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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덕한 유방, 7년만에 건달에서 황제로…

김영수 | 36호 (2009년 7월 Issue 1)
최근 우리 사회는 ‘제대로 된 리더 및 리더십의 부재’라는 문제에 직면해 있다. 이 문제의 핵심은 ‘덕(德)’이라는 한 글자로 표현할 수 있다. 필자는 올해 초에도 이 코너에서 리더의 자질로 덕이 중요하다고 언급했다(동아비즈니스리뷰 26호 참조). 그때 덕이란 결코 추상적인 개념이 아니라, ‘각박하지 않음’을 뜻한다고 말했다. 우리 사회의 리더들에게 가장 부족한 자질이 바로 덕이라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서였다.

 

 

‘각박하지 않음’이란, 나와 내 편은 물론 너와 상대편을 받아들일 줄 아는 ‘포용’을 전제로 한다. 특별한 인격상의 하자가 없고 특정 분야에 전문성을 갖춘 능력 있는 인재라면, ‘내 사람’이 아니더라도 과감히 기용해 우대할 줄 알아야 ‘덕이 있는 리더’라는 평가를 들을 수 있다. 이것이 포용의 리더십이다. 포용의 리더십은 이념, 정파, 계층을 초월해 보편적인 가치를 추구하는 차원 높은 인간 행위이며, 지금 우리 사회에 가장 절실한 덕목이기도 하다.
 
역사를 보면 각박하게 행동하고도 성공한 리더는 거의 없다. 반면 포용력을 가진 리더치고 실패한 리더 또한 거의 없다. 아주 단순해 보이는 이치지만 이를 행동으로 실천한 사람은 드문 편이다. 특히 권력을 장악한 다음, 한때 자신에게 반대하거나 맞섰던 정적에게 포용력을 발휘한 리더는 더욱 드물다.
 
바로 이 대목에서 리더의 자질론이 대두된다. 타고난 리더는 없다. 포용력은 리더가 자기 수양을 통해 기를 수 있는 후천적 자질이다. 역사상 성공한 리더로 꼽히는 두 사람의 사례를 통해 포용력이 리더에게 얼마나 중요한지 살펴보자.
 
한 고조의 논공행상
주색을 밝히며 건달 생활을 하다 얼떨결에 농민 봉기군의 우두머리가 되고, 그 후 불과 7년 만에 황제가 된 인물이 있다. 바로 한나라를 개국한 고조(高祖) 유방(劉邦)이다. 그는 역사상 리더들에게 가장 많은 영감을 준 인물로도 유명하다. ‘날건달’이 어떤 과정을 밟아 황제가 됐는지에 대한 연구는 2000년이 지난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유방은 5년에 걸친 항우(項羽)와의 초한쟁패에서 승리해 천하를 재통일했다. 그리고 자신을 보좌했던 공신들을 대상으로 논공행상을 하려 했으나, 뜻하지 않은 암초에 부딪혔다. 공신들이 저마다 자신의 공을 내세우며 자기가 더 높은 상을 받아야 한다고 아우성을 쳤기 때문이다. 그 바람에 유방은 1년이 지나도록 논공행상을 하지 못했다. 유방에게 소극적으로 협조했거나, 한때 그를 반대하거나 배신한 경력을 가진 자들은 행여 보복을 당하지 않을까 안절부절못했다. “차라리 반역을 일으키는 쪽이 낫겠다”는 이야기까지 나올 정도였다.
 
유방도 이런 분위기를 감지하고는 해결책 마련에 부심했다. 마침내 옹치(雍齒)에게 상을 내려 이 상황을 수습하기로 했다. 유방은 옹치를 불러 식읍(食邑) 2500호와 십방후(什方侯)라는 작위를 내렸다. 그러자 흉흉하던 분위기가 순식간에 잠잠해졌고, 저마다 기분이 좋아져 잔치 분위기가 됐다.
 
옹치는 유방과 같은 고향인 패현의 유지였다. 유방은 봉기 후 옹치에게 풍 지방을 지키게 했다. 그러나 옹치는 주시(周市)의 사주를 받아 유방을 배신하고 위나라에 투항한 뒤 유방을 괴롭혔다. 그러다 항우와의 초한쟁패 때 다시 유방에게 돌아왔다.
 
유방은 자신이 어려울 때 배신한 옹치에게 늘 섭섭한 마음을 갖고 있었다. 이 때문에 논공행상이 시작되자 주위의 관심은 온통 유방이 옹치를 어떻게 처리할지에 쏠렸다. 그런데 오히려 옹치에게 상을 내리자 다른 사람들은 ‘걱정할 게 없다’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유방은 중요한 시기에 자신을 배반하고 괴롭혔던 옹치에게 벌이 아닌 상을 내림으로써 논공행상을 둘러싼 흉흉한 분위기를 일거에 잠재우고, 정권 초기의 불안한 민심을 안정시켰다.
 
원수를 포용한 진 문공
춘추시대 초기 진(晉)나라 왕이었던 문공(文公) 중이(重耳)는 아버지인 헌공이 젊은 후궁에게 홀려 태자를 비롯한 아들들을 죽이려 하자 망명길에 올랐다. 그리고 무려 19년 동안 여러 나라를 전전한 끝에 61세의 나이로 최고 리더 자리에 올랐다. 그는 이 과정에서 아버지가 보낸 자객에게 몇 번이나 암살당할 위기에 처했고, 굶어 죽을 뻔한 고비도 여러 차례 겪었다. 하지만 남다른 인품과 포용력, 낙관적 리더십으로 위기를 헤쳐 나갔다.
 
그렇다고 해도 정권 초기의 불안한 정세를 피할 수는 없었다. 특히 위기감을 느낀 과거 정권의 지지 세력이 문제였다. 이들은 당연히 자신들에게 보복이 돌아올 것을 걱정했다. 그들의 우려는 곧 궁전에 불을 질러 중이를 태워 죽이자는 음모로 이어졌다. 이때 마침 중이를 두 차례나 죽이려 했던 사인피(寺人披)가 음모에 대한 정보를 듣고는 중이에게 접견을 요청했다. 그러나 중이는 그의 요청을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대신 자신을 두 번이나 죽이려 한 사실에 대해 강하게 질책했다. 사인피는 굴하지 않고 어쩔 수 없었던 자신의 입장을 피력했다.
 
“저는 과거에 당시 국왕의 명령을 받들어 대왕을 해치려 했습니다. 정말 어쩔 수 없었습니다. 지금 대왕께서는 과거의 원한 때문에 저를 만나고자 하시지 않습니다. 그건 괜찮습니다. 그러나 이로 인해 다시 재난이 몰려오지 않을까 두렵습니다. 그렇게 되면 저처럼 대왕에게 일찍이 죄를 지은 사람들은 대왕을 위해 충성을 다하려 하지 않을 것입니다.”

중이는 그 말에 태도를 바꿔 사인피를 만났다. 모반을 보고받은 중이는 치밀한 준비로 반란 세력들을 일거에 섬멸함으로써 정권을 안정시켰다. 반란을 평정한 다음 그는 즉각 민심을 안정시키는 조치를 취했다. 그리고 반란 주동 세력이 이미 섬멸된 만큼 나머지 추종 세력에 대해서는 죄를 묻지 않는다고 선포했다.
 
그럼에도 과거 정권의 대신들은 그의 말을 믿지 않았다. 민심은 여전히 불안할 수밖에 없었다. 중이가 이 일로 노심초사 걱정을 하고 있을 때였다. 수년 전 망명 시절에 그의 행장을 가지고 도망쳤던 집사 두수(頭須)가 갑자기 나타나 배알을 요청했다. 중이는 두수를 만나기는 했으나 성질을 이기지 못하고 마구 욕을 퍼부었다. 그의 배신 때문에 사방으로 돌아다니며 구걸을 하던 옛날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두수는 예상과 달리 정색을 하며 말했다.
 
“저는 지금 대왕을 반드시 만나야 할 때라서 왔습니다. 사방에서 유언비어가 난무하고 있습니다. 대왕께서는 대왕께 죄를 지은 사람들을 용서해주겠다고 말했으나, 그 말을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만약 대왕께서 저에게 어가(御駕)를 몰게 하신다면, 저는 직접 시내에 나가 어가 위에 앉아 몇 바퀴를 돌겠습니다. 사람들은 저처럼 대왕을 배신한 사람도 용서를 받는다는 사실을 알 것입니다. 그러면 자신이 용서받지 못할 것이라고 걱정하는 사람은 아마 없을 것입니다.”
 
중이는 두수의 말이 그럴듯하다고 생각해 즉각 그의 말대로 했다. 과연 유언비어는 언제 그랬냐는 듯 바로 꼬리를 감췄고, 민심은 곧 안정됐다.
 
예로부터 ‘아량’과 ‘포용력’은 리더를 평가하는 중요한 기준이었다. 역사는 포용력을 갖춘 리더가 성공했다는 평범한 사실을 잘 보여준다. 동시에 각박한 리더는 성공할 수 없다는 사실도 함께 알려준다.
 
필자는 고대 한·중 관계사를 전공하고 한국정신문화연구원(현 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 석·박사 과정을 수료했다. 20년 동안 사마천의 <사기>에 대해 연구해오고 있으며, 2002년 외국인 최초로 중국 사마천학회의 정식 회원이 됐다. 저서로 <난세에 답하다> <사기의 인간경영법> <역사의 등불 사마천, 피로 쓴 사기>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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