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과 경영

천재의 삶은 왜 비극적일까

19호 (2008년 10월 Issue 2)

카이사르를 유명하게 만든 것은 기원전 58∼51년의 8년 동안 수행한 갈리아 원정이다. 갈리아는 지금의 프랑스와 스페인 국경에서 라인강까지 대체로 프랑스, 스위스, 벨기에, 네델란드, 룩셈부르크 일대를 아우르는 지역이다. 갈리아 원정은 서유럽 전역과 이탈리아 간의 전쟁이었다. 더욱이 갈리아 원정 내내 카이사르가 거느린 병력은 겨우 4만∼8만 명이었다. 갈리아에서 유력한 1개 부족의 군대보다 적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카이사르가 성공할 수 있었던 비결은 로마군의 우수성과 문명의 힘, 카이사르의 탁월한 지도력, 부족 단위로 살아가는 갈리아의 분열 덕분이었다. 예를 들어 로마군의 공성구(성이나 요새를 공격하는 데 쓰는 기구)와 축성술은 갈리아인에게 전혀 새로운 것이었다. 또 갈리아인에게 20일은 족히 걸릴 다리 건설을 로마군은 단 하루 만에 해치우고 도강하기도 했다.
 
갈리아에서도 부족을 통합해 강력한 국가를 이루려는 움직임이 있었지만 쉽지 않았다. 갈리아 부족들은 언어와 문화가 달랐으며, 통치방식도 거칠고 투박했다. 자유롭게 살아온 족장과 귀족들은 자신이 왕이 되는 것은 괜찮지만, 다른 사람의 신하가 되는 것은 견딜 수가 없었다.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3500만 명이 넘는 인구가 10만 명도 안 되는 로마군에게 지배당한다는 것은 믿을 수 없는 사실이었다. 게다가 갈리아 전사들은 이탈리아인보다 머리 하나는 더 컸다. 그래서 갈리아인들은 해마다 반란을 일으켰다. 그러나 번번이 로마군에게 패했다.
 
통합 국가를 원한 갈리아의 영웅
기원전 53년 카이사르는 갈리아를 거의 평정했다고 생각했다. 그때 지금의 프랑스 중부 지역에 거주하던 아르베니아족에서 베르킨게토릭스라는 젊은 영웅이 나타났다. 그는 족장으로서 친로마 정책을 유지하던 숙부를 제거하고 족장이 된 뒤 전 갈리아 부족을 반란에 동참시켰다. 이것은 놀라운 사건이었다. 지난 7년 동안 갈리아는 로마에 저항해 왔지만 단 한 번도 전체 갈리아가 합심해서 들고 일어난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사실 오늘날까지도 이 국가들이 하나로 뭉친 적은 한 번도 없다) 놀랍게도 베르킨게토릭스가 그 일을 해낸 것이다.
 
그런데 베르킨게토릭스가 평범한 지도자였다면 갈리아 전사가 총궐기했다는 사실만으로도 과거의 분열, 즉 패배의 핵심 요인을 극복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베르킨게토릭스가 원한 통합 갈리아는 물리적 연합이 아니었다. 지난 전쟁이 준 교훈은 분열이 패배를 부른다는 통상적 진리가 아니었다. 부족의 전쟁 방식으로는 제국 군대를 이길 수 없었다. 그래서 그는 소집에 응한 갈리아 연합군에게 질적인 변화도 요구했다. 통합 갈리아는 국가가 되어야 했고, 당장 국가 방식으로 전쟁을 치러야 했다. 바로 이런 점에서 (카이사르도 칭송했듯이) 그는 모든 갈리아인 가운데 가장 뛰어난 이였다. 

 

 

그러나 선각자의 깨달음이 실현되기 위해서는 숙성의 과정이 필요했다. 제국 군대로서 전쟁을 치르기 위해 베르킨게토릭스는 세 가지 벽을 넘어야 했다. 부족의 통합, 전술, 훈련의 벽이었다. 먼저 통합 부분을 보면 전체 갈리아가 궐기했다고는 하지만 다 그런 것은 아니었다. 그 가운데 몇몇은 갈리아에서 가장 강한 부족들이었다. 베르킨게토릭스는 군대를 둘로 나누었다. 한 부대는 로마의 속주인 지금의 남프랑스 지방을 공격해 로마군을 그곳에 묶어두게 했다. 그 사이에 자신은 소극적인 부족을 공격해서 그들을 참여시키기로 한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적장 카이사르는 로마 역사상 가장 뛰어난 지휘관이었다. 카이사르는 신속한 기동으로 단번에 이 작전을 무산시켰다. 그러나 베르킨게토릭스도 성과를 냈다. 갈리아 최대 부족이며 로마의 충실한 지원자이던 하이두이족을 반란에 끌어들인 것이다. 하이두이족은 최대의 식량 조달처일 뿐 아니라 기병이 없는 로마군의 기병 공급원이었다. 하이두족이 반란에 가담하자 카이사르의 기병은 게르만 용병 약 400명밖에 남지 않았으며, 식량 지원도 끊겼다.
 
실패한 청야전술
그러나 갈리아 연합군은 여전히 부족연합군에 불과했다. 이들을 제국 군대로 훈련시키려면 시간이 필요했다. 그래서 베르킨게토릭스는 제국 군대식 전투 대신 제국의 전술을 쓰기로 했다. 그것은 ‘청야전술(淸野戰術·주변에 적이 사용할만한 모든 군수물자와 식량 등을 없애 적군을 지치게 만드는 전술)’이었다.
 
그는 로마군의 식량 공급을 차단하고 로마군 주변의 모든 도시를 불태웠다. 로마군은 애초에 15일분의 식량만 휴대하고 나왔다. 할 수 없이 로마군은 식량을 찾아 널리 흩어져야 했으며, 이 틈을 이용해 갈리아 기병은 병력이 분산된 로마군을 기습했다. 로마군은 여러 부대를 한꺼번에 내보내 적을 교란하거나, 부대 출동시간을 변경하는 등 여러 방법을 써보았지만 목적지와 동선이 뻔한 데다 상대는 재빠른 기병이어서 기습을 피할 수 없었다. 로마군은 위기에 빠졌다. 카이사르는 갈리아 전쟁기에서 피해 수치를 공개하지 않았지만 막대한 피해를 보았다고 서술했다.

 

 

그런데 갈리아는 아직 설익은 국가였다. 중국이나 한국에서라면 국왕의 명령 한마디로 간단하게 청야전술을 시행할 수 있었지만 베르킨게토릭스는 도시를 태우기 위해 부족들을 설득하러 뛰어다녀야 했다. 결국 가장 큰 도시 부르주는 부족들의 결사적인 반대로 끝내 불태우지 못했다. 치명적이었다. 단 한 도시만 남겼지만 로마군에게는 그것으로 충분했다. 부르주를 함락한 로마군은 주민들을 모두 학살하고 몇 달 동안 작전을 수행할 수 있는 식량을 획득했다.
 
베르킨게토릭스가 구상한 국가로서의 전쟁은 이제 물거품이 됐다. 그에게 남은 방법은 평범한 지도자의 전술, 전체 갈리아 연합군이라는 병력 수에 의존하는 방법뿐이었다. 결국 지도자의 뛰어난 자각에도 불구하고 ‘통합 갈리아’는 단 하나의 관문도 통과하지 못하고 출발점으로 되돌아온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도 위대한 지도자는 비전을 잃지 않았다. 설령 승리한다고 해도 그것이 부족연합군의 승리라면 일회성 의미밖에 없다. 이 승리는 갈리아 왕국으로 나아가는 출발점이 돼야 했다. 그래서 베르킨게토릭스는 연합군 사령관 이상의 역할을 하기로 했다. 그는 스스로 미끼가 돼 로마군에게 포위되었다. 그가 선택한 장소인 알레시아는 고대로부터 갈리아인의 성지였다. 꼭 고구려의 오녀산성처럼 평지에 돌출한 고지인데, 정상부는 넓은 평지였다.
 
스스로 포위돼 단결 호소
이곳에서 베르킨게토릭스는 전 갈리아에 전령을 보내 성전에 참여할 것을 호소했다. 그의 호소는 놀라운 감동과 반향을 일으켰다. 24만 명의 갈리아 전사가 속속 집결해서 알레시아를 포위한 로마군을 역포위했다. 베르킨게토릭스도 8만의 병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그를 포위한 카이사르군은 겨우 5만 명이었다.
 
감동적인 전쟁이었지만 카이사르는 완벽하게 냉정하고 정확했다. 그는 이 상황을 예상하고 양쪽으로 방벽을 쌓았다. 그리고 모든 기술과 아이디어를 동원해서 방어시설과 함정을 설치했다. 세계 역사상 처음으로 양쪽의 적을 상대한다는 작전이었다. 34만 명 대 5만 명의 전투는 격렬하고 아슬아슬하게 전개됐지만 카이사르의 계산이 옳았음이 입증됐다. 실패를 인정한 베르킨게토릭스는 단신으로 카이사르 앞에 나타나 포로가 되었다. 카이사르는 어떤 갈리아인보다도 그의 비범함을 명확하게 인식하고 있었다. 그래서 절대로 살려둘 수 없는 인물이었다. 베르킨게토릭스는 로마 감옥에서 복역하다가 기원전 46년 카이사르의 개선식 행사 때 불에 타 죽었다.
 
베르킨게토릭스의 운명을 안타까워하는 사람들은 알레시아 전투가 결정적인 실수였다고 말한다. 그러나 필자의 생각은 다르다. 베르킨게토릭스는 최선의 선택을 했다. 그는 더 나은 방법을 구상하고 시도했지만, 그가 속한 사회와 문명이 감당하지 못했다. 국가든 기업이든 지도자의 역량과 자각이 아무리 뛰어나도 조직의 수준을 넘어설 수는 없다. 특히 중진국에서 선진국, 중소기업에서 대기업으로 각각 이행하는 것처럼 단계를 뛰어넘는 성장을 위해서는 교육을 통해 구성원의 자각을 변화시켜야 한다.
 
천재의 실패는 공멸 야기
그런데 막상 교육을 하면서 베르킨게토릭스처럼 좌절한 천재, 실패한 선각자의 이야기를 하면 사람들의 반응은 대부분 이렇다. “그러기에 사람은 주변의 수준에 맞춰 살아야 해”, “너무 튀면 부러지는 거야”.
 
옛날이라면 이 말이 맞을지도 모른다. 사실 카이사르도 베르킨게토릭스와 똑같은 운명을 걸었다. 갈리아에서 함께 싸운 동료들까지도 그가 귀족정을 파괴하고, 황제가 되려 하는 것에 분노할 정도였다.
 
옛날에는 문명과 사회의 발전 속도가 느렸다. 변혁의 시기도 세기말에야 한 번 올까말까 했다. 그래서 천재와 선각자는 다가올 파멸을 홀로 떠들었고, 다음 세대나 되어서야 사람들은 그의 예지가 옳았음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오늘날의 세계는 급변하고 있다. 따라서 천재의 비극이 곧 집단의 공멸로 이어질 수 있다. 천재의 예지를 다시 한 번 생각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편집자주 전쟁은 역사가 만들어낸 비극입니다. 그러나 전쟁은 인간의 극한 능력과 지혜를 시험하며 조직과 기술 발전을 가져온 원동력이기도 합니다. 전쟁과 한국사를 연구해온 임용한 박사가 전쟁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교훈을 시리즈로 연재합니다. 이 코너를 통해 리더십과 조직 운영, 인사 관리, 전략 등과 관련한 생생한 역사의 지혜를 만나보시기 바랍니다.
 
필자는 연세대 사학과를 졸업하고 경희대에서 한국사 전공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조선국왕이야기> <전쟁과 역사> <조선전기 관리등용제도연구> <조선전기 수령제와 지방통치> 등 다수의 책과 논문을 저술했다.
 
동아비즈니스리뷰 292호 Hyper-personalization 2020년 3월 Issue 1 목차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