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se Study 朝鮮 : 병자호란
Article at a Glance
병자호란이 일어나 삼전도의 굴욕을 당하기까지 조선의 대응, 특히 리더의 판단과 행동은 한심하기 그지없었다. 사람들은 어려운 위기가 닥칠 것이라고 예상되더라도 그것이 멀리 있을 경우에는 존재를 부정하거나 과소평가한다. 그것에 대한 걱정과 스트레스를 피하기 위해 자신의 뜻대로 현실을 통제할 수 있을 거라는 ‘통제 환상(illusion of control)’을 갖기도 하고 긍정적인 면만 생각하고 부정적인 현실을 애써 외면하기도 한다. “설마 그렇게 되겠어?” “그런 위험도 있지만 상황이 내 의도대로 전개될 거야”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예측된 위기의 경우에는 대처할 시간이 충분하다고 착각해 시간을 낭비하기도 한다. 그러다가 막상 위기가 눈앞에 닥치게 되면 어찌할 바를 몰라서 주저앉아 버리는 것이다. 당시 리더였던 인조나 대신들 중 많은 이들이 보인 태도가 바로 이랬다. 위기의 징후를 감지하고 대처해야 하는 리더들은 위기 신호에 주목하는 법을 배우고 그러한 시스템을 구축해야 한다. 위기를 인정하는 것을 백안시하는 분위기도 몰아내야 한다. 조선의 병자호란에서 뼈저리게 배워야 할 교훈은 이것이다. |
편집자주
조선에서 왕이 한 말과 행동은 거의 모든 것이 기록으로 남아 있습니다. 그 여러 가지 기록 중 비즈니스 리더들이 특히 주목해봐야 할 것은 바로 어떤 정책이 발의되고 토론돼 결정되는 과정일 것입니다. 조선시대의 왕과 마찬가지로 기업을 이끄는 리더들 역시 고민하고 판단하며 결정을 내리고 살기 때문입니다. 또한 이미 해당 정책이 성공했는지, 실패했는지 알 수 있는 상황이기에 더욱 면밀히 성공과 실패의 요인들을 분석할 수 있습니다. 조선시대에 정통한 연구자인 김준태 작가가 연재하는 ‘Case Study 朝鮮’에서 현대 비즈니스에 주는 교훈을 찾아가시기 바랍니다.
“그대들이 매번 사소한 문제를 따지고 다투느라 이렇게 위태로운 치욕을 맞게 되었다. 그렇지 않았으면 어찌 오늘날 이와 같은 상황이 되었겠는가.”
1637년(인조15) 1월18일 남한산성. 청나라에 대한 항복이 사실상 결정됐던 즈음, 삼사(三司)1 의 관원들이 몰려와 청나라에 보낼 국서에 잘못된 글자가 있다며 발송을 하루 늦추자고 주장했다. 그러자 최명길이 그들을 꾸짖은 것이다. 나라의 존망이 위태로운 때에 글자가 적절하니 마니 하면서 트집을 잡는 모습이 한심해 보였으리라. 바로 이러한 태도들이 쌓여 전쟁을 초래했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흔히 ‘병자호란’은 명(明)과의 경쟁에서 우위를 잡은 후금(後金)이 칭제건원(稱帝建元)2 하면서 과거 형제관계였던3 조선에게 군신관계를 요구하자 존주대의(尊周大義)4 와 재조지은(再造之恩)5 을 버릴 수 없던 조선이 여기에 반발했고, 청이 이를 제압하려는 과정에서 발발한 것으로 이해된다. 물론 틀린 평가는 아니지만 단선적이다. 병자호란은 당시 조선의 집권층이 국제질서의 변화를 읽지 못하고, 청과의 관계에서 오는 위기 신호들을 오판했으며, 예상되는 위기에 대비하지 않고, 심지어 최고 리더가 위기를 조장하기까지 하면서 악화된 상황의 결과물이었다. 위기 대응의 총체적인 부실이라는 케이스로 검토해볼 사건인 것이다.
1. 위기의 신호를 읽지 못하다
‘카산드라(Cassandra)의 저주’라는 말이 있다.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트로이의 공주로 아폴론 신으로부터 앞날을 예언할 수 있는 능력을 부여 받았지만 자신의 구애를 거부한 그녀에게 화가 난 아폴론은 아무도 그녀의 예언을 믿지 않도록 저주를 내렸다. 위기가 닥쳐온다는 징조, 위험신호도 이와 같은 경우가 많다. 분명히 크고 작은 시그널들이 있었지만 사람들은 그것을 놓친다. 아니, 보았다고 하더라도 제때에, 올바른 방향에서 대처하지 못하곤 한다. 자신이 보고 싶은 것만 보려 하는 습성, 긍정적인 면만 부각하고 부정적인 면은 애써 무시하려는 경향, 숲은 보지 못하고 눈앞의 나무만 보는 좁은 시야, 눈앞에 닥칠 때까지 일을 미루려는 게으름 등 다양한 요인들이 작동하기 때문이다.
1627년(인조5), ‘이괄의 난(1624)’으로 인한 충격을 채 수습하기도 전에 조선은 정묘호란을 맞았다. 명과의 결전을 앞두고 가도(?島, 평안북도 철산군)에 구축된 명군 기지를 섬멸하고 배후의 위험요인을 제거하기 위해 조선으로 진군한 후금은 형제의 관계를 맺는 것으로 전쟁을 종결시킨다. 명나라의 핵심 번국인 조선의 복속을 받았다는 것을 홍보함으로써 명나라 중심의 국제질서를 흔들 수 있게 됐고 조선으로부터 얻은 개시(開市, 국경에 여는 무역시장)와 세폐(歲幣, 공물)를 통해 물자 공급처를 확보하는 등 소기의 성과를 거뒀기 때문이다. 조선의 입장에서는 오랑캐라고 무시하던 후금을 형으로 모셔야 하는 상황이 탐탁지 않았지만 나라의 안위를 지켜내기 위해서는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그런데 ‘형제의 예(禮)’라는 명분으로 임시 봉합된 양국의 관계는 이내 흔들리게 된다. 1633년(인조11)부터 실록에는 양국의 충돌에 관한 기사가 자주 나타난다. 인조 11년 1월25일 후금은 아예 조선이 보내온 공물의 수령을 거부했는데 “양이 점점 적어지고 질도 나빠졌다”는 이유에서였다. 이 후에도 후금은 번번이 공물의 양이 줄었다며 힐난하고(실제로 조선은 이러저러한 이유를 들며 애초 약속했던 양보다 세폐를 줄여서 보냈다) 사신들에 대한 대우가 나쁘다고 문제 삼았다. 개시를 열겠다는 정묘호란 당시의 약속을 지키지 않는 것을 따졌고, 도망간 포로를 쇄환하지 않는 점을 지적했다. 그런데 이럴 때마다 조선의 조정은 단순하게 접근하고 미봉책으로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다. 조선의 성의와 진심을 문제 삼는 후금의 국서를 “진의는 폐물을 증가하기 위한 데에 있다”고 파악하고6 물리적인 이익을 약간 늘려주는 정도로 후금의 불만을 해소하려 들었다.
그런데 후금의 뜻은 그것이 아니었다. 물론 경제적인 요구, 외교적인 무례에 대한 불만 표시가 담겨 있긴 했지만 근본적인 질문은 ‘조선이 다른 마음을 품고 있는 것이 아니냐’였다. 정묘호란 때 맺은 화의를 배반하고 명과 함께 자신들을 공격할 수도 있다는 의심이었다. 하지만 조선은 이에 대한 대답을 하지 않았고 결국 전쟁의 시위는 당겨지고만 것이다.
그렇다면 대체 조선 조정은 왜 위기의 신호를 읽어내지 못했을까. 무엇보다 자신들이 보고 싶은 것만 보려 했던 습성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개별 사건의 단편만 바라봤기 때문이다. 사건의 점들이 선으로 연결될 때 어떤 그림이 그려지는가. 사건과 사건의 이면에 그것들을 관통하는 어떤 의도가 존재하지 않는가. 그것을 예상하고, 상상하지 못했기 때문에 위험을 미리 예측하고 대응하지 못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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