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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을 원하는가? 타인에게 미움받을 용기를 가져라

한근태 | 171호 (2015년 2월 Issue 2)

 

Article at a Glance – 자기계발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지 않는다는 건 부자연스러운 동시에 불가능한 일이다. 자유에는 대가가 뒤따르고 타인에게 미움을 살 수밖에 없다. 행복해지려면 미움받을 용기가 필요하다. 그런데도 많은 사람들의 남의 시선을 의식해 나의 삶을 결정한다. 또 타인과 끊임없이 비교하며 열등감을 키워간다. 인생은 타인과의 경쟁이 아니다. 건전한 열등감은 타인과 비교해서 생기는 것이 아니라 이상적인 나와 비교해서 생기는 것이다. 타인의 과제에 개입하는 것 역시 나와 상대방 모두의 인생을 힘들게 하는 원인이 된다. 내 과제에 대한 경계선을 정하고 타인의 과제는 버려라. 그것이 인생의 짐을 덜고 내 삶은 더 행복하게 하는 첫걸음이다.

 

 

20년 이상 안경을 쓰다 라식수술을 한 지인이 있다. 그에게 안경은 신체의 일부분과 같았기에 안경을 벗고 세상을 본다는 사실에 스스로 감동했다. 그런데 만나는 사람 중 드디어 그가 안경을 벗게 됐다는 사실을 알아보는 이는 거의 없었다. 심지어네가 안경을 썼었나라고 되묻기까지 했다. 그 일을 겪은 뒤 그는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깨달았다.

 

“사람들은 내게 별 관심이 없다는 지극히 당연한 사실이었다. 아기를 데리고 가족사진을 찍은 엄마는 현상된 사진을 볼 때 가장 먼저 누구를 볼까? 바로 자신이다. 아기가 아닌 자기 자신을 가장 먼저 보는 것이다. 사람들은 다른 사람에게 별 관심이 없다. 오로지 자신에게만 관심이 있을 뿐이다. 그런데 우리는 다른 사람의 시선에 묶여 하루하루를 살아간다. 자신의 생각보다는 다른 사람이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지배를 받는다. 그래서 자신은 싫더라도 다른 사람을 의식해 중요한 일을 결정한다. 부모님이 원한다는 이유만으로 원치도 않는 전공을 선택하기도 하고, 배우자가 주장해 원치 않은 모습으로 헤어스타일을 바꾸기도 한다. 그런 인생은 내 인생이 아니다. 다른 사람의 인생을 대신 사는 것이다. 여러분은 어떤가? 심리학자 알프레드 아들러의 철학을 일본학자가 쉽게 풀어 쓴 책 <미움받을 용기>는 이러한 고민을 곱씹어보게 한다.

 

변화에 필요한 용기

그는 트라우마에 부정적이다. 과거에 사로잡혀 현재를 희생하지 말라고 주장한다. 옷을 얇게 입어 감기에 걸렸다면 원인이 중요할까, 치료가 중요할까? 과거의 일로 지금의 내가 불행하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정신과의사는 과거를 들추면서 사람들을 위로한다. 당신에겐 잘못이 없다고 얘기한다. 어떤 경험도 그 자체로서는 성공 또는 실패의 원인이라 할 수 없다. 경험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경험이 부여한 의미에 따라 자신이 결정하는 것이다. 우물물을 차갑게 느끼느냐, 뜨겁게 느끼느냐는 주관적 사실이다. 과거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느냐에 따라 현재 상태가 정해진다. 문제는 무엇이 있었느냐가 아니라 그 문제를 어떻게 해석하느냐다. 문제는 과거가 아닌 지금 여기에 있다. 과거 어떤 일이 있었느냐, 그 일이 지금 내게 어떤 영향을 미쳤느냐보다 앞으로 어떻게 할 것인지가 중요하단 얘기다.

 

사람들은 변화를 싫어한다. 변화해야 한다고 말은 하지만 변화하지 못한다. 왜 그럴까? 스스로 변하지 않겠다고 결심했기 때문이다. 변화하기 위해서는 용기가 필요하다. 변함으로써 생기는 불안을 선택할 것이냐, 변하지 않아서 따르는 불만을 선택할 것이냐? 변화의 핵심은 변화하겠다는 용기다. 지금 생활양식을 바꾸고 싶은가? 어떻게 하느냐고? 바꾸겠다고 결심하면 된다. 변화에 따른 불편함을 감수하면 된다. 소설가를 꿈꾸지만 생전 글을 쓰지 않는 사람이 있다. 그 꿈이 과연 이뤄질 수 있을까? 그런 사람은 왜 그렇게 행동할까? 생각만 하고 글을 쓰지 않고 응모하지 않음으로써 가능성을 남겨두고 싶은 것이다. 남의 평가를 받고 싶지 않고 낙선하는 현실도 피하고 싶은 것이다. 소설가가 되고 싶으면 방법은 간단하다. 열심히 글을 쓰면 된다.

 

적면(赤面)공포증에 걸린 여학생이 있다. 남 앞에 서면 얼굴이 붉어지는 병이다. 왜 그런 일이 일어날까? 그런 병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여학생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남자에게 채이는 것이다. 그럴 때 적면공포증은 좋은 이유가 된다. “그 남자를 못 만나는 것은 적면공포증 때문이야라고 스스로 위로할 수 있기 때문이다. 고백할 용기를 내지 않아도 되고 설령 차인다 해도 스스로를 납득시킬 수 있다. 적면공포증만 낫는다면 해낼 수 있다는가능성속에서만 살고 싶은 것이다. 결정적 순간에 감기에 유난히 잘 걸리는 사람도 비슷한 케이스다. 감기에 걸리면 모든 것이 용서되기 때문이다. 감기 핑계를 대지만 사실은 감기에 의존해 살아가는 것이다. 맘에 들지 않는 회사와 상사도 그렇다. 맘에 들지 않지만 회사를 그만 두지 못한다. 그게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래야 모든 불만을 회사와 상사 탓으로 돌릴 수 있다. 그게 없어지면 인생 자체가 피곤해진다. 또 다른 핑곗거리를 찾아야 하기 때문이다. 한국에서는 대통령이 그런 역할을 한다. 많은 사람들이 자기 인생이 힘든 이유를 정치권, 그중에서도 대통령에게서 찾는다. 만약 대통령이 정치를 잘한다면 그들은 다른 이유를 찾아 헤맬 것이다.

 

모든 고민은 인간관계에서 비롯된다. 아들러의 말이다. 맞는 말이다. 원활한 인간관계를 위해서는 자신의 감정, 다른 사람의 감정을 잘 읽을 수 있어야 한다. 대인관계를 해치는 감정 중 하나는 열등감이다. 열등감이란 어떤 감정일까? 열등감은 주관적 감정이다. 키에 대해 열등감이 있는 사람이 있다. 작은 키에 대한 불만을 토로했더니 상대는 이렇게 말했다.

 

 

 

 

“키는 커서 뭐 하려고? 넌 사람을 편하게 하는 재능이 있잖아.” 그는 작은 키를 다르게 해석했다. 작은 키가 문제가 아니라 작은 키에 대해 어떻게 해석하느냐, 어떤 의미를 부여하느냐, 어떤 가치를 주느냐가 행동을 결정하는 것이다. 키에 대한 열등감은 타인과의 비교를 통해 만들어낸 주관적 감정이다. 비교대상이 없다면 열등감은 존재하지 않는다. 열등감은 객관적 사실이 아닌 주관적 해석이다.

 

 

인생은 타인과의 경쟁이 아니다

인간은 우월성을 추구하는 욕구가 있다. 더 나아지길 바란다. 기는 아이는 걷기를 바라고, 걷는 자는 뛰기를 바라고, 뛰는 자는 날기를 바란다. 이와 대조를 이루는 것이 열등감이다. 우월성 추구도, 열등감도 제대로만 발현된다면 성장을 위한 자극이 될 수 있다. 반대로 콤플렉스에 빠져어차피란 말을 입에 달고 사는 사람들이 있다. 그건 열등감이 아니라 열등 콤플렉스다. 열등 콤플렉스는 자신의 열등감을 변명거리로 삼기 시작한 상태를 말한다. 가방 끈이 짧아서, 여자라서, 지방대 출신이라 등등우리가 믿는 인과관계는 실은 무늬만 인과관계일 가능성이 높다. 인과관계가 없는 것을 마치 중대한 인과관계가 있는 것처럼 스스로에게 설명하고 납득시키려 한다. 열등 콤플렉스처럼 우월 콤플렉스가 있다. 권위 부여가 그렇다. 자신이 권력자와 각별한 사이라는 것을 어필한다. 그걸 통해 자신이 특별한 존재라는 것을 부각시킨다. 경력을 속이거나 명품 브랜드 제품을 과시하는 것도 일종의 권위 부여이자 우월 콤플렉스다. 권위를 빌려 자신을 포장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의 가치관에 맞춰 다른 사람의 인생을 사는 것이다. 자기 공을 뽐내고 싶어 하는 사람, 과거 영광에 매달려 걸핏하면 무용담을 늘어놓는 것도 우월 콤플렉스다. 자랑은 열등감의 발로다. 정말 자신 있는 사람은 자랑하지 않는다. 열등감이 심하니까 자랑하는 것이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누구 한 사람도 자신을 인정하기 않기 때문이다. 열등 콤플렉스와 우월 콤플렉스는 뿌리가 같다.

 

불행을 자랑하는 형태도 있다. 성장과정에서 자신이 겪은 불행을 마치 뽐내듯이 말하는 사람들이다. 타인이 위로하거나 변화를 권하면넌 내 심정을 몰라하면서 도움의 손길을 뿌리친다. 이런 사람은 불행을 특별하다고 여기고 불행함을 내세워 남보다 위에 서려 한다. 불행을 무기로 상대를 지배하려 한다. 자신이 얼마나 불행한지, 얼마나 괴로운지 알림으로써 주변 사람을 걱정시키고 그들의 말과 행동을 지배한다. 아들러는오늘날 연약함은 매우 강한 권력을 지녔다고 지적했다.

 

인생은 타인과의 경쟁이 아니다. 인생은 누구와 경쟁하지 않고 그저 앞을 보고 걷는 것이다. 다른 사람과 비교할 것도 없다. 건전한 열등감은 타인과 비교해서 생기는 것이 아니라 이상적인 나와 비교해 생기는 것이다. 내 얼굴을 주의 깊게 보는 사람은 나뿐이다. 관계의 중심에 경쟁이 있으면 인간관계의 고민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경쟁의 끝에는 승자와 패자만 남기 때문이다. 경쟁이나 승패를 의식하면 필연적으로 열등감이 생긴다. 콤플렉스는 그 연장선상에 있다. 늘 남과 비교를 한다면 나를 제외한 모든 사람은 경쟁자가 된다. 더 나아가 세상을 적으로 느끼게 된다. 그게 경쟁의 무서움이다. 경쟁 속에서 사는 사람은 마음이 편하지 않다. 엄청난 성공을 거두고도 행복하지 않은 사람은 늘 경쟁 속에서 살기 때문이다. 경쟁의 도식에서 나와야만 행복을 느낄 수 있다.

 

 

 

인생의 과제는 자립하고 사회와 조화를 이루며 살아가는 것이다. 사회적 존재로 살려면 인간관계를 벗어날 수 없다. 그게 인생의 과제다. 일도 그렇다. 일하고 싶지 않은 것도 따지고 보면 노동을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일과 얽힌 인간관계를 피하고 싶은 것이다. 일을 통해 다른 사람의 비판과 질타를 받는 것, 무능의 낙인이 찍히는 것, 나의 존엄에 상처가 나는 것이 싫은 것이다. 그건 아니다. 대인관계를 위해서는 내가 먼저 변하면 된다. 내가 변하면 주변도 달라진다. 아들러 심리학은 타인을 바꾸기 위한 심리학이 아니다. 자신을 바꾸기 위한 것이다.

 

우리는 인정에 목숨을 건다. 왜 그럴까? 인정을 받으면 기분이 좋아진다. 인정받음으로써 내 자신이 가치 있다는 것을 실감한다. 자신감이 생기고 열등감이 사라진다. 근데 인정에 목숨을 걸어서는 안 된다. 위험하다. 자칫하면 인정의 덫에 걸린다. 직장에서 쓰레기를 치웠다 하자. 동료들은 전혀 눈치 채지 못한다. 고마워하지도 않는다. 인사 한마디 건네는 사람이 없다. 그래도 계속 쓰레기를 치우겠는가? 아마 치우지 않을 것이다. 인정 욕구의 위험이 거기에 있다. 대개 그것은 상벌교육의 영향이다. “적절한 행동을 하면 칭찬받고 그렇지 못하면 야단 맞는다.” 잘못된 생활양식이다. 누군가에게 칭찬받지 못하면 분개하고 다시는 이런 일을 하지 않는다? 뭔가 이상하다. 타인의 기대를 만족시키기 위해 살아서는 안 된다. 타인의 기대를 만족시킬 필요도 없다. 누굴 위해 사는가라는 질문을 던지면 모두가당연히 나 자신을 위해 산다고 말한다. 그런데도 인정에 목숨을 거는 것은 타인을 위한 삶을 사는 것과 다를 바 없다. 타인의 인정을 바라고 타인의 평가에만 신경을 쓰다 보면 끝내 타인의 인생을 살게 되는 것이다. 타인도 마찬가지다. 타인도 내 만족을 위해 사는 것이 아니다. 상대가 내가 원하는 대로 행동하지 않는다고 화를 내면 안 된다.

 

나와 타인의 과제를 분리하라

대인관계 핵심 중 하나는 과제의 분리다. 나의 과제와 그 사람의 과제가 뭔지를 생각하고 이를 구분하면 대인관계가 편해진다는 말이다. 아이의 공부 문제만 해도 그렇다. 공부는 누구의 과제일까? 당연히 아이의 과제다. 공부하라고 잔소리하는 것은 타인의 과제에 끼어드는 행위다. 그래서는 안 된다. 자신의 과제와 타인의 과제를 분리해야 한다. 타인의 과제에 함부로 침범해서는 안 된다. 트러블의 원인 중 대부분은 타인의 과제에 함부로 침범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누구의 과제인지를 어떻게 구분할 것인가? 선택의 최종 결과를 누가 받아들이는지, 누가 결과에 대한 책임을 지는지를 생각하면 된다. 공부하지 않는 결과를 누가 지는가? 말을 물가로 데려갈 수는 있지만 물을 마시게 할 수는 없다. 과제를 구분하고 타인의 과제를 버려라. 타인의 과제에 함부로 참견하지 말아라. 많은 대인관계가 편해질 것이다.

 

 다음은 가족관계다. 가족관계는 쉽지 않다. 한번 망가지면 회복하기 어렵다. 가족관계는 쉬울 것 같지만 사실은 가장 어려운 문제다. 왜 그럴까? 대부분 과제의 분리 때문이다. 가족관계 회복을 위해서는 의식적으로 과제를 분리해야 한다. 아이의 전공 문제, 군대 문제, 심지어 결혼 문제까지 깊숙이 관여하는 부모가 있다. 당연히 자식과 사사건건 갈등을 빚는다. 모두 다 자녀들의 과제다. 당신 의견을 낼 수는 있지만 최종 결정은 자식이 해야 한다. 얼마나 많은 부모들이 자녀를 사랑한다는 미명 아래 자녀와 등을 지고 사는가? 상대를 믿는 것은 당신의 과제다. 자신의 기대와 신뢰를 받는 상대가 어떻게 행동하느냐는 그 사람 과제다. 그 선을 긋지 않은 채 자신의 희망만 밀어붙이면 그건 스토커와 다름 없다. 하지 말아야 할 개입이다. 타인의 과제에 개입하는 것과 타인의 과제를 떠안는 것이 인생을 힘들게 한다. 여기부터 저기까지는 내 과제가 아니다라고 경계선을 정하라. 타인의 과제는 버려라. 그것이 인생의 짐을 덜고 인생을 단순하게 만드는 첫걸음이다. 근데 왜 자꾸 타인의 과제에 개입을 할까? 편하기 때문이다. 애가 신발끈을 매지 못한다. 도와주면 문제는 간단하다. 기다리는 것보다 낫다. 근데 아이의 과제를 빼앗는 꼴이 된다. 그런 개입이 반복되면 아이는 아무 것도 배우지 못한다. 과제를 직시할 용기를 잃게 된다. 곤경에 직면해보지 못한 아이는 곤경이 닥칠 때마다 그것을 피하려고만 한다.

 

현재 당신은 누구의 생각에 좌우되는가? 자기 생각인가, 아니면 주변 사람의 생각인가? 혹시 원하지는 않지만 타인의 기대를 만족시키기 위해 살고 있지는 않은가? 타인의 기대를 충족시키며 사는 것은 힘들지 않다. 내 인생을 타인에게 맡기면 된다. 타인에게 인정받는 삶을 살 것인가, 아니면 인정받지 않아도 상관없는 삶을 살 것인가? 어느 게 자유로울까? 누구에게도 미움을 받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언제나 다른 사람의 안색을 살피고 모든 사람에게 충성을 맹세해야 한다. 포퓰리즘에 빠진 정치가처럼 하지도 못할 일을 할 수 있다고 약속하는 것이다. 책임지지 못할 일까지 떠맡으면 된다. 쉽지 않은 삶이다. 미움받으면서 살고 싶어 하는 사람은 없다. 근데 모든 사람에게 사랑을 받을 수는 없다. 어차피 미워할 사람은 나를 미워하고, 사랑할 사람은 나를 사랑한다. 진정한 자유란 무엇일까? 욕망이나 충동에 이끌려 사는 것일까? 비탈길을 굴러 내려가는 돌멩이처럼 사는 것이 자유일까? 그렇지 않다. 그런 삶은 욕망과 충동의 노예로 사는 것과 같다. 진정한 자유란 굴러 내려가는 자신을 아래에서 밀어 올려주는 태도가 아닐까? 돌멩이는 힘이 없다. 하지만 우린 돌멩이가 아니다. 경향성에 저항할 수 있는 존재다. 굴러 떨어지는 자신을 멈추고 비탈길을 올라갈 수 있는 힘이 있다.

 

인정받고 싶은 욕구는 자연스럽다. 그렇다고 다른 사람의 인정을 위해 비탈길을 계속 굴러야 하는 것은 아니다. 자유란 본능이나 충동에 저항하는 것이다. 타인에게 미움을 받는 것이다. 그건 자유롭게 살고 있다는 증거다.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지 않는다는 건 부자연스러운 동시에 불가능한 일이다. 자유에는 대가가 뒤따른다. 자유를 얻으려면 타인에게 미움을 살 수밖에 없다. 행복해지려면 미움받을 용기가 필요하다.

 

누구에게도 미움을

 

받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언제나 다른 사람의 안색을 살피고

 

모든 사람에게 충성을 맹세해야 한다.

 

책임지지 못할 일까지 떠맡으면 된다.

 

 

그렇다면 인간관계의 목표는 무엇일까? 공동체 감각이다. 타인을 친구로 여기고 내가 있을 곳은 여기라고 느낄 수 있는 것이다. 공동체 감각을 사회적 관심(social interest)이라고도 한다. 사회의 최소 단위는 가족이 아니다. 너와 나다. 두 사람이 있으면 그게 사회다. 공동체 감각을 이해하려면 우선 너와 나를 기준점으로 생각하면 된다. 자기에 대한 집착을 타인에 대한 관심으로 바꾸어야 한다. 자기에 대한 집착을 자기중심적으로 바꾸어 보라. 집단의 조화를 깨뜨리는 자, 자기 멋대로인 자, 세상이 자기를 중심으로 돈다고 착각하는 자, 인정욕구에 사로잡힌 자는 자신밖에 보지 않는다. 나 이외에는 관심이 없다. 자기중심적이다. 타인에게 잘 보이려고 남들의 시선에 신경을 쓰는 것도 따지고 보면 타인에 대한 관심이 아니라 자신에 대한 집착이다. 남에게 어떻게 보이느냐에 집착하는 삶이야말로 자기중심적 생활양식이다. 나는 세계의 중심이 아니다. 자신밖에 관심이 없는 사람은 본인이 세계의 중심에 있다고 생각한다. 이런 사람에게 타인이란나를 위해 뭔가를 해줄 사람에 불과하다. 모든 사람은 나를 위해 행동하는 존재이며, 내 기분을 최우선으로 고려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소속감을 갖기 위해서는 공동체에 적극 헌신해야 한다. 그 사람이 내게 무엇을 해줄까 대신 내가 이 사람에게 무엇을 줄 수 있을까를 생각해야 한다. 소속감이란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획득하는 것이다.

 

칭찬을 경계하라

과도한 칭찬도 조심해야 한다. 함부로 칭찬하지 말아라. 칭찬의 행위는 능력 있는 사람이 능력 없는 사람에게 내리는 평가의 측면이 있다. 엄마가 아이를 자기보다 아래로 보고 무의식 중에 상하관계로 만들려는 것이다. 아들러는 상벌교육을 강하게 부정한다. 아이를 조정하려는 측면 때문이다. 칭찬하고 칭찬받으려는 것은 인간관계를 수직으로 본다는 증거다. 아들러는 온갖 수직관계를 반대하고 모든 인간관계를 수평관계로 만들자고 주장한다. 인간관계를 수직으로 받아들이면 상대를 자신보다 아래라고 보고 개입을 한다. 상대를 바람직한 방향으로 이끌려고 한다. 내가 옳고 상대는 틀렸다고 생각한다. 수평관계를 맺으면 조종은 사라진다. 칭찬도 하지 않고 야단도 치지 않아야 한다. 이게 용기 부여다. 칭찬은 받을수록 능력이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칭찬받고 기쁨을 느낀다면 수직관계에 종속돼 있는 것이다. 나는 능력이 없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다. 스스로 가치 있는 사람으로 생각하기 위해서는 타인을 평가하지 않아야 한다. 평가란 수직관계에서 비롯된 말이다. 만약 수평관계를 맺고 있다면 감사, 존경, 기쁨의 인사 같은 말이 나온다. 인간은 자신이 가치 있다고 느낄 때만 용기를 얻는다.

 

 

공동체 감각을 기르기 위해서는 자기 수용, 타자 신뢰, 타자 공헌이 필요하다. “나는 강하다, 나는 할 수 있다라는 자기 긍정은 그럴 듯하지만 자칫 자신을 속이는 행위가 될 수 있다. 위험하다. 자기 수용은 하지 못하는 나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할 수 있을 때까지 나아가는 것을 뜻한다. 자신을 속이지 않고 부족한 자신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다. 긍정적 포기다. 과제 분리와 마찬가지로 변할 수 있는 것과 변할 수 없는 것을 구분하는 것이다. 불가능한 것을 받아들이는 것이 자기 수용이다. 신뢰는 다른 사람을 믿을 때 조건을 달지 않는 것이다. 신뢰의 반대는 회의다. 남을 의심하고 친구를 의심하는 것이다. 의심의 눈으로 상대를 보면 상대는 바로 느낀다. 발전적 관계가 만들어지지 않는다. 배신할지, 안 할지를 결정하는 것은 내가 아닌 타인의 과제다. 그저 내가 어떻게 할 것인가만 생각하면 된다. 신뢰하지 못하면 누구와도 깊은 관계를 맺을 수 없다. 타자 신뢰를 통해 더 깊은 관계 속으로 들어갈 용기를 가질 때 인간관계의 즐거움이 늘어나고 기쁨이 커진다. 가장 좋은 타자 공헌은 일이다. 노동은 돈 버는 수단이 아니다. 노동을 통해 타인에게 공헌하고, 공동체에 헌신하며, 누군가에게 도움이 된다는 것을 실감한다. 마지막은 공헌이다. 공헌은 내가 남을 위해 무언가를 해주는 것을 의미한다. 무언가 공헌하고 있다고 생각하면 현실이 다르게 보인다. 남들이 인정하든, 그렇지 않든 상관없다. 인간은 누군가에게 도움이 된다고 느낄 때 자기 가치를 실감한다.

 

인생은 찰나의 연속이다. 우리는 지금 여기를 살아갈 수밖에 없다. 춤을 추는 지금 여기에 충실하면 그걸로 충분하다. 등산의 목적은 빨리 산에 오르는 것이 아니다. 헬기를 타면 5분 만에 오를 수 있다. 지금 여기에 강력한 스포트라이트를 비치면 과거도 미래도 잘 보이지 않는다. 현재만이 보인다. 과거에 어떤 일이 있었건, 미래에 어떤 일이 벌어지건 상관 없다. 난 지금 이곳에서 열심히 즐기며 살 뿐이다. 인생 최대의 거짓말은 지금 여기를 살지 않는 것이다. 과거를 보고, 미래를 보고, 인생 전체에 흐릿한 빛을 비추면서 뭔가를 본 것 같은 착각에 빠져 있는 것이다. 여러분은 지금 어떤 삶을 살고 있는가?

 

 

한근태한스컨설팅 대표 kthan@assist.ac.kr

필자는 서울대 섬유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애크론대에서 공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핀란드 헬싱키경제경영대에서 경영학 석사 학위(MBA)를 받았다. 대우자동차 이사, IBS컨설팅그룹 상무, 한국리더십센터 소장 등을 지냈고 서울과학종합대학원에서 겸임 교수를 맡고 있다.

  • 한근태 한근태 | - (현) 한스컨설팅 대표
    - 서울과학종합대학원 겸임 교수
    - 대우자동차 이사 IBS 컨설팅 그룹 상무
    - 한국리더십센터 소장
    kthan@assist.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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