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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EO를 위한 인문고전 강독

시민적 명예:타인의 평가에 얽매이지 마라

김원철 | 83호 (2011년 6월 Issue 2)


편집자주

21세기 초경쟁 시대에 인문학적 상상력이 경영의 새로운 돌파구를 제시해주고 있습니다. DBR ‘CEO를 위한 인문고전 강독코너를 통해 동서고금의 고전에 담긴 핵심 아이디어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인류의 사상과 지혜의 뿌리가 된 인문학 분야의 고전을 통해 새로운 영감을 얻으시기 바랍니다.

노르망디에 사는 오슈코른 영감은 지독한 구두쇠다. 그는 조금이라도 쓸모 있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집으로 가져가는 버릇이 있다. 이 때문에 웃지 못 할 사건이 터진 것은 늦가을 어느 장날이었다. 시장 통을 어슬렁거리던 그는 말똥 묻은 노끈을 발견했다. 주우려고 허리를 굽히고 보니 마구수선업자 말랑댕 영감이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일전에 심하게 다툰 이후 그와는 원수처럼 지내는 사이다. 그런 그에게 노끈이나 줍는 모습을 보이는 것은 여간 수치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기에 오슈코른 영감은 얼른 몸짓을 바꿔 귀중품이라도 찾는 시늉을 했다. 그런데 같은 날 장터에서 지갑을 잃어버린 사람이 있었다. 모든 동네 사람들은 오슈코른 영감을 의심했다. 그가 지갑을 줍는 것을 보았다는 말랑댕 영감의 증언 때문이다. 억울한 심정에서 오슈코른 영감은 지나가는 사람들을 붙들고 진실을 말해 보지만 되돌아오는 것은 비웃음과 책망뿐이다.

다행히도 지갑은 이튿날 한길에서 발견됐다. 돈도 그대로였다. 오슈코른 영감은 의기양양해져 더 큰 소리로 떠들었다. “내가 불쾌한 것은 그 사건 자체가 아니야. 알겠나? 그런 게 아니라 그 멀쩡한 거짓말 때문이야. 거짓말로 남에게 비난 받는 것처럼 불쾌한 일은 없거든.”

하지만 아무도 그의 말을 곧이듣질 않았다.

그래! 그래! 이 영감탱이야! 나도 알아. 그 노끈 이야기 말이지! 그야 물건을 주운 사람하고 갖다 준 사람하고 얼마든지 다를 수 있지. 안 그래?”

오슈코른 영감은 억울하고 화가 치밀어 눈앞이 캄캄하고 목이 조여 왔다. 온 세상 사람들이 자기를 교활한 인간이라고 생각하는 이상 무슨 말을 해도 소용이 없었다. 하지만 포기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는 오슈코른 영감의 이야기는 날마다 조금씩 길어져 갔다. 혼자 있을 때면 몇 시간이고 말할 줄거리를 미리 생각하는 버릇까지 생겼다. 그의 변호가 복잡해지고 증거가 확실할수록 사람들은 그를 더욱 믿어 주지 않았다. 결국 오슈코른 영감은 섣달그믐께 화병으로 몸져누웠고, 정월 초순 끝내 세상을 하직했다. 숨을 거두는 마지막 순간에도 그의 하소연은 계속됐다.

그건 조그마한 노끈 오라기인뎁쇼. 조그마한 노끈 오라기라고요. 보십시오. 여기...”

이 웃지 못 할 희극은 모파상의 단편소설 <노끈>에 나오는 이야기다. 다소 우화적이기는 하지만 충분히 있을 법한 이야기다. ‘지하철 반말녀개똥녀와 같은 현대판 오슈코른 이야기는 오늘도 끊임없이 재생산되고 있다. 여론의 뭇매를 맞는 당사자 입장에서는 참으로 억울한 일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달리 어찌할 방도도 없다. 자신의 얼굴과 신상은 낱낱이 공개돼 있는데 반해 비난하는 이는 얼굴도 이름도 없는 다수다. 이러한 비대칭적 구도 속에서 모든 변명들은 오히려 그의 교활함을 보여주는 또 다른 증거가 될 뿐이다. 그는 점점 인격적으로 존중받지 못할 악인으로 추락한다. 반대로 그를 힐난하는 대중들은 죄인의 거짓 진술 따위에는 결코 속아 넘어가지 않는 엄정한 판관으로 군림한다. 그들이야말로 살아있는 정의의 파수꾼인 셈이다.

<도덕의 기초에 관하여>에서 쇼펜하우어는 여론의 맹렬함을 다음처럼 묘사했다.

여론은 가차 없이 엄격하게, 단 하나의 잘못된 행동도 결코 용서하지 않고, 죽을 때까지 지울 수 없는 표시를 죄인에게 씌운다.”

여론의 이러한 힘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사람들은 왜 여론의 감시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것일까? 쇼펜하우어는 명예심에서 그 답을 찾는다. 여론은 법처럼 물리적 폭력으로 사람들을 통제하지 않는다. 그것은 훨씬 더 강력한 것으로 사람들의 마음속에명예라는 이름으로 내면화되어진다. 오슈코른 영감이 말똥 묻은 노끈 줍는 모습을 말랑댕 영감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았던 것도, 사람들에게 거짓말쟁이로 낙인찍히는 것이 참을 수 없었던 이유도 명예 때문이다.

명예란 객관적으로 보자면 우리의 가치에 대한 타인의 생각이지만, 주관적으로 보자면 이 생각에 대한 우리의 두려움이다.”

명예는 명성과는 다르다. 명성이 없다는 말은 무명(無名)의 상태를 의미할 뿐이지만, 명예가 없다는 말은 일종의 치욕을 뜻한다. , 명성이란 것은 그 장본인이 예외적 인물이라는 사실을 나타내는 데 반해 명예는 누구에게나 통상적으로 전제되는 성질, 따라서 없어서는 안 될 성질을 가리킨다. 예를 들어, 상인에게 없어서는 안 될 것은 신용이다. 달리 말해 신용이 상인의 명예다. 상인이 상인으로서의 명예가 없다고 여겨진다면 누구도 그와 거래를 하지 않을 것이다. 물론 어떤 이가 신용이 있는지 없는지는 여러 번 거래를 해본 뒤에나 알 수 있다. 이 점에서 명예는 상업에 종사하는 모든 이에게 신용대출 같은 형태로 미리 주어져 있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시민사회의 일원이 되기 위해서는 시민으로서의 명예가 요구된다. 시민적 명예란 자신만의 이익을 위해 부도덕한 방법을 결코 사용하지 않겠다는 약속과 같은 것이다. 교류에 앞서 일단 승낙한 약속이다. 이 약속이 잘 지켜졌는지, 그렇지 못한지를 판단하는 것은 전적으로 타인들의 몫이다. , 명예의 분배에 있어서도 개인과 대중의 관계는 비대칭적이다.

대중들로부터 비난받는 것이 치욕이라면, 비난을 하는 것은 명예가 된다. 동감하지 못하겠다면 다음 경우를 생각해봐라. 누군가를 부도덕하다고 비난할 때, 당신은 도덕 준칙을 잘 알고 있다. 적어도 타인의 눈에는 그렇게 보인다. 명예도 타인의 눈에 비친 당신의 자질이다. 따라서 타인의 잘못을 힐문하면 할수록 당신의 시민적 명예도 높아진다. 명예란 타인이 당신에게 빌려 준 것이니, 대출 연장되어진다고 말하는 편이 옳겠다. 어쨌든 사람들의 모든 행위가 여론의 감시 아래 놓이게 될 수밖에 없는 이유가 명백해졌다. 그것은 바로 명예 때문이다.

우리가 함께 더불어 살아가는 한 시민적 명예는 불가피한 것처럼 보인다. 시민사회에서 안전과 재산은 일률적으로 사회에 의지해 보장받고 있으며, 무슨 일을 계획하든 타인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명예를 잃을까봐 두려워하는 것은 실제로는 사회로부터 얻을 이익을 잃을까봐 걱정하는 것이다. 이 점에서 명예는인간 사회에서의 이익에 대한 자기 몫을 받을 자격이 있는 일원으로 인정받고 싶다는 욕구. 명예에 대해 쇼펜하우어가 보내는 냉소의 원인이 여기에 있다. 그것은 말하자면이기주의에 대한 관습적이고 체계적인 부정으로서 일종의 승인된 위선일 뿐이다. 그럼에도 그것은 요구되고 칭송받는다. 쇼펜하우어는 이렇게 말한다.

왜냐하면 그것이 감추는 이기주의는 너무 역겨운 것이어서, 사람들은 그것이 거기에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것을 보지 않으려 하기 때문이다.”

독일의 문호 토마스 만은 쇼펜하우어를 읽고 난 후 상반된 감정을 느꼈다고 한다. “잔인하고 가혹한 사상, 이 얼마나 모욕적이고 무자비하며 거만스러운가! 이를 용납하는 것은 우리의 감정에 거슬리지만, 우리의 감정은 그런데도 이 사상에 깃든 신비를 부르고 있다.”

쇼펜하우어의 신비감은 우리 삶의 본질을 미화 없이 보여준다는 점에 있다. 그는 이기주의 자체를 도덕적으로 비난하지 않는다. 그것은 살고자하는 의지와 직결된 것이다. 이 의지는 맹목적이며 제어할 수 없는 충동이다. 이 점에서()에의 의지(Wille zum Leben)’는 나 자신에 대한 것이든 내 밖의 세상에 대한 것이든 모든 인식들보다 앞선다. 내가 지금 마주 대하고 있는 세상의 모습이란 실상 내 의지의 거울일 뿐이다.

자기중심적 세계에 빠져 사는 것은 분명 미망이다. 타인의 생각에 얽매여 사는 미망은 이 미망 자체를 잊게 만든다. 쇼펜하우어는 일종의 처세술로서 내면의 감정에 충실할 것을 권한다. 바로 거기에 마음의 유쾌함과 불쾌함이 직접적으로 깃들어 있기 때문이다.

어리석은 사람은 시인이 경험한 황홀한 사건만 부러워할 뿐, 매우 평범한 사건을 그렇게도 멋진 시로 표현해낸 시인의 활력 있고 왕성한 상상력은 부러워하지 않는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는 무엇보다도 세계에 대한 우리의 생각에 의해 좌우되며, 이 생각의 차이에 따라 무미건조하고 하찮은 것이 되기도 하고, 시인들이 노래하는 황홀경이 되기도 한다는 것을 잊지 말자.

필자는 고려대 철학과를 졸업하고 벨기에 루벵대에서 철학 석사 학위를, 파리 고등사회과학원(E.H.E.S.S)에서 스피노자 철학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고려대 등에서 강의를 하고 있다. 특히 윤리학의 역사, 스토아철학, 아우구스티누스에 관심을 갖고 관련 분야를 연구하고 있다.

김원철 철학박사 won-chul-kim@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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