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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미를 찾지 않을 때 인생의 의미를 알 수 있다?

178호 (2015년 6월 Issue 1)

Article at a Glance – 자기계발

 

현대인은 생존과 쾌락에만 연연한다. 작은 불편도 못 견딘다. 이러한말세인과 대조적인 사람이초인이다. 고귀한 인간, 기품 있는 인간이란 뜻이다. 니체는초인은 세상을 아름답게 본다며 삶을 찬양했다. 그는 또우리가 섬겨야 할 신은 춤출 줄 아는 신이라고 말했다. 삶을 즐기고 긍정하라고 주장한 것이다. 그러나 운명에 맞서 싸우는 초인은 강한 정신력을 갖춰야 한다. 니체는 힐링과 대척점에 선 사람이다. 그는 나약한 인간을 경멸했다. 고난에 용감하게 맞서 싸우면서 초인이 될 것을 주장했다. 

 

() 이병철 삼성그룹 창업주는 종교에 관해 이런 질문들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신은 살아 있는가, 그렇다면 왜 세상은 이 모양인가등 삶에 대한 근본적인 의문에 관한 것이다. 사실 우리들도 비슷한 생각을 한다. 왜 사는 게 이렇게 힘이 들까, 산다는 것이 도대체 어떤 의미가 있을까, 왜 인생은 뜻대로 되는 일이 없을까, 죽음이란 무엇일까 등…. 이번엔 그런 질문에 관해 힌트를 줄 수 있는 책 한 권을 소개한다. 니체의 철학을 빌려 여러 의문에 관한 답을 주려고 노력한 책 <초인수업>이다. 니체를 이해하는 데 어려움이 있는 일반인을 위해 쉽게 풀어 쓴 책이다.

 

인생이 힘들다고 다들 난리다. 먹고사는 문제로 좌절하고 극단적 선택을 하는 사람들도 늘고 있다. 그러다 보니힐링이란 주제가 선풍적 인기를 끌고 있다. 걸핏하면 사람들은 상처를 받았느니, 힐링이니 하는 얘기를 한다.

 

니체는 힐링과 대척점에 선 사람이다. 그는 나약한 인간을 경멸했다. 고난에 용감하게 맞서 싸우면서 초인이 될 것을 주장했다. 그가 생각하는 초인이란 고난을 견디는 것에 그치지 않고 고난을 사랑하는 사람이며 고난 같은 것은 얼마든지 오라고 촉구하는 사람이다. 인간은 고난을 통해서만 나아질 수 있다고 생각했다.그는 안락한 삶을 추구하는 인간을 경멸했다.

 

철학이란 무엇일까? 철학은 우리가 흐릿하게 알고 있는 것을 분명하게 보여주는 역할을 한다. 별다른 경험과 고민 없이 삶에 대해 쉽게 판단하는 것을 경계했다. 삶에 대한 모든 판단과 평가는 항상 비교에 입각해 있다. 근데 비교 대상이 마땅치 않다. 좁은 숲을 보아야 지금 이 숲이 넓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처럼 우리가 사는 세상도 그렇다. 이 세상이 어떤 곳인지를 알기 위해서는 이곳을 벗어나 다른 세상을 경험해 봐야 하는데 그런 적이 없다는 것이다. 그런 상태에서는 이 세상이 선한지, 악한지 평가하기 어렵다. 가치판단을 내리자면 인생 밖에 서 있어야 하는데 죽지 않고서는 자기 삶에 대해 가치평가를 하기 쉽지 않다. 따라서 인생에 대한 가치평가는 불가능하다. 인생이 아름답다든가, 추악하다든가 하는 평가도 결국 그런 평가를 내리는 사람의 생리적, 심리적 상태의 표현일 뿐이다.

 

행복이란 무엇일까? 현대인은 생존과 쾌락에만 연연한다. 병약한 인간이 됐다. 작은 불편도 못 견딘다. 이렇게 자극에 민감하고 안락만을 탐하는 사람을 말세인이라 부른다. 대조적인 사람이 초인이다. 초인은 고귀한 인간, 기품 있는 인간이다. 기품 있고 고귀한 인간은 세상을 어떻게 볼까? 당연히 아름답게 본다. 우리 인간이 자신의 아름다움과 풍요로움을 세계에 나눠주는 것이 바로 아름다움이다. 아름다움과 풍요로움을 느끼는 사람은 이 세상도 아름답고 풍요로운 것으로 경험한다. 이런 사람은 이미 예술가다. 훌륭한 예술가의 작품은 이런 힘의 충만함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예술은 힘의 고양과 충만을 경험하는 도취의 상태에서만 가능하다. 니체의 사상은 불교의 일수사견(一水四見)과 비슷하다. 똑같은 물이라도 인간과 물고기 아귀와 천상의 신은 그것을 각각 다르게 경험한다는 것이다. 그가 생각하는 행복이란 힘이 증가되고 있다는 느낌 혹은 저항을 초극했다는 느낌을 말한다. 인간은 스스로 좀 더 강하고 괜찮은 사람이 되고 싶어 하는 충동이 있다. 니체는 그것을힘에의 의지라고 불렀다.우리가 진실로 바라는 것은 단순히 안락하게 오래 사는 것이 아니다. 자기 힘을 증대시키는 것이다. 이때 중요한 것은 자신과 싸우면서 스스로를 극복하는 것이다. 행복한 인간은 고난과 고통이 없기를 바라지 않고 그런 것들이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정신적인 평정과 충일함을 느낄 수 있는 사람이다. 이런 의미에서 행복의 반대는 비애나 고통이 아니라 내적으로 빈곤해지고 생명력이 쇠퇴한 결과로 나타나게 되는 우울증이다. 우울증은 비애나 고통의 지배를 받을 뿐 아니라 매사 그런 감정을 느끼는 허약한 상태를 말한다.

 

나를 넘어 나를 만나다

초인수업

저자 박찬국, 21세기북스, 2014

 

 

인생에는 도대체 어떤 의미가 있을까? 결론부터 얘기하면 의미를 찾지 않을 때 인생의 의미를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참으로 역설적이다. 이런 얘기를 하는 것은 사는 것이 힘들기 때문이다. 근데 생각해 보라. 고통 자체가 힘든 것이 아니다. 내가 왜 이런 고통을 겪어야 하는지 의미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힘든 것이다. 니체는 인간 정신을 세 단계로 구분했다. 낙타의 정신, 사자의 정신, 아이의 정신이 그것이다. 낙타는 사막에서 무거운 짐을 지고 아무 불만 없이 뚜벅뚜벅 걸어가는 동물이다. 인내와 순종의 대명사다. 낙타는 사회 가치와 규범을 절대적 진리로 알면서 무조건적으로 복종하는 정신이다. 사자의 정신은 기존 가치에 의문을 품고 저항한다. 하지만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지는 못한다. 기존 가치와 의미는 무너뜨렸지만왜 살아야 하는가라는 물음에 대한 답은 결여된 상태다. 니체는 이를 니힐리즘이라 명명했다. 견디기 어려운 상태이다. 무기력과 우울한 나날이다. 니힐리즘을 극복하고 새로운 활력을 회복한 상태를 아이의 정신으로 부른다. 아이들은 삶에 대해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아이들은 하루하루 인생을 놀이처럼 즐길 뿐이다. “인생이란 무엇인가? 왜 살아야 하는가?” 같은 질문은 왜 던질까? 바로 재미가 사라졌지만 계속 놀이를 해야 할 때 이런 질문을 던진다. 인생이 그렇다. 인생이 재미난 놀이로 여겨지는 사람은 이런 질문을 하지 않는다. 그저 삶이란 놀이를 즐길 뿐이다. 삶의 의미를 자꾸 묻는 것은 삶이 재미없기 때문이다. 삶이 무거운 짐으로 느껴졌기 때문이다. 인생의 의미에 대한 물음은 그런 물음이 제기될 필요가 없을 정도로 재미있게 살아갈 때 해소될 수 있다. 의미에 대한 질문은 어떤 이론적인 답을 통해서도 해결될 수 없다. 그런 물음 자체가 일어나지 않는 상태로 삶을 변화시킬 때만 해결 가능하다.

 

험난한 산을 오를 때 힘이 들면왜 이 산을 올라가야 하는가라는 물음을 계속 던진다. 그런 산을 올라야 하는 운명을 한탄한다. 이에 반해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강할 때 그 산은 아름답고 장엄하다. 그럴 때는왜 산을 올라가야 하는가라는 질문은 던지지 않는다. 인생의 의미에 대한 물음에 사로잡힌다는 것은 자기 정신에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정신력이 약해지다 보니 세상이 무의미하고 황량하게 보이는 것이다. 정신력을 강화시키면 세상은 아름답게 보인다. 이렇게 아름다운 세상에서 매 순간 충만한 기쁨을 느끼면서 경쾌하게 사는 것, 매 순간 충일함을 즐기면서 사는 것, 이게 아이의 정신이다. 니체는 삶을 찬양했다. 우리가 섬겨야 할 신은 춤출 줄 아는 신이라고 말했다. 삶을 즐기고 긍정하라고 주장했다.

 

아이처럼 인생을 즐기라는 얘기를 하는 니체를 보면 사람들은 그가 대단히 안락한 삶을 살았을 것으로 가정한다. 인생의 뜨거운 맛을 보지 못했기 때문에 철없는 소리를 한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근데 그렇지 않다. 그는 험난한 삶을 살았다. 다섯 살에 아버지를 잃었다. 예술과 학문 면에서 천재적 재능을 보여 25세의 나이에 스위스 바젤대 교수가 됐지만 10년도 되지 않아 병 때문에 교수직을 그만 두고 연금만으로 일생을 보낸다. 연금이 너무 적어 한겨울에도 방에 불을 때지 못할 정도로 가난했다. 제자였던 루 살로메란 여인을 사랑했지만 그녀의 사랑을 얻지 못하고 평생 독신으로 지냈다. 쓰는 책 역시 독자들의 관심을 끌지 못해 자비로 책을 내야만 했다. 조금 유명해진 45세에 광기가 엄습하면서 10년을 병석에서 식물인간처럼 지내다 죽는다. 참으로 기구한 운명의 사람이다.

 

 

 

그렇지만 그는 늘 운명에 맞서 강한 초인이 될 것을 주장했다. 저승에서 천국을 탐하지 말고 이승을 천국으로 만들라고 했다. 이를 위해서는 자기 운명을 받아들이고 사랑할 수 있어야 한다. 그게 초인이다. 그가 주장하는 초인은 자기 운명을 사랑하는 사람이다. 인간은 운명에 대해 세 가지 태도를 보인다.

 

첫째, ‘하면 된다는 것이다. 이런 극단적 자유의지 철학은 단죄의 철학이다. 이런 철학은 사회적으로 실패한 사람을 단죄한다. 당신이 실패한 것은 당신의 노력 부족 때문이다. 이런 단죄에 대해 사회적으로 실패한 사람은 억울하다고 할 것이다.

 

둘째, 숙명론이다. 일종의 패배주의다. 모든 것을 운명 탓으로 돌린다. 자유의지의 철학은 인간을 단죄하지만 숙명론은 사람을 무기력하게 만든다.

 

셋째, 운명을 긍정하고 사랑하는 것이다. 자신의 역경을 오히려 성장의 기회로 생각하고 험난한 운명에 감사하는 것이다.

 

초인의 대표 선수는 마쓰시타 고노스케이다. 94세의 나이로 죽을 때 종업원 13만 명, 570개의 기업을 거느렸다. 그는 늘 세 가지 은혜에 감사했다. 가난하게 태어난 것, 허약하게 태어난 것, 못 배운 것이 그것이다. 가난하기 때문에 부지런할 수밖에 없었고, 허약했기 때문에 건강의 소중함을 깨닫고 몸을 단련했다. 못 배웠기 때문에 무엇이든 배우려 했다. 보통 사람 같으면 좌절하고 절망했을 환경이지만 이것을 성공의 발판으로 만들었다. 이게 바로 니체가 얘기하는 초인이다.

 

“신은 죽었다.” 니체 하면 떠오르는 말 중 하나다. 도대체 왜 이런 소리를 한 것일까? 이 말의 의미는 무엇일까? 중세시대에는 종교가 생활이고 생활이 곧 종교일 정도로 종교의 영향력이 컸다. 지금의 종교가 가진 영향력은 너무 미미하다.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작아졌다. 이를 두고 니체는 신은 죽었다고 표현한 것이다. 그렇다면 누가 신을 죽인 것일까? 신을 죽인 것은 바로 우리다.

 

앞으로 우린 어떻게 우리를 위로할 것인가? 니체는 에리히 프롬처럼 종교를 두 가지로 나눴다. 먼저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종교처럼 죄책감을 강요하지 않고 사람들의 힘을 강화시키고 고양시키는 종교가 있다. 또 다른 하나는 기독교처럼 지상의 힘이나 쾌락을 죄악시하고 끊임없이 회개를 강요하는 종교가 그것이다. 인본주의적, 권위주의 종교다. 두 종교의 공통점은 인간이 만들어낸 것이고 신을 위한 것이 아닌 인간을 위한 것이라는 것이다. 인본주의적 종교는 인간을 성숙시키고, 발전시키고, 잠재력을 실현하는 데 도움을 준다. 권위주의적 종교는 잠재력을 손상시키고 억압한다. 기독교는 두 요소가 섞여 있다. 권위주의적 종교를 믿으면 믿을수록 사람들은 자신만이 절대적 진리를 믿고 있다고 생각한다. 오만해지고 다른 종교나 사상은 모두 허위 내지 이단이라고 배격하는 독선적인 인간이 된다고 니체는 주장했다. 북한은 권위주의적 종교가 갖는 모든 부정적 현상이 가장 극명하게 나타나는 곳이다.

 

초인은 예수 그리스도와 카이사르를 종합한 인간이다. 초인은 강한 긍지와 용기, 그리고 민활한 지혜를 갖추고 있으며 자신보다 강한 자에 대해서는 의연하고 도전적이지만 패자에 대해서는 관용과 자비를 베풀 줄 아는 사람을 가리킨다. 니체는 인간의 잠재력을 믿는다. 강인한 의지로 고통과 고난을 이겨내면서 과업을 성취할 수 있다. 근데 신에게 소망할 때의 인간은 지극히 초라해져 자신을 무력한 존재로 여기면서 신에게 모든 것을 해줄 것을 간구한다. 니체는 소망하고 있는 인간처럼 자기 비위를 거슬리는 것은 없다고 말한다. 니체는 나무처럼 살 것을 요구한다. 나무는 대지에 뿌리를 박고 있으면서도 끊임없이 위를 향한다. 천상을 돌아가야 할 고향으로 희구하지 말고 이 지상에 굳게 뿌리를 내리고 지상의 삶을 긍정하면서 초인의 고귀한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다음 주제는 예술이다. 예술이 삶을 변화시킬 수 있을까? 과학적 지식은 생존에 필요한 정보에 불과하다. 삶은 예술을 통해 충만해진다. 인간이 궁극적으로 원하는 것은 오래 사는 것이 아니라 짧게 살더라도 충만하게 사는 것이다. 근데 충만함을 주는 것은 과학이 아닌 예술이다. 예술은 세계를 단순히 물리화학적 작용이나 생존, 종족 보존을 위해 발버둥치는 곳이 아니라 아름답고 충만한 곳으로 보여준다. 세상이 살 만한 곳임을 보여준다. 오직 예술을 통해서만 삶은 정당화된다. 예술가가 건강한 힘으로 충일해 있는 상태를 도취라 부른다. 예술을 낳을 수 있는 충동에는 두 종류가 있다. 가상에의 충동과 도취에의 충동이 그것이다. 가상에의 충동은 아름다운 가상을 만들어내고 싶어 하는 충동으로 건축, 미술, 조각 같은 조형예술을 가능하게 하는 충동이다. 아폴론적 예술이라 부른다. 도취에의 충동은 도취에 빠져 개체의식을 상실하고 모든 것들과 하나가 되고 싶어 하는 충동이다. 이런 충동은 춤과 음악 같은 비조형예술을 가능하게 한다. 디오니소스적 예술이다.

 

도취는 경기에서 승리하고 싶은 욕망과 경기에 임했을 때의 강렬한 흥분상태에서 비롯된다. 도취의 본질은 힘 내지 생명력의 상승과 충만의 느낌이다. 예술은 이런 느낌에서 비롯된다. 예술을 경험하는 자들은 이런 느낌 속으로 빠져든다. 이런 느낌에 빠질 때 세상이 아름답게 보인다. 생명력이 넘칠 때 사물을 아름답게 볼 수 있다. 예술은 과학과 마찬가지로 하나의 허구이다. 과학은 삶에 유용한 정보는 주지만 삶을 유의미하고 충만한 것으로 만들지는 못한다. 종교는 사람들에게 의미와 방향을 주고 삶을 충만하게 만드는 허구를 제공했다. 근데 종교는 과학의 공격에 의해 무력해졌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 삶을 충만하게 할 수 있는 것은 예술뿐이다. 누구나 삶의 예술가가 될 수 있다. 삶의 예술가란 매 순간 도취된 기분 속에서 삶과 세상을 아름답고 충만한 것으로 경험할 수 있는 사람이다. 우리는 삶의 예술가가 돼야 한다.

 

죽음이란 무엇일까? 죽는다는 것은 두렵기만 한 일일까? 그가 생각하는 죽음은 삶의 끝이 아니라 절정이다. 죽음은 인간은 성숙시키는 최고의 기회다. 자기 삶을 최고로 승화시키기 위해 자살을 하는 사람도 있다. 삶에 대한 사랑 때문에 자살을 하는 것이다. 자신의 삶이 누추하고 비루하게 보이는 것을 원하지 않기 때문에 자살을 택한다. 그렇기에 자살하는 순간에도 의연하다. 그들은 더 오래 살게 해달라고 의사에게 매달리지 않고, 죽어서 천국에 가게 해달라며 신에게 애원하지도 않는다. 이들은 최고로 독립적이며 자유로운 자들이라고 니체는 주장한다. 헬렌 니어링이 쓴 <아름다운 삶, 사랑, 그리고 마무리>에는 100살이 된 남편이 단식을 통해 생을 마감하는 장면이 나온다. 이런 내용이다.

 

“단식에 의한 죽음은 자살과 같은 난폭한 형식이 아니다. 그 죽음은 느리고 품위 있는 에너지의 고갈이며, 평화롭게 떠나는 방법이자 스스로 원한 것이다. 안팎으로 그이는 준비를 했다. 그이는 언제나기쁘게 살았고 기쁘게 죽으리. 나는 내 의지로 나를 버리네라는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의 말을 좋아했다. 나는 동물들이 흔히 택하는 죽음의 방식, 보이지 않는 곳으로 가서 스스로 먹이를 거부함으로써 죽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것을 조용히 받아들였다.”

 

일견 자살을 찬양하는 것처럼 들릴 수도 있다. 하지만 꼭 그렇지만은 않다. 우리가 보고 듣는 대부분의 자살은 죽음으로의 도피다. 나약함과 비겁함의 표현이다. 니체는 어설픈 연민을 비판했다. 연민은 인간을 성장시키는 대신 연약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연민을 보낸다는 것은 그 사람을 불쌍하게 보는 것이고, 그 사람을 나약하고 무력한 사람으로 여기는 것이다. 당연히 상대의 무력감이 커진다. 연민을 아무 거부감 없이 받아들이는 사람은 그 상황이 되면 누구나 자신처럼 될 것으로 생각한다. 극복할 생각을 하지 않는다. 이렇게 연민에 빠지면 발전이란 없다. 니체는 어떤 사람이 어려움에 처했을 때 그에게 필요한 것은 연민이 아닌 채찍질이라고 생각했다.

 

나답게 산다는 것은 무엇일까? 니체는그대 자신이 되라는 주장을 했다. 나만의 개성을 살려야 한다고 했다. 교육 방법에는 두 가지가 있다. 길들이는 방식과 길러내는 방식이 그것이다. 길들이는 방식은 인간을 특정한 틀에 맞추도록 강요한다. 이런 방식은 인간을 병들게 하고 위축시킨다. 길러내는 방식은 인간의 타고난 소질과 성향을 긍정적으로 발전시킨다. 그대 자신이 되기 위해서는 자기 성격과 적성, 그리고 환경을 잘 고려하면서 그것을 긍정적으로 승화시키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이를 위해서는 남의 눈치를 보지 않고 사는 주체성을 가져야 한다. 남의 평가에 민감한 것은 노예근성 때문이다. 노예는 자신을 주체적으로 평가하지 못한다. 노예를 평가할 수 있는 사람은 주인뿐이기 때문이다. 노예는 주인이 잘했다고 칭찬하면 기뻐하고 못했다고 지적하면 슬퍼한다. 남의 시선과 평가에 연연할 때 자신을 노예로 하락시키고 있는 것이다. 자신이 되기 위해서는 내면의 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내면에는 끊임없이 자신을 고양시키고 강화시키고 싶어 하는 의지가 존재한다. 이런 의지는 피상적인 삶을 살고 있을 때 병에 걸리게 하든지, 지금의 삶에 대해 권태나 허무감을 준다. 그렇게 해서 변화를 유도한다.

 

사는 게 힘든가? 그게 무엇 때문이라고 생각하는가? 어느 날 갑자기 흑기사가 나타나 내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그런 날이 온다고 생각하는가? 니체의 말을 들어보면 그런 날은 올 것 같지 않다. 내 문제는 내 스스로 해결해야만 한다. 고난에 맞서 싸우는 초인이 돼 스스로를 극복해야 한다. 초인정신이야말로 나약한 우리들에게 필요한 정신이란 생각이다.

 

사는 게 힘든가?

그게 무엇 때문이라고 생각하는가?

어느 날 갑자기 흑기사가 나타나

내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그런 날이

온다고 생각하는가?

니체의 말을 들어보면

그런 날은 올 것 같지 않다.

 

 

한근태 한스컨설팅 대표 kthan@assist.ac.kr

필자는 서울대 섬유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애크론대에서 공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핀란드 헬싱키경제경영대에서 경영학 석사 학위(MBA)를 받았다. 대우자동차 이사, IBS컨설팅그룹 상무, 한국리더십센터 소장 등을 지냈고 서울과학종합대학원에서 겸임 교수를 맡고 있다.

 

 

동아비즈니스리뷰 294호 The Centennial Strategy 2020년 4월 Issue 1 목차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