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이 묻고 신하가 답하다: 선조 - 조희일

“알아도 실천 안 하면 공부가 무슨 소용”

311호 (2020년 12월 Issue 2)

Article at a Glance

공부는 어떻게 해야 할까? 조선 선조가 낸 문제에 문신 조희일은 ‘성의(誠意)’, 내 뜻을 정성스럽게 하라고 강조했다. 공부의 첫 단계는 배우고 익혀서 앎에 도달하는 ‘치지(致知)’이다. 하지만 알아도 실천하지 않으면 아무런 소용이 없을 것이다. 성의를 다하느냐는 결국 마음에 달려 있다. 공부에서 ‘존양’과 ‘성찰’이 강조되는 이유다. 마지막으로 독실하면서도 꾸준하게 평생토록 노력하는 것, ‘역행(力行)’의 자세를 다하면 공부와 성장을 통해 완성된 인간으로 나아갈 수 있다.



우리는 왜 공부를 할까? 정답은 없다. 하지만 어떤 이유로 공부를 하든 궁극적인 목표는 자기 성장에 있을 것이다. 내가 더 나아지기 위해 공부하는 것일 테니까. 그렇다면 그 공부는 어떻게 해야 할까? 특히 어디에 주안점을 둬야 할까? 이 역시 정답이 없겠지만 여기 참고할 만한 내용이 있다. 1602년(선조 35년)에 열린 별시(別試)로 가보자. 이날 과거시험에서는 이런 문제가 출제됐다. “공부에는 네 가지 조목이 있으니 바로 존양(存養), 성찰(省察), 치지(致知), 역행(力行)이다. 그에 대해 자세히 말해볼 수 있는가?”

이 물음에 대해 조선 선조∼인조 연간에 활약한 문신이자 뛰어난 서화가(書畵家)였던 조희일(趙希逸, 1575∼1638)1 은 이렇게 대답했다.

(공부할 때는) 반드시 먼저 사물의 이치를 깨달아서[치지(致知)] 학문하는 밑받침과 도(道)에 나가는 기반으로 삼아야 합니다. 다음으로 내면을 삼가고 절제하여 마음가짐을 단정하게 하며[존양(存養)], 행실을 살펴 몸가짐을 신중히 해야 합니다[성찰(省察)]. 이미 알고 있는 것을 바탕으로 삼아 더욱 깊이 학문을 연마하고, 지금 내가 알고 있는 것이 충분하다며 학문 정진을 멈춰서는 안 됩니다. 또한 선(善)을 보고 배우면 반드시 실천해야 하니, 스스로 충분히 행했다고 여겨 선행(善行)을 그만두지 말아야 합니다. 평범한 일상생활에서 깊은 학문의 본원에 이르기까지 이치를 터득하고, 마음과 행실을 모두 닦아서 독실(篤實)하게 실천하여 밝게 빛내야 합니다.[역행(力行)]

무엇을 공부하든 배워서 익히는 일이 첫 단계다. 대상을 치열하게 연구하고 파고들어 기초 지식을 쌓고 근본 원리를 깨달아야 한다. 이것을 유학에서는 격물(格物), 그리고 앎에 도달한다는 뜻에서 ‘치지’라고 부른다. 그런데 공부를 통해 지식을 얻고 원리를 깨우쳤다고 해서 곧바로 내 것이 되는 것은 아니다. 무엇이 옳은지 그른지, 어느 쪽이 의로운지, 효과적인지를 알게 됐다고 해서 즉각 실천에 옮길 수 있을까? 만약 그렇다면 공부한 사람 중에는 잘못하거나 실수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을 것이다.

책문을 출제한 선조의 경우를 생각해보자. 방계 출신으로 보위에 오른 선조는 부족한 정통성을 메꾸기 위해 매일매일 경연에 나가 공부했다.2 경연에서 선조를 가르친 스승들은 퇴계 이황, 고봉 기대승, 율곡 이이, 우계 성혼 등 한국 사상사를 대표하는 석학들이었다. 더욱이 조선 제왕학의 전범으로 불리는 이황의 『성학십도(聖學十圖)』와 이이의 『성학집요(聖學輯要)』는 바로 선조를 위해 저술된 것이다. 그러니 선조는 왕으로서의 자세와 책임에 대해 정말 귀에 못이 박히게 들었을 것이다. 선악과 시시비비에 대해서도 누구보다 잘 배웠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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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데 왜 그토록 못난 모습을 보였을까? 선조는 오만하고 독선적이었으며, 신하들을 의심하느라 여러 과오를 저질렀다. 성군이 돼 달라는 이황과 이이의 간곡한 당부에 부응하지 못한 것이다. 이는 선조가 뭘 몰라서가 아니다. 무엇이 올바른지 알고는 있었지만 반드시 그렇게 실천해야 한다고 마음먹지 않았기 때문이다. 저렇게 행동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배웠지만 진심으로 수긍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일을 방지하기 위해 조희일은 『대학(大學)』에 나오는 ‘성의(誠意)’를 강조했다. ‘내 뜻을 정성스럽게 하라는 것’이다. ‘성의’의 구체적인 요령에 대해 성리학자들은 ‘홀로 있을 때를 삼가는 것[愼其獨]’과 ‘자기 자신을 속이지 않는 것[毋自欺]’, 두 가지를 제시한다. 먼저 홀로 있을 때를 삼간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우리는 보통 남들 앞에서는 말과 행동거지에 주의를 기울인다. 체면 때문에, 칭찬을 듣고 싶어서, 또는 비난을 듣기 싫어서 좋은 사람인 양 행동한다. 그러나 혼자 있을 때는 어떤가? 쉽게 나태하고 해이해진다. ‘아무도 안 보는데 어때?’ 하면서 규칙을 위반하곤 한다. 회사에 출근했을 때의 나와 집에 혼자 있을 때의 나를 비교해보면 명확하다.

다음으로 ‘자기 자신을 속이지 않는 것’이란 자기변명이나 합리화, 자기기만을 하지 않는 것이다. 저 사람의 의견이 타당하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단지 그가 싫어서 동의하지 않는 것, 내가 틀렸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괜한 자존심 때문에 끝까지 우기는 것을 말한다. 윗사람에게 아부하거나 경쟁자를 모함하기 위해 일부러 본심과는 다른 말을 하는 것, 응당 해야 하는 일인 줄 알면서 외면하는 것도 여기에 해당한다. 사람은 사사로운 감정이나 욕심 때문에 스스로를 자주 속이니, 항상 주의 깊게 살펴 그런 싹이 보이는 순간 곧바로 이를 잘라내라는 것이다.

요컨대, 사람은 ‘홀로 있을 때를 삼가’서 ‘자기 자신을 속이지 않음으로써’ 성의를 구현할 수 있다. 다만, 그 길은 여전히 험난하다. 다름 아닌 ‘사람의 마음’ 때문이다. 마음은 나의 가장 든든한 원군이면서 나의 가장 강력한 적군이다. 나를 분투, 노력하게 만드는 것도 마음이고, 방종하게 만드는 것도 마음이다. 흔들림 없이 정의를 추구하게 하는 것도 마음이고, 욕망에 흔들려 잘못된 선택을 하게 만드는 것도 마음이다. ‘성의’에서 스스로 속이냐 마느냐, 홀로 있을 때를 삼가느냐 마느냐도 결국 마음에 달려 있는 것이다.

공부에서 ‘존양’과 ‘성찰’이 강조되는 이유가 그래서이다. 조희일은 ‘존양’을 “내면을 삼가고 절제하여 마음을 단정하게 하는 것”이라고 설명하는데 보다 자세히 풀어쓰면 “마음이 잘못된 방향으로 나가지 않도록 보존하는 것”이 ‘존’이고, “마음이 언제나 맑고 투명하게 유지될 수 있도록 마음의 역량을 기르는 것”이 ‘양’이다.

다시 공부의 처음으로 돌아가 보자. 열심히 공부해서 어떤 분야의 지식을 배웠고, 그 분야의 원리와 이치에 대해서도 깨우쳤다. 하지만 내 마음이 바르지 못한 상태라면 어떻게 될까? 욕망이 싹트거나 감정에 치우쳐 있고 편견이나 선입관에 휩싸여 있다면? 평정심을 잃고 계속 흔들리고 있다면? 상황 인식과 판단을 제대로 할 수가 없으니 나의 배움을 온전히 구현하기 힘들 것이다. 깨달음이 변질되거나 왜곡돼 버릴 수도 있다. 그러므로 마음이 중심을 잡고 객관적으로 작동할 수 있도록 ‘존양’이 필요한 것이다. ‘존양’이 전제돼야 ‘뜻을 정성스럽게 하는’ 성의도 이뤄질 수 있다.

‘존양’이 내면의 생각을 바로잡는 공부라면 ‘성찰’은 외면의 행동을 교정하는 공부다. 조희일은 성찰에 대해 “행실을 살펴 몸가짐을 신중히 하는 것”이라고 했다. 내가 그릇된 행동을 했다면, 왜 그런 행동을 했는지를 곰곰이 살펴보고 반성해 다시는 그와 같은 잘못을 반복하지 않는 것이 성찰이다. ‘성찰’은 ‘존양’과 별개의 것이 아니다. 행동으로 표출되기 전, 마음의 단계에서는 존양이 적용되고 행동으로 표출된 후에는 성찰의 영역일 따름이다. 마음이 바르면 행동도 발라지지만, 반대로 행동을 가다듬고 신중히 해도 마음이 정돈되는 효과를 가져올 수 있다. 즉, ‘존양’과 ‘성찰’은 함께 병진해야 하는 것이다.

이처럼 공부는 ‘치지’를 토대로 ‘존양’과 ‘성찰’을 통해 발전한다. 이것으로 끝일까? 공부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독실하면서도 꾸준한 노력이다. 이미 지식이 있으니 충분하다며 멈춰서는 안 된다. 계속 배우고 익히며 “이미 알고 있는 것을 바탕으로 삼아 더욱 깊게 학문을 연마해야 한다.” 그래야 계속 성장할 수 있다. 또, 배웠으면 반드시 그것을 실천하고자 노력해야 한다. 깨달음이 단지 머릿속 지식으로만 남는다면 결코 나의 삶을 변화시키지 못한다. 이 과정을 평생토록 이어가는 것, 거기에 자신의 힘을 남김없이 쏟아내는 것이 바로 ‘역행(力行)’이다.

이상 조희일의 책문을 보면 지레 공부가 어렵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치지’ ‘존양’ ‘성찰’ ‘역행’ 같은 낯선 성리학 용어가 나열되고 있으니 말이다. 그러나 조희일은 기본 중에서도 기본을 말하고 있다. 공부를 할 때는 치열하게 파고들어 원리를 깨달아야 한다는 것, 깨달은 내용을 실천해 내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것은 오늘의 우리에게도 적용되는 말이다. 나의 마음가짐과 행동을 바르게 하여 깨달은 바를 올바로 구현하고, 꾸준히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것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이렇게 순차적으로 공력을 쌓아감으로써 완성된 인간을 향해 나아갈 수 있다.


김준태 성균관대 한국철학인문문화연구소 책임연구원 akademie@skku.edu
필자는 성균관대에서 한국 철학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고 동 대학 유교문화연구소, 유학대학 연구교수를 거치며 우리 역사 속 정치가들의 리더십과 철학을 연구하고 있다. 특히 현실 정치에서 조선시대를 이끌었던 군주와 재상들에 집중해 다수의 논문을 썼다. 저서로 『군주의 조건』 『탁월한 조정자들』 『논어와 조선왕조실록』 『다시는 신을 부르지 마옵소서』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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