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여를 멸망시킨 도전정신

30호 (2009년 4월 Issue 1)

주몽과 대소
기원전 1세기, 지금의 중국 창춘(長春)과 눙안(農安) 일대에 흰옷을 입고 밤이 되면 거리마다 어깨동무하고 노래 부르는 사람들로 가득한 나라가 있었다. 바로 부여다.
 
풍요하고 강력했던 부여는 오랫동안 평화롭게 살았다. 주변에는 감히 부여를 건드리는 나라가 없었다. 부여도 정복을 원하지 않았다. 현실에 만족하고 그저 평화롭게 살다 보니 부여는 안일해졌다. 중국 한나라가 제국의 확장을 추구했고, 만주에 흩어져 살던 여러 부족들이 자신들의 존재를 자각하며 변화를 모색하고 있을 때에도 부여는 변화를 거부하며 전통적인 사회 체제를 고집했다.
 
부여는 독립된 단위 부족의 세력이 강하다는 약점이 있었다. 부족의 독립성은 강한 적이 공격해오거나, 자신들이 강해지기 위해 정복 전쟁을 펼칠 때 방해가 된다. 당시 부여에도 왕이 있기는 했다. 하지만 부족들을 통제하고 호령할 강력한 권한은 없었다.
 
다행히 권력의 중심부에서 상황을 자각하는 인물이 나타났다. 금와왕의 첫째 아들 대소였다. 대소는 야심가였다. 국왕의 권력을 확대하고 소극적인 부여를 정복 왕조로 바꾸겠다는 욕망을 갖고 있었다. 그런 그에게 눈에 걸리는 인물이 있었으니, 바로 주몽이다. 대소의 표현을 빌면 ‘사람의 소생이 아니며(주몽은 알에서 태어났다는 전설이 있다), 용맹스러워 미리 제거하지 않으면 후환이 두려운’ 인물이었다.
 
대소의 음모를 알아챈 주몽은 부여를 탈출해 지금의 환인 지방에 나라를 세움으로써 고구려의 시조가 된다. 그때 주몽의 나이 22세였다. 안타깝게도 주몽은 40세라는 한창 나이에 사망하고, 아들 유리가 뒤를 이어 왕이 된다. 처음 환인으로 이주할 때 주몽 집단의 규모는 알 수 없지만, 오늘날 군 정도의 땅을 지배하기도 벅찰 정도로 매우 작았다. 그러나 주몽과 유리의 시대에 고구려는 빠르게 성장해 상당히 넓은 지역을 지배하게 된다.
 
대소의 고구려 침공
주몽과 달리 대소는 매우 오래 살았다. 고구려의 성장을 본 대소는 위협을 느끼는 동시에 자신의 야심도 실현할 때가 왔음을 깨달았던 것 같다. 유리왕 14년(기원전 6년) 11월, 대소는 5만 명의 병력으로 고구려를 침공한다. 이 시기에 5만 명은 결코 적은 숫자가 아니다. 고구려가 강력한 정복 국가로 거듭나는 광개토대왕에서 장수왕대나 삼국 항쟁의 절정기에도 5만 군사의 동원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이었다. 아직 부족 연맹에 불과했던 부여에서 5만 대군을 동원했다는 것은 대소의 정치적 야심과 능력을 보여준다. 그러나 갑자기 동장군이 덮쳐 부여군에 동사자가 속출했고, 대소는 할 수 없이 철군하고 만다.
 
놀란 고구려는 수도를 남쪽으로 200여km 내려간 국내성(集安·현재 중국 지린 성의 한 도시)으로 옮겼다. 유리왕은 계속되는 대소의 협박에 전전긍긍했지만, 부여도 이때의 원정에서 손실이 컸는지 다시 고구려 정복에 나서는 데는 20년이 걸렸다.
 
서기 13년 11월, 대소의 부여군은 다시 고구려를 침공해 국내성을 40km 앞에 둔 학반령까지 순조롭게 진군한다. 이 고개만 넘으면 국내성까지는 방어선을 칠 곳이 없는 탄탄대로다. 그러나 이 마지막 고개에서 부여군은 어처구니없게도 고구려군에게 기습 공격을 당한다. 유리왕의 아들 무휼(대무신왕)이 지휘했다는 고구려군은 고개를 내리달아 부여군을 급습했다. 골짜기 사이로 난 협로를 따라 일자로 길게 늘어섰던 부여군은 도미노 게임에서 블록이 넘어지듯 차례로 격파되며 붕괴되고 말았다.
 
대무신왕의 과감한 반격
서기 18년, 무휼이 즉위해 대무신왕이 된다. 21년, 이번에는 대무신왕이 고구려군을 이끌고 부여 정복에 나섰다. 부여 왕은 여전히 대소였다. 그는 전국에 동원령을 내려 병력을 있는 대로 끌어모았다. 22년 2월, 양국의 군대는 부여의 남쪽 벌판에서 대치했다.
 
역사적인 결전이 벌어졌다. 공격과 수비의 상대도 바뀌어 있었지만, 전투의 양상도 이전과는 달랐다. 일반적으로 공격군은 수비군보다 많아야 한다는 정설을 깨고, 고구려는 터무니없이 적은 병력으로 부여를 침공했다. 부여군은 공격해 들어온 고구려군을 몇 배나 되는 병력으로 포위했는데, 고구려군은 소수의 군대가 행하는 또 하나의 상식을 깨고 험한 산지나 요새가 아닌 평지에 진을 벌였다.
 
모든 장점을 손에 쥔 대소는 기병을 전부 동원해 일거에 고구려군을 급습했다. 그런데 이미 초봄이 시작된 만주 평원은 땅이 녹아 진창으로 변해 있었다. 진창에 빠진 말들은 움직임이 현저히 느려졌고, 공격 부대들 간에 진군 속도가 맞지 않아 전선이 엉클어져버렸다. 이것이 고구려군의 노림수였다. 고구려는 이 틈을 놓치지 않고 최강의 장수와 최정예 부대를 출격시켜 대소의 본진을 공격했다. 대소의 진은 고구려 정예 부대의 공격을 감당하지 못했다. 부여군을 돌파한, 키가 크고 피부가 눈처럼 희었다는 이국적 용모의 장수 괴유는 대소를 붙잡아 목을 베었다. 대소의 걱정대로, 주몽은 아니었지만 주몽의 손자가 그를 죽였다. 대소가 죽은 후 부여는 급속히 와해된다.
대소와 주몽, 대무신왕의 차이
대군을 동원했고 치명적인 패배를 당한 후에도 지배권을 잃지 않았던 것을 보면, 대소는 흉년이 들기만 해도 부족장들에게 쫓겨났다는 이전의 부여 왕들과는 달랐다. 그는 부여 역사에서 강력하고 남다른 개성을 지닌 왕이자, 영리하고 뛰어난 정치가요, 탁월한 추진력을 보인 행정가였음이 분명하다.
 
하지만 전술가로서의 그는 치명적인 약점을 갖고 있었다. 대소는 3번의 전쟁에서 병력 우위에 집착하는 경향을 보였다. 병력의 우위는 전쟁에서 중요한 장점이기는 하지만 승패에 절대적인 영향을 끼치는 요인은 아니다. 그리고 단점도 있다. 병력이 과도하면 막대한 군수물자가 필요하고, 훈련이 부족해지며, 전술 운영 능력이 떨어질 수 있다. 첫 번째 침공에서 부여군이 패배한 이유는 이상 기후 때문이기도 했지만, 과도한 병력으로 군수와 보급이 불충분하고 훈련이 부족했기 때문일 가능성도 높다.
 
두 번째 패전에서도 여러 가지 엉성한 모습이 보였다. 마지막 고비에서 고구려군의 기습을 허용한 게 문제였다. 또 전위(前衛)가 무너지고 길게 늘어선 병력 때문에 정체 현상이 발생하자, 놀란 부여군은 사방으로 흩어져 도주해 궤멸됐다. 이것도 훈련과 전술 운영 능력이 부족한 군대의 전형적 모습이다.
 
반면 대무신왕은 대소와 정반대 전략을 보여줬다. 대소의 성향을 알아챈 고구려군은 평원이 진창으로 변하는 2월에 침공을 개시해 부여군을 함정에 몰아넣었다. 그런데 2월은 농사를 시작하는 시기다. 한나라 같은 부유한 강대국은 농사철에 구애를 받지 않았지만, 대부분의 국가들은 농한기에 대규모 전쟁을 벌였다. 농사철에는 군인들이 생업에 복귀해야 하므로 보급과 인력 동원에 어려움이 크기 때문이다.
 
가뜩이나 부여보다 작고 가난한 나라인 고구려가 농사철에 공격을 감행하려면 동원할 수 있는 병력은 더욱 적어진다. 그러나 대무신왕은 병력의 숫자에 구애받지 않고 대담하게 소수의 병력으로 승부를 걸었다.
 
평범한 리더들은 일단 자신이 유리하다고 생각하면 안전하게 승리를 얻으려 한다. 그들의 전략은 승리가 아니라 패배하지 않는 쪽으로 집중된다. 상황이 조금 나빠지면 다른 사람들이 이미 지나간 길, 안전하고 검증된 길로만 다니려고 한다. 그러면 상대는 그들의 행동을 예측하게 되고, 주몽이나 대무신왕 같은 용기 있는 승부사들은 그 약점을 파고들어 승리를 쟁취한다.
 
다소 호전적이고 전투적으로 보이더라도 리더에게 모험심과 도전 정신이 필요한 이유는 이 때문이다. 이런 리더를 양성하려면 작은 실패에 개의치 않고 새로운 도전에 나설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줘야 한다. 절대 침몰하지 않는 항모처럼 보이는 거대 기업이나 너무 안정적으로 보이던 기업일수록 순식간에 다가오는 위기에 취약하다. 너무 꽉 짜이고 합리적인 관리 원칙이 평소에는 위력을 발휘하지만, 환경이 급격히 변화할 때는 조직 전체를 위기에 빠뜨리는 함정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주몽과 대무신왕의 성공 및 대소의 실패가 역사의 산 증거다.
 
편집자주 전쟁은 역사가 만들어낸 비극입니다. 그러나 전쟁은 인간의 극한 능력과 지혜를 시험하며 조직과 기술 발전을 가져온 원동력이기도 합니다. 전쟁과 한국사를 연구해온 임용한 박사가 전쟁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교훈을 시리즈로 연재합니다. 이 코너를 통해 리더십과 조직 운영, 인사 관리, 전략 등과 관련한 생생한 역사의 지혜를 만나기 바랍니다.
 
필자는 연세대 사학과를 졸업하고 경희대에서 한국사 전공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조선국왕 이야기> <전쟁과 역사> <조선전기 관리등용제도 연구> <조선전기 수령제와 지방통치> 등 다수의 책과 논문을 저술했다.
동아비즈니스리뷰 289호 Boosting Creativity 2020년 1월 Issue 2 목차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