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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visiting Machiavelli-2

약소국의 분노를 古典으로 터뜨리다

김상근 | 92호 (2011년 11월 Issue 1)


편집자주

많은 사람들은 마키아벨리를권모술수의 대가로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는 억울하게 살고 있는 약자들에게더 이상 당하지 마라고 조언했던 인물입니다. 메디치 가문의 창조 경영 리더십 연재로 독자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았던 김상근 연세대 교수가 이번 호부터 마키아벨리를 주제로 새 연재를 시작합니다. 시대를 뛰어넘는 통찰력을 주는 마키아벨리의 이야기 속에서 깊은 지혜와 통찰을 얻으시기 바랍니다.

 

나의 친구, 마키아벨리?

본격적으로 마키아벨리의 생애와 사상을 재해석하기 전에 먼저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가 있다. 스스로마키아벨리의 친구임을 자처하는 일본 작가 시오노 나나미에 대한 평가다. 현재 마키아벨리에 대한 책 중에서는 시오노 나나미의 <나의 친구, 마키아벨리>가 가장 많은 독자를 확보하고 있기 때문에 한국에서 마키아벨리하면 시오노 나나미의 책을 참고하게 된다. 먼저 이 책을 평가해두는 것이 좋겠다.

 

널리 알려진 대로 시오노 나나미는 일본에서 태어나 가큐수인(學習院)대 철학과를 졸업했다. 1964년에 이탈리아로 건너가 현지 의사와 결혼하고 살면서 주로 로마 및 르네상스 역사와 관련된 책을 집필하고 있다. 시오노 나나미는 자신의 인생 방향을 결정지은 사람 중의 한 명이 바로 마키아벨리라고 지명하면서나의 친구라는 친밀한 표현을 사용하고 있다. 실제로 시오노 나나미가 집필한 많은 책 중에서 <나의 친구 마키아벨리>를 자세히 읽어보면 다른 책에서 볼 수 없는 감정이입과 정성스러운 글쓰기가 느껴진다. 독자들의 관심에 눈높이를 맞추고 책읽기의 몰입을 증대시키는 시오노 나나미의 글 솜씨는 언제나 경탄을 자아내게 만든다.

 

그러나 시오노 나나미의 글은 기초적인 사료 분석의 미숙함을 드러내고 있기 때문에 조심해서 읽어야 한다. 시오노 나나미의 글은 역사가 아니라 일종의 수필에 가깝다. 이렇게 냉정하게 말하는 것은 남의 글을 깎아내려 내 글을 더 읽어 주십사 간청하기 위함이 아니다. 시오노 나나미의 글을 조심해서 읽어야 한다고 굳이 강조하는 이유는 그녀의 글에는 마키아벨리와 그 시대에 대한 정확한 이해가 결여돼 있기 때문에 자칫하면 마키아벨리의 생애와 사상을 오독(誤讀)으로 이끌 수 있다는 염려에서다. 시오노 나나미가 쓴 <나의 친구 마키아벨리>는 마키아벨리에 대한 정확한 글이 아니다. 예를 들면, 마키아벨리는 피렌체의 외무를 담당하는 제2 서기장 자격으로 프랑스에 4번이나 중대한 출장을 다녀왔다. 프랑스 국내에서 이동 중이던 왕과 대신을 따라 그는 프랑스 전역을 누비면서 프랑스인들이 어떻게 사고하고 행동하는지 관찰했고 독서광답게 틈틈이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쓴 <갈리아 전쟁기>도 읽었다.1 지금의 독일이라고 할 수 있는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를 알현하고 그의 능력과 인간됨을 관찰할 수 있었던 출장업무도 맡겨졌다. 그러나 시오노 나나미는 마키아벨 리의 이런 업무들에 대해 아무런 언급을 하지 않는다. 자기가 알고 있는 부분(이탈리아)에 대해서만 모든 지면을 할애하고 잘 알지 못하는 부분은 아무런 이유없이 생략해버리는 것은 역사를 연구하는 사람의 태도가 아니다. 사실 마키아벨리에 대한 연구는 이미 기본 사료(저술과 편지, 공문서 등)에서부터 기초 연구서까지 거의 완벽하게 구비돼 있는 상태다. 마키아벨리가 쓴 모든 글은 이탈리아어는 물론이고 영어 및 서구 언어로 번역돼 있다. 시오노 나나미의 글은 이런 일반적인 사료에 자신의 사생활과 느낌의 단편들을 개입시킴으로써 독자들에게 글을 읽는 재미를 증대시키는 효과를 노리고 있다. 마키아벨리의 난해한 편지를 인용하다가 갑자기 자신의 이탈리아 생활 경험을 끼워 넣는다.

 

고전 읽기는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마키아벨리의 글이 특히 그렇다. 독자들의 눈높이에 글의 수준을 맞추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 그렇다고 해서 마키아벨리에 대한 기존 사료를 모아다가 대충 얼버무리고 개인적 감상과 소회를 뒤섞는 것은 그녀가 자주 사용하는 표현처럼글 쓰는 사람의 도리가 아니다. 마키아벨리는 처음부터 공포에 사로잡혀 있던 인물, 그 두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인간의 변하지 않는 행동양식을 유심히 관찰했던 인물, 약자로서 살아남기 위해 강자의 힘과 권력의 속성을 파헤침으로써 공포에 질린 우리 삶에 희망과 용기를 심어준 인물이다. 마키아벨리는 시오노 나나미가 주장하는 것처럼‘나의 친구 마키아벨리가 아니라 이 세상 모든 약자들의 친구이다. 다시 말하자면 마키아벨리는 시오노 나나미의 친구일 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의 친구인 셈이다.

 

마키아벨리의 첫 경험, 공포와 전율

마키아벨리의 어린 시절에 대한 기록은 거의 남아 있지 않다. 아버지 베르나르도가 쓴 일기와 피렌체 역사 기록에 간간이 등장하는 마키아벨리가()에 대한 언급으로 그의 유년기를 짐작해볼 뿐이다. 베르나르도는 약 140명의 피렌체 중산층 상공인들이 주축이 된 라 피에타(La Pietà)라는 친목회에 소속돼 있었다. 아들 마키아벨리도 이 친목단체의 청소년부에 소속돼 활동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2 라 피에타는 산타크로체성당 구역을 본거지로 삼고 있었기 때문에 자연히 마키아벨리 가문은 산타크로체성당과 인연이 깊다. 나중에 세월이 흘러 1527년에 임종한 마키아벨리의 시신이 묻힌 곳도 산타크로체성당이다. 마키아벨리의 정규 교육은 1476 56일부터 시작됐다. 7살 때인데 이렇게 정확한 날짜까지 알 수 있는 것은 아버지가 선생에게 지불한 첫 학비의 내역을 기록해 놓았기 때문이다. 마테오(Matteo)란 이름의 신부(神父)에게 기초 라틴어를 배우고, 바티스타 다 포피(Battista da Poppi)란 선생에게서 중급 라틴어, 수학 등의 기초 교육을 받았다. 초등교육에 해당하는 과정이다.

 

1482년부터 1498년까지, 그러니까 마키아벨리가 13살에서 29살까지 어떻게 생활했는지 확인할 수 있는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 피렌체의 베키오다리 근처에 있는 허름한 집에 거주하던 마키아벨리의 식구들이 1481년부터 다음 해까지 무젤로(Mugello)로 이주했다는 기록만을 확인할 수 있다.

 

마키아벨리의 집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폭격을 맞아 완전히 훼손됐다. 건물의 기둥으로 사용되던 큰 원목이 발견돼 그 집터에 보존돼 있다. 현재 그 집의 1층은 도자기 가게가 영업을 하고 있는데 베키오다리에서 피티궁전으로 가는 길목에 있다.


마키아벨리 식구들의 갑작스런 이주는 그해에 피렌체를 강타한 흑사병 때문이다. 그러나 피렌체에 흑사병이 창궐하게 된 직접적인 이유는 1478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른바파치가의 음모(1478)’로 불리는 메디치 가문의 지도자에 대한 암살 시도 사건과 곧이어 촉발된 피렌체-나폴리 전쟁(1479)과 연관이 있다. 파치가의 음모는 피렌체에서 승승장구하던 메디치 가문을 제거하기 위해 경쟁자였던 파치(Pazzi) 가문이 일으킨 암살 시도 사건이지만 그 배후에는 로마 교황청의 식스투스4(1471∼1484년 재위)와 나폴리왕국의 페란테 국왕(1458∼1494년 재위)이 있었다. 암살 사건이 미수에 그치자 교황과 나폴리 국왕은 아예 막강한 군대를 동원해 피렌체에 대한 무력 접수를 시도했다. 전쟁이 터지자 피렌체 정부는 성문을 걸어 잠그고 성문 외곽에서 진을 치고 있던 나폴리 연합군과 맞섰다.

 

피렌체의 소년 마키아벨리는 파치가의 음모를 8살 때, 곧이어 발발한 피렌체-나폴리 전쟁을 9살 때 경험했다. 마키아벨리는 장성한 다음에도 이 두 사건을 정확하게 기억했고 자연스럽게 음모와 전쟁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갖게 된다. 그가 집필한 여러 책에서 음모와 전쟁이 집중적으로 연구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3 마키아벨리는 음모가 꾸며지는 동기와 과정, 성공하는 음모와 실패하는 음모의 차이점, 음모를 효과적으로 진압하는 방법에 대한 여러 편의 글을 남겼다. 그의 생전에 출간된 유일한 책인 <전술론>은 전쟁의 기술(Art of War)을 다뤘다. 어릴 때에 겪은 충격적인 경험은 평생 그 사람의 사고방식과 행동양식을 지배하게 된다. 마키아벨리도 그런 경우에 속한다.

 

파치가의 음모에 대해서는 핵심만 간단히 설명하기로 한다.4  1478년 부활절 아침, 피렌체의1 시민인 메디치 가문의 일원은 산타 마리아 델 피오레(두오모) 성당의 부활절 미사에 참석했다가 암살 시도에 직면하게 된다. 다행히위대한 자로렌초 데 메디치는 약간의 상처만 입고 위기를 모면했지만 동생 줄리아노는 자객들의 칼에 찔려 현장에서 즉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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