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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이 묻고 신하가 답하다

“경(經)을 지키면서 편의(便宜)를 구해야”

김준태 | 367호 (2023년 04월 Issue 2)
편집자주

‘왕이 묻고 신하가 답하다’ 코너의 연재를 마칩니다. 필자는 조만간 새로운 연재로 다시 독자 여러분을 만날 예정입니다.

Article at a Glance

정해진 매뉴얼을 따르기 어렵거나 원칙을 지킬 수 없을 때 많은 사람이 ‘상황’을 내세운다. 하지만 원칙과 상황은 공존 가능하다. 원칙을 지키되 상황에 맞게 융통성을 발휘하기 위해서 중요한 것은 ‘마음’이다. 마음이 바로 서지 못하면 아무리 좋은 법을 만들어도 아귀가 맞지 않아 합치하지 않고, 훌륭한 제도를 도입해도 서로 어그러져 시행하기 어려워진다. 마음이 올바르고 사사로운 욕망이나 편견에 빠져 있지 않고 감정에 흔들리지 않는다면 원칙과 상황도 균형 있게 조화시켜 나갈 수 있다.



흔히들 ‘원칙’과 ‘상황’이 상충한다고 생각한다. 정해진 매뉴얼을 따르기 어렵거나 규정을 그대로 적용할 수 없을 때, 대부분 그 이유로 내세우는 것이 ‘상황’이다. 하지만 과연 원칙과 상황은 공존할 수 없는 단어일까? 1694년(숙종 20년)에 시행된 별시문과(別試文科)에서 숙종은 “자신은 나라와 백성을 위해 ‘시의(時宜)’1 를 확보하려고 근면하게 노력하고 있는데 왜 성과가 없는지”를 물었다. 그리고 그 원인이 “자신이 원칙을 지키지 못해서인지 아니면 현실에 맞게 보다 적극적으로 융통성을 발휘하지 못해서인지”를 질문했다.

이에 대한 권이진(權以鎭, 1668~1734)2 의 대책을 살펴보자. 권이진은 송나라 때 학자 여대림(呂大臨)의 말을 인용하는 것으로 답안을 시작한다.

“이천(伊川) 선생은 다스림은 반드시 상법(常法)으로 해야 한다고 하셨고, 명도(明道) 선생은 일을 조치할 때는 편의(便宜)가 중요하다고 하셨습니다.”3

국가를 경영하는 데 있어서 이천은 원칙을 고수해야 한다고 강조했고, 명도는 현실에 맞게 편리한 방향을 찾으라고 주문했다는 것이다. 얼핏 두 사람의 주장이 어긋나는 것처럼 보이지만 권이진은 이천의 말과 명도의 말이 서로 다르지 않다고 말한다. 이어지는 권이진의 발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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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스림은 진실로 지키는 법이 있어야 하고 조치함에는 편의가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고집스러운 사람은 옛 제도에 집착하다가 일을 상황에 맞춰 마땅하게 처리하지 못하게 되고, 함부로 하는 사람은 자신의 지혜만 믿고 경상(經常)의 법을 업신여깁니다.”

“일에는 이치에 근본을 두고 바꿀 수 없는 ‘항상(恒常)’됨이 존재합니다. 그러나 일을 할 때는 상황에 기인해 반드시 적절하게 조치하는 일이 중요합니다. 경(經)을 지키면서 편의(便宜)를 구해야 하는 것입니다.”

정치에는 결코 변하면 안 되는 도리가 있다. 국민의 재산과 생명을 보호해야 하는 국가의 의무, 민생을 안정시키고 나라를 번영케 하겠다는 국가의 목표, 지도자가 공적인 마음과 올바른 태도를 가지는 것 등이다. 이는 정치에서 가장 중요한 원칙으로 어떤 경우에도 흔들려서는 안 된다. 이러한 것들을 굳건하게 지키는 가운데 구체적인 일들에서는 상황에 맞게 융통성을 발휘할 필요가 있다. 위기가 눈앞에 보이는데 대응 매뉴얼에 없다며 가만히 있을 건가? 우회로로 가면 되는데 정면에 길이 막혀 있다며 포기할 것인가? 원래 현실은 예측하지 못한 변수들로 가득한 법이다. 이를 면밀하게 살펴 창의적이고 능동적으로 대응해야 한다. 이때 매뉴얼만 고집하고, 한 가지 방식만 고수하게 되면 결코 성과를 도출할 수가 없다. 그렇다고 원칙은 접어두고 ‘상황’만 따르는 것도 옳은 선택은 아니다. 원칙을 배제한 해결책은 임시방편에 불과하다. 지속성이나 확장성을 가질 수 없다. 그러니 모든 일을 임시방편으로 처리하려 들면 얼마 지나지 않아 감당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될 것이다. 결과만 중시하고 편법을 남용하다가 잘못된 길로 빠지게 될 가능성이 높다.

그래서 권이진은 “경을 지키면서 편의를 구하라”, 즉 원칙을 지키는 가운데 형편과 조건에 어울리는 마땅함을 찾으라고 말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기준에서 보자면 숙종의 정치는 무엇이 문제였을까? 권이진은 “백성을 보호하겠다면서도 항산(恒産)을 마련해주지 않아 집집마다 지아비가 아내와 자식을 이끌고 고향을 떠나 살길을 찾아 떠돌고 있습니다. … 토지를 측량하는 것은 경계를 바로잡고자 함인데 부호의 토지 겸병이 이로써 더욱 불어났습니다. … 포조(逋租)4 를 탕감해주어 은혜를 베풀고자 하였으나 서민들의 집에는 미치지 않았습니다. 대동법을 밝혀 세금을 덜어주고자 하나 유사(有司)5 들은 창고가 비었다고 말합니다”라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불을 태우면 연기가 나고 물이 흐르면 흙이 젖는 것이니, 일을 하고도 공이 없거나 복무하여 수고했는데도 효과가 없는 것은 있지 않습니다. 한데 전하께서 하신 일이 공효(功效)가 없는 것이 이와 같은 지경에 이르렀으니 어찌 된 일이겠습니까?”라고 묻는다.

권이진이 보기에 숙종은 본인만 똑똑한 줄 안다. 신하들이 고루하고 원리원칙만 따진다며 비웃고, 오로지 자신만이 현실을 잘 살펴 시의적절하게 대처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고 자만해 있다. 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못하다. 숙종은 본인의 주관과 편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심지어 오만에 빠져 있어 “지금이 무엇을 할 때라며 움직이나 시기라고 생각했던 것이 적기(適期)가 아니어서 어그러지는 지경에 이르고 있다.” 군주로서의 마음가짐이 잘못돼 상황 판단을 제대로 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더욱이 숙종의 정치는 “시의(時宜)에 부합하고자 힘쓰나 끝내 허투루 돌아가며, 비록 사무에 적합해지고자 힘쓰나 끝내 헛치레에 지나지 않는 일이” 잦은데 이는 숙종이 기준이나 원칙 없이 그때그때 임시방편으로만 일을 해결하려 들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법을 도입한 취지와는 달리 유민이 생기고, 부자의 배만 불려주고, 백성에게 혜택이 돌아가지 않고, 나라 살림이 줄어드는 폐단이 나타났다는 것이 권이진의 진단이다. 이에 권이진은 무엇보다 마음이 올바른 상태여야 한다고 강조했다. 원칙을 준수하면서 융통성을 발휘하는 것, 상황 인식과 판단이 적절하게 이뤄지는 것 모두 마음이 하는 일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왕은 “편의를 얻지 못함을 걱정하지 말고 오직 이 마음이 바르지 않는 것을 걱정해야 하니” 그렇지 않으면 “아무리 좋은 법을 만들어도 아귀가 맞지 않아 합치하지 않고, 훌륭한 제도를 도입해도 서로 어그러져 시행하기 어려워진다”는 것이다.

요컨대, ‘원칙’과 ‘상황’은 서로 조화를 이룰 수 있다. 다만 ‘내 마음’이 제 역할을 해야 가능하다. 내 마음이 올바르고 사사로운 욕망이나 편견에 빠져 있지 않고 감정에 흔들리지 않는다면 나의 인식과 판단 능력이 제대로 작동할 테고 원칙과 상황도 균형 있게 조화시켜 나갈 수 있는 것이다.

더불어 이 ‘마음’은 지금까지 연재에서 다룬 18편의 책문을 관통하는 핵심 키워드이기도 하다. 다양한 시대의, 다양한 주제를 다뤘지만 모든 것은 결국 내 마음을 다스리는 일로 수렴된다. 좋은 인재를 얻으려면, 갈등을 해결하고 공도를 세우려면, 경청을 잘하고 간언을 수용하려면, 중용을 실천하고 항상 정성을 다하려면, 전쟁에서 지휘관이 제 역할을 하려면, 타인의 신뢰를 받으려면, 나아가야 할 때와 물러서야 할 때를 정확히 판단하려면, 술의 부림을 당하지 않으려면, 모두 내 마음을 수양하는 일이 전제가 돼야 했다. 내 마음이 중심을 잡고, 투명하고 객관적으로, 특히 올바르게 작동해야 가능한 일들이기 때문이다. 옛날 선비들이 그토록 자기 수양을 강조했던 이유도 그래서였을 것이다.

  • 김준태 | 성균관대 유학동양학과 초빙교수

    필자는 성균관대에서 한국 철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고 동 대학 유교문화연구소, 유학대학 연구교수를 거치며 우리 역사 속 정치가들의 리더십과 철학을 연구하고 있다. 특히 현실 정치에서 조선 시대를 이끌었던 군주와 재상들에 집중해 다수의 논문을 썼다. 저서로는 『왕의 경영』 『왕의 공부』 『탁월한 조정자들』 등이 있다.
    akademie@skku.ed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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