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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종은 단종과 강빈 등 억울하게 희생됐거나 위상이 크게 훼손된 인물들의 명예를 회복하며 조선 왕실에 남아 있던 오랜 상처를 치유하고자 했다. 이는 포용과 통합의 메시지를 전하는 동시에 왕권의 도덕적 정당성을 강화하는 효과를 가져왔다. 그러나 한계도 분명했다. 신원의 대상은 일부 인물에 국한됐고 과거의 잘못된 의사결정이 왜 발생했는지를 성찰하거나 같은 비극이 반복되지 않도록 제도를 보완하는 단계까지는 나아가지 못했다. 오늘날 조직에도 같은 교훈이 적용된다. 억울함을 바로잡는 일은 명예 회복을 선언하는 것만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사실관계를 명확히 규명하고 문제를 낳은 구조와 제도를 함께 개선할 때 비로소 조직은 회복적 정의에 대한 구성원의 신뢰를 얻을 수 있다.
얼마 전 영화 ‘왕과 사는 남자’가 엄청난 흥행을 기록하며 세간의 화제가 되면서 비극적인 최후를 맞은 단종(端宗, 재위 1452~1455)에 대한 관심도 쏟아졌다. 569년 만에 온 국민이 단종의 장례를 치른 것 같다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그런데 이보다 앞서 단종의 한을 위로해 준 사람이 있었다. 조선의 19대 국왕 숙종(肅宗, 재위 1674~1720)이다. 숙종은 1681년(숙종 7년) 노산군(魯山君)을 노산대군(魯山大君)으로 높인 데 이어 1698년(숙종 24년) 10월 24일, 노산대군의 왕호를 회복하고 묘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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를 단종, 무덤을 장릉(莊陵)으로 부르게 했다. 노산군 부인 송씨도 ‘정순왕후(定順王后)’로 복위시켰다. 백성들이 단종이 폐위당해 죽임을 당한 일을 여전히 슬퍼하고 원통해한다는 이유에서였다.
숙종의 신원 작업은 단종에만 머무르지 않았다. 그는 1차 왕자의 난 때 태종에게 죽임을 당한 소도군(昭悼君, 당시 세자) 이방석과 무안군(撫安君) 이방번을 각각 의안대군(宜安大君)과 무안대군(撫安大君)으로 격을 높여 추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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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일하게 묘호를 받지 못한 상태로 삼백 년 가까이 지난 2대 국왕 공정왕(恭靖王)에게는 ‘정종(定宗)’이란 묘호를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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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뿐만이 아니다. 임영대군의 아들로 세조 때 영의정을 지냈으나 ‘남이의 옥사’에 연루돼 실각한 귀성군(龜城君) 이준(李浚)을 신원하고 관직을 회복시켜 줬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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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종의 맏아들로 폐세자가 된 양녕대군(讓寧大君)의 사당을 세우고 묘의 이름을 지어주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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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종이 훗날 인조에 의해 사사된 강빈(姜嬪)을 복권했던 일도 주목할 만하다. 인조의 맏아들 소현세자의 빈이었던 강빈은 인조를 저주하고 독살하려 했다는 죄로 죽임을 당했다. 인조는 대다수 신하가 강하게 만류했음에도 불구하고 “지금껏 그 흉악함이 이 역적처럼 극심한 자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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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며 강빈의 친정까지 멸문시켰다. 문제는 인조가 내세운 증거가 부족하고 그나마 일방적인 추측으로 가득했다는 점이다. 그로 인해 논란이 계속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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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빈은 많은 사람으로부터 동정받고 있었다. 숙종은 “강빈의 옥사에 대해 마음속으로 슬퍼해 온 지가 오래됐다. (…) 그 원통함을 알고도 억울함을 씻어주지 않는다면 이것이 옳은 일이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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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며 강빈을 복권하고 ‘민회(愍懷)’라는 시호를 내렸다. 백성들이 그가 지위를 잃고 죽은 것을 슬퍼하고 가슴 아파했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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