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겸손과 꼰대

김남국 | 249호 (2018년 5월 Issue 2)

동양적 세계관을 집약한 『주역(周易)』에는 총 64개의 괘(卦)가 있습니다. 흥미로운 점은 대부분 괘에 좋은 내용과 나쁜 내용이 혼재돼 있다는 것입니다. 매우 좋은 일이 일어나는 상황을 의미하는 괘에서도 부정적인 일이 벌어질 수 있음을 암시하는 내용이 어김없이 포함돼 있고 그 반대도 마찬가지입니다. 정말 어렵고 힘든 상황을 의미하는 곤(困)괘에 대인(大人)은 길(吉)하다는 설명이 포함돼 있는 식입니다. 실제 개인이나 조직 모두 큰 어려움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급속히 성장합니다.

그런데 딱 하나의 괘는 모두 좋은 내용만 담고 있습니다. 바로 겸손을 의미하는 ‘겸(謙)’괘입니다. 이 괘의 풀이도 무척 의미심장합니다. 태양은 높은 곳에 있지만 아래로 내려와 수많은 생명에 에너지를 줍니다. 땅은 낮은 곳에 위치하면서 만물을 소생시킵니다. 잉여가 있는 곳은 덜어내고 가득 차 있는 것은 흐르게 하는 게 자연의 이치입니다. 실제 주역의 이런 통찰은 ‘평균으로의 회귀(regression)’와 같은 자연과 사회현상을 설명하는 개념과 유사성이 매우 높습니다. 결국, 자신을 낮추는 것은 어떤 상황에서도 통하는 최고의 전략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겸손은 이렇게 천하무적의 힘을 갖고 있지만 실천이 대단히 어렵다는 함정이 있습니다. 한두 번의 말로 자신을 낮춘다고 겸손을 실천했다고 볼 수 없습니다. 진심으로 낮은 자세로 살아가야 합니다. 조직에서 예를 들자면 자신이 보기에 세상 물정 모르는 한참 나이 어린 직원의 터무니없어 보이는 제안에도 진심으로, 그리고 지속적으로 귀를 기울일 수 있어야 겸손한 삶을 살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특히 성공을 많이 경험한 사람일수록, 열심히 일한 사람일수록 겸손해지기 힘듭니다. 후배 직원들의 역량이 자신보다 떨어진다고 생각하기 쉬운데다 자신은 정답을 알고 있다고 믿을 확률도 높기 때문입니다. 과거에는 이런 스타일로 생활하더라도 별문제가 없었습니다. 상명하복 체제에서 효율과 관리가 강조됐던 시기에 이런 리더십은 생산성 향상에 오히려 도움을 주는 측면도 있었습니다. 여기에 권력의 거리(power distance)가 멀고 서열을 강조하는 고유의 문화가 맞물려 한국 기업에는 수많은 꼰대가 양산됐습니다.

하지만 시대가 변했습니다. 관리나 운영보다 창의성이나 혁신이 훨씬 중요한 요소로 자리 잡았습니다. 또 조직 구성원 다수의 자발적 참여를 이끌어내지 못하는 조직은 경쟁에서 뒤처질 수밖에 없습니다. 아무리 뛰어난 리더도 답을 알 수 없는 전대미문의 불확실성 속에서 기업을 운영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결국 자신을 낮추고 조직원들의 진심 어린 참여를 이끌어내는 리더십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이런 인식하에 고성과자 가운데 꼰대적 성향을 성공적으로 떨쳐낸 사례들이 무척 인상적입니다. 어떤 리더는 “나이가 드니 이상하게도 말싸움에서 지지 않는 신기한 능력이 생겼다”며 회의 때 아예 침묵을 선언해 조직원들의 참여를 유도했습니다. 또 어떤 리더는 말도 안 되는 아이디어를 공개적으로 제시하면서 자신을 낮춥니다. 직원들이 리더를 편한 마음으로 대할 수 있어야 마음에 담고 있는 이야기를 꺼낼 수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아이디어가 공개적으로 거절당하는 상황을 너무나 당연하게 여기는 리더도 있습니다. 어떤 리더는 부하직원과의 만남에서 무조건 “아, 그래요? 아, 그렇군요”라는 말로 대화를 시작합니다. 공감하지 못하면 커뮤니케이션은 공허해질 수밖에 없다는 믿음 때문입니다.

DBR은 이번 호 스페셜 리포트로 꼰대 이슈를 집중 해부했습니다. 특히 당대 최고의 철학자였지만 놀라울 만큼 겸손한 삶을 살아간 퇴계 선생의 생생한 스토리가 깊은 인상을 줍니다. 이번 리포트가 겸손을 실천하는 새로운 리더십 확산의 전기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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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남국

    김남국march@donga.com

    - (현) 동아일보 미래전략연구소장
    - 동아일보 미래전략연구소 편집장
    - 한국경제신문 사회부 정치부 IT부 국제부 증권부 기자
    - 한경가치혁신연구소 선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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