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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visiting Machiavelli-2

약소국의 분노를 古典으로 터뜨리다

김상근 | 92호 (2011년 11월 Issue 1)


편집자주

많은 사람들은 마키아벨리를권모술수의 대가로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는 억울하게 살고 있는 약자들에게더 이상 당하지 마라고 조언했던 인물입니다. 메디치 가문의 창조 경영 리더십 연재로 독자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았던 김상근 연세대 교수가 이번 호부터 마키아벨리를 주제로 새 연재를 시작합니다. 시대를 뛰어넘는 통찰력을 주는 마키아벨리의 이야기 속에서 깊은 지혜와 통찰을 얻으시기 바랍니다.

 

나의 친구, 마키아벨리?

본격적으로 마키아벨리의 생애와 사상을 재해석하기 전에 먼저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가 있다. 스스로마키아벨리의 친구임을 자처하는 일본 작가 시오노 나나미에 대한 평가다. 현재 마키아벨리에 대한 책 중에서는 시오노 나나미의 <나의 친구, 마키아벨리>가 가장 많은 독자를 확보하고 있기 때문에 한국에서 마키아벨리하면 시오노 나나미의 책을 참고하게 된다. 먼저 이 책을 평가해두는 것이 좋겠다.

 

널리 알려진 대로 시오노 나나미는 일본에서 태어나 가큐수인(學習院)대 철학과를 졸업했다. 1964년에 이탈리아로 건너가 현지 의사와 결혼하고 살면서 주로 로마 및 르네상스 역사와 관련된 책을 집필하고 있다. 시오노 나나미는 자신의 인생 방향을 결정지은 사람 중의 한 명이 바로 마키아벨리라고 지명하면서나의 친구라는 친밀한 표현을 사용하고 있다. 실제로 시오노 나나미가 집필한 많은 책 중에서 <나의 친구 마키아벨리>를 자세히 읽어보면 다른 책에서 볼 수 없는 감정이입과 정성스러운 글쓰기가 느껴진다. 독자들의 관심에 눈높이를 맞추고 책읽기의 몰입을 증대시키는 시오노 나나미의 글 솜씨는 언제나 경탄을 자아내게 만든다.

 

그러나 시오노 나나미의 글은 기초적인 사료 분석의 미숙함을 드러내고 있기 때문에 조심해서 읽어야 한다. 시오노 나나미의 글은 역사가 아니라 일종의 수필에 가깝다. 이렇게 냉정하게 말하는 것은 남의 글을 깎아내려 내 글을 더 읽어 주십사 간청하기 위함이 아니다. 시오노 나나미의 글을 조심해서 읽어야 한다고 굳이 강조하는 이유는 그녀의 글에는 마키아벨리와 그 시대에 대한 정확한 이해가 결여돼 있기 때문에 자칫하면 마키아벨리의 생애와 사상을 오독(誤讀)으로 이끌 수 있다는 염려에서다. 시오노 나나미가 쓴 <나의 친구 마키아벨리>는 마키아벨리에 대한 정확한 글이 아니다. 예를 들면, 마키아벨리는 피렌체의 외무를 담당하는 제2 서기장 자격으로 프랑스에 4번이나 중대한 출장을 다녀왔다. 프랑스 국내에서 이동 중이던 왕과 대신을 따라 그는 프랑스 전역을 누비면서 프랑스인들이 어떻게 사고하고 행동하는지 관찰했고 독서광답게 틈틈이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쓴 <갈리아 전쟁기>도 읽었다.1 지금의 독일이라고 할 수 있는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를 알현하고 그의 능력과 인간됨을 관찰할 수 있었던 출장업무도 맡겨졌다. 그러나 시오노 나나미는 마키아벨 리의 이런 업무들에 대해 아무런 언급을 하지 않는다. 자기가 알고 있는 부분(이탈리아)에 대해서만 모든 지면을 할애하고 잘 알지 못하는 부분은 아무런 이유없이 생략해버리는 것은 역사를 연구하는 사람의 태도가 아니다. 사실 마키아벨리에 대한 연구는 이미 기본 사료(저술과 편지, 공문서 등)에서부터 기초 연구서까지 거의 완벽하게 구비돼 있는 상태다. 마키아벨리가 쓴 모든 글은 이탈리아어는 물론이고 영어 및 서구 언어로 번역돼 있다. 시오노 나나미의 글은 이런 일반적인 사료에 자신의 사생활과 느낌의 단편들을 개입시킴으로써 독자들에게 글을 읽는 재미를 증대시키는 효과를 노리고 있다. 마키아벨리의 난해한 편지를 인용하다가 갑자기 자신의 이탈리아 생활 경험을 끼워 넣는다.

 

고전 읽기는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마키아벨리의 글이 특히 그렇다. 독자들의 눈높이에 글의 수준을 맞추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 그렇다고 해서 마키아벨리에 대한 기존 사료를 모아다가 대충 얼버무리고 개인적 감상과 소회를 뒤섞는 것은 그녀가 자주 사용하는 표현처럼글 쓰는 사람의 도리가 아니다. 마키아벨리는 처음부터 공포에 사로잡혀 있던 인물, 그 두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인간의 변하지 않는 행동양식을 유심히 관찰했던 인물, 약자로서 살아남기 위해 강자의 힘과 권력의 속성을 파헤침으로써 공포에 질린 우리 삶에 희망과 용기를 심어준 인물이다. 마키아벨리는 시오노 나나미가 주장하는 것처럼‘나의 친구 마키아벨리가 아니라 이 세상 모든 약자들의 친구이다. 다시 말하자면 마키아벨리는 시오노 나나미의 친구일 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의 친구인 셈이다.

 

마키아벨리의 첫 경험, 공포와 전율

마키아벨리의 어린 시절에 대한 기록은 거의 남아 있지 않다. 아버지 베르나르도가 쓴 일기와 피렌체 역사 기록에 간간이 등장하는 마키아벨리가()에 대한 언급으로 그의 유년기를 짐작해볼 뿐이다. 베르나르도는 약 140명의 피렌체 중산층 상공인들이 주축이 된 라 피에타(La Pietà)라는 친목회에 소속돼 있었다. 아들 마키아벨리도 이 친목단체의 청소년부에 소속돼 활동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2 라 피에타는 산타크로체성당 구역을 본거지로 삼고 있었기 때문에 자연히 마키아벨리 가문은 산타크로체성당과 인연이 깊다. 나중에 세월이 흘러 1527년에 임종한 마키아벨리의 시신이 묻힌 곳도 산타크로체성당이다. 마키아벨리의 정규 교육은 1476 56일부터 시작됐다. 7살 때인데 이렇게 정확한 날짜까지 알 수 있는 것은 아버지가 선생에게 지불한 첫 학비의 내역을 기록해 놓았기 때문이다. 마테오(Matteo)란 이름의 신부(神父)에게 기초 라틴어를 배우고, 바티스타 다 포피(Battista da Poppi)란 선생에게서 중급 라틴어, 수학 등의 기초 교육을 받았다. 초등교육에 해당하는 과정이다.

 

1482년부터 1498년까지, 그러니까 마키아벨리가 13살에서 29살까지 어떻게 생활했는지 확인할 수 있는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 피렌체의 베키오다리 근처에 있는 허름한 집에 거주하던 마키아벨리의 식구들이 1481년부터 다음 해까지 무젤로(Mugello)로 이주했다는 기록만을 확인할 수 있다.

 

마키아벨리의 집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폭격을 맞아 완전히 훼손됐다. 건물의 기둥으로 사용되던 큰 원목이 발견돼 그 집터에 보존돼 있다. 현재 그 집의 1층은 도자기 가게가 영업을 하고 있는데 베키오다리에서 피티궁전으로 가는 길목에 있다.


마키아벨리 식구들의 갑작스런 이주는 그해에 피렌체를 강타한 흑사병 때문이다. 그러나 피렌체에 흑사병이 창궐하게 된 직접적인 이유는 1478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른바파치가의 음모(1478)’로 불리는 메디치 가문의 지도자에 대한 암살 시도 사건과 곧이어 촉발된 피렌체-나폴리 전쟁(1479)과 연관이 있다. 파치가의 음모는 피렌체에서 승승장구하던 메디치 가문을 제거하기 위해 경쟁자였던 파치(Pazzi) 가문이 일으킨 암살 시도 사건이지만 그 배후에는 로마 교황청의 식스투스4(1471∼1484년 재위)와 나폴리왕국의 페란테 국왕(1458∼1494년 재위)이 있었다. 암살 사건이 미수에 그치자 교황과 나폴리 국왕은 아예 막강한 군대를 동원해 피렌체에 대한 무력 접수를 시도했다. 전쟁이 터지자 피렌체 정부는 성문을 걸어 잠그고 성문 외곽에서 진을 치고 있던 나폴리 연합군과 맞섰다.

 

피렌체의 소년 마키아벨리는 파치가의 음모를 8살 때, 곧이어 발발한 피렌체-나폴리 전쟁을 9살 때 경험했다. 마키아벨리는 장성한 다음에도 이 두 사건을 정확하게 기억했고 자연스럽게 음모와 전쟁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갖게 된다. 그가 집필한 여러 책에서 음모와 전쟁이 집중적으로 연구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3 마키아벨리는 음모가 꾸며지는 동기와 과정, 성공하는 음모와 실패하는 음모의 차이점, 음모를 효과적으로 진압하는 방법에 대한 여러 편의 글을 남겼다. 그의 생전에 출간된 유일한 책인 <전술론>은 전쟁의 기술(Art of War)을 다뤘다. 어릴 때에 겪은 충격적인 경험은 평생 그 사람의 사고방식과 행동양식을 지배하게 된다. 마키아벨리도 그런 경우에 속한다.

 

파치가의 음모에 대해서는 핵심만 간단히 설명하기로 한다.4  1478년 부활절 아침, 피렌체의1 시민인 메디치 가문의 일원은 산타 마리아 델 피오레(두오모) 성당의 부활절 미사에 참석했다가 암살 시도에 직면하게 된다. 다행히위대한 자로렌초 데 메디치는 약간의 상처만 입고 위기를 모면했지만 동생 줄리아노는 자객들의 칼에 찔려 현장에서 즉사했다.

 



로렌초 데 메디치를 암살하기 위해 자객들이 사용했던 단검과 같은 종류의 칼. 
로렌초의 동생 줄리아노가 이런 칼에 찔려 현장에서 즉사했다.


당시 현장을 목격했던 피렌체의 역사가들은 암살시도가 실패로 돌아갔다고 증언하고 있다. 피렌체의 일반 시민들이팔레! 팔레!”를 외치며 메디치 가문을 지지하고 나선 것이다. 메디치 가문의 문장(
紋章)에는 둥근 공처럼 보이는 환약이 달려 있는데 공()을 뜻하는 팔레(Palle)란 구호는 메디치 가문에 충성하겠다는 뜻이다. 암살자들은포폴로, 리베르타(민중들이여, 자유를 위해 봉기하라)”를 외치면서 피렌체 시민들에게 반() 메디치 전선에 동참하라고 부추겼지만 시민들의팔레소리에 묻히고 말았다. 다급해진 암살자들의 고함 소리가 분노한 시민들의 함성에 밀려 잦아들어 갔을 때 그들 운명의 그림자도 점차 어두워져 가고 있었다.

 

피렌체의 지도자가 암살될 뻔하고 암살자들이 즉각적인 복수를 외치는 시민들의 손에 의해 처참하게 살해되고 있을 때 피렌체의 8살 소년 마키아벨리는 무엇을 보고 있었을까? 암살 시도와 피비린내 나는 복수극이 백주대낮에 펼쳐지고 있을 당시 명민했던 소년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음모에 가담했던 약 80명의 암살자들이 목에 밧줄이 감겨 시뇨리아 정청의 창문에 주검으로 매달려 있을 때 마키아벨리는 그 시신들을 바라보면서 아버지와 무슨 대화를 나눴을까? 그의 아버지 베르나르도는 그날 아무런 기록을 남겨 놓지 않았다. 뜬금없이 바로 다음 날 아버지는 일기장에 짧은 기록을 남겼는데소 한 마리를 팔았다고 적어 놓았다.

 

마키아벨리가 유년기에 경험했던 폭력은 파치가의 음모 이후에도 계속됐다. 메디치 살해 음모를 은밀히 사주했던 교황 식스투스4세와 나폴리 국왕 페란테는 피렌체와의 전쟁을 선포했다. 페란테 국왕의 막강한 나폴리 군대가 교황령 영토를 거쳐 피렌체 외곽에 도착한 것은 1479 97일이었다. 하필이면 나폴리 군대와 피렌체 군대 간의 전투가 벌어진 곳이 바로 마키아벨리의 산장이 있던 산탄드레아였다. 마키아벨리 가문이 전쟁의 직접적인 피해자가 된 것이다. 마키아벨리의 아버지 베르나르도는 마을 근처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피렌체 군이 패배했다는 소식을 듣자 아들 마키아벨리를 포함한 모든 식구를 피렌체로 황급히 피신시켰다는 일기를 남겼다. 같은 해 112일의 기록을 보면 나폴리 군대와의 전투에서 패했던 피렌체의 장군이 마키아벨리의 집에 작전본부를 차렸다가 피렌체 쪽으로 도주했다는 언급도 나온다. 피렌체 군인들이 자기 집에 주둔할 동안 건물의 천장 일부가 훼손돼 군인들이 파손시킨 천장을 자비로 수리했다는 기록도 발견할 수 있다. 전체 기록을 자세히 읽어보면 베르나르도는 전쟁 통에도 성실한 가장의 책무를 다했던 것 같다. 자신을 제외한 모든 식구들을 산탄드레아에서 피난시키고 혼자서 시골집을 지켰다.

 

전쟁의 경험은 모든 인간에게 끔찍한 기억의 상처를 남기기 마련이다. 전쟁은 인간이 느낄 수 있는 위기감과 공포심이 극대화되는 시간이다. 시골집을 지키기 위해 혼자 남은 아버지를 뒤에 두고 온 가족과 함께 피란을 떠나야했던 9살 소년 마키아벨리의 마음속에는 어떤 폭력의 트라우마(Trauma, 심리적 상처)가 남게 됐을까?

 

두 번째 전쟁의 경험

16세기 이탈리아의 총체적 비극은 1494년부터 시작됐다. 막강한 전투력과 무시무시한 파괴력을 가진 철제 대포를 앞세우고 프랑스 군대가 북쪽으로부터 물밀듯이 남하하면서 비극이 촉발됐다. 모든 이탈리아의 도시국가와 로마 교황청은 프랑스의 강력한 군사력 앞에 굴복하고 말았다. 프랑스 군대가 알프스산맥을 넘어 로마로 진격하면서 중간 통과 지점에 위치해 있던 피렌체는 속수무책으로 당해야만 했다. 사실 프랑스의 왕 샤를8세에게 피렌체는 관심 밖의 도시였다. 이탈리아를 통째로 집어삼키기 위해 그가 겨눴던 목표는 밀라노, 로마, 나폴리였기 때문이다.

 

1494, 이탈리아를 침공했던 프랑스 군대는 이미 피 냄새에 희열을 느끼던 무자비한 용병으로 구성돼 있었다. 오를레앙의 성처녀 잔 다르크(Jeanne d’Arc, 1412∼1431)가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100년 전쟁을 치른 프랑스 군대는 전쟁이라면 이력이 난 역전의 용사들이 대거 포진하고 있었다. 당시 이탈리아인들은 피비린내 나는 살육전을 경멸하는 태도를 지녔다. 서로에게 비효율적이고 많은 비용이 수반되기 때문에 과도한 폭력이 사용되는 전쟁을 야만적이라 보았던 것이다. 그래서 이탈리아 영토 내에서 치러진 대부분의 도시국가 간의 전쟁은 고용된 용병대장 간의 정치적 협상으로 마무리되곤 했다. 부득이하게 전투를 치러야 할 형편이 되면 철저하게 희생을 줄이는 방식을 택했다. 우천 시에는 전투를 하지 않는 것이 원칙이고 날이 어두워지기 시작하면 양쪽 군대는 무조건 막사로 돌아가는 것이 일종의 전투 수칙이었다. 비가 오면 마차가 진흙 구덩이에 빠져 장비가 훼손될 가능성이 있고 피아의 식별이 곤란한 밤에 전투를 하면 너무 많은 희생자가 발생하기 때문에 서로 싸우는 것을 삼갔다. 눈이 내리기 시작하는 겨울이 다가오면 일반적으로 그 눈이 다 녹게 되는 봄까지 잠정적인 휴전상태에 들어간다. 병사들에게 방한복을 지급해야 하고 막사 안에 난방시설을 설치해야 하므로 겨울철에는 전쟁을 하지 않는 쪽이 낫다. 이탈리아에서는 전쟁도 일종의 비즈니스였던 것이다. 그러나 프랑스인들에게 전쟁은 내가 살기 위해 남을 죽여야 하는 피비린내 나는 생존 투쟁이었다. 더군다나 그들은 막강했던 영국 군대와 100년 동안이나 전쟁을 했던 참전용사였다. ‘살인의 추억을 가진 프랑스 군대가 국경선을 넘었을 때 모든 이탈리아의 도시국가들은 풍전등화와 추풍낙엽의 신세를 면치 못했다.

 

철제 포탄을 사용하던 프랑스 포병과는 달리 이탈리아 군대는 돌멩이를 포신으로 사용하고 있었다. 사진은 로마의 산탄젤로성에 소장돼 있는 16세기 이탈리아 군대의 포와 석탄(石彈)의 모습이다.

이탈리아인들이 특히 두려워했던 것은 프랑스의 포병이었다. 중국에서 발명된 화약이 유럽으로 전래됐을 때 그 가공할 만한 파괴력을 제일 먼저 알아보고 전쟁에 도입한 나라가 프랑스다. 당시 이탈리아 포병은 단순히 장력(張力)을 이용해 사람 머리만한 돌멩이(石彈)를 날려 보내는 게 고작이었다. 그러나 프랑스 포병은 화약의 추진력을 이용해 큰 쇳덩어리를 날려 보냄으로써 성벽 뒤에 숨어 있던 이탈리아 군대를 아연실색하게 만들었다. 멀리서 날아온 검은 쇳덩이는 순식간에 성채에 구멍을 냈고 성벽을 무너지게 만들 뿐만 아니라 파편이 튀어 옆에 있는 군인들이 죽어나가는 모습을 보게 된 것이다. 프랑스 포병의 기동력 또한 이탈리아인에게 충격을 줬다. 이탈리아 포병은 소가 장비를 지고 다녔기 때문에 기동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프랑스 포병은 한 대의 무게가 6000파운드나 나가고 길이가 8피트에 이르는 거대한 포를 마차에 싣고 다녔다. 샤를8세의 군대는 이런 거대한 포를 모두 36문이나 보유하고 있었다.

 

프랑스 군대가 36문의 포를 끌며 피렌체 시내를 관통해 갈 때 이 광경을 지켜보던 마키아벨리는 어느 덧 25살의 애국 청년으로 성장해 있었다. 당시의 기록은 남아 있지 않지만 자신의 조국 피렌체가 직면하고 있는 약자의 굴욕을 뼈저리게 느꼈을 것이다. 메디치 가문의 지도자 피에로 데 메디치(1472∼1503)는 프랑스의 무시무시한 군사력에 지레 겁을 집어 먹고 항복을 선언했다. 약체 국가였던 피렌체의 시민들은 저항 한번 해보지 못하고 외국 군대의 침공을 받아들여야만 했다. 피렌체 도심에 진입한 프랑스 군대가 베키오다리를 지나 남쪽으로 행군했다면 마키아벨리의 집 앞도 스쳐 지나갔을 것이다. 25세 청년 마키아벨리는 괴성을 내뱉으며 전진해 가는 위압적인 프랑스 군대의 포를 지켜보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1494년 11월17일, 피렌체로 입성하는 샤를8세의 프랑스 군대. 프란체스코 그라나치(Francesco Granacci)가 그린 템페라화로 우피치미술관에 소장돼 있다.

마키아벨리의 마지막 공포

마키아벨리는 유년기(8)와 청년기(25)에 외국 군대의 침공을 두 눈으로 지켜봐야만 했다. 두 번 다 약체 국가인 피렌체가 속수무책으로 당하는 모습을 가슴을 쓸어내리며 지켜보았을 것이다. 마키아벨리의 생애 마지막은 어떻게 됐을까? 피렌체는 국력을 신장하고 군사력을 증대시켜 이탈리아의 신흥 강대국으로 면모를 일신했을까? 마키아벨리의 마지막 절망과 한숨을 설명하기 위해서 우리는 부득이 그의 생애 마지막 사건을 미리 살펴볼 필요가 있다. 9살 소년 시절, 남쪽에서 쳐들어왔던 나폴리 왕국의 군대에 느꼈던 공포심, 1494년 프랑스 군대가 북쪽에서 밀고 내려 왔을 때 25세 열혈 청년으로 느꼈던 절망감을 58세의 노인이 된 마키아벨리가 또다시 경험하게 된다. 마키아벨리가 생애 마지막 해(1527)에 몰아쉬었던 한숨과 절망은 이탈리아를 침공해 로마를 쑥대밭으로 만들었던 스페인 군대 때문이었다. 남쪽의 나폴리 군대, 북쪽 프랑스 군대의 침략에 이어 이번에는 서쪽 스페인 군대의 침략까지 받게 된 것이다. 다시 한번 마키아벨리는 약자의 설움을 뼈저리게 느껴야했고 사랑하는 가족이 외국 군대의 침공 때문에 무서워 떠는 모습을 안타까운 마음으로 지켜봐야만 했다.

 

나중에 다시 자세하게 설명되겠지만 생애 말년의 마키아벨리는 15년간 거의 실업자로 전전하다가 친구 덕분에 겨우 소일거리를 마련하는 정도였다. 스페인 군대가 유럽 전역에서 구성한 용병부대를 이끌고 로마를 향해 진격하고 있을 때 58세의 실업자 마키아벨리는 군사 참모로써 이탈리아 군대의 행렬 속에 포함돼 있었다. 공식 직책이 아니라 친구의 부탁으로 군사 문제에 대한 개인적인 자문을 해주는 자격이었다.

 

당시 마키아벨리가 종군하고 있던 이탈리아 군대는 피렌체 지역을 관통하고 있던 스페인 군대의 뒤를 쫓아가고 있었다. 마키아벨리의 이탈리아 군대는 이틀 거리를 두고 피렌체 북쪽에 주둔하고 있었다. 문제는 사랑하는 가족들이 스페인 군대의 행군로에 노출돼 있었던 것이다. 스페인 군대가 피렌체를 관통해 마키아벨리의 시골집이 있는 산탄드레아 지역을 휩쓸고 지나가고 있었기 때문에 온 가족이 또다시 외국 군대의 공포에 떨고 있었다. 마키아벨리는 어린 시절의 기억을 떠올렸을 것이다. 나폴리 군대가 피렌체를 점령하기 위해 북진하면서 자기 동네에서 피렌체 군대를 패배시킨 일과 가족을 피신시킨 아버지가 시골집을 혼자 지키고 있었던 아련한 기억을 떠올렸을 것이다. 그러나 이번에는 가장인 자신이 가족과 떨어져 있는 형편이었다. 실업자로 지내던 무능한 가장은 친구의 부탁을 받고 특별한 직책도 없이 무기력한 이탈리아 군대를 따라다니고 있었다. 산탄드레아에서 마키아벨리 대신 가장 역할을 하고 있던 장남의 이름은 구이도(Guido)였다. 당시 마키아벨리에게 보내진 아들 구이도의 절박한 편지는 가족이 당면하고 있는 위기감을 잘 보여준다.

 

“아빠, 우리 가족은 이제 더 이상 독일인들을(스페인 군대의 주력부대는 독일 용병) 무서워하지 않습니다. 아빠가 곧 우리에게 돌아오신다고 약속하셨기 때문이지요. 만약 어떤 일이 발생하면 아빠가 우리와 함께 계시면서 문제를 해결해 주시겠다고 약속 하셨기 때문에 걱정할 필요가 없어졌습니다. 엄마가 너무 걱정하지 마시라고 전하랍니다.” (1527 417, 아들 구이도가 아버지 마키아벨리에게 쓴 편지)

 

어린 장남의 편지를 받아 본 가장의 마음은 어땠을까? 강자의 무자비한 폭력 앞에서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는 약자의 설움에 눈물을 떨구지 않았을까? 아들 구이도에게 보낸 마키아벨리의 답신은 절망과 체념으로 가득하다.

 

“엄마에게 안부를 전해주렴. 나는 하루속히 여기서 떠나 집으로 돌아가는 것을 바라왔고 지금도 그런 생각이 간절함을 엄마에게 전해주기 바란다. 내가 지금처럼 피렌체로 돌아가고 싶어 했던 적이 없을 정도로 여기 상황이 심각하게 돌아가고 있구나. 왜냐하면 여기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야.”

 

강자의 횡포에 맞서는 길

나폴리 왕국의 군대(1479), 프랑스 샤를8세의 침공(1494), 로마를 쑥대밭으로 만들었던 스페인 군대의 진군(1527) 앞에서 우리들의 친구 마키아벨리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세 번씩이나 그의 삶을 송두리째 흔들어 놓았던 외국 군대의 침략은 자신의 말대로애국심으로 가득했던마키아벨리에게 어떤 영향을 끼쳤을까? 강자의 횡포에 속수무책으로 가만히 앉아서 당할 수밖에 없었던 약체국가의 시민으로서 마키아벨리는 어떤 비분강개(悲憤慷慨)를 느꼈을까?

 

우리들의 친구 마키아벨리가 <군주론> <로마사 논고> <전략론> 등의 명저를 통해서 동시대와 후대의 독자들에게 말하고 싶었던 것은 마키아벨리의 이런 가슴 아픈 개인사와 깊숙한 관련이 있다. 나폴리, 프랑스, 스페인이라는 절대 강자의 횡포에서 맞설 수 있는 약자의 대책이란 무엇인가? 왜 우리는 늘 당하고만 사는 것일까? 어떻게 하면 우리는 강자의 횡포에 맞설 수 있는 것일까?

 

마키아벨리에게 강자의 횡포에 맞서는 첫 번째 길은 고전(古典)으로 돌아가는 것이었다. 약자의 설움을 눈물로 대신 삼켜야 했던 마키아벨리는 자신이 당하고 있는 약자의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 몸부림치는 삶을 살았다. 그 방식은 고전으로부터 지혜를 얻는 것이다. 고대 그리스의 도시 국가를 이끌었던 수많은 지도자들과 로마 제국의 옛 현자들이 어떻게 시련과 위기를 극복해나갔는지 물었고 그들의 답을 통해 자신이 감내해야 하는 약자의 삶에 대입시켜 그 해결책을 모색했다.

 

마키아벨리는 늘 고전을 곁에 두고 살았다. 그는 고전과의 대화를 통해 현재의 시련을 극복할 수 있는 지혜를 모색함으로써 역사에 흔적을 남기는 위대한 인물이 됐다. 1513 12월 공직에서 쫓겨났던 마키아벨리는 로마에 있던 친구 프란체스코 베토리(Francesco Vettori)에게 자신의 안부를 전하는 편지를 쓴다. 이탈리아 문학사에서 가장르네상스적인서간문으로 꼽히는 이 편지는 마키아벨리가 어떻게 강자의 횡포에 맞서왔는지 잘 보여준다.

 

“저녁이 오면 나는 집으로 돌아가 서재로 들어간다네. 서재로 들어가기 전에 흙과 먼지가 묻어 있는 일상복을 벗고 관복으로 갈아입지. 그리고 나는 옛 시대를 살았던 어르신들의 정원으로 들어간다네. 그분들은 나를 정중히 맞아 주시고 나는 혼자서만 그 맛을 음미할 수 있는 지혜의 음식을 그 어르신들과 나누게 되지. 나는 그 지혜의 음식을 먹으며 다시 태어난다네. 나는 옛 시대를 사셨던 어르신들과 대화를 나누지. 내가 그 분들에게 주저하지 않고 질문을 드린다네. 왜 그때, 그런 식으로 행동하셨는지를. 그 숨겨진 이유가 무엇인지를! 그럼 옛 성현들은 내게 대답해 주시지. 매일 옛 시대의 어르신들과 대화를 나누는 그 네 시간 동안 나는 아무런 피곤을 느끼지 못한다네. 내 삶에 주어진 모든 시련과 고통도 다 잊어버리지. 나의 가난도 두렵지 않아. 내게 닥쳐올 죽음조차도 내겐 아무런 의미가 없다네.”

 

(베토리에게 보낸 1513 1210일자 편지)

 

마키아벨리는 철저한 약자로 살았다. 공직에서 쫓겨나 15년을 실업자로 살면서 산골에서 가난한 농부들과 함께 곤고했던 시대를 견뎌내야만 했던 인물이다. 그러나 마키아벨리는 고전과의 대화를 통해서 옛 시대의 영웅들과 함께 진지한 대화를 나누며 한 시대를 버텨낼 수 있는 지혜를 얻게 됐다. 비록 실업자였고 가난에 찌든 삶을 살았던 그였지만 고전을 읽을 때만은 의관정제(衣冠整齊)하는 진지함과 멋을 잃지 않는 사람이었다. 편지에 쓴 대로 그는 고전을 읽는 네 시간 동안만은 피렌체의 제2 서기장 시절에 입었던 관복(官服)으로 갈아입었다. 고대의 성현들과 대화를 나누기 위해 자기 혼자만의 예의를 갖춘 것이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지만 시골의 허름하고 어두컴컴한 작은 방안에 홀로 촛불을 켜놓고 관복을 입은 채 열심히 고전을 읽고 있는 마키아벨리를 한번 상상해 보시라. 피식 웃음이 나오다가 불쌍해서 가슴이 먹먹해진다. 마키아벨리가 쓴 천하의 명저 <군주론>은 그렇게 탄생했다. 그의 현실은 나폴리, 프랑스, 스페인 군대가 차례로 짓밟고 지나갔지만 그의 정신만은 언제나 높은 곳을 향하고 있었다. 일상에 지치고 약자의 삶에 신물도 나지만 그래도 우리가 용기를 내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김상근 연세대 신과대학 교수 skk@yonsei.ac.kr

필자는 사우스캐롤라이나 주립대 및 에모리대에서 석사 학위를, 프린스턴 신학대학원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연세대 신과대학 부교수로 재직 중이며 ㈜SK케미칼 고문도 맡고 있다. <르네상스 창조 경영> <천재들의 도시 피렌체> <사람의 마음을 얻는 법> 15권의 책을 냈다. 르네상스 시대의 창조적 영감을 현대적 언어로 재해석하는 작업에 몰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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