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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병훈 변호사가 말하는 ‘판사의 외로운 결단’

“100% 신뢰감 줘 최대의 정보 얻어라”

하정민 | 41호 (2009년 9월 Issue 2)
판사는 외로운 직업이다. 첨예하게 대립하는 원고와 피고의 주장을 검증해야 하는 데다 각자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각색한 각종 증거들 가운데 진실에 가까운 것을 취사선택해 최선의 의사결정을 내려야 하기 때문이다. 철저한 독립성을 보장받지만, 의사결정을 내리는 과정에서 그 누구의 도움도 받을 수 없다. 판결에 대한 책임도 전적으로 혼자 져야 한다.
20년 넘게 판사로 일하다 지난 3월 전업한 민병훈 변호사는 좋은 의사결정의 최우선 요건을 ‘단순화’라고 정의했다. 재판 과정은 분쟁의 모든 사안을 다룰 수 없기에 공백과 불확실성이 생길 수밖에 없다. 재판의 이해관계자는 그 공백을 자신에게만 유리하게 몰고 가려 한다. 때문에 모든 이슈에 얽매이면 결코 좋은 의사결정을 내릴 수 없다고 민 변호사는 강조했다.

민 변호사는 높은 자리에 올라가고 권한이 많아질수록 사안을 단순화시켜 타인의 이해도를 높이라고 조언했다. 또 아무리 옳은 판단이라도 조직 구성원들의 반발이 있다면 그 결과물을 무조건 강요하면 안 된다고 강조했다. 그에게서 바람직한 의사결정 노하우를 들어봤다.
 

 
판사의 의사결정 프로세스가 기업 경영자 혹은 다른 조직 결정권자의 의사결정과 다른 점은 무엇입니까?
의사결정의 대상이 공적 영역이라는 점, 의사결정의 발표 시기를 조절할 수 있다는 점이 가장 큰 차이입니다. 재판부의 의사결정은 판결 선고라는 형태로 나타나는데, 의사결정권자인 재판부가 발표 시기를 조절할 수 있습니다.
시기를 조절한다는 게 의사결정의 결과를 움직인다는 뜻은 아닙니다. 사회적으로 아직 받아들이기 힘든 제도는 법의 영역과 현실 사이에 괴리가 있을 수 있기에 사회가 이를 받아들일 여지를 만들어준다는 의미입니다. ‘간통죄 위헌 논쟁’이 그 예죠. 법적 차원에서는 간통죄가 위헌이지만, 아직 우리 사회가 이를 받아들이지 못하기 때문에 그 시기를 미룬 겁니다.
시기 조절의 유연성은 기업의 최고경영자(CEO)가 유념해야 할 대목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무리 옳은 판단이라 할지라도, 조직 구성원들의 반발이 있다면 그 의사결정 사항을 무조건 강요하면 안 된다는 거죠.”
 
재판 과정은 원고와 피고의 이해관계가 복잡하게 얽혀 있고, 그 기간 또한 매우 깁니다. 이런 상황에서 효과적인 의사결정을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재판 과정은 분쟁의 모든 걸 다루지는 못합니다. 극히 작은 부분만 다루죠. 재판에 언급되지 않은 부분을 판사가 결정할 수 없기 때문에 공백이 생기고, 불확실성도 증가합니다. 많은 이해관계자는 그 공백을 자신에게 유리하게 해석하려 하고요.
때문에 재판을 할 때는 이해관계를 단순화시킴으로써 불확실성을 없애는 일이 가장 중요합니다. 같은 사건이라도 어떤 관점에서 보느냐에 따라 수많은 이슈와 다양한 이해관계가 등장합니다. 그 모든 이슈에 얽매이면 결코 좋은 의사결정을 할 수 없죠. 특히 사회적 의미가 큰 사건일수록 이해관계를 단순화해야 사건의 본질적 성격과 의미를 명확히 정의할 수 있습니다.”
 
예로 들 만한 사건을 소개해주신다면?
삼성 이건희 회장의 경영권 상속 문제를 보죠. 이 사건에서 가장 중요한 이슈는 세금과 주주 재산권 침해라고 생각합니다. 세금을 내지 않고 상속을 하려 했는지 아닌지, 그게 상장회사 주주들의 재산권을 침해했는지 아닌지가 이 사건을 바라보는 키포인트입니다.
 
물론 그 외에도 이 사건을 해석하는 다양한 의견들이 있겠지만, 가장 중요하다고 판단되는 한두 가지 핵심 쟁점을 바탕으로 이것이 문제냐 아니냐를 따져야 좋은 재판을 할 수 있습니다. 큰 흐름을 잡고 세부 사항은 추후에 판단하자는 거죠. 미시적인 사안을 쫓다 보면 사건의 정의나, 그 사건을 통해 재판부가 사회에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왜곡되기 쉽습니다. 부장판사를 할 때 제가 배석 판사들에게 가장 많이 했던 말이 ‘이 사건 성격이 뭐지?’ ‘무슨 메시지를 만들고 싶어?’였습니다.
 
제가 법원 행정처에 근무하던 시절 모셨던 상사가 단순화를 참 잘하셨어요. 얼핏 보기에는 실력도 없고 많은 생각을 하는 듯 보이지도 않는데, 한마디 하시면 무릎을 탁 치게 만드는 분이셨죠. 그때 행정처에서 ‘기업 이미지 통합(CI)’ 사업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하자고 제안을 했었는데, 당시만 해도 공공기관의 CI 사업이 드물었습니다. 대법원장께서 ‘이게 뭐지?’라고 물어보시자, 그 상사 분이 ‘으쌰으쌰해서 일 잘해보자는 겁니다’라고 답하셨어요. 그때 높은 자리에 올라가고 권한이 많아질수록 사안을 단순화시켜 타인의 이해도를 높이는 게 중요하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이해관계나 쟁점을 단순화하는 일을 잘하려면 어떤 노력이 필요할까요?
우리나라는 변론주의를 택하고 있습니다. 판사는 검사, 변호사, 피고, 원고의 주장을 통해 사건의 전말을 파악할 뿐이죠. 그런데 원고나 피고 모두 자신에게 유리한 부분만 진술할 뿐, 전체적인 맥락에서 사건이 어떻게 벌어졌는지는 전혀 언급해주지 않습니다. 부분적인 정보만 갖고 판결을 내릴 수는 없으니까 커뮤니케이션을 통해 상대방으로부터 최대한 많은 정보를 이끌어내야 합니다.
 
진술을 통해 얻은 자료만으로는 사건 전체를 파악할 수 없습니다. 언뜻 ‘이렇지 않겠나’라는 느낌이 들지만 이를 확인할 길이 없을 때, 커뮤니케이션 과정을 통해 제 생각을 드러내고 그에 대한 상대방의 반응을 살핍니다. 원고, 피고, 검사, 변호사가 갖고 있는 생각들을 뽑아내는 과정에서 그들 각자가 어떤 부분을 부각시키려고 하는지, 어떤 부분을 감추려고 하는지를 파악할 수 있어요. 아무리 자신에게 유리한 발언만을 하려고 노력해도, 계속 얘기를 하다 보면 전체적인 맥락이 드러나거든요.
 
기업 경영도 마찬가지입니다. 특히 부서별 이익이 충돌해 문제가 발생할 때는 한 회사에 있다고 해도 서로에게 정확한 정보를 주지 않을 때도 있잖아요. 결국 의사결정권자인 경영자가 각자 자신에게만 유리한 진술을 하는 이해관계자의 부분적 얘기를 듣고 전체적인 큰 그림을 완성할 수 있어야 합니다.
누가 어떻게 하면 좋은 재판관이 될 수 있느냐고 물어보면, 저는 ‘잘 속아줘야 한다’고 답합니다. 상대방에게 제가 자신의 얘기를 100% 믿고 있다는 인상을 줘야 그 사람으로부터 얻을 수 있는 최대한의 정보를 끌어낼 수 있습니다. 진술하는 사람도 판사가 자신을 믿어주는지 아닌지를 바로 알거든요. 때문에 자신을 믿어준다고 생각하는 판사에게 훨씬 솔직한 얘기를 털어놓죠. 물론 거짓말 유무를 가려내는 지혜는 반드시 가져야겠지만요.”
 
의사결정 과정에서 선입견이나 편견에 의한 오류에 빠질 수도 있습니다. 이를 방지하기 위한 방안은 무엇인가요?
의사결정을 내리기 전에는 주위 사람들로부터 도움을 받을 수 있지만, 결정을 내리는 순간에는 전적으로 저 혼자입니다. 결정에 따른 모든 일을 제가 책임져야 합니다. 저에게 결정을 내릴 권한이 주어졌다는 건 그에 대한 책임도 제가 져야 한다는 뜻이죠. 제가 내린 결정을 뒷받침할 논리도 제가 만들어야 합니다. 그 논리의 타당성을 높이기 위해 몇 가지 방법을 사용합니다.
 
첫째, 먼저 언급했듯 당사자와 충분히 소통해야 합니다. 올바른 결정을 내리려면 일차적으로 당사자로부터 양과 질 면에서 모두 충분한 정보를 얻어내고, 서로를 이해해야 합니다.
 
둘째, 좋은 결정을 내릴 만한 물리적, 공간적 여유를 가져야 합니다. 바쁘고 지칠 때는 좋은 의사결정을 내릴 수 없습니다. 합의부 재판을 하다 보면 10일 연속 새벽 3시에 집에 들어가는 일도 허다합니다. 여러 재판을 동시에 진행해야 할 때도 많고요. 일이 많으니까 제 딴에는 ‘더 집중해 이걸 빨리 해결해야겠다’고 사건에 매달려보지만, 좋은 생각이 안 떠올라요. 큰 재판, 중요한 의사결정일수록 관례나 선례를 따라가기보다 상상력을 발휘하는 게 중요합니다. 상상력은 여유가 있을 때 생깁니다. 커피 한 잔 들고 법원 마당을 산책하거나, 가까운 대학 캠퍼스를 거닐거나, 책상 위에 다리를 올려놓고 눈을 감는 시간을 자주 가집니다. 집중하는 대신 생각을 비울 때 오히려 문제를 해결할 수 있더군요.
 
셋째, 제가 틀릴 수도 있다는 걸 인정해야 합니다. 지나친 자기 확신은 오히려 편견으로 이어질 때가 많습니다. 인적 네트워크를 통해 다양한 조언을 얻어내는 일도 중요합니다. 정보 혹은 진실을 찾는 과정은 숨은그림찾기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숨은그림찾기를 혼자 하면 편협한 정보를 얻을 가능성이 높고, 문제를 왜곡할 위험에 빠지기도 쉽습니다. 저는 숨은그림찾기의 정답이 코끼리라고 판단했지만, 남들은 코뿔소로 볼 수도 있거든요. 
때문에 복잡한 사안일수록 법조계 동료나 선후배들의 의견을 많이 구합니다. ‘이런 걸 당신한테 물어보지, 누구한테 물어보겠냐. 당신이 이 분야 전문가잖아’ 하면서 물어보면 당사자들이 매우 좋아해요. 제가 그만큼 그 사람을 신뢰하고, 전문성을 인정한다는 뜻이니까요. 그러면 더 성의껏 답변해주고, 좋은 의견을 주려고 노력하더군요. 저 역시 다른 사람이 제 분야에 관해 질문하면 최대한 자세히 알려주려고 애씁니다.
 
저는 어떤 사안의 의견을 구할 때, 주변 사람들로부터 좋은 평판을 받는 사람의 판단력을 매우 신뢰하는 편입니다. 주변 사람들이 좋은 평가를 하는 건 다 그만한 이유가 있기 때문이죠. 좋은 의사결정을 내리려면 주변에 판단력과 평판이 좋은 사람들을 많이 만들어두고 그들의 의견을 구하는 일도 중요합니다.”
 
직급과 의사결정 프로세스 간에 관계가 있을까요?
“1심 판사건 대법관이건, 모든 판사의 의사결정 프로세스는 동일하다고 생각합니다. 직급이 올라갈수록 맡은 사건의 중요도가 달라질 뿐이죠. 낮은 직급의 판사라고 의사결정 프로세스가 간단하고, 높은 직급의 판사라고 과정이 복잡한 건 아닙니다.
다만 판사로 일하는 기간이 늘어나면서 제 스스로 의사결정 프로세스가 개선되고 있음을 느꼈습니다. 판사의 결정이 사회에 반향을 일으킬 수밖에 없는 사건을 맡으면, 제가 어떤 결정을 내리더라도 지지하는 사람과 반대하는 사람들이 생깁니다. 젊었을 때는 통념에 도전하는 결정을 내리고, 그걸 지지해주는 사람이 많으면 안 그러려고 해도 솔직히 기분이 좋았습니다. 그런데 그 후 꼭 제 개인 생활에서 실수를 저지르더군요. 교만했던 거죠.
 
나이가 들수록 판결 후 사회나 여론의 반향에 무덤덤하게 대처할 수 있었습니다. 이유는 간단해요. 의사결정을 내릴 때 가장 고려해야 할 건 사회적 비용도, 남들의 평가도 아닌 오직 사람입니다. 세월이 흐를수록 인간에 대한 이해도가 커지고, 제 스스로 제가 틀릴 수도 있다는 걸 인정할 수 있었거든요. 그러면서 더 좋은 결정을 내리고, 그 후의 결과에도 무심할 수 있었죠.”
 
몇 달 전 판사를 그만두고 변호사가 되셨는데, 가장 달라진 점은 무엇인가요?
자유는 늘고 책임은 줄었습니다. 판사를 할 때는 친구나 친척 등 가까운 사람이라도 쉽게 만날 수 없었습니다. 제 스스로 모든 모임을 피했어요. 그래야만 엄밀한, 공정한 판단을 내릴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죠. 판사는 공정성, 청렴성을 의심받아서는 안 됩니다. 의심을 받는 순간 아무리 좋은 결정을 내리더라도 그 결정의 의미가 퇴색합니다.
 
변호사가 된 후 친한 친구가 저녁을 먹자고 하더군요. 제 첫마디가 ‘누구랑 같이 있는데’였습니다. 판사 시절 습관 때문이죠. 친구가 웃으면서 ‘변호사는 아무나 만나도 되잖아. 빨리 나와’ 하더군요. 그때 판사와 변호사의 차이를 절실히 느꼈습니다.
 
민사 재판과 달리 형사 재판은 제가 내리는 결정이 그 즉시 타인의 신체적 자유를 빼앗을 수 있습니다. 때문에 절대 실수하면 안 된다는 부담이 컸죠. 어떤 사람의 신체적 자유를 빼앗을 수도 있다는 사실, 그 모습을 직접 봐야 한다는 사실이 저를 힘들게 할 때가 많았거든요. 그런 무거운 권한과 책임에서 벗어나 홀가분합니다.”
 
민병훈 변호사는 서울대 공법학과를 졸업하고, 1984년 사시 26회에 합격했다. 사법연수원 교수, 서울고등법원 판사, 수원지방법원 부장판사 등을 거쳐 2006년부터 3년간 서울중앙지방법원 부장판사로 일했다. 지난 3월 민병훈 법률사무소를 개업하며 변호사로 전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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