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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운하 시대 중국 상인 이야기

‘관시’는 윤활유… ‘give and take’가 아니다

조영헌 | 336호 (2022년 01월 Issue 1)
Article at a Glance

타지에 진출한 중국 객상들은 낯선 땅에 적응하며 겪어야 했던 고충을 혈연, 지연, 학연을 활용해 극복했다. 족보 편찬을 통해 인재 확보를 위한 정보를 얻었으며 자신들만의 동향 조직을 운영해 같은 언어로 결속을 다졌다. 또한 똑똑한 자제는 관료가 되게 해 권위에 기반한 안전망을 획득했다. 현대에도 자주 회자되는 중국의 ‘관시’ 문화는 위험을 최소화하며 자신이 보유한 자산과 네트워크를 최대한으로 활용했던 중국 상인들로부터 진화했다.



편집자주
중국 상인을 심층적으로 연구해 온 조영헌 고려대 교수가 ‘대운하 시대, 중국 상인 이야기’를 연재합니다. 과도기적 역사 속에서 신속한 대처 능력과 전략적 투자로 입지를 넓혀 나간 역사 속 중국 상인들에 대한 고찰을 통해 난세를 극복하는 경영의 지혜를 익히시길 바랍니다.

지난 첫 연재 1 에는 대운하 시대(1415∼1784), 중국의 10대 상방 가운데 제일로 손꼽히던 휘주 상인이 경제 대동맥인 대운하의 유통망을 둘러싼 경쟁에서 우위를 차지하는 비결을 살펴봤다. 분명 휘주 상인이 다른 상인 집단에 비해 우위를 차지한 것은 사실이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남겨져 있는 기록, 즉 사료에 근거한 결론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록에 남겨진 성공한 휘주 상인들은 전체 상인 가운데 소수라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훨씬 더 많은 무명의 상인은 실패하거나 성공을 꿈꾸며 목숨을 거는 고통을 오랜 시간 감내해야 했다. 오늘날 잘 알려진 빅테크 기업인 구글, 아마존, 페이스북, 카카오, 네이버 등이 있지만 이처럼 성공한 기업은 소수이고 대다수 중소기업이나 벤처기업은 성공을 꿈꾸며 생존 경쟁을 펼치는 것과 유사하다. 따라서 이번 호에는 과거 객지로 진출했던 벤처 상인들이 객상으로 겪어야 했던 고충과 이를 극복하기 위해 인적 네트워크의 세 요소인 혈연, 지연, 학연을 어떻게 활용했는지에 대해서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모든 거상(巨商)도 초창기는 이 세 요소를 적재적소에 배치하면서 인적 네트워크를 형성했다. 과하지 않게 활용하는 센스가 있어야 진정한 신뢰 관계가 형성되기 마련이었다. 그 속에서 중국인 특유의 관시(關係) 문화가 형성됐음은 물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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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지에 진출한 객상으로서의 고충

대운하 시대에 돈을 벌기 위해 타지로 진출했던 ‘벤처’ 상인들이 직면했던 딜레마가 있었다. 너무 빨리 귀향해도 곤란했지만 그렇다고 객지에 너무 오래 머물 수도 없다는 딜레마였다.

그들은 한 번 나가면 보통 2∼3년이 넘도록 고향에 돌아오지 못했다. 소문만 듣고 나갔으나 각지에서 몰려든 상인과 현지 상인들과의 경쟁이 날로 심해지는 상황에서 돈을 버는 것이 기대만큼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성공하지 못하고 고향에 돌아오면 웃음거리가 되기 십상이었다. 소설 『이각박안경기』(권37)에 등장하는 휘주 상인, 즉 첫 번째 사업에서 초기 자본까지 모두 날려버리는 실패를 경험하고도 장사를 정리하지 못하고 전전긍긍했던 인물 정재(程宰)는 이러한 상황을 실감 나게 보여준다. 휘주에서는 과거 응시를 위해 떠났던 자가 귀향할 때처럼 장사를 위해 떠난 사람도 그 성공 여부에 따라 고향에서의 태도가 현저하게 달랐다.

반면 객지에 적응하고 정착하느라 정신이 팔려 고향을 돌아보지 않는 경우도 비난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휘주인들은 객지에서 활동할 때 다른 지역 출신에 비해 동향 의식이 강하고 종족 조직도 잘 활용하는 것으로 유명했지만 그만큼 고향과의 결속력을 요구받았다. 또한 고향 식구들을 돌아보고 경제적으로 지원해야 한다는 책임감도 강하게 요구됐다. 만약 경제적인 성공에 취해 객지에만 머물 뿐 고향에 있는 조상의 묘나 사당을 돌아보지 않는다면 이는 경박하다고 지탄을 받았다.2 소설 『유세명언』(권1)에 등장하는 휘주 상인 진대랑(陳大郞, 이름은 상(商))이 호광(湖廣) 양양부(襄陽府)로 진출했다가 또 다른 객상 남편을 떠나보내고 독수공방하던 여인(삼교아)을 유혹해 정을 통하고도 다시 고향으로 돌아왔던 것, 그럼에도 불구하고 삼교아를 못 잊고 다시 양양부로 돌아갔다가 비참한 죽음을 맞는다는 설정 모두 객지에서의 성공에 눈이 어두워 고향을 돌아보지 않는 자에게 돌아오는 인과응보의 교훈을 담고 있다. 상업 발달로 고향을 떠난 객상이 증가하는 시대였음에도 불구하고 여성에게는 정절을 강요하는 모순적인 현실 상황을 드러내고 있는 소설이다. 문화연구자 리어우판(李歐梵) 홍콩중문대 교수는 이 소설의 스토리를 중국인들의 욕망과 일탈의 문화를 보여주는 키워드의 하나인 ‘음식남녀(飮食男女)’의 대표로 제시했다.3

17세기 소설 속에 등장했던 두 휘주 상인은 완전히 다른 결말을 맞이했다. 소주(蘇州)풍의 모자를 눌러쓰고 새하얀 호남(湖南) 비단으로 만든 도포를 입고 등장한 진대랑은 장사보다 사랑을 희구하다 상사병으로 비참한 죽음을 맞이했다. 한편 숙박업소에서 구매할 물건과 방식을 알려주는 여신(女神)을 밤마다 만났던 정재는 세 차례의 상품 매매를 통해 10냥의 초기 자본금을 3000∼4000냥으로 불렸다. 누군들 진대랑처럼 되고 싶지 않았겠으며, 또 정재처럼 귀신 같은 정보를 입수하길 원하지 않았겠는가? 유동성이 급증하던 사회에서 신뢰도가 높은 정보를 신속하게 입수하고자 상인들에게는 신뢰할 수 있는 인적 네트워크가 절실했다.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중국 특유의 인맥, ‘관시 네트워크’라고 볼 수 있는데 핵심은 신뢰와 호혜(reciprocity)였다. 그 첫 번째 요소가 혈연을 기반으로 한 종족 조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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