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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털 전환기 기업 경영의 진화

공학 몰라도 리더 되는 비결은 흡수 역량

김은환,정리=최호진 | 401호 (2024년 9월 Issue 2)
Article at a Glance

기술 변화로 시장과 산업이 예측 불가능하게 변하는 현실에서는 ‘동적 역량’이 요구된다. 동적 역량이란 기존의 기술-전략 복합체를 하나의 레고 블록 조립체로 보고 다양한 신기술을 새로운 블록으로서 재조립, 재구성하는 힘이다. 이런 동적 역량을 구사하기 위해서는 낯선 기술을 빠르게 학습할 뿐만 아니라 그 핵심을 파악하고 전략이나 업무의 맥락에서 활용할 수 있는 역량인 ‘흡수 역량’이 필요하다. 우주과학도, 로켓도 전공하지 않았지만 재사용 로켓 발사를 시도한 일론 머스크가 흡수 역량을 발휘한 좋은 예다. 그는 로켓 기술에 관한 모든 세부 사항과 관련 원리를 통달하진 못하지만 자신만의 문제 의식과 프레임으로 꼭 필요한 사업 아이템을 식별하고 자기 것으로 만들었다. 이런 흡수 역량을 가진 전략가는 낯선 기술 분야에 진입해도 길을 잃지 않고 자신의 목적을 성공적으로 추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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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화의 시대, 기술의 상호보완성 파악해야

경영 환경은 항상 변화해왔다. 그러나 변화에는 시간이 필요했고 어떤 환경은 생각보다 더욱 천천히 변했다. 기술은 가격이나 생산량, 경기 변동에 비해서는 느리게 변하는 것이었고 매년 경영 전략을 수립할 때 일일이 기술 변화를 체크할 필요는 없었다. 그러나 정보화와 디지털화가 진전되면서 상황이 달라지고 있다. 작년에 불가능했던 것이 올해 가능하고 내년에는 또 어떤 일이 벌어질지 그 분야의 전문가조차 단언하지 못한다. 클라우드, 블록체인, 초거대 언어모델(LLM) 등은 문자 그대로 느닷없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제 기업의 전략적 대응은 과거의 프레임에서 벗어나야 한다. 경영학과 경제학은 단기 분석에서 기술을 항상 상수로 간주했고 기술 변화는 장기 분석에서만 고려했다. 이런 장단기 구분은 이제 유용하지 않을뿐더러 때론 오판을 유도할 수도 있다. 투자 결정 시 사용되는 현금흐름 분석은 5~10년간의 영업 활동을 예측하며 이 기간 동안 기술이 고정돼 있다고 가정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이제는 이런 가정이 성립하지 않는다.

UC버클리대 경영학 교수 데이비드 티스는 기술 세계에서 모든 것이 정확하다거나 단 하나의 최적 기술이 지배한다는 생각에 동의하지 않는다. 그는 다양한 기술 간의 상호보완성이 존재한다고 주장한다.1 서로 다른 두 종류의 기술이 만났을 때 전혀 예상하지 못한 효과가 빚어진다는 것이다. 증기기관을 생각해보자. 증기기관은 수증기를 방출하는 방식으로 동력을 일으켰고 이를 통해서는 수직 방향의 왕복 운동만 가능했다. 상당 기간 증기기관은 탄광에서 물을 퍼내는 펌프로 사용됐다. 수직 왕복 운동을 원운동으로 전환해주는 기어 장치가 부착된 뒤에야 증기기관은 공장의 기계를 돌리는 에너지원이 될 수 있었다. 이 기어 장치의 아이디어는 고대부터 있었지만 증기기관을 만나면서 산업혁명의 원동력이 된 것이다.2

상호보완성으로 예상치 못한 시너지가 창출된 또 다른 사례로는 월마트가 있다. 전자상거래 시대가 오면서 많은 오프라인 유통 기업이 사라졌지만 월마트는 여전히 아마존에 밀리지 않는 경쟁력과 존재감을 유지하고 있다. 현재 월마트는 오프라인 유통 채널과 IT를 접목해 아마존이 흉내 낼 수 없는 옴니채널의 강점을 발휘하고 있다. 월마트가 이렇게 할 수 있는 이유는 과거부터 ‘Everyday Low Price’ 전략을 위해 디지털 기반의 물류 효율화를 빠르게 추진했기 때문이다. 월마트는 특히 실시간으로 전사의 물동량을 파악하는 관리 시스템을 구축했다. 이렇게 디지털화된 매장은 오늘날 큰 어려움 없이 창고형 지역 배송센터로 변모했다.3 월마트는 오프라인 시대에 추진한 디지털 기술이 온라인 시대의 고도화된 옴니채널 기술과 상승 작용을 일으킨 대표 사례다.

물론 기술이 연결될 때 무조건 시너지가 나는 건 아니다. 상호 배척하는 경우도 있다. 특정 기술이 성숙할 경우 유망한 신기술이 호환성이나 인프라 문제로 거부되는 것이 대표적인 예다. 삼성전자가 파운드리 분야에서 TSMC를 따라잡지 못하는 이유 중 하나로 메모리와 파운드리 간의 역시너지를 거론하는 의견이 있다. 메모리 기술에 정통한 기업이 파운드리 사업에 적응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다는 것이다. 또한 챗GPT로 대표되는 LLM 분야에서 구글이 마이크로소프트에 뒤처지는 현상도 역시너지가 원인으로 간주된다. 인공지능(AI)에 일찍부터 관심을 기울였고 우수 인력과 자금을 지속적으로 투입하던 구글은 왜 선수를 놓쳤을까. 단순히 기술 역량의 차이 탓이 아니다.

LLM을 활용하면 문장형 검색이 가능해 구글의 키워드 검색보다 질적으로 우수하다는 데는 이견이 없다. 하지만 구글의 키워드 검색은 관련 사이트를 노출해 광고비를 책정하기가 쉽고 투명하다. 구글은 오랫동안 검색 내용의 관련성과 광고비 책정 간의 긴장과 균형을 유지하는 정교한 알고리즘을 개발해왔다. 이 알고리즘 덕에 구글은 검색자에게 유의미한 정보를 제공하는 동시에 광고주로부터 적정한 수익을 올릴 수 있었다. 이에 반해 문장형 검색은 광고와의 연계가 까다롭다. 다양한 정보를 가공해 답변하기 때문에 광고주들은 자사 사이트 노출이 불투명해진다며 불만의 목소리를 높인다. 물론 논문의 참고 문헌처럼 답변 뒤에 관련 사이트들을 열거할 수도 있지만 이는 지적재산권 문제라는 뇌관을 건드릴 수 있다. 이런 맥락에서 구글의 검색 기술은 LLM과 상충한다. 엄청난 문샷 프로젝트를 다수 시도하는 구글도 결국 수익원을 따져보면 검색엔진에 결부된 광고 사업이 가장 중요하다. 오픈AI를 탑재한 검색엔진 빙과의 진검승부를 위해 구글도 LLM을 선보이고 있지만 이런 노력들은 기존의 효자 사업인 구글 검색과 카니벌라이제이션(자기잠식) 문제를 야기한다. 검색 기술과 AI 기술 간의 부정적 상호작용이 일어나는 셈이다.

월마트의 초기 디지털화는 옴니채널 전략의 도약대가 된 반면 구글의 검색엔진은 파열음을 내고 있는 대조적 결과는 모두 기술의 특성으로부터 기인한다. 마치 사람 사이의 궁합이 있듯이 기술 간에도 궁합이 있는 것이다. 이것이 문제를 복잡하게 만든다. 티스 교수의 이론이 등장하기 전 주류 전략 이론은 모든 기술을 투입구에 생산 요소를 넣으면 배출구에서 제품이 튀어나오는 블랙박스로 간주했다. 블랙박스 내부는 엔지니어에게 일임하고 경영자는 오직 투입-산출 관계만 알면 됐다. 즉, 기술 채택은 엔지니어들이 공학적 근거, 즉 가능한 최소 투입으로 최대 산출을 올리는 조건에 따라 이뤄졌다. 시장 상황을 고려할 필요가 없었으며 엔지니어들은 경영·경제 환경을 몰라도 됐다. 반면 경영자는 엔지니어가 제시한 대안 중 가격, 시장, 경쟁 상황 등을 고려해 적합한 기술을 채택했다. 즉, 문과와 이과 사이의 엄격한 역할 분담이 가능했다. 그러나 티스 교수의 주장처럼 기술 간의 상호보완성이 존재한다면 기술 채택은 투입-산출 계수만으로 판단할 수 없다. 기술 간 상호보완성이 이런 깔끔한 업무 분장의 경계선을 깨뜨리면서 이제 기술을 도외시한 경영 전략이란 불가능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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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선 기술의 핵심 파악하는 ‘흡수 역량’

그렇다면 이제 모든 경영자는 공학 전공자여야 할까. 이는 티스 교수의 논점을 오해한 것이다. 공학을 깊이 전공할수록 다룰 수 있는 분야는 좁아진다. 티스 교수가 주장한 동적 역량은 기술과 시장, 산업이 예측 불가능하게 변하는 현실에서 요구된다. 동적 역량이란 기존의 기술-전략 복합체를 하나의 레고 블록 조립체로 보고 다양한 신기술을 새로운 블록으로서 재조립, 재구성하는 힘이다. 그러나 아무리 천재 공학박사라도 공학 기초부터 최첨단 기술 동향까지 모두 파악하는 것은 무리다. 즉, 경영자가 공학을 전공하는 것은 정답이 아니다.

동적 역량을 구사하기 위해 경영자는 ‘딜레탕트(dilettante)’가 돼야 한다. 특정 분야의 지식에 관해서는 항상 문외한과 전문가가 있지만 이 두 양극단 사이에는 넓은 스펙트럼이 존재한다. 양극단의 중간 영역에 바로 딜레탕트가 있다. 딜레탕트라는 말은 아는 체하며 겉멋 부리는 수준에서 아마추어 경지를 넘어선 수준까지 폭넓은 뉘앙스를 갖는다. 지구가 태양으로부터 너무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골디락스 존에 위치하듯이 기술에 대한 경영자의 이해는 문외한보다는 깊이 있고 공학 전공자보다는 얕고 넓은 수준이 가장 적합하다. 이를 잘 표현해주는 개념이 바로 ‘흡수 역량(absorptive capacity)’이다. 흡수 역량이란 낯선 지식을 빠르게 학습할 뿐만 아니라 그 핵심을 파악하고 전략이나 업무의 맥락에서 활용할 수 있는 능력이다.4

흡수 역량을 발휘한 좋은 사례 중 하나는 일론 머스크의 재사용 로켓 개발이다. 그는 뛰어난 혁신가이지만 우주과학도, 로켓도 전공하지 않았다. 다만 어렸을 때부터 아버지의 영향으로 과학 서적과 SF 소설에 큰 관심을 보였다. 어쩌면 이런 비전문성이 NASA가 엄두도 내지 못한 수직 착륙형 재사용 로켓을 구상해내는 데 영향을 줬을지 모른다. NASA가 시도한 우주왕복선은 지구로 돌아올 때 항공기처럼 활주로에 착륙하는 방식으로 단점이 많았다. 발사 장소와 착륙 장소가 멀어져 귀환 비용이 막대했다. 항공기보다 거대한 몸집의 왕복선을 위한 활주로 건설도 대역사였지만 이미 착륙한 왕복선을 다시 발사장으로 운반하는 것도 보통 일이 아니었다. 왕복선 방식의 재사용은 의미 있는 비용 절감 효과를 거두지 못했다.

반면 머스크의 재사용 로켓은 발사 장소로 바로 되돌아오기 때문에 활주로도, 운반도 필요 없다. 엄청난 비용 절감이 가능하며 기존 우주선 1회 발사 비용을 17분의 1로 절감했다고 평가받는다.5  이렇게 좋은 아이디어를 그간 실행하지 못한 이유는 수직 착륙의 기술적 어려움이 그만큼 컸기 때문이다. 아마도 머스크의 비전문성은 이런 무모한 도전에 뛰어드는 데 일조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는 어린 시절 SF 소설에서 받은 영감을 현실에 구현하려는 천진난만함과 무모함을 거침없이 드러낸다. 그 결과 NASA는 절대로 도전할 수 없었을 일을 감행했다.

그렇다면 무지야말로 혁신의 성공 요건일까? 한때 “호박벌은 공기역학적으로 날 수 없는 신체 구조를 가지고 있지만 스스로 그걸 모르기 때문에 날 수 있다”라는 터무니없는 이야기가 자기 계발 서적이나 강의에서 언급된 적이 있다. 머스크를 인간 호박벌로 간주해선 안 된다. 전공자는 아니었지만 머스크는 꾸준히 우주에 대한 비전을 다듬어왔으며 재사용 기술에 대해 상당히 구체적인 아이디어를 구상하고 있었다. 수직 착륙이라는, 누구도 시도하지 않은 방향으로 발걸음을 내디딘 것은 비전문가의 만용일지 몰라도 일단 이 새로운 경로에서 그는 공상과는 차원이 다른 구체적인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일례로 스페이스X의 로켓 실험이 연이어 실패해 궁지에 몰렸을 때 머스크는 낙담하는 엔지니어들을 격려하며 의지를 북돋웠다. 이 과정에서 일반적인 경영자와는 차원이 다른 행동을 보였다. 그는 매번 실패할 때마다 지난 실패에 비해 어떤 부분에서 기술적으로 진전했는지를 정확하게 설명했다고 한다. 이런 행동은 실패에 동요되지 않는 강한 멘탈뿐만 아니라 구체적인 비전과 계획의 존재를 증명한다.

여기서 이상적인 흡수 역량의 조건이 드러난다. 전문가들의 프레임에 갇히지 않을 만큼 자유분방하면서도 해당 분야의 핵심 원리는 꿰뚫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즉, 기술에 관한 모든 세부 사항과 관련 원리에 통달할 필요는 없지만 자신만의 문제 의식과 프레임으로 꼭 필요한 아이템을 식별하고 자기 것으로 만들 수 있어야 한다. 이렇게 흡수 역량을 가진 전략가는 낯선 기술 분야에 진입해도 길을 잃지 않고 자신의 목적을 놓치지 않는다. 해당 분야를 깊이 있게 전체적으로 파악하진 못하지만 자신의 맥락에서 중요한 점을 발견하는 데는 예리하다. 이런 흡수 역량은 티스 교수가 주장한 동적 역량을 가능하게 하는 리더의 핵심 자질이다. 이처럼 기술을 이해하고 전략에 반영할 수 있는 능력은 이제 경영자의 필수 역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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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술을 전략으로 바꾸는 ‘과학적 상상력’

그렇다면 리더는 기술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무엇보다 기술의 본질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기술은 솔루션이 아니라 오히려 새롭고 낯선 문제다. 2차 산업혁명의 트리거가 된 전기 모터가 최초로 등장했을 때 사람들은 발견자인 영국 물리학자 마이클 패러데이에게 이것을 도대체 어디에 쓸 것인지 물었다. PC가 처음 등장했을 때도, LLM이 등장한 지금도 사람과 기업은 비슷한 당혹감을 느낀다. 기술은 해답을 주는 대신 “나를 어디에 쓸 것인지”를 묻는다. 이 질문에 적절한 답변을 내놓는 전략 주체가 주도권을 장악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런 질문에 대한 답변은 의외성을 가질수록 좋다. 전기 모터가 겨우 장난감을 구동할 정도의 힘밖에 없었을 때 아무도 이것이 증기기관을 대체할 동력원이라고 여기지 않았다. 일시적인 과학적 호기심의 대상에서 그칠 것으로 보였다. 이때 스위치를 켜고 끄는 동작을 멀리까지 전송할 수 있다면 정보 전달이 가능하다는 아이디어가 나왔다. 기계를 움직이기엔 터무니없이 작은 힘을 가진 전기였지만 정보를 전달하기엔 충분했다. 전신이라는 통신 혁명은 패러데이도 전혀 예상치 못한 ‘전기로 무엇을 할 수 있을 것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의외의 답변이었다. 컴퓨터와 인터넷이 등장했을 때도 상황은 비슷했다. 기업들은 무엇을 해야 할지 잘 몰랐다. 바코드가 등장하면서 컴퓨터는 재고 관리와 고객 관리를 완전히 새로운 지평으로 올려 놓았다. SNS와 같이 친교와 가벼운 정보를 나누던 인터넷은 비대칭 암호를 통한 보안 기술이 발달하면서 디지털 혁명의 최전선인 전자상거래 플랫폼으로 발전했다.

이 모든 것이 가리키는 의미는 분명하다. 기술이 무언가의 해답이 되려면 보완적인 기술이든 혁신적인 비즈니스 모델이든 전략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런 전략은 기술에 대한 상당 수준의 이해를 요구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기술을 전략으로 바꾸는 역량, 즉 과학에 기반한 상상력이 필요하다. 예를 들어 컴퓨터가 주어졌을 때 최초의 이용자들에게는 그 용도가 수수께끼였다. 컴퓨터로 무엇을 할 것인가라는 수수께끼에 답하려면 상상력이 필요했다. 컴퓨터를 당장 사용하는 데 가장 큰 장벽이 된 건 데이터였다. 방대한 데이터를 입력할 방법을 찾아야 했고, 컴퓨터가 0과 1만을 처리할 수 있다는 제약 조건이 그다음 단계의 상상을 자극했다. 한편 빛을 쏘았을 때 검은색과 흰색의 반사율이 다르다는 점에서 착안해 바코드 스캔 기술이 개발됐고, 빛을 쏘았을 때 전류가 흐르는 반도체의 특성을 활용해 오늘날의 센서가 개발됐다. 바코드와 센서라는 기술이 컴퓨터와 결합하면서 티스 교수가 말한 기술 간의 상호보완성이 증폭했고 컴퓨터는 디지털 문명의 기반이 될 수 있었다.

넷플릭스의 추천 시스템을 장착한 플랫폼 비즈니스 역시 티스 교수가 주장한 동적 역량 모델의 교과서적 사례다. 최신 기술을 습득하고 잠재력을 이해하는 흡수 역량이 발휘됐고, 이 기술에 기존의 비즈니스 모델을 연결하고 나아가 AI 기술을 접목하는 과정에서 기술 간의 상호보완성이 전략적으로 활용됐다. 구체적으로 들여다보면 매장에서 비디오를 대여해주던 블록버스터와 달리 DVD를 우편 배송하던 넷플릭스는 인터넷 스트리밍 기술에서 미래를 발견했다. 당시 스트리밍 기술은 불완전했지만 이 같은 넷플릭스의 전략은 회사의 방향성을 바꿨다. 오프라인 대여 매장 중심이던 블록버스터로서는 기존의 비즈니스 모델을 부정하는 온라인 스트리밍에 대해 내부 저항을 겪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반면 스트리밍 기술을 도입한 넷플릭스는 또 다른 부가 기술을 만나 새로운 핵심 역량을 창출한다. 바로 AI 기술과 접목한 영화 추천 시스템이다. 블록버스터가 지배하는 시장의 틈바구니에서 출발한 넷플릭스는 처음부터 특이한 취향의 이용자들을 대상으로 영업을 전개하면서 이들의 취향에 대한 데이터를 축적하고 마케팅의 일환으로 영화 추천을 시도했다. 스트리밍 기술은 단순히 영화를 편리하게 공급하는 수단을 넘어 고객의 취향 분석 및 예측을 위한 데이터 수집 수단이었다. 넷플릭스는 기술을 요술 램프의 지니처럼 모든 문제를 해결해주는 존재로 바라본 것이 아닌 자사만의 아이디어와 상상력으로 그간 존재하지 않았던 새로운 가치의 수단으로 전용했다. 이것이 블록버스터와 넷플릭스의 운명을 가른 차이다.6

넷플릭스뿐만이 아니다. 과거의 탁월한 경영자들은 모두 강인한 흡수 역량을 보여줬다. 대표적인 사례가 삼성전자의 이건희 회장이다. 메모리 반도체 경쟁에 뛰어든 지 얼마 안 돼 삼성전자는 디램 적층 방식을 선택하는 중대한 기로에 직면한다. 이 회장은 반도체 공학 전문가가 전혀 아니었지만 지속적인 학습과 상상을 통해 분자 단위 미시 세계의 형상을 그린다. 기존의 디램이 일반 주택이라면 주택의 층고를 높여 입체화하는 것이 적층형 디램이다. 이때 결정적인 문제가 전자를 가두는 커패시터7 를 웨이퍼 아래로 파는 벙커 형태로 만들 것인지, 웨이퍼 위로 쌓아 올리는 탑 형태로 만들 것인지였다. 실무자조차 판단이 쉽지 않았을 때 이 회장은 실험적인 기술인 만큼 시행착오가 있을 수 있으며 이 경우 커패시터가 노출돼 있는 구조가 수정하기 쉬울 것이란 이유로 탑 형태인 스택 방식을 지시했다. 이후 이 같은 상상은 적중했다.8

반도체와 관련한 물리·화학 이론을 모두 알고 있는 것이 아니라 생각을 전개하고 과학적 지식을 해석할 수 있는 마인드 모델을 갖추는 것. 이것이 바로 흡수 역량의 전형이다. 오늘날의 경영자는 급속도로 변하는 기술의 급류 한가운데서 자신만의 마인드 모델을 갖추고자 노력해야 한다. 물론 비전문가가 만드는 마인드 모델은 정확할 수 없다. 따라서 꾸준히 과학자들과의 소통을 통해 수정, 보완해나갈 필요가 있다. 2차 세계대전을 승리로 이끈 처칠은 늘 과학자들을 가까이 두고 대화를 나눴다. 그 결과 전차, 레이더 등 신무기 경쟁에서 한발 앞선 결단을 내릴 수 있었다.

뇌과학 이론에 따르면 어린이는 새로운 자극을 수용하기 위해 뇌 회로를 근본적으로 재편하지만 어른은 자극을 가급적 변두리에서 국지적으로 다룬다. 오늘날 탁월한 경영자는 기술 변화를 어린이처럼 받아들여 전략을 근본적으로 재편하는 동적 역량을 가진 이들이다. 기술의 노후화보다 기업에 더욱 치명적인 것은 전략의 노후화다. 역량을 재조립하고 근본적인 전략을 재편하는 동적 역량을 갖춘다면 향후 기술 변화의 급류에서도 경쟁을 지휘할 리더십을 탄탄히 구축하는 데 용이할 것이다.
  • 김은환serikeh@gmail.com

    경영 컨설턴트·전 삼성경제연구소 경영전략실장

    김은환 컨설턴트는 경영과학과 조직이론을 전공한 후 삼성경제연구소(현 삼성글로벌리서치)에서 25년간 근무했다. 근무 중 삼성그룹의 인사, 조직, 전략 분야의 획기적인 프로젝트에 참여했으며 현재 삼성 계열사 전체가 사용하고 있는 조직문화 진단 툴을 설계하기도 했다. 현재는 프리랜서 작가 및 컨설턴트로서 저술 활동과 기업 및 공공 조직의 프로젝트를 수행하고 있다. 2019년에는 저서 『기업 진화의 비밀』로 정진기언론문화상 경제·경영도서 부문 대상을 수상했다. 4차 산업혁명과 디지털 전환이라는 격변기를 맞아 기업과 전략의 변화를 꾸준히 연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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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리=최호진hojin@donga.com

    동아일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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