기원전 247년 장양왕(莊襄王)이 즉위 3년 만에 죽었다. 이제 겨우 열세 살의 진시황이 그 뒤를 이었다(진시황은 즉위 전에는 영정, 즉위 후에는 진왕 정, 황제 즉위 후에는 진시황으로 불렸다. 편의를 위해 진시황으로 통일한다). 어머니와 함께 조(趙)나라에서 귀국한 지 불과 4년 만이었다. 아무것도 모르던 세 살 나이에 아버지와 떨어졌고, 6년 만에 아버지의 나라로 와서 세 식구가 함께 살기를 4년,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것이다.
 
실권은 여불위에게 돌아갔다. 즉위하자마자 진시황은 상국(相國)으로 있던 여불위를 ‘중보(仲父)’로 높여 불렀다. 여불위를 아버지처럼 대하겠다는 의미였다. 나랏일은 어머니인 조태후와 대신들에게 형식적으로 위임했다. 이듬해에는 여불위의 식객으로 있던 이사(李斯)를 발탁해 장사(長史)에 임명하고 자문 역할인 객경으로 모셨다. 여불위가 추천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기록상으로 이것이 진시황과 이사의 첫 만남이었다.
 
얼떨결에 보좌에 오르긴 했지만 안팎의 상황은 어린 왕에게 우호적이지 않았다. 여불위가 권력을 행사했고, 여기에 품행이 방정하지 못한 어머니까지 끼어들었다. 실권을 쥔 여불위와 조태후는 옛정을 되살렸다. 걸릴 게 없었기 때문이다. 한창 나이에 과부가 된 조태후는 자신에게 주어진 뜻밖의 권력을 한껏 만끽하려 했고, 여불위는 자신의 입지를 확실하게 굳히기 위해서라도 조태후의 유혹을 물리치기 어려웠다.
 
객관적 상황도 좋지 않았다. 즉위 3년째인 기원전 244년(16살)에는 큰 기근이 들었고, 이듬해에는 메뚜기 떼가 천지를 뒤덮고 천하에 전염병이 돌았다. 주변국과의 전쟁도 끊이질 않았다.
 
젊은 진시황은 이런 뒤숭숭한 상황에서 노심초사 자신의 처지에 대해 깊이 고민했다. 어린 나이에 산전수전 다 겪은 그인지라 생존력 하나만큼은 누구보다 강했다.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아 말수가 적었고, 혼자서 뭔가를 상상하고 이를 구체적인 계획으로 구상하는 일이 몸에 배었다. 그는 자신에게 주어진 권력을 어떻게 행사해야 할지 고민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권력을 자기 수중에 넣어야만 했다. 성년에 점점 가까워지면서 권력에 대한 진시황의 야심도 커져만 갔다.

동생의 반란
지난 호에서 말한 바와 같이 진시황의 생애는 크게 네 단계로 나눠볼 수 있다. 이 중에 13살 즉위 후 22살까지 대권을 장악하고 친정(親政)하게 되는 두 번째 단계는 그가 자신의 리더십을 발휘할 기회를 노심초사 기다린 단계다. 어쩌면 이 시기가 진시황의 생애에서 가장 빛나는 때가 아닌가 한다. 이 기간에 그는 자신의 손으로 왕국을 통치하고 나아가 천하를 통일하는 꿈을 꾸며 자신의 리더십을 발휘하는 시뮬레이션에 몰두했을 것이다. 그리고 거기에는 그가 그리는 이상적인 제국의 모습이 화려하게 펼쳐졌을 것이다.
 
즉위 후 안팎으로 결코 순탄치 않은 상황에 처해 있던 진시황이 스스로 권력을 행사할 수 있게 만든 결정적 계기는 2개의 난이었다. 하나는 진시황의 나이 21살 때 발생한 동생 장안군(長安君) 성교(成)의 반란이고, 또 하나는 이듬해 진시황의 어머니와 그 정부 노애가 일으킨 반란이었다.
 
진시황의 동생으로 기록돼 있는 성교는 진시황 아버지 장양왕의 아들인 것은 분명하지만 어머니에 대해서는 알 수 없다. 배다른 동생일 가능성이 있다. 당시 성교는 군대를 이끌고 조나라를 공격하다가 갑자기 반란을 일으켰다. 성교는 둔류(屯留)에서 전사하고 그를 따르던 군관들도 모두 목이 잘렸다. 이어 둔류에 살고 있던 백성들을 모두 지금의 감숙성(甘肅省) 임조(臨兆)로 옮기는 조처까지 단행됐다. 심지어 성교와 관련 있는 장수들이 뒤이어 반란을 일으켰다가 군졸까지 모조리 육시를 당했다고 한 것을 보면 이 반란의 여파가 만만치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누가 성교의 반란을 진압했는지에 대해서는 기록이 없다. 그러나 전후 기록의 맥락을 볼 때 진시황이 직접 참전했거나 반란 진압을 지휘했을 가능성이 커 보인다. 왜냐하면 같은 해 내시를 가장한 노애가 진시황의 어머니 조태후와 사통하면서 불순한 음모를 꾸미기 시작하는데, 진시황은 몰래 사람을 심어 이들의 동태를 파악한 것으로 기록에 전해지기 때문이다. 진시황이 성교의 반란을 계기로 정치 일선에 나선 것이다. 첫 무대이긴 했지만 진시황의 손은 매서웠다. 반란 주동자는 물론 그를 따른 병사들까지 모조리 참살한 과정에서 그는 잔인한 면모의 일단을 선보였다.
어머니, 탯줄을 놓다
동생 성교의 반란을 진압한 이듬해인 기원전 238년에 진시황의 나이는 22살이었다. 그해 4월, 진시황은 옹성 기년궁에서 관례(성인식)를 치르고 친정을 시작했다. 이보다 앞서 기원전 239년에는 앞서 말한 대로 내시로 가장한 노애가 태후와 사통하며 권세를 휘두르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 노애라는 자는 다름 아닌 여불위의 추천으로 궁에 들어왔다. 태후와의 음행이 발각될까봐 겁이 난 여불위가 태후와의 관계를 정리하는 대신 음경이 크고 정력이 절륜한 노애를 내시로 속여 태후에게 보낸 것이다.
 
<여불위열전(呂不韋列傳)>에 따르면 여불위는 태후와의 관계를 정리하기 위해 꽤나 치밀한 수순을 밟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점점 성년이 되어가는 진시황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던 여불위는 정력이 남다른 노애를 자기 집 가신으로 들여와 여러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몸짱’ 노애를 노출시켜 그 소식이 태후의 귀에도 들어가게 했다(이 대목은 상당히 선정적으로 기록되어 있어 필자가 문장을 다듬었다). 태후는 은밀히 사람을 넣어 노애에 대한 자신의 욕심을 전했고, 여불위는 못 이기는 척 노애를 들여보내면서 가짜로 궁형을 받게 하여 거둬들이면 된다는 방법까지 알려줬다.
 
노애는 순식간에 태후의 몸과 마음을 사로잡았고, 태후를 등에 업은 노애는 수천 명의 가신까지 거느리는 권세가로 떠올랐다. 진시황도 태후의 청에 못 이겨 노애를 장신후(長信侯)에 봉하고 산양 땅을 봉지로 내려 마음대로 처분할 수 있는 특권까지 주었다. 심지어 하서 지역 태원군이 노애의 봉국으로 변경되기까지 했다. 그해가 바로 동생 성교의 반란을 진압한 기원전 239년, 진시황의 나이 21살이었다.
 
그리고 이듬해 22살이 된 진시황이 성인식과 함께 친정을 시작하기가 무섭게 태후와 노애가 반란을 일으켰다.
 
아들, 탯줄을 끊다
태후와 노애의 음란한 행위는 단순히 육체적 만족으로 끝나지 않은 게 문제였다. 노애는 자기 집에다 수천 명의 가신과 벼슬이 탐나 자신을 찾은 1000여 명의 예비 관료군(빈객)을 거느리는 등 정치적 행보에 몰두했다. 그사이 태후와의 사이에서 아들을 둘이나 낳았다. 물론 이 일은 비밀에 부쳐졌다. 하지만 스무 살이 넘은 진시황은 어머니의 이런 추문에 촉각을 곤두세우지 않을 수 없었다.
 
진시황은 노애와 태후의 반란에 앞서 이미 사람을 넣어 이들의 동정을 감시하고 있었다. <여불위열전>에는 누군가 노애의 정체를 폭로하고 나아가 태후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을 왕으로 앉히려는 음모를 꾸미고 있다고 보고해왔다고 되어 있다. 하지만 전후 맥락으로 볼 때 진시황은 진작부터 태후의 간행을 알고 나름대로 준비해온 것으로 추정된다.
 
노애도 더 늦기 전에 왕위를 찬탈해야겠다는 판단이 들었는지, 진시황의 친정을 계기로 행동에 나섰다. 이들은 진시황의 옥새와 태후의 인장을 위조하여 도성을 지키는 군대를 비롯하여 가신들, 그리고 융적까지 동원해 기년궁을 공격했다. 상당히 치밀한 준비 끝에 나온 거사였지만 진시황의 대처는 신속하고 단호했다. 진작부터 이들의 일거수일투족을 파악하고 있었던 터라 그에 대한 대응 역시 물샐 틈 없었다.
 
진시황은 반란의 진압을 상국 창평군(昌平君)과 창문군(昌文君)에게 맡겼다. 두 사람은 노애를 함양으로 몰아 빠져나가지 못하게 한 다음 맹공을 퍼부어 수백 명의 머리를 베었다. 노애 무리는 별 힘도 써보지 못하고 일망타진을 당했다. 진시황은 후속 조치도 신속하게 마무리 지었다. 노애의 삼족을 멸하고, 태후와의 사이에서 낳은 두 아들을 죽였다. 어머니인 조태후는 옹 땅으로 추방했다. 난리 통에 도주한 노애에 대해서는 생포 100만 냥, 사살 50만 냥이라는 어마어마한 거금을 현상금으로 내걸었다. 노애와 주동자들은 오래 버티지 못하고 잡혔다. 20여 명의 주동자들이 본보기로 목이 잘려 높은 곳에 매달렸고 사지는 거열형으로 찢어버렸다. 일족도 다 처형당했다. 가신들과 죄질이 가벼운 자들은 노역형에 처해졌다. 무려 4000여 가구가 작위를 삭탈당하고 촉 지방 방릉(房陵)으로 쫓겨갔다.
 
연달아 발생한 두 반란을 진압하면서 진시황은 친정과 함께 왕국의 절대 권력에 성큼 다가섰다. 이 과정에서 보여준 그의 신속하고 무자비한 대응은 전국 시대 최강국의 지도자로서 손색이 없었다. 이제 남은 것은 여불위 한 사람이었다. 어머니와의 피비린내 나는 대결에서 가볍게 승리한 진시황은 이제 생부인 여불위와의 최후의 일전을 눈앞에 두게 되었다. 어머니와의 혈투로 인한 피비린내의 여파가 채 가시기도 전에 진시황은 또 한 차례 일전을 준비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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