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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제국도 잡아먹는 뇌물, 뇌물의 역사가 곧 세계사다

한근태 | 189호 (2015년 11월 Issue 2)

Article at a Glance

뇌물 관행은 인류의 역사와 함께 발전해왔다. 중국의 명나라는 뇌물로 망했고 우리나라에선 임진왜란 이후 공명첩이 남발됐다. 조선시대에 첩은 뇌물 접수 창구로 중요한 역할을 했다. 가족을 떠나 지방 발령을 받은 관리들은 수완, 경험, 미모, 남자를 다루는 솜씨가 있고 신뢰할 수 있는 정인을 곁에 두는 것이 관행이었다. 부패를 이기려는 뇌물과의 싸움도 뇌물 역사의 한 부분이다. 한때 부패로 얼룩졌던 홍콩과 싱가포르는 시민의식을 높이는 데 투자를 집중하면서 청렴으로 유명한 국가로 떠올랐다.

 

춘래불사춘의 유래를 알고 있는가? 기원전 33년 중국 한나라 원제 때 일이다. 당시 궁에는 수많은 여인이 있었고 그는 여인을 초상화를 보고 골랐다. 당연히 초상화를 그리는 화공이 큰 힘을 가졌고 간택을 원하는 여인들은 화공에게 뇌물을 바쳤다. 그런데 천하의 미인 왕소군은 뇌물을 바치지 않아 못생기게 그렸고 당연히 간택이 되지 않았다. 그러다 북방 흉노족이 쳐들어와 미녀를 바치라는 요구를 했다. 원제는 가장 못생긴 걸로 알고 있던 왕소군을 보내기로 결정했다. 그런데 이게 웬걸. 실제로 보니 엄청난 미인이었던 것이다. 화가 난 원제는 화공을 처형하기까지 했다. 왕소군은 결국 오랑캐 땅으로 시집을 갔고 거기서 고향을 그리워하며 지은 시가 바로 호지무화초 춘래불사춘(胡地無花草 春來不似春)이다. ‘오랑캐 땅에는 풀과 꽃이 없으니 봄이 와도 봄 같지 않다는 것이다.

 

이처럼 뇌물의 역사는 오래됐다. 이번 호에서는 유구한 역사를 가진 뇌물 얘기를 다룬 책 <뇌물의 역사>를 소개한다.

 

역사를 바꾼 뇌물

 

20세기 초 당시 미 시카고 시장 윌리엄 톰슨은 부패하고 교활한 사람이었다. 갱단의 뒤를 봐주고 선거에도 이용했다. 시카고 공무원, 언론, 경찰은 뇌물과 부패 덩어리였다. 기자와 경찰들은 갱단으로부터 줄을 서서 월급을 받았을 정도다. 그때 활약했던 갱이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갱 두목 알 카포네다. 당시 사회가 이렇게 부패한 이유 중 하나는 경제적 문제 때문이다. 그렇지 않아도 대공황으로 힘든데 금주령까지 내려진 것이다. 원래는 도덕과 가치의 타락을 막겠다는 취지였지만 취지와는 달리 전 사회를 뇌물투성이로 만들고 암흑가를 키우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경제공황으로 주류 수요가 폭발하면서 밀주로 발생한 자금은 사회의 모든 상부구조를 부패시켰다. 마피아의 탄생도 사실은 대공황 때문이다. 경기가 하락하고 생계가 어려워지면 불법과 뇌물이 판을 친다. 작은 일자리라도 얻으려면 뇌물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이처럼 뇌물이 생기는 가장 강력한 원인은 경제적인 이유다. 먹고살기 힘들 때 뇌물은 등장하기 마련이다.

 

뇌물은 역사를 바꾸었다. 명나라는 뇌물로 망한 나라다. 원래 강력한 군대를 자랑했다. 하지만 100년도 되지 않아 무능해지고 썩었다. 뇌물을 받고 군역을 빼주다 보니 실제 병력은 명부의 10분의 1에 불과했다. 다들 이름만 올리고 있었던 것이다. 이자성이란 인물이 반란을 일으킨 것도 군량부족 때문이었다. 배가 고팠던 그는 부하를 이끌고 탈영했다 잡혔는데 뇌물을 바친 끝에 빠져 나왔다. 당시 명나라 관리의 월급은 역대 최저였다. 생활이 곤란했기 때문에 모두 뇌물을 먹고 살았다. 군대도 그랬다. 이자성이 북경에 쳐들어왔지만 수비대 대부분이 식량을 구하러 출동해 사람이 거의 없었다. 결국 조화순이란 환관이 성문을 열면서 쉽게 성을 점령할 수 있었다. 이미 국가가 아니었던 것이다. 200년간 전쟁을 지속한 십자군원정도 한번의 뇌물로 극적 반전을 이룬다. 1차 원정 때 십자군은 난공불락의 안티오크를 만난다. 이 성을 넘어야 예루살렘에 입성할 수 있다. 식량도 떨어지고, 전염병까지 돌아 많은 군사들이 죽었다. 투르크의 군대가 이들을 돕기 위해 거의 도착했다. 그때 십자군 원정대 대장이었던 보에몽은 성을 지키던 수비대장을 매수해 성문을 열게 했고, 십자군은 안티오크를 점령해 예루살렘 공국을 세울 수 있었다. 조금만 참았더라면, 뇌물에 매수만 되지 않았다면, 안티오크를 지킬 수 있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더 이상의 십자군 원정은 없었을 것이다.

 

 

세상을 움직이는 은밀하고도 거대한 힘

뇌물의 역사

저자 임용한 김인호 노혜경, 이야기가 있는집, 2015

 

명예를 파는 공명첩의 남발

 

뇌물 하면 정치가 연상된다. 가장 많은 권력과 이권을 차지하려고 사람들이 뇌물을 바치기 때문이다. 주범은 돈이다. 권력을 가지면 돈을 갖고 싶어 하고, 돈을 가지면 권력을 쥐고 싶어 한다. 둘은 늘 붙어 다닌다. 이 둘이 만날 때 매관매직이 일어난다. 돈으로 자리를 팔고 사는 것이다. 임진왜란 이후 최고의 상품은 관직이다. 공명첩(空名帖)이 이때 등장했다. 공명첩은 글자 그대로 헛된 이름을 파는 것이고 명예를 파는 것이다. 공명첩은 이름을 적는 칸을 비워둔 백지 임명장이다. 돈이나 곡식을 받은 뒤 공란에 구매자 이름을 적어주면 임명장이 된다. 공명첩의 기원은 오래됐다. 중국은 한나라 때부터 돈이 필요할 때 많이 사용했다. 공명첩으로 임명하는 관직은 거의 진짜가 아니다. 이름뿐이다. 그래도 다른 이익이 있다. 조세와 부역의 의무를 면할 수 있고 관직을 이용해 재산도 지킬 수 있다. 중국의 역대왕조는 매관매직을 국가 공식사업으로 양성화했다. 국경지대에서 곡식을 바친 사람에게 관직을 줬다. 이를 연납제라고 한다. 조선은 임란 후 본격적으로 공명첩을 만들었다. 아무 준비가 없는 상태에서 외적이 쳐들어오자 다급했지만 군대를 동원할 방법이 마땅치 않았다. 그래서 꺼내든 카드가 공명첩이다. 지휘관이나 지방관이 백지 임명장을 갖고 있다 군에 자원하거나, 군량을 바치거나, 공을 세우면 즉석에서 이름을 적었다. 특히 식량을 모으는 데 공명첩이 유용했다. 곡식을 바치고 벼슬을 얻는 제도라 해서 납속(納粟)제도라고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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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근태

    한근태kthan@assist.ac.kr

    - (현) 한스컨설팅 대표
    - 서울과학종합대학원 겸임 교수
    - 대우자동차 이사 IBS 컨설팅 그룹 상무
    - 한국리더십센터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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