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 엽편 소설: 우리가 만날 세계
추웠다.
주머니에 구겨 넣은 손끝도 곱아드는 추위였다. 아무도 없는 마을버스 정류장을 향해 굳이 종종걸음을 쳐야 했던 것도 이 추위 때문이었다. 길은 반쯤 녹은 눈과 섞여 슬러시 상태가 된 얼음으로 뒤덮여 있었다. 그게 5분 전 07번이 출발해 아무도 없는 한겨울 한낮의 마을버스 정류장에서 벌러덩 뒤로 자빠져 머리를 깨뜨릴 뻔한 이유였다.
전세 사기를 당하는 것과 빙판길에서 종종걸음 치다 뒤로 넘어져 머리를 깨는 것 중 더 멍청한 건 어느 쪽일까? 다행히 내 머리는 깨지진 않았다. 초보 서커스 줄광대처럼 꼴사납게 파닥거리며 간신히 균형을 잡은 덕분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그게 내가 멍청하지 않다는 보증은 될 수 없었다.
사흘 전, 집주인이 ‘돌려줄 전세금이 없으니 지금 살고 있는 집을 매입하든가 아니면 마음대로 길바닥에 나앉든가’로 요약되는 문자를 세입자 전체에게 보낸 후 잠적해 버렸다. 이틀 전, 우리 빌라 세입자들이 모인 단톡방이 개설됐다. 그때부터 48시간 내내 핸드폰이 사시나무처럼 몸을 떨어댔다. 부르르, 부르르, 부르르. 한 번 떨릴 때마다 새로운 피해자와 새로운 피해 건물이 단톡방에 들어왔고 피해 금액이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이틀 동안 모인 피해 금액은 나처럼 조그만 디자인 회사에 다니는 말단 직장인이 한 번 만져보려면 삼백 년, 아니 삼천 년쯤 월급을 모아야 가능한 액수였다.
오늘 태어나서 처음으로 경찰서에 갔다. 거기 모인 모두는 하나같이 억울했고 화가 나 있었다. 나는, 나도 억울했고 화가 나 있었는데 거기 모인 모두의 사연에 비하면 어쩐지 내 사연이 조금 덜 억울하고 덜 긴급한 것 같아 이상했다. 나는 한 달 전 결혼해 처음 함께 살 집을 마련한 신혼부부거나 처자식이 주렁주렁 딸린 가장이 아니었고, 곁을 떠나지 않고 부양해야 할 노부모나 간병해야 할 환자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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