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식부기, 화포 등 세계적 수준의 기술과 경영 체계를 물려받은 조선이 기술 후진국으로 전락한 이유는 기술을 육성하는 국가 시스템의 부재에서 찾을 수 있다. 사농공상을 기반으로 한 건국 이념은 근본적으로 기술을 경시했으며, 특히 1442년 장영실의 퇴장은 기술 축적의 맥을 끊는 계기가 됐다. 반면 은 제련 기술 등 조선에서 외면당한 신기술은 일본으로 흘러 들어가 일본의 비약적 성장을 이끌었다. 국가뿐 아니라 기업도 기술 개발뿐 아니라 그것을 상용화하고 보호하는 총체적인 시스템을 설계하는 데 각별한 관심을 기울일 필요가 있다.
고려 시대에는 세계 일류를 자랑하는 과학 기술이 수두룩했다. 먼저 고려는 세계 최초로 금속활자를 개발했다. 유네스코에 등재된 세계 최초의 금속활자 인쇄본 직지심체요절(直指心體要節) 1 1 흔히 ‘직지심경(直指心經)’으로 알려져 있다. 가장 오래된 고려의 금속활자는 증도가자(證道歌字)로서 직지심체요절보다 138년, 구텐베르크보다 216년 앞선다는 주장이 제기된 바 있으나 논란이 있다.
닫기은 독일의 구텐베르크보다 78년 앞섰다. 목판 인쇄술의 한계를 넘어서려는 시도는 당시 책의 제작과 보급이 활발했고 지식의 전파가 체계적으로 이뤄졌음을 보여주는 방증이다. 2 2고려의 금속활자가 귀족들의 기호품이었고 대중적으로 이용되지 않았기 때문에 최초라는 타이틀 이외에는 큰 의미가 없다는 주장을 펴는 사람도 있는데 금속활자가 귀족들의 기호품이라는 주장의 근거가 무엇인지 찾기 어렵다. 대중적으로 이용하지 않을 것이면 왜 나무 대신 견고한 금속을 필요로 했을지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쉽지 않다.
닫기 또 고려 말 최무선이 우왕의 지시로 화통도감을 설치해 화포를 개발하고 1380년 진포해전에서 수군 전함에 배치해 운용한 것도 창의적인 시도였다. 이는 동양 최초의 함포 운용이었을 뿐 아니라 세계 최초로 함포를 사용해 승리한 해전이라고 할 수 있다.33해상전투에서 화약 무기를 사용한 최초의 사례는 백년전쟁 기간 중 1338년 발생한 Arnemuiden 해전을 들 수 있으나 화약 무기를 운용한 영국군이 패배했기 때문에 전술적으로 의미를 부여하기 어렵다. 적선을 불태우거나 부술 수 있는 수준의 파괴력은 갖추지 못했던 개인 화기 수준의 화약 무기였다고 봐야 하므로 전술적으로 평가할 때 세계 최초의 함포 운용 해전은 진포해전으로 봐야 옳다고 본다.
닫기 또 고려 수도 개경의 상공인들은 서양보다 200년 이상 앞서 복식부기(Double Entry Book-keeping)를 사용했다. 송도사개치부법(松都四介治簿法)이라 불리는 개경 상공인들의 복식부기 기록 방식은 서양의 방식과 크게 다르지만 대차대조표, 손익계산서, 현금흐름표를 생산했다는 점에서 서양의 복식부기와 차이가 없었다. 또 수익적 지출과 자본적 지출을 명확히 구분했다. 4 4프란체스코 수도사이자 수학자인 루카 파치올리(Luca Pacioli)는 1494년에 복식부기에 관한 책 『Summa de arithmetica, geometria, Pro-portioni et proportionalita』를 발간했다. 이 책에 나온 복식부기 내용이 유럽 상공인들이 이미 사용하고 있는 것을 정리한 것인지 루카 파치올리의 창작품인지 분명하지 않으나 이미 사용하고 있는 것을 정리한 것이라 하더라도 고려가 시기적으로 앞서 있었다는 것이 세계적으로 인정되고 있다.
닫기 독일의 지성 괴테가 인류 최고의 발명품이라고 극찬한 바 있는 복식부기는 서구 자본주의 발전을 이끈 중요한 수단으로 인식되고 있는데 놀랍게도 고려가 유럽보다 앞서서 사용했고 조선 시대에도 계승된 것이다. 조선 초기 상업과 공업이 상당한 수준에 이르렀음을 알려주는 의미 있는 증거라고 볼 수 있다.
이처럼 고려 시대에 축적된 과학기술은 조선의 세종 시대에 이르기까지 상당히 많이 계승됐다. 일례로 세종대왕 시절 조선군의 화포 체계는 세계적인 수준으로까지 올라갔는데 세계 최초의 로켓탄이라 할 수 있는 신기전이 개발되고, 권총의 원조라고 할 수 있는 10㎝ 내외 길이의 세총통이 개인 화기로 개발됐다. 세종 시대 세계 최초로 제작된 측우기는 강우량을 측정하는 기구라는 하드웨어 측면에서도 탁월했지만 강우량을 측정해 비가 오는 패턴을 연구하고 자료를 축적해 농사에 활용하고자 한 것이 소프트웨어의 혁신이라는 측면에서 더 의미가 있다.
흔히 고려청자의 기술적 우수성과 탁월한 예술성을 강조하면서 조선백자는 그 아래 수준으로 보는 경향이 있는데 사실 조선백자는 도자기 제조 기술에서 소재 혁신(진흙 → 고령토)을 이뤘다는 점을 높이 평가해야 한다. 맑고 영롱한 빛을 발하는 조선백자에 일본식 도안과 채색을 한 일본자기는 유럽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면서 큰돈을 벌었다.
하지만 이처럼 세계 수준의 기술과 경영 체계를 갖추고 출발해 세종대왕 시절에 꽃을 피웠던 조선은 후기에 기술 후진국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고금을 막론하고 국가의 힘은 과학과 기술 수준에 의해 결정된다. 과학과 기술이 발전해야 산업 생산성이 높아지고 파괴력과 정확도가 큰 무기 개발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결기와 선동으로 과학과 기술을 넘어설 수 있다고 생각할 때 국가는 이미 사라진 것이나 다름없다. 과학 기술의 쇠퇴로 인해 조선이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할 수밖에 없었는지도 모른다. 왜 세계 수준이었던 조선 초기 과학기술이 조선왕조 500년을 거치며 하위권으로 전락했을지 분석해보고자 한다.
최중경choijk1956@hanmail.net
한미협회장
최중경 한미협회장은 33년간 고위 관료와 외교관을 지냈고 동국대 석좌교수, 고려대 석좌교수, 미국 헤리티지재단 방문연구원, 한국공인회계사 회장을 역임했다. 현재 한미 협력을 증진하는 민간 단체인 한미협회 회장과 자선단체 평가 업무를 수행하는 NGO인 한국가이드스타 이사장을 맡고 있다. 서울대에서 경영학 석사를, 미국 하와이대에서 경제학 박사를 받았다. 저서로는 『청개구리 성공신화』 『워싱턴에서는 한국이 보이지 않는다』 『역사가 당신을 강하게 만든다』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