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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운하 시대 중국 상인 이야기

‘관시’는 윤활유… ‘give and take’가 아니다

조영헌 | 336호 (2022년 01월 Issue 1)
Article at a Glance

타지에 진출한 중국 객상들은 낯선 땅에 적응하며 겪어야 했던 고충을 혈연, 지연, 학연을 활용해 극복했다. 족보 편찬을 통해 인재 확보를 위한 정보를 얻었으며 자신들만의 동향 조직을 운영해 같은 언어로 결속을 다졌다. 또한 똑똑한 자제는 관료가 되게 해 권위에 기반한 안전망을 획득했다. 현대에도 자주 회자되는 중국의 ‘관시’ 문화는 위험을 최소화하며 자신이 보유한 자산과 네트워크를 최대한으로 활용했던 중국 상인들로부터 진화했다.



편집자주
중국 상인을 심층적으로 연구해 온 조영헌 고려대 교수가 ‘대운하 시대, 중국 상인 이야기’를 연재합니다. 과도기적 역사 속에서 신속한 대처 능력과 전략적 투자로 입지를 넓혀 나간 역사 속 중국 상인들에 대한 고찰을 통해 난세를 극복하는 경영의 지혜를 익히시길 바랍니다.

지난 첫 연재 1 에는 대운하 시대(1415∼1784), 중국의 10대 상방 가운데 제일로 손꼽히던 휘주 상인이 경제 대동맥인 대운하의 유통망을 둘러싼 경쟁에서 우위를 차지하는 비결을 살펴봤다. 분명 휘주 상인이 다른 상인 집단에 비해 우위를 차지한 것은 사실이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남겨져 있는 기록, 즉 사료에 근거한 결론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록에 남겨진 성공한 휘주 상인들은 전체 상인 가운데 소수라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훨씬 더 많은 무명의 상인은 실패하거나 성공을 꿈꾸며 목숨을 거는 고통을 오랜 시간 감내해야 했다. 오늘날 잘 알려진 빅테크 기업인 구글, 아마존, 페이스북, 카카오, 네이버 등이 있지만 이처럼 성공한 기업은 소수이고 대다수 중소기업이나 벤처기업은 성공을 꿈꾸며 생존 경쟁을 펼치는 것과 유사하다. 따라서 이번 호에는 과거 객지로 진출했던 벤처 상인들이 객상으로 겪어야 했던 고충과 이를 극복하기 위해 인적 네트워크의 세 요소인 혈연, 지연, 학연을 어떻게 활용했는지에 대해서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모든 거상(巨商)도 초창기는 이 세 요소를 적재적소에 배치하면서 인적 네트워크를 형성했다. 과하지 않게 활용하는 센스가 있어야 진정한 신뢰 관계가 형성되기 마련이었다. 그 속에서 중국인 특유의 관시(關係) 문화가 형성됐음은 물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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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지에 진출한 객상으로서의 고충

대운하 시대에 돈을 벌기 위해 타지로 진출했던 ‘벤처’ 상인들이 직면했던 딜레마가 있었다. 너무 빨리 귀향해도 곤란했지만 그렇다고 객지에 너무 오래 머물 수도 없다는 딜레마였다.

그들은 한 번 나가면 보통 2∼3년이 넘도록 고향에 돌아오지 못했다. 소문만 듣고 나갔으나 각지에서 몰려든 상인과 현지 상인들과의 경쟁이 날로 심해지는 상황에서 돈을 버는 것이 기대만큼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성공하지 못하고 고향에 돌아오면 웃음거리가 되기 십상이었다. 소설 『이각박안경기』(권37)에 등장하는 휘주 상인, 즉 첫 번째 사업에서 초기 자본까지 모두 날려버리는 실패를 경험하고도 장사를 정리하지 못하고 전전긍긍했던 인물 정재(程宰)는 이러한 상황을 실감 나게 보여준다. 휘주에서는 과거 응시를 위해 떠났던 자가 귀향할 때처럼 장사를 위해 떠난 사람도 그 성공 여부에 따라 고향에서의 태도가 현저하게 달랐다.

반면 객지에 적응하고 정착하느라 정신이 팔려 고향을 돌아보지 않는 경우도 비난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휘주인들은 객지에서 활동할 때 다른 지역 출신에 비해 동향 의식이 강하고 종족 조직도 잘 활용하는 것으로 유명했지만 그만큼 고향과의 결속력을 요구받았다. 또한 고향 식구들을 돌아보고 경제적으로 지원해야 한다는 책임감도 강하게 요구됐다. 만약 경제적인 성공에 취해 객지에만 머물 뿐 고향에 있는 조상의 묘나 사당을 돌아보지 않는다면 이는 경박하다고 지탄을 받았다.2 소설 『유세명언』(권1)에 등장하는 휘주 상인 진대랑(陳大郞, 이름은 상(商))이 호광(湖廣) 양양부(襄陽府)로 진출했다가 또 다른 객상 남편을 떠나보내고 독수공방하던 여인(삼교아)을 유혹해 정을 통하고도 다시 고향으로 돌아왔던 것, 그럼에도 불구하고 삼교아를 못 잊고 다시 양양부로 돌아갔다가 비참한 죽음을 맞는다는 설정 모두 객지에서의 성공에 눈이 어두워 고향을 돌아보지 않는 자에게 돌아오는 인과응보의 교훈을 담고 있다. 상업 발달로 고향을 떠난 객상이 증가하는 시대였음에도 불구하고 여성에게는 정절을 강요하는 모순적인 현실 상황을 드러내고 있는 소설이다. 문화연구자 리어우판(李歐梵) 홍콩중문대 교수는 이 소설의 스토리를 중국인들의 욕망과 일탈의 문화를 보여주는 키워드의 하나인 ‘음식남녀(飮食男女)’의 대표로 제시했다.3

17세기 소설 속에 등장했던 두 휘주 상인은 완전히 다른 결말을 맞이했다. 소주(蘇州)풍의 모자를 눌러쓰고 새하얀 호남(湖南) 비단으로 만든 도포를 입고 등장한 진대랑은 장사보다 사랑을 희구하다 상사병으로 비참한 죽음을 맞이했다. 한편 숙박업소에서 구매할 물건과 방식을 알려주는 여신(女神)을 밤마다 만났던 정재는 세 차례의 상품 매매를 통해 10냥의 초기 자본금을 3000∼4000냥으로 불렸다. 누군들 진대랑처럼 되고 싶지 않았겠으며, 또 정재처럼 귀신 같은 정보를 입수하길 원하지 않았겠는가? 유동성이 급증하던 사회에서 신뢰도가 높은 정보를 신속하게 입수하고자 상인들에게는 신뢰할 수 있는 인적 네트워크가 절실했다.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중국 특유의 인맥, ‘관시 네트워크’라고 볼 수 있는데 핵심은 신뢰와 호혜(reciprocity)였다. 그 첫 번째 요소가 혈연을 기반으로 한 종족 조직이었다.

혈연에 기반한 종족 네트워크의 힘

오늘날 전 세계로 진출한 화교 상인이나 차이나타운의 중국 상인들을 보면 각개전투는 거의 없고 대부분 먼저 정착한 이들과 나중에 진출한 이들이 서로 힘을 모아 동료와 함께 비즈니스 전쟁에서 살아남는다. 이는 오랜 객상의 전통, 즉 객지의 낯섦이나 위험성을 극복하기 위한 상인들의 노하우가 축적된 결과다. 전통 시대, 특별히 객상 풍조가 유행이 된 대운하 시대야말로 이러한 노하우가 무수하게 등장했던 시기였다. “피는 물보다 진하다”고 하지 않았던가! 전근대 중국에서 혈연보다 신뢰할 만한 요소는 쉽게 찾기 어려웠다.

돈을 벌기 위해 객지에 진출을 결심하는 단계부터 시작해 업종을 선택할 때, 그리고 실제 현지에 도착해 각종 난관을 헤쳐나가는 모든 단계에 가장 먼저, 그리고 가장 강력하게 힘을 발휘했던 네트워크는 혈연에 기반한 종족 혹은 가족 네트워크였다. 종족을 중시하는 풍조는 기본적으로 중국 사회를 지배했던 유교의 힘이 오래전부터 작동한 것과 관련이 깊다. 하지만 유교가 국교가 됐던 한대(漢代)나 과거제가 등장했던 수당(隋唐) 시대, 그리고 성리학이 등장한 송대(宋代)보다 더 유교의 생활 지배력이 강해진 시기는 대운하 시대가 시작하는 명대(明代)였다. 송대 이후 서민들 사이에도 족보 편집과 종사(宗祠) 건설이 행해졌지만 이러한 관행이 본격화된 것은 명 이후의 일이었다. 이는 명 조정이 질서 유지를 위해 유달리 종법 질서를 강화하고, 족보 편찬과 종사 건설을 장려했기 때문이다. 바로 이 시기에 객상 풍조가 유행했으니 객지에 진출한 상인들이 종족 네트워크를 적극 활용한 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현상이었다.

그렇다고 대운하 시대 모든 객상이 종족 네트워크로 재미를 본 것은 아니었다. 상인들은 예외 없이 혈연을 가지고 있었지만 특별히 혈연에 기반한 종족 네트워크로 사업에 성공한 부류는 따로 있었다. 장사를 하면서도 유교적 가치관을 중히 여기거나 족보 편찬과 종사 건립 및 족산(族産) 축적에 투자하는 것을 아끼지 않는 이들이었다. 그 가운데 성리학을 개창한 주희(朱熹, 1130∼1200)를 신봉했던 휘주 상인이 많았다. 주희는 복건에서 태어났으나 조상들의 본적인 조적(祖籍)이 휘주이고, 주희 역시 휘주에 머문 적이 있으므로 휘주인들은 어디를 가든 주희를 숭상하며 제사했다. 그래서 휘주 상인들은 객지에 도착하면 동향인을 모아 상호부조를 위해 주희를 제사하는 자양서원(紫陽書院)을 건립했다. 명칭은 서원이지만 기능은 동향 회관(會館)이었다. 자양은 휘주 흡현(歙縣)에 위치한 산 이름이며 주희의 조상이 이곳에서 독서를 했기에 복건으로 옮겨 간 주희는 자신의 독서실을 자양서실(紫陽書室)이라고 불렀다. 휘주에 동남 지역의 유교 본거지라는 뜻인 ‘동남추로(東南鄒魯)’라는 별칭이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휘주인들이 족보 편찬과 종사 건립에 집중했던 것도 그 이면에는 비즈니스에서 경쟁력을 높이기 위한 전략이 깔려 있었다. 가령 족보의 편찬에는 인재 확보를 포함한 정보 수집과 사업망 확장을 위한 거점 확보라는 의도가 숨어 있었다. 족보는 몇 년마다 갱신되므로 그때마다 각지에 진출한 종족 구성원들의 상황 변화와 정보가 갱신되는 셈이었다. 종사의 건설과 제사를 통한 회합 역시 동족 사이의 인적 교류와 연대를 강화하고 정보를 교류하는 장이 됐다. 4 종족의 공동 재산을 비축하는 것 역시 객지에서 어려움을 겪는 종족 구성원들에게 지급되는 재정 지원에 사용되기도 했다. 그 결과 휘주 상인들은 객지, 특별히 유교적 문화 수준을 중요하게 여기는 강남 지역에 진출해 장사할 때, 다른 상인보다 쉽게 현지 신사층의 부정적 시각을 완화할 수 있었다. 이는 사업권을 획득하는 데도 유리했다. 종족 네트워크는 상거래에 관한 법률이 정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국가 공권력으로부터 자신들을 지키기 위한 기본적인 수단이었다.

객상이 증가하며 유동성이 급증한 현실 속에서 종족은 현상적 질서 유지에 기여했다. 가령 대운하 시대에 종족 단위로 가규(家規)와 가전(家典)을 정비하는 일이 보편화됐는데 이는 현실적으로 남편이 장사를 위해 수년 동안 타향으로 떠나고 집으로 돌아오지 못하는 상황에서 여성의 정절을 강조하기 위함이었다. 한국이나 일본과 달리 중국의 족보에는 가규나 종약(宗約)이라는 항목으로 상세한 규칙이 많은 분량을 차지했다. 이는 그만큼 객상의 증가로 인해 분열의 가능성이 높았음을 반증하며 종족 내부의 결속을 강화해야 할 필요성이 증가한 결과다. 조선의 족보가 사회적 지위를 과시하는 대외적 기능에 초점이 맞춰졌던 것에 비해 중국 족보는 일족의 결속과 유대 강화라는 대내적 기능에 방점이 찍혀 있었다는 해석이 가능하다.5

물론 종족 네트워크는 휘주 상인만의 전유물이 아니었다. 복건 상인이나 산동 상인 등 누구나 종족을 활용하며 장사했다. 복건 지역에 관한 한 연구에 따르면 대운하 시대가 시작하는 15세기부터 확산된 종족 형성 운동이 새로운 행정구역인 신현(新縣)의 설치, 신사층의 형성, 상품경제의 발달과 밀접히 관련돼 있었다. 6 대운하 도시인 양주에서는 15세기부터 소금 유통업으로 일확천금을 벌기 위한 산서 상인들의 이주 열풍이 불었는데 고향인 산서성의 대동(大同)과 약 1000㎞ 떨어진 양주로 이주하면서도 고향에서의 가업을 안정적으로 유지하기 위해 종족 조직을 활용하는 산서인들의 이야기는 16세기에도 이어졌다.7

혈연에 기반한 종족 네트워크에 대한 신뢰는 근대 이후 가족 기업의 탄생과 확산에 자양분이 됐다. 개혁 개방 이후 우후죽순처럼 생겨난 중국의 민영기업 중 8할 이상은 가족주의를 기초로 한 형태였으며 이러한 비중은 국민당 정부가 통치하던 1970∼1980년대 대만의 기업에서도 유사하게 나타났다.8 한국의 대기업이나 재벌에서도 가족 기업은 보편적인데 유교적 문화가 강고한 사회의 유사성이라고 볼 수 있다. 가족 기업은 유럽에도 존재하지만 유럽의 가족 기업이 주로 소유권과 경영권이 분리돼 있는 데 비해 동아시아는 그렇지 않다는 차이가 있다. 물론 최근에는 중국과 한국에서도 가족(종족)의 경영권을 스스로 반납하며 전문 경영인을 고용해 경쟁력을 강화하는 사례가 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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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연에 기반한 동향 네트워크의 힘

휘주 상인이 동향 조직으로 자양서원을 이용한 것처럼 다른 지역 상인들 역시 자신들만의 동향 조직을 운영했다. 혈연을 보완할 수 있는 지역적 동질성을 근거로 한 동향 네트워크다. 혈연보다는 느슨할 수 있지만 전통 시대 동향 네트워크의 힘은 약하지 않았다. 지난번에 소개한 것처럼 대운하 시대에 10대 상인을 구분하는 기준은 동향이었다.

동향 네트워크가 힘을 발휘한 이유가 있었다. 지역마다 사용하는 언어, 즉 방언이 서로 달랐기 때문이다. 우리도 지역마다 방언이 있지만 소통이 불가능한 경우는 거의 없다. 하지만 중국은 바로 옆 지역으로만 진출해도 숫자를 세는 용어가 듣기 어려워지고, 먼 지역으로 이동할 경우 사실상 소통이 불가능할 정도로 발음과 성조가 달라졌다. 오래전 진시황이 통일했던 문자의 모양만 같을 뿐 발음이 지역마다 달랐기에 객상들은 객지로 진출해서 속임수에 빠지는 경우도 많았다. 지금도 중국인들은 외지인과 협상을 하다가도 비밀스러운 이야기를 나누고 싶으면 동향인들끼리 특유한 방언으로 대화한다.

그래서 필요한 것이 TV 뉴스에 등장하는 공통의 언어인 보통화(普通話)로, 국공 내전을 통일했던 마오쩌둥(毛澤東)의 업적이다. 대운하 시대에는 관화(官話)라는 이름으로 수도 베이징 인근 지역의 방언을 ‘표준’으로 삼았다. 하지만 관화는 과거 시험을 보거나 중앙이나 지방에서 관직을 얻으려는 소수의 지식인에게만 필수적인 언어였다. TV도 없던 시절이기에 중국의 전통 시대 각 지역은 그야말로 다른 언어와 다른 도량형, 다른 문화를 지닌 ‘다른’ 나라나 다름없었다. 무엇보다 마오쩌둥처럼 언어로 전국을 통일하려는 의지와 능력을 겸비한 지도자가 나타나지 않았다. 따라서 전통 시대 중국에서 객지에서 장사를 한다는 것은 오늘날엔 아예 다른 나라로 이민을 가서 사람을 사귀고 거래망을 여는 것으로 생각해도 무방했다. 객지에서 동향인을 찾는 것은 ‘말’이 통하는 사람을 찾아 현지인과 거래하기 위한 첫걸음이었다.

기억을 상기할 필요가 있겠다. 시세 차익을 노리고 객지로 진출해 장사했던 사례는 아주 오래전부터 존재했지만 말이 통하지 않고 문화와 도량형이 다른 객지로 진출하는 위험 요소가 너무 높았기에 실제 참여하는 이들은 소수였다. 객상으로의 참여가 사회적 풍조로 정착한 것은 대략 15세기 중엽이다. 명나라 중기에 해당하고 대운하 시대와 중첩된다. 이때가 돼서야 중국사에서 교역의 욕구가 전대미문의 단계에 도달하고, 객상이 전국 각지를 누비고 다니며, 다수의 외지인이 현지의 상거래를 휘젓는 일이 보편화된다. 동향 조직이 전국 각지에 건립되는 붐을 이뤘던 시기도 바로 대운하 시대다.

휘주 상인에게 주희를 숭배하는 자양서원이 있었다면 산서 상인에게는 관우(關羽=관공)를 숭배하는 관묘(關廟)가 있었다. 삼국시대 유비를 따라 장비와 함께 도원결의를 맺고 쓰러져가는 한나라의 적통을 이으려고 했던 무장 관우는 산서 상인의 고향인 산서 하동의 해현(解縣) 출신이었다. 이후 나관중의 소설 『삼국지연의』를 통해 관우의 이미지는 기개가 충만하고 의로운 장군의 모습으로 대중들에게 각인됐다. 산서 상인들은 관우를 숭배하면서 생전에 보인 여러 의로운 모습을 자신의 상업 활동에 적용하기 시작했다. “의로운 이익을 취해야 한다(利以義制)”는 원칙이 여기서 나왔다. 산서 상인은 자신들이 진출한 객지에 관묘를 세우거나 이미 건립된 관묘를 활용해 동향인들을 상호부조하며 자신들의 정체성을 강화했다. 가령 양자강 중류의 교통 요인이자 오늘날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의 근원지로 알려진 한구(漢口, 우한(武漢)의 한 지역)에 건립된 산서회관에는 “돈을 벌고 그 흐름을 조절하는 것은 모두 관공(=관우)의 신비로운 공력에 의해 결정되므로 잘 따라야 한다”는 문장이 걸려 있었다. 또한 하남성 낙양(洛陽)에 건립된 산서인들의 회관에는 관우 신앙에 대해서 “성현에 대한 제사는 최대한 엄숙하고 경건하게 지내야 한다. 여러 성현 가운데 특히 관제(關帝=관우)의 제사가 더욱 그렇다. … (중략) … 많은 사람이 그 덕과 공덕을 기리면 그 밝은 빛이 상인들에게 내려와 좋은 일만 있을 것이다. 언제나 경각심을 잃지 않고 이익에 취해 의를 망각하지 않는 것도 역시 관제의 보살핌 덕분”이라고 기록했다. 관우의 의로운 기개를 기리며 숭상할수록 ‘의로운’ 재물을 더 모을 수 있다는 신념이 산서 상인들 사이에 공유됐다. 이에 관우는 유교의 문(文)과 대비되는 무(武)를 상징하면서도 재신(財神)으로까지 그 의미가 확대돼 오늘날 세계 각지로 진출한 중국인들의 상점마다 입구에 관우상이 놓여 있는 것을 보게 된다. 9

사실 회관은 수도 베이징에서 근무하는 관리들이 고향 사람들과 친목을 다지는 과정에서 탄생했으나 돈 많은 상인의 참여가 증가하면서 점차 상인들의 동향 센터로 변모했다. 여기에 동향인들은 회관에서 자신들이 숭상하는 지역 신앙을 제사하며 전파했으므로 종종 회관은 동향인들의 종교 시설이기도 했다. 복건인들이 진출하는 곳에 주로 건립된 천후궁(天后宮)과 마조(媽祖) 신앙은 그 대표적인 사례다. 마조의 이름에 따라 천후궁은 천비궁(天妃宮)이나 마조묘 등 다양한 명칭으로 불렸다. 천후궁의 신앙 대상인 마조는 북송 초기에 복건 보전현(莆田縣) 미주도(湄洲島)에서 태어난 임씨(林氏) 집안의 딸로 알려져 있고, 그의 사후에 항해자들에게 영험함이 있다고 알려지면서 해신으로 숭배됐다. 이후 복건 상인들은 마조를 자신들의 신앙 대상으로 삼았다. 마조 신앙의 세 중심지는 복건, 대만, 천진에 있는데 모두 바다에 인접하거나 둘러싸인 곳이자 복건 상인들의 활동지였다. 일부 내륙에도 천후궁이 건립되는데 이는 대운하 시대 해금(海禁) 정책의 영향으로 해양으로 진출하지 못했던 복건인들이 내지로 진출한 영향이다.

따라서 낯선 지역에 도착해 장사를 시작하려면 먼저 같은 고향 사람들이 숭배하는 종교 시설이나 회관을 찾아가야 했다. 신흥 상인들은 자신들의 경영을 보호해줄 신령(神靈)을 선택하고 종교 시설을 짓기도 했다. 우선은 말이 통하는 사람을 만나야 했고, 섣불리 안전한 유통과 사업의 성공을 기원할 수 있는 기복(祈福) 의식도 갖춰야 했기 때문이다. 동향인이라 믿고 가진 재물의 위치나 정도를 밝히다 도리어 낭패를 봤다는 이야기가 소설 속에 종종 등장하지만 이는 초보자에게 해당하는 이야기다. 현지 정착과 유력인들과의 관시 형성을 위해서는 혈연과 지연을 넘어선 그 ‘무엇(something)’이 더 필요했다. 바로 과거(科擧) 중시 사회에서 윤활유 같은 역할을 할 수 있는 학문적 인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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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연에 기반한 ‘축적된 능력’ 네트워크의 힘

일찍이 중국 인구사와 과거제의 대가였던 허핑티(何炳棣, Ho Ping-Ti, 1917∼2012) 시카고대 교수는 대운하 시대 젊은이들이 목숨을 걸고 노년까지 매달렸던 과거라는 시험 제도를 ‘성공의 사다리(Ladder of Success)’라고 묘사했다. 10 과거제를 통해 사회 유동성(social mobility)이 증가했던 것은 사실이지만 주자의 경전 해석을 달달 외우는 방식의 과거제로 일원화된 성공 방정식은 지식인뿐 아니라 상인들에게도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관리들을 만나고 과거 합격을 지상 과제로 여기던 지역사회에 정착해 인정받기 위해서라면 상인이라도 유교 경전에 익숙하거나 가족 가운데 과거 합격자가 있어야 유리했다. 이른바 학연으로 불러야 할 과거제를 매개로 한 광범위한 네트워크였다.

당시 과거 합격의 특권은 세습되지 않고 단대(單代)로 끝났기에 학연 네트워크를 대대로 유지하려면 지속적인 노력이 수반돼야 했다. 혈연과 지연은 태어나면서 부여된 세습 조건이지만 학연은 후천적으로 습득해야 하는 ‘축적된 능력’이었던 셈이다. 이는 오늘날 미국의 엘리트들이 값비싼 교육을 통해 ‘인적 자본’을 대물림받는다는 것과 유사한 이치다. 그래서 예일대 로스쿨 교수인 대니얼 마코비츠(Daniel Markovits)는 『엘리트 세습』에서 현대사회에서 능력주의(Meritocracy)가 결국 현대판 귀족 사회를 의미한다고 주장했다. 11

휘주 상인들이 자제 가운데 가장 똑똑한 아들에게 장사가 아니라 교육을 강조했던 것도 이 때문이었다. 이는 유교 지식인으로 키우기 위해서라기보다는 최종적으로 과거 시험에 합격시켜 집안에 관료를 배출하기 위함이었다. 일단 일족 가운데 관료가 배출되면 신사층의 특권으로 세금의 부담을 경감받을 수 있었고, 정부 정책에 일정 정도 상인들의 이해관계를 반영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무엇보다 가장 큰 유익은 과거제와 관련된 각종 인적 네트워크를 동원해 상거래의 안전판인 ‘권위’를 획득하는 것과 신뢰성 높은 ‘고급 정보’를 빠르게 수집하기 쉬웠다는 데 있었다.12

지금도 그렇지만 대운하 시대 중국에도 수요와 공급 상황, 상품의 회전율, 시장에서의 가격 변동과 시세 차익, 운송 비용의 시세 등의 고급 정보를 신속하게 획득하는 것은 비즈니스의 기본 경쟁력이었다. 더 중요한 것은 상거래상의 개인을 보호해줄 수 있는 상법과 법치 체계가 제대로 마련되지 않은 전통 시대에 국가와 지역사회의 ‘폭력’으로부터 자신을 지켜줄 수 있는 안전판을 확보하는 것이다. 상거래상의 분쟁이 발생하거나 세관(稅關)에서 소란이 발생하면 상인들은 우선 그 지역에서 활동하는 동족이나 동향인들의 도움을 구하지만 혈연과 지연이 그 자체로 판결에 큰 힘이 되지는 못했다. 분쟁에는 역시 지역사회 엘리트의 여론과 관료들과의 관시가 결정적인 힘을 발휘했다. 당시 대도시의 엘리트는 대부분 유교적 소양으로 가득 찬 신사들이었고 지역 신사와 관료들은 유교 지식과 좌주문생(座主門生) 등 과거제로 형성된 관계망으로 연결돼 있었다. 따라서 관료를 배출할 수 있는 학연 방면의 ‘축적된 능력’이 있느냐에 따라 상인들의 비즈니스상에서의 경쟁력이 결정됐다.

주자학의 대가 주희를 숭상하는 휘주 상인은 유교적 소양에서 다른 상인에 대해 배타적인 우월성을 주장할 수 있었으나 실력은 과거 합격자 수를 통해 증명해야 했다. 실제 대운하 유통망의 핵심 도시였던 양주의 상업계에서 후발 주자로 진입했던 휘주 상인은 과거 합격자 수에서 선발 주자였던 산서와 섬서 상인을 압도했고, 이는 결국 양주 염업계의 주도권 장악에 결정적으로 작용했다. 고향을 떠나 오랜 기간 객지에서 활동해야 했던 염상(鹽商)을 위해 조정에서는 특별히 ‘상적(商籍)’을 허용해 체류하는 객지의 학교에 자제를 입학시키고 그 지역에서 과거 응시의 기회를 부여했다. 상적의 혜택은 휘주 상인뿐 아니라 산서 상인과 섬서 상인에게도 동일하게 부여됐지만 대대로 과거에 합격시키는 ‘축적된 능력’은 휘주인들을 능가하는 집단이 없었다.13 청대 4대 시진(市鎭)으로 손꼽히던 상업 도시이자 무술의 대가 황비홍(黃飛鴻, 1847∼1924)의 고향인 광동성 불산진(佛山鎭)에도 외지에서 온 상인들이 현지인들보다 과거 합격자를 더 배출하면서 지역 상권이 외지인에게 넘어가게 됐다.14

휘주 상인에 대한 묘지명을 읽어보면 “기유종상(棄儒從商)”, 즉 “유학을 버리고 상업에 종사했다”는 언급이 유독 많이 등장한다. 이것을 유학을 천시하고 상업을 중시했다고 해석하면 심각한 오독이 된다. 반대로 워낙 많은 휘주 상인이 상업에 뛰어들기 전에 과거 합격에 뜻을 품고 있을 정도로 유학에 대한 집착이 강했음을 보여준다. 오히려 처음부터 장사만 했던 ‘무식한’ 이들과 차별성을 강조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묘지명에 ‘기유종상’이라는 흔적을 새겨 넣은 것이다.

신뢰와 호혜에 기반한 관시의 형성

중국에 진출한 비즈니스맨이라면 귀가 닳도록 들었을 용어가 바로 관시다. 현지에 잘 정착하고 유력인들과의 네트워크를 형성하기 위해서 중국인 특유의 “관시를 맺으라”는 주문을 수없이 들었을 것이다. 우리의 인맥과 비슷한 용어이고 영어로는 ‘personal network’ 혹은 ‘particularistic ties(배타적 유대관계)’로 번역되지만 그 실체를 체득하기는 쉽지 않다. 이런저런 방식으로 친해진 것 같은데 결정적인 순간이 되면 결국 관시가 제대로 작동되지 않음을 느낄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그동안 쌓았던 중국인과의 ‘관계’는 도대체 뭐란 말인가?

필자도 아직 관시의 정체를 명확히 말하기 어렵다. 다만 중국 학자들과의 교류와 중국에서의 체류 경험을 통해 체감하는 관시는 신뢰에 기반한 인간관계의 ‘윤활유’와 유사하다. 관시가 제대로 맺어지면 상대방의 인적 관계망을 총체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가능성이 부여된다. 신뢰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관시는 결코 일방적이거나 고정된 그 무엇이 아니다. 앞서 언급한 혈연, 지연, 학연이 모두 관시를 맺어가는 데 기여할 수 있지만 어느 한두 가지 요소가 있다고 형성을 장담할 수 없다. 무엇보다 관시는 고정불변하지 않는다. 인류학자들이 관시를 연구하면서 중국 전통 사회의 선물 경제(gift economy)와의 관련성을 언급하며 관시를 ‘예술(art)’로 표현하는 이유가 여기 있다. 15 주고받는 관계에서 형성되긴 하지만 서구적인 ‘give and take’로 파악하면 큰 오산이다.

일부 연구에서 관시 문화를 공산당 집권 이후 현대 중국의 산물로 보기도 하지만 필자는 전통 시대 잦은 이주와 교역을 ‘윤활유’처럼 원활하게 유지하는 문화적 관행이 진화해서 오늘날의 관시 문화를 형성했다고 파악한다. 따라서 관시 문화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중국 전통 사회의 윤리 규범이자 감정을 뜻하는 ‘인정(人情)’, 체면을 뜻하는 ‘면자(面子, face)’, 호혜적인 응대를 뜻하는 ‘보(報)’, 경축일이나 절기마다 공유되는 선물을 뜻하는 ‘예물(禮物)’의 개념도 함께 고려해야 한다.

무엇보다 이주와 교역이 급증했던 대운하 시대의 상업 풍조를 재조명할 필요가 있다. 이전 시대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늘어난 상품경제의 확산과 이주와 객상의 풍조 속에서 낯선 지역에 잘 정착하려면 인간관계의 ‘윤활유’가 필요했다. 당시 객지에 진출한 상인만큼 관시라는 윤활유를 간절히 희구했던 집단도 드물었다. 서로의 체면(‘면자’)이 손상되지 않는 범위에서 지역사회의 ‘인정(人情)’을 준수하며 유력자들에게 ‘예물’을 전달하게 되면 자연스럽게 호혜적인 ‘보답’이 이뤄지게 되는데 이때가 바로 관시의 예술이 실현되는 순간이다. 이를 위해 휘주 상인은 자양서원을, 산서 상인은 관묘를, 복건 상인은 천후궁을 우선 의지했을 뿐이다. 덧붙여 과거(科擧) 중시 사회에서 혈연과 지연을 넘어선 그 ‘무엇’을 위해 학연이라는 ‘축적된 능력’을 활용한 것이다.

오늘날 혈연, 지연, 학연이라는 용어는 구태의연하다는 부정적 의미가 가미돼 가급적 은폐하려 하지만 사실상 중국의 관시 문화는 이로부터 진화된 형태다. 누구나 위험을 최소화하며 돈을 벌기 위해서는 현지에 적합한 ‘보호 비용(cost of protection)’을 지불해야 했는데 중국의 객상들은 지역사회 엘리트와의 관시를 맺기 위해 모든 자원을 동원한 셈이다. 낯선 지역에 진출하거나 새로운 아이템을 고려하고 있는 기업이나 조직이 있다면 자신이 보유한 자산과 인적 네트워크를 활용해 현장에 적실한 ‘보호 비용’을 지불하는 것도 결단과 센스가 필요한 투자일 것이다.


조영헌 고려대 역사교육과 교수 chokra@korea.ac.kr
필자는 서울대 동양사학과를 졸업하고 중국사회과학원 역사연구소의 방문 학자와 하버드-옌칭 연구소 방문 연구원을 거쳐 서울대 동양사학과에서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중국 근세 시대에 대운하에서 활동했던 상인의 흥망성쇠 및 북경 수도론이 주된 연구 주제이고, 동아시아의 해양사와 대륙사를 겸비하는 한반도의 역사 관점을 세우는 데 관심이 있다. 저서로 『대운하 시대, 1415-1784: 중국은 왜 해양 진출을 ‘주저’했는가?』 『대운하와 중국 상인: 회양 지역 휘주 상인 성장사, 1415-1784』 『엘로우 퍼시픽: 다중적 근대성과 동아시아(공저)』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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