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 대리님의 스파이 짓으로 인한 대혼란은 오히려 우리에게 득이 되었다. 그가 빼내간 기술과 제품 콘셉트는 우리가 제품 개발 초기 단계에 기획한 것이었다. 우리가 이후에 수없이 많은 조사와 분석, 검토를 통해 도출한 제품 콘셉트와 타깃 소비자, 홍보 및 마케팅 기획 등의 내용이 빠져 있을 수밖에 없었다. 당연히 곰 인형 조명기기에 대한 소비자 반응은 기대 이하였으며, 판매도 지지부진했다. 유 대리님은 훔쳐낸 제품 콘센트로 알량한 팀장 직함만 얻어낸 셈이었다.
우리에게 도움을 준 것은 유 대리님 제품의 실패에서 얻은 교훈이었다. 우리는 일단 외로운 독신자를 겨냥한 감성 위주 제품이 시장성이 없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독신자에서 스트레스 해소가 필요한 직장인과 수험생으로 타깃을 바꾼 결정이 정확했다는 이야기다. 따라서 좀 더 실용적인 측면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마케팅 전략을 구체화하기로 했다.
낮에는 모든 팀원이 흩어져 곰 인형 조명기기의 판매 상황을 살펴보고, 밤이면 마케팅 회의를 하기 여러 날. 우리는 소비자 밀착형 마케팅에 집중해야 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우선 무료 체험단을 모집해 소비자들이 직접 제품을 사용하도록 했다. 체험단에 참가한 사람들이 블로그나 인터넷 카페에 올린 이용 후기는 생각보다 훌륭한 구전 마케팅 효과를 발휘했다.
덕분에 우리 제품은 시판 초기부터 직장인, 학생, 학부모 사이에 화제를 불러일으키며 기대 이상의 매출을 올렸다.
우리 팀원들이 갑자기 터진 ‘유 대리 사건’을 수습하기 위해 이리저리 뛰어다니는 동안 회사 법무팀에서는 곰 인형 조명기기에 대한 법적 조치를 검토하고 있었다. 유 대리님은 우리가 기획 초기부터 기술 특허를 출원해 놓았다는 기본적인 사실조차 모르고 있었던 듯 했다. 일은 안하고 빈둥빈둥 놀기만 했으니 그럴 만도 했다. 곰 인형 조명기기는 우리 기술을 거의 대부분 그대로 적용한 제품이었다.
회사에서는 다시는 이와 비슷한 일이 생겨서는 안 된다는 사장님 지시가 내려졌다. 이에 따라 유 대리님과 그를 스카우트한 회사에 대해 강경책을 펴기로 결정했다. 특허청에 특허의 조기공개를 신청하고, 이후에 고의적인 기술 도용에 따른 기술 손실 보상금과 손해배상 청구, 판매금지 가처분 소송을 하겠다는 내용의 경고장을 보내는 등 가능한 모든 법적 조치를 취하기로 한 것이다.
이제 사정이 급해진 것은 자신이 몸담고 있던 회사의 기술을 빼돌려 만든 제품이 시장에서 외면을 받은 데다 본인까지 산업 스파이로 낙인 찍혀 법정에 드나들게 된 유 대리님이었다.
얼마 전 유 대리님이 직접 우리 팀에 협상을 제안해 왔다. 법적 조치를 취소하면 우리의 요구를 들어주겠다는 것이었다. 옛정을 생각해 적당한 선에서 마무리해 달라는 말도 덧붙였다. 팀장님께서는 협상에 유리한 고지는 우리가 차지하고 있으니 손해배상금을 받든지 기술 사용에 대한 로열티를 받든지 우리 회사의 매출을 늘리는 쪽으로 결론짓자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다른 사람도 아닌 나에게 유 대리님과 접촉하라는 지시를 내리셨다.
나는 일단 유 대리님의 기부터 죽이기 위해 본인이 배신하고 떠난 우리 회사로 직접 찾아오라는 문자 메시지를 보냈다. 유 대리님은 회사 입구에서부터 사장실 바로 옆에 붙어 있는 7층 회의실로 올라오기까지 한때는 동료였던 사람들의 따가운 시선을 온몸으로 받아야 했다. 그는 애써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을 지었지만 이미 평정심을 잃고 있는 듯 했다. 그럼 기선 제압은 성공한 건가?
“어이구, 유 대리님 오랜만입니다. 아니, 이젠 유 팀장님이시죠? 팀장씩이나 되시는 분이 뭐가 아쉬워서 여기까지 오셨어요?”
“강 대리, 그만하지. 그건 그렇고, 더 이상 제품 개발을 하지 않겠다고 약속할 테니 법적인 조치는 자제해 줄 수 있겠어?”
“결국엔 망할 제품, 개발을 하든지 말든지 우린 상관없습니다. 그러게 기술을 훔쳐갈 거면 제대로 훔쳐 가시던가요. 하긴 일을 제대로 하지도 않았으니 뭐가 중요한지도 모르셨을 거고.”
“(발끈) 너! 말이 너무 심한 거 아냐?”
“그쪽이 화내실 일이 아니죠! 화는 우리가 내야 하잖아요.”
흠흠…. 내가 제대로 이야기를 끌고 가고 있긴 한 건가? 이대로 가다간 싸우기만 하고 끝나겠는 걸. 팀장님께서 지시하신 내용을 얘기해야 하는데, 언제 말하는 게 좋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