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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변기의 국가 경영

17세기 조선을 상징하는 ‘2가지 리더십’

김준태 | 374호 (2023년 08월 Issue 1)
Article at a Glance

17세기는 한국사를 대표하는 격변기였다. 혼란과 불확실성이 극도에 다다랐고 대내외적으로 크고 작은 도전이 계속됐다. 국가의 존립 자체가 위태로웠던 시간도 있었다. 하지만 역사적으로 17세기는 크게 관심을 받지 못했다. 어떻게 우리는 17세기를 무난한 시대로 기억하고 있는 것일까? 그것은 왕을 위시한 민관이 합심해 필사적으로 버텨냈기 때문이다. 특히 광해군이나 숙종처럼 갈등과 분열을 조장해 혼란을 야기한 왕도 있었지만 효종이나 현종처럼 화합과 공존의 리더십을 발휘해 나라의 큰 위기를 막은 왕도 있었다.



편집자주

김준태 교수가 조선의 격변기였던 17세기, 조정의 리더십 분석을 통해 현대의 지도자들에게 교훈을 주는 새 코너 ‘격변기의 국가 경영’를 연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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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17세기인가?

조선의 역사에서 17세기는 상대적으로 관심을 받지 못했다. 성군 세종대왕이 등장하고 조선왕조의 기틀이 세워진 15세기, 사화(士禍)가 연이어 벌어지고 임진왜란으로 온 나라가 전란에 휩싸인 16세기, 영조와 정조가 조선의 르네상스를 이끌었던 18세기, 국가가 쇠락해가며 망국으로 이어진 19세기 사이에서 17세기는 평범했던 시대로 기억된다. 사람들이 떠올리는 사건이나 인물이 있다면 병자호란과 장희빈 정도랄까? 그런데 17세기가 정말 무난했을까? 단언컨대 아니다. 17세기는 한국사를 대표하는 격변기였다. 혼란과 불확실성이 극도에 다다랐고, 대내외적으로 크고 작은 도전이 계속됐다. 국가의 존립 자체가 위태로웠던 시간도 있었다.

우선, 당시 조선은 각종 제도와 정책들이 시의성(時宜性)을 상실해가고 있었다. 건국한 지 200년이 흐르고 인구 증가 등 정책 환경이 변화하면서 폐단이 발생하고 시스템도 한계에 봉착한 것이다. 16세기 후반 율곡 이이(1536~1584)가 ‘경장(更張)’을 주장하며 사회 전 분야에 걸친 개혁을 추진하긴 했지만 뜻을 펼치지 못한 채 죽었고, 곧이어 임진왜란이 발발하면서 문제를 해결할 골든타임을 놓치고 말았다.

임진왜란은 경장을 지연시켰을 뿐만 아니라 조선 사회에 엄청난 충격을 줬다. 국토가 황폐해지고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했으며 국가 행정망이 붕괴했다. 특히 경작이 가능한 농경지는 임진왜란 직후 첫 양전(量田)1 이 실시된 1601년 기준, 30만 결로 줄어들었다. 조선 초기 세종 시대의 5분의 1에 불과한 수준이다.2 전후 복구 사업을 진행하고 민생을 안정시키려면 넉넉한 재원이 필요한데 국가 재정 수입이 급감해 버린 것이다. 국정을 정상적으로 운영하기 힘든 상황이었다.

이럴 때 통치자의 리더십이라도 제대로 발휘됐다면 좋았으련만 그러지도 못했다. 1608년 보위에 올라 15년간 조선을 다스린 광해군은 개혁 군주라는 평가와 폭군이라는 평가가 공존하는 인물이지만 최소한 국가 재정에 부담을 주고 백성을 힘들게 했음은 분명하다. 그는 재위 기간 내내 대규모 토목공사를 벌였는데 굳이 필요하지도 않은 인경궁(仁慶宮)3 , 자수궁(慈壽宮), 경덕궁(慶德宮)을 건설하며 재정을 낭비하고 백성에게 불필요한 노역을 부과해 고통을 줬다. 그뿐만이 아니다. 광해군은 어머니를 폐하고 동생을 죽이는 ‘폐모살제(廢母殺弟)’4 의 패륜을 저질렀다. 유교 국가인 조선에서 왕이 나라의 핵심 가치를 무너뜨린 것이다. 이는 ‘인조반정(仁祖反正)’의 주요 명분이 된다.

그러나 인조 정권이 등장한 뒤에도 정국은 안정되지 못했다. 1624년 인조반정의 공신인 이괄이 반란을 일으켰고5 인조 대에만 14차례의 역모가 발생하는 등 정치적 혼란이 계속됐다. 그뿐만이 아니다. 오랑캐라고 무시했던 후금이 조선을 침공한 1627년의 정묘호란(丁卯胡亂), 후금이 국호를 청으로 바꾸고 다시 조선을 침략한 1636년의 병자호란(丙子胡亂)도 조선을 뒤흔들었다. 물론 두 전쟁 모두 2개월 정도밖에 지속되지 않았기 때문에 물적·인적 피해 면에서 7년 전쟁인 임진왜란과 비교할 바가 못 된다. 전투가 벌어진 지역도 의주에서 서울로 이어지는 길목 정도다. 하지만 인조가 삼전도에서 ‘오랑캐의 우두머리’ 청 태종에게 삼배구고두(三拜九叩頭)6 를 올리며 굴욕적으로 항복하면서 조선 사회는 큰 충격을 받았다. 특히 사림(士林)은 문명 질서가 전복되고 왕실과 조정의 권위가 무너진 사건으로 받아들였다. 만약 오늘날 미국이 붕괴하고 적국으로 여겼던 나라가 그 자리를 대체하며, 서울을 무력으로 점령해 정부의 항복을 받았다고 생각해보자. 국가와 국민이 겪게 될 혼란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것이다. 하물며 당시 조선에 명나라가 갖는 의미는 지금보다 훨씬 강력한 것이었다.

그런데 조선의 시련은 이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200~300년에 한 번 올까 말까 하는 대기근이 17세기에만 세 번이나 발생했다. 1626년 병인년과 1627년 정묘년에 ‘병정 대기근’이, 1695년 을해년과 1696년 병자년에 ‘을병 대기근’이 일어났다. 압권은 1670년 경술년에서 1671년 신해년 사이에 벌어진 ‘경신 대기근’이었다. 우리 역사상 최악의 대기근으로 불리는 경신 대기근에는 냉해, 가뭄, 수해, 풍해, 병충해가 동시다발적으로 발발했고 전국적으로 전염병과 우역(牛疫)7 이 창궐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재앙이, 하나만 일어나도 견디기 힘든 재앙이 한꺼번에 몰아닥친 것이다. 이 기간에 무려 전 국민의 4분의 1이 사망했다고 한다. 민생은 파탄에 이르고, 민심이 크게 동요할 수밖에 없었다.

이와 같은 사태가 벌어진 이유는 ‘소빙기(小氷期)’와 관련이 있다. 연구에 따르면 17세기는 소빙기가 절정에 이르렀던 시기로 범지구적으로 자연재해와 기근, 전염병이 만연했다. 평균기온이 낮아지고, 이상저온 현상이 장기간 지속되며, 일기가 불순해지면서 벌어진 현상이다. 이에 따라 농산물 생산이 감소하고 인간과 동물의 면역력도 저하될 수밖에 없었다. 천재지변의 발생 빈도도 크게 높아졌는데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된 천재지변 기사 건수를 보면 유성(流星) 50%, 서리 30%, 때아닌 눈[설(雪)] 45%, 해일 30%, 대풍우 30%, 대설 45%, 먼지8 90%가 17세기에 일어났다. 그야말로 위기가 일상이었던 시대, 당장 내일 어떤 재앙이 펼쳐질지 알 수 없는 시대였던 것이다.

요컨대, 조선의 17세기는 정치, 사회, 경제, 윤리, 국제 질서 등 거의 모든 분야에서 중대한 도전에 직면하고 있었고, 정치가들은 언제 닥칠지 모를 자연 재해·전염병과도 싸워야 했다. 그런데 어떻게 우리는 17세기를 무난한 시대로 기억하고 있는 것일까? 그것은 왕을 위시한 민관이 합심해 필사적으로 버텨냈기 때문이다. 다양한 사상과 이념이 치열하게 경쟁하면서 백성을 위한 대책을 모색했고, 기존의 틀을 과감히 탈피하는 혁신으로 불확실성을 극복했기 때문이다. 그 덕분에 대동법이 태동하는 등 민생 안정을 위한 각종 제도가 구축될 수 있었고, 능동적인 정책 대응도 가능했다. 이러한 17세기 조선이 국제 정세의 변화, 정치적 갈등과 혼란, 기후 위기, 팬데믹 등 비슷한 과제와 마주한 21세기의 대한민국에 시사점을 줄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17세기 조선의 군주 리더십

조선과 같은 전제군주제 국가에서 왕이 어떤 사람이냐는 나라의 운명에 지대한 영향을 준다. 최고 의사결정권자이자 구성원의 생사여탈을 쥐고 있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특히 조선의 17세기를 통치한 광해군(재위 1608~1623), 인조(재위 1623~1649), 효종(재위 1649~1659), 현종(재위 1659~1674), 숙종(재위 1674~1720) 등 다섯 군주의 리더십 특징을 분석해 보면 17세기를 파악하는 길라잡이로 삼을 만하다.

우선, 광해군은 ‘뺄셈의 정치’로 자신의 역량을 스스로 약화했다. 광해군 집권 초기만 해도 조정에는 서인, 북인, 남인의 세 당파가 공존하고 있었다. 남인 이원익이 영의정, 서인 이항복이 좌의정, 북인 기자헌이 좌의정, 남인이지만 북인의 영수 이산해의 사위인 이덕형이 영의정으로 재임한 것을 봐도 알 수 있다. 하지만 광해군은 자신에게 반대하는 신하들을 축출하기 시작했고, 특히 ‘폐모살제’를 거치면서 조정에는 정권 옹위 세력인 북인밖에 남지 않게 됐다. 그 북인조차도 갈라져 일부밖에 생존하지 못했으니9 전체 양반사대부의 6분의 1만 남은 셈이다. 조직이 발전하려면 조직 내 역량이 모두 결집하고 사장되는 인재가 없어야 하는 법인데 국가가 쓸 수 있는 인적 자원의 83%를 배제하고 국가를 경영했으니 국정이 잘 굴러갈 리가 없다.

인조는 ‘중종반정’에 이어 조선에서 두 번째로 벌어진 ‘반정(反正)’, 즉 쿠데타로 집권했다. 인조는 기획 단계부터 주도적으로 반정에 참여한 ‘대주주’였는데 따라서 반정공신의 위세에 눌려 왕으로서 제대로 권한을 발휘하지 못했던 중종과 달리 왕권을 안정적으로 행사할 수 있는 위치였다. 한데 인조는 무책임과 무능으로 일관한다. 먼저 민생 현안이 산재해 있는 상황에서 집권 직후부터 ‘전례(典禮) 논쟁’10 을 일으키며 시간을 낭비하고 조정을 분열시켰다.

또한 정묘호란을 겪었음에도 병자호란이 초래될 수 있다는 위기 신호를 읽지 못했고, 아무런 대응도 하지 않은 채 전쟁 위험을 조장했다. 본인이 청나라와 단교를 외치고 총궐기하라는 하교를 내렸다가 청나라에 발각돼 위기가 고조되자 인조는 “방어할 준비를 하고자 해도 상황이 마음먹은 대로 되지 않고 적을 달랠 방책을 찾고자 해도 모두가 불가하다고 한다. 적은 오고야 말 것인데 어떻게 해야 하겠는가?”11 라고 말한다. 그야말로 무책임의 전형을 보여주고 있다. 그뿐만이 아니다. 각종 정책을 추진함에 있어서도 최고경영자이자 조정자로서 리더십을 발휘하지 못했다. 공납제도, 호패법, 양전 등 각종 개혁 정책이 인조 대에는 대부분 유야무야됐다. 임금의 오락가락한 행보로 인해 백성의 불만이 더욱 비등하기도 했다.

그러면 효종은 어땠을까? 인조의 둘째 아들인 효종은 정통성이 완전하지 못했다. 효종이 세자에 책봉될 당시 조카이자 인조의 적장손인 이석철12 이 살아 있었기 때문이다. 종법(宗法)13 에 따르면 석철이 왕위를 계승해야 하는데 인조는 신하들의 반론을 찍어 누르고 둘째 아들인 봉림대군(효종)을 세자로 삼았다. 훗날 효종이 죽고 인조의 계비 자의대비가 효종을 위해 어떤 상복을 입어야 하느냐를 두고 이른바 ‘예송논쟁’이 벌어졌을 때, 송시열을 위시한 서인이 효종은 장자가 아니라며, 장자 외의 자식이 죽었을 때 입는 일년복을 입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은 그런 이유다.14 효종의 왕위 승계에 종법상 하자가 있다고 본 것이다.

이처럼 신하들의 지지를 받지 못하고 보위에 오른 효종은 자신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당시 여론을 주도하던 산림(山林)15 과 정치적 타협에 나섰다. 그가 청나라를 정벌해 명나라의 원수를 갚는다는 산림의 ‘북벌(北伐)’론을 국정의 최우선 어젠다로 채택하자 관직을 거절하고 은거해 있던 송시열, 송준길, 이유태 등이 조정에 출사했다. 효종에게 힘을 실어준 것이다. 이를 바탕으로 효종은 자신이 구상했던 실질적인 개혁 정책들을 추진해 갔는데 ‘대동법’이 대표적이다.

그런데 효종은 대동법을 억지로 완성하려 들지 않았다. 오랜 시간이 걸리더라도 다각도의 실험과 세심한 보완을 통해 단점을 최소화하고자 했다. 기득권 세력이 반발하자 앞장서 막아주기도 했다. 이러한 효종의 노력으로 대동법의 기틀이 튼튼하게 다져진다. 대동법 실무를 총괄했던 김육이 다음과 같이 말할 정도였다.

“일의 처음은 내가 말을 꺼냈고 여러 신하가 알맞게 변통해 중도에 좌초하지 않을 수 있었다. 그러나 일이 성공한 것은 성상께서 홀로 결단하고 확고한 의지로 흔들림 없이 성사시킨 덕이다.”16

그런가 하면 현종은 대중에게는 잘 알려지지 않은 군주다. 학자들에게도 ‘2차 예송논쟁’에 직접 참여해 서인의 주장을 논파했다는 정도로만 기억되고 있다. 하지만 현종은 아버지 효종보다 오랜 시간 집권하면서 우리 역사상 최악의 고난이라 불리는 경신 대기근을 겪어냈다. 현종은 당파를 가리지 않고 전문가 중심의 지도부를 구성하고 신속한 대응에 나섰다. 군포를 면제하고 토지세를 감면하고 부채를 탕감했으며, 비축미를 방출하고 국가 경비와 왕실 경비를 대폭 삭감했다. 이 밖에도 기존의 관행에서 과감히 벗어나 구휼 및 방역 시스템을 능동적으로 운영함으로써 피해가 최소화되도록 힘썼다. 경신 대기근이라는 참혹한 재난이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우리가 현종의 시대를 무난했던 시대로 기억하는 것은 현종의 뛰어난 리더십을 방증하는 것이기도 하다. 또한 이때 현종이 재난 대응 시스템을 확립해 놓은 덕분에 25년 후 벌어진 ‘병정 대기근’이 벌어졌을 때도 조선은 효과적으로 시련을 극복할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숙종은 태종에게 죽임을 당한 이방석과 이방번,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빼앗기고 비극적인 죽음을 맞은 단종, 인조에게 역모로 몰려 죽은 소현세자의 부인 강빈 등 권력 투쟁에 패배했거나 억울한 죽음을 맞은 왕실 인물들을 대거 신원, 복권해줬다. 쇠락한 양녕대군의 사당을 다시 지어주고 공정왕으로 머물러 있던 태종의 둘째 형 이방과에게 ‘정종’이란 묘효를 내려준 것도 숙종이다. ‘2차 왕자의 난’ 때 태종에게 패배했던 이방간의 후손들도 다시 왕족으로 편입시켰다. 왕실의 소외된 인물까지 포용한 것이다. 숙종은 적장자로 왕이 된 아버지를 이어 자신 역시 적장자로 왕이 된 보기 드문 케이스였다.17 ‘적장자 승계’라는 유교 국가의 원칙이 대를 이어 지켜진 것이다. 숙종은 이러한 막강한 정통성과 권위를 바탕으로 과거사를 정리하고 왕실의 힘을 한데 모았다고 평가할 수 있다.

이에 비해 숙종은 조정의 갈등과 분열을 악화시켰다. 그는 경신환국, 기사환국, 갑술환국 등 세 번에 걸친 ‘환국(換局)’을 단행했는데 붕당이 공존했던 이전과 달리 한 당파 일색으로 조정을 구성하는 시스템이다. 숙종은 왕이 마음만 먹으면 한 당파를 전멸시켜 버릴 수도 있다는 공포를 심어줌으로써 국왕에 대한 절대적인 충성을 유도했다. 하지만 국왕의 정국 주도력은 강화됐을지 몰라도 상대방을 ‘악’으로 규정하고, 우리 당파가 살기 위해서는 상대 당파를 죽여야 하는 ‘전부 아니면 전무(all or nothing)’의 세상이 됐다. 이후 붕당 간의 갈등이 극심해지고 영조와 정조가 탕평을 통해 이를 수습하고자 골몰했던 것은 모두 숙종이 심어놓은 부정적 씨앗 때문이다.

앞으로 연재를 통해 더욱 자세히 살펴보겠지만 갈등과 분열의 리더십이 혼란을 낳았고, 타협과 공존의 리더십이 성과를 낳았음을 분명히 확인할 수 있다. 지도자의 책임감과 역량이 조직에 매우 큰 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지금 우리가 속한 조직의 리더십은 어떠한지 생각해 보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
  • 김준태 | 성균관대 유학동양학과 초빙교수

    필자는 성균관대에서 한국 철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고 동 대학 유교문화연구소, 유학대학 연구교수를 거치며 우리 역사 속 정치가들의 리더십과 철학을 연구하고 있다. 특히 현실 정치에서 조선 시대를 이끌었던 군주와 재상들에 집중해 다수의 논문을 썼다. 저서로는 『왕의 경영』 『왕의 공부』 『탁월한 조정자들』 등이 있다.
    akademie@skku.ed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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