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제조업은 커다란 전환기를 맞고 있다. 지난 20년간 중소 제조업체 수가 절반으로 줄고 후계자 부재로 폐업 위기에 처한 곳이 60만~70만 개사에 이른다. 전통 제조업이 쇠퇴하고 디지털 전환의 압력이 밀려오는 가운데 일본에서는 새로운 길을 모색하는 움직임이 나타나고 있다. 2000여 개의 마을 공장이 모인 도쿄 스미다구에 위치한 하마노제작소는 단순 하청 공장을 탈피해 기획·설계·개발·테스트까지 아우르는 ‘창조형 제조 기업’으로 변모했다. 특히 지역 내 소규모 공장들과 네트워크를 구축해 공동 창조(Co-creation) 모델을 발전시키며 제조업을 ‘중소 창조업’으로 탈바꿈시키고 있다. 한편 일본 전역에서는 230여 개 기업이 참여한 디지털 전환(DX) 컨소시엄 ‘IVI(Industrial Value Chain Initiative)’를 통해 개별 제조 기업이 독자적으로 감당하기 어려운 디지털화 과제를 산업 단위의 연합체로 풀어내고 있다. 두 사례는 일본 제조업의 미래 전략이 단순 효율 개선이 아닌 ‘제조의 서비스화’와 ‘연결과 협력을 통한 새로운 가치 창출’에 있음을 보여준다.
편집자주 | 이 기사의 취재와 자문에 윤태성 KAIST 기술경영전문대학원 교수가 참여했습니다. 일본 도쿄 스미다구에 들어섰을 때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건 촘촘히 들어선 작은 공장들이었다. 이곳은 ‘도쿄의 공장지대’라 불릴 만큼 산업이 집약된 지역으로 공장 수만 해도 도쿄 23구 가운데 두 번째로 많다. 스미다구에는 2000개가 넘는 마을 공장이 서로 연결된 것처럼 공존하고 금속·종이·철강 등 업종의 스펙트럼도 다양하다.
이 지역은 예로부터 물건을 만드는 마을로 알려져 있으며 일본 장인 정신의 발전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에도 시대(1603~1868)에 스미다강을 통해 기와, 목재, 염료 등의 원자재가 운송되면서 강을 따라 지역 산업이 발달했다. 자연스레 풍부한 장인 문화가 꽃피웠고 메이지 시대(1868~1912)가 시작되면서 금속 가공, 유리 제조부터 섬유 및 가죽 제품 제조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공장이 생겨났다. 지금도 스미다 지역에는 많은 장인이 전통 기술을 계승하며 활약하고 있다. “이 동네에서는 아이디어만 있으면 뭐든 다 만들 수 있다”는 말이 있을 정도다.
일본 굴지의 적지 않은 대기업들도 이 지역에서 시작됐다. 세이코 시계, 시세이도 화장품, 아사히 맥주, 라이온 생활용품 등 일본을 대표하는 브랜드들이 스미다구에서 첫발을 내디뎠다. 작은 상점과 공장에서 출발해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한 이들의 역사는 ‘근대 경공업의 발상지’라는 스미다구의 또 다른 얼굴을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