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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EO를 위한 인문고전 강독

쾌락은 새로움을 추구하는 자에게 온다

김원철 | 89호 (2011년 9월 Issue 2)


편집자주

21세기 초경쟁 시대에 인문학적 상상력이 경영의 새로운 돌파구를 제시해주고 있습니다. DBR ‘CEO를 위한 인문고전 강독코너를 통해 동서고금의 고전에 담긴 핵심 아이디어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인류의 사상과 지혜의 뿌리가 된 인문학 분야의 고전을 통해 새로운 영감을 얻으시기 바랍니다.

필자는 고려대 철학과를 졸업하고 벨기에 루뱅대에서 철학 석사 학위를, 파리 고등사회과학원(E.H.E.S.S)에서 스피노자 철학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고려대 등에서 강의를 하고 있다. 특히 윤리학의 역사, 스토아철학, 아우구스티누스에 관심을 갖고 관련 분야를 연구하고 있다.

 

전라에 가까운 무희들이 현란한 춤동작으로 사람들을 유혹한다. 이에 뒤질세라 어릿광대의 몸동작도 빨라진다. 여러 개의 공을 쉴 새 없이 돌려대는 그의 신묘한 손놀림은 우스꽝스러운 얼굴 표정과 묘한 대비를 이룬다. 이에 아랑곳없이 궁정악단의 가락은 사람들의 신경을 거스르지 않을 정도로 낮게 흘러간다. 귀 기울여 듣지 않으면 연주곡이 바뀐지도 모를 정도다. 단절 없는 연주에 맞춰 비대한 몸집의 요리사들이 형형색색의 음식들을 쉼 없이 나른다. 통째로 구운 새끼돼지부터 보기만 해도 군침이 도는 이국의 과일들까지 그 수는 헤아리기 어렵고 그 양은 십여 명의 장정들이 배불리 먹고도 남을 만큼이다. 하지만 이 모든 것들은 단 한 사람의 쾌락을 위해 차려진 것이다. 연회의 주인공인 왕은 쿠션 속에 푹 파묻힌 채 연신 긴 한숨만을 내뱉고 있다. 먹는 것처럼 먹어본 게 언제인지 이제는 기억도 가물가물하다.


뉴욕 브로드웨이, 존 말코비치가 공연했던 소극장을 끼고 왼편으로 돌아서면 자그마한 카페가 나온다. 한 조각의 치즈케이크를 먹기 위해 장시간의 기다림도 마다않고 줄 서 있는 사람들 속에는 이국의 여행객들도 심심찮게 보인다. 어렵사리 얻은 테이블, 옆 사람과 어깨가 맞닿을 만큼 비좁지만 외지인들은 마냥 행복하기만 하다. “평소에 먹던 치즈케이크와는 뭔가 확실히 달라. 소박한 실내장식도 너무 맘에 들고 지금 흘러나오는 바로크풍 음악도 이 곳 분위기와 너무 잘 어울려. 여기 들르기를 참 잘했어. 이번 여행의 근사한 추억이 될 거야.” 한 끼 저녁식사 값에 맞먹는 치즈케이크와 커피 한 잔이 지친 여행객의 배고픔을 달래주진 못하겠지만 값으로 측정할 수 없는 쾌락을 그들에게 안겨준다.


사람들의 만족과 쾌락 사이에는 거대한 차이가 있다. 만족은 부족하던 것이 채워지는 데서 오는 기쁨이다. 배고픈 사람에게 한 그릇의 자장면은 큰 만족을 준다. 이 점에서 만족은 욕구와 관련된 것이며 특정한 대상을 통해서만 얻어진다. 허기져 보채는 아이에게 새 장난감을 사주어도 아이는 울음을 그치지 않는다. 만족의 측면에서 장난감의 효용과 자장면의 효용은 서로 대체할 수 없는 것이다.


반대로 쾌락은 욕구가 아니라 욕망에 관련된다. 욕망은 부족한 것을 채워서 원래의 균형 상태를 회복하려 하지 않는다. 그보다는 예전에 알지 못하던 새로운 대상들을 통해 기분 좋은 상태를 재현하려 한다. 한 대상이 유쾌한 것으로 수용되느냐, 그렇지 않으면 불쾌한 것으로 수용되느냐는 전적으로 대상을 어떤 맥락에서 경험하느냐에 달려 있다. 똑같은 대상도 상황에 따라 다르게 느껴진다. , 쾌락은 대상의 성질에 의해 좌우되기보다는 경험의 성질에 의해 결정된다. 사람들은 예전의 유쾌했던 경험을 다시 느끼고 싶은 것이지, 유쾌함을 주었던 그 대상을 원하는 것이 아니다. 쾌락의 측면에서 볼 때 대상들은 얼마든지 대체가능하다.


만족과 쾌락이 동시에 올 수도 있다. 한국의 성인들은 어렸을 적 처음 맛보았던 자장면의 맛을 잊지 못하리라. 만족과 쾌락을 동시에 선사했던 그 자장면의 맛이란 일국의 대통령이 돼서도 잊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조선조의 이름난 대령숙수가 환생해 돌아와도 그 맛을 재현해내지는 못한다. 졸업식처럼 특별한 날이 아니더라도 저렴한 가격에 즐길 수 있게 된 자장면이 허기를 달래줄 수 있어도 식도락의 즐거움을 주지는 못하기 때문이다. 만족은 주되 쾌락은 주지 못하는 음식이 됐다. 이것이 풍요의 딜레마다.


욕구의 만족이 보장된 풍요의 사회에서 사람들은 쾌락의 기회를 박탈당할 수도 있다. 쾌락은 욕망의 실현을 통해 주어지는데 욕망은 일정 부분 욕구 불만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먹고 싶은 욕구가 없는 상황에서 무슨 식도락을 논하겠는가? 반면 한 번 체험된 쾌락은 떨쳐버릴 수 없는 유혹처럼 우리 안에 남는다. 맛있는 것을 더 많이 맛보기 위해 일부러 먹은 음식물을 게워 냈다는 로마의 귀족 이야기는 만족과 쾌락이 더 이상 함께 갈 수 없는 상황을 보여주는 사례다. 먹고살기도 벅찬 사람들에게는 결코 발생하지 않았던 문제가 풍요의 도래와 더불어 생긴 것이다.


쾌락의 최대화를 위해서는 욕구와 욕망을 어떻게 조절해야 할까? 콜린 캠벨(Colin Campbell, 1940∼)은 고대인들과 현대인들은 상이한 방식으로 이 문제의 해답을 찾는다고 밝혔다. 전자가 쾌락들(pleasures)에 관심을 가졌던 반면 후자는 쾌락(pleasure)에 관심을 갖는다.


쾌락들에 관심을 가질 경우 기본 관심사는 삶의 단위당 쾌락발생률이다. 쉽게 말해 더 자주 쾌락을 체험하자는 의미다. 새로운 요리를 맛보기 위해 일부러 게워 내는 것이 그 대표적인 방법이다. 그렇다고 고대인들이 쾌락의 발생빈도에만 신경 썼던 것은 아니다. 쾌락들 간의 조합을 통해 질을 높이려는 시도들도 동시에 이뤄졌다. 세상에 즐거운 일이 어디 먹는 일뿐이랴. 어린 광대의 쇼와 흥겨운 음악을 곁들인다면 식사시간은 훨씬 유쾌해질 것이다. 사실 미각과 촉각이 주는 자극은 매우 강력하고 직접적인 것이지만 스펙트럼이 너무 한정돼 있다. 그에 비해 시각과 청각의 스펙트럼은 훨씬 더 세분화돼 있어 색다른 쾌락을 제공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 한 가지 단점은 시·청각적인 쾌락은 상당한 수준의 집중력을 요구하는 탓에 자칫하다가는 미각의 쾌락을 감소시킬 위험이 있다는 것이다.


쾌락들이 아니라 쾌락에 관심을 가질 경우 기본 관심사는 다채로움이 아니라 쾌락의 강도다. 시대가 바뀌고 문화가 바뀌어도 사람들이 쾌락을 느끼는 몇 가지 기본 목록은 존재한다. 예를 들어 먹고 마시고 노래하고 춤추고 놀이하는 것이 그것이다. 물론 성교도 빼놓을 수 없는 인류의 공통된 쾌락 대상이다. 하지만 다양한 종류의 쾌락들을 향유한다고 해서 쾌락의 강도가 높아지는 것은 아니다. 무희와 어릿광대의 공연, 산해진미가 넘쳐나도 왕을 권태로움으로부터 막아 줄 충신은 한 명도 없다. 그가 왕 자신이 아닌데 어찌 그의 쾌락을 책임져 줄 수 있겠는가. 쾌락은 철저히 주관적인 문제다. 그런 연유로 남들도 다들 좋아하는 일이 내 쾌락의 강도를 높여주지는 못한다. 뉴욕의 치즈케이크를 상미(賞味)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여행자처럼 다양한 대상들 속에숨어 있는쾌락의 속성들을 쥐어짜내는 일을 서슴지 않고 해야만 쾌락의 강도는 길이길이 기억할 만큼 강력한 것이 된다. 고대인에게는 없지만 현대인들에게는 있는 새로운 능력은 바로 자신의 감정을 스스로 조율할 줄 아는 능력이다. 이 점에서 상상력은 현대인들의 필수 덕목이다. 어찌 치즈케이크의 맛이 소박한 실내장식과 바로크풍 음악을 동시에 닮을 수 있겠는가.


전통적 쾌락주의와 근대적 쾌락주의의 차이를 논하면서 콜린 캠벨은감정적 자결주의(emotional self-determinism)’를 선포한다. 사회학자인 그가 쾌락의 문제에 그토록 깊은 관심을 보이는 이유는 다름 아닌 소비문제 때문이었다. 현대사회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막스 베버(Max Weber, 1864∼1920)는 자본주의의 정신을영리추구를 직업윤리로 정당화하고 의무화하는 심적 태도라고 규정하면서 청교도적 금욕주의를 자본주의에 걸맞은 윤리관으로 지정했다. 하지만 현실이 어디 그러한가? 사람들은 더 큰 쾌락을 즐기기 위해 더 많은 재화를 갈망한다. 삶을 풍요롭게 할 수만 있다면 소비는 죄가 아니라 미덕이다. 자본주의의 출현은 사실 산업혁명으로부터 왔다. 물질적 풍요는 욕구와 욕망의 갈등을 증폭시킨다. 그래서 현대인들은필요한물건들보다 자신에게쾌락을 가져다줄 것처럼 상상된물건들을 구입하는 데 열을 올린다. 베버가 보지 못했던 이 측면을 부각시키기 위해 캠벨은 <낭만주의 윤리와 근대 소비주의 정신>이라는 책을 썼다. 베버가 쓴 <프로테스탄티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의 자매서처럼 읽어주길 당부하면서.


Carpe Diem!
현재를 즐겨라! 하지만 만족이 쾌락의 무덤이 될 수도 있음을 잊지 말아야할 것이다. 쾌락은 안락함이 아니라 새로움을 추구하는 자에게 주어지는 선물이다.


만족과 쾌락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다. 만족은 부족하던 것이 채워지는 데서 오는 기쁨이다. 배고픈 사람에게 한 그릇의 자장면은 큰 만족을 준다. 이 점에서 만족은 욕구와 관련돼 있다. 반면 쾌락은 욕구가 아닌 욕망에 관련된다. 욕망은 새로운 대상을 통해 기분 좋은 상태를 재현하려 한다. 욕구의 만족이 보장된 풍요의 사회에서 사람들은 쾌락의 기회를 박탈당할 수 있다. 고대인에게는 없지만 현대인에게 있는 새로운 능력은 바로 자신의 감정을 스스로 조율할 줄 아는 능력이다. 이 점에서 상상력은 현대인들의 필수 덕목이다. 사람들은 더 큰 쾌락을 즐기기 위해 더 많은 재화를 갈망한다. ‘필요한물건보다 자신에게쾌락을 가져다줄 것처럼 상상된물건들을 구입하는 데 열을 올린다. 막스 베버가 보지 못했던 이 측면을 부각시키기 위해 콜린 캠벨은 <낭만주의 윤리와 근대 소비주의 정신>이라는 책을 썼다. 쾌락은 안락함이 아니라 새로움을 추구하는 자에게 주어지는 선물이다.

 

 

김원철 철학박사 won-chul-kim@hanmail.net

 

고려대 철학과를 졸업하고 벨기에 루뱅대에서 철학 석사 학위를, 파리 고등사회과학원(E.H.E.S.S)에서 스피노자 철학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고려대 등에서 강의를 하고 있다. 특히 윤리학의 역사, 스토아철학, 아우구스티누스에 관심을 갖고 관련분야를 연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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