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 & Philosophy

내 속의 프리다 칼로, 모든 인간은 女性이다

210호 (2016년 10월 lssue 1)

Article at a Glance

남성이지만 프리다 칼로의 자화상에 공감하는 것은 바로 내 자신이 프리다 칼로와 다를 바 없는 하나의 고독하고 소외된 인격체, 여성이기 때문이다. 뒤샹이 여성의 가면을 썼을 때 느끼는 해방감 또한 남성이라는 권력의 가면으로부터 벗어나서 온전하지 않은 결여된 주체, 여성으로서의 자신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모든 인간은 근본적으로 여성이다. 권력의 핵심에 있는 사람들조차도 권력이라는 허구가 주는 상처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결여된 존재인 것이다. 

 

편집자주

사상가와 예술가들의 공유점을 포착해 철학사상을 감각적인 예술적 형상으로 풀어내온 박영욱 교수가 DBR ‘Art & Philosophy’ 코너를 연재합니다. 철학은 추상적이고 난해한 것이라는 고정관념에서 벗어나는 경험을 선사할 것입니다.

 

칼로는 여성주의의 전사?

멕시코 출신의 프리다 칼로(Magdalena Camen Frida Kahloy Clderon, 1907∼1954)는 유난히 자화상을 많이 그린 화가다. 그녀의 자화상을 한 번이라도 본 사람이라면 호불호를 떠나서 틀림없이 강한 느낌을 받았을 것이다. 짙은 일자 눈썹과 상 남자에게나 어울릴 듯한 콧수염, 섬뜩한 배경, 강렬한 색채 등 그림의 모든 요소들이 보는 사람들의 감정을 동요시키기에 충분하다. 1944년의 자화상부러진 척추또한 우리에게 잘 알려진 그림 중 하나이다. 일자 눈썹과 콧수염 달린 얼굴은 물론이고 가슴이 드러난 알몸에 부서진 척추, 그리고 상반신을 꼿꼿하게 지탱시키는 코르셋과 군데군데 박힌 못, 강렬한 듯하면서 공허한 눈빛, 몽환적인 색상과 형태의 배경, 이 모든 것이 관객의 눈을 사로잡는다.

 

 

칼로는 자신의 삶을 내리친 두 번의대형 사고를 이 그림에 고스란히 담고 있다. 어릴 때 소아마비를 앓아서 오른쪽 다리가 불편했던 칼로는 의학도의 꿈을 품고 열심히 공부하던 학창 시절 18세의 나이에 통학버스가 전차와 부딪쳐서 철제 봉이 그녀의 몸을 파고드는 사고를 당한다. 소아마비로 불편했던 오른 다리가 완전히 짓이겨진 것은 물론이고 몸 전체가 만신창이가 돼 십 수차례의 수술을 감내해야만 했다. 살아 있는 것만으로도 의학적으로 기적이었던 셈이다. 그러나 목숨을 건진 대가는 엄청났다. 그녀는 평생 사고와 수술의 통증으로부터 단 한순간도 자유로운 적이 없었다. 그녀는 자신의 몸이 다친 것이 아니라 부서져버렸다고 표현했다. 이 부서진 몸을 간신히 지탱시킨 의학과 보조 장치는 그녀의 몸을 지탱시키는 보조물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고통과 억압의 철장이기도 했다.

 

두 번째 대형 사고는 당대 최고의 화가 디에고 리베라(Diego Rivera, 1886∼1957)를 만난 것이다. 여성 편력이 너무나도 심했던 그는 칼로의 마음을 사로잡아 결혼했지만 칼로에게 리베라는 마치 자신의 물리적 몸을 지탱해주는 의학적 장치들과 마찬가지로 정신적 지주이자 고통의 원인이기도 했다. 마초 기질을 지닌 리베라는 상처받고 피폐해진 한 여성에게 의지할 수 있는 거인과도 같은 존재였지만 그의 걷잡을 수 없는 바람기는 그녀에게 불안과 고통을 통해 고독의 심연을 안기는 존재이기도 했다. 심지어 리베라는 칼로의 동생과도 부적절한 관계를 맺었다. 그림에 담긴 그녀의 부서진 몸은 교통사고만이 아닌 상 남자 리베라에 의해서도 산산조각난 자신의 영혼을 나타낸다.

그림의 녹색 배경 또한 그녀의 불안과 고독함을 증폭한다. 녹색의 배경은 원초적인 수풀을 상징한다. 숲은 인위적인 도시와는 달리 지구의 가장 원초적인 장소이며, 태초의 장소이다. 어쩌면 인류에게는 자궁과도 같은 편안한 곳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그림에 묘사된 원초적인 장소는 어딘지 모르게 불길한 느낌을 준다. 앙리 루소의 그림에 나오는 원시림처럼 초현실적인 분위기마저 감돈다. 다른 자화상들에서는 원시림의 나뭇가지가 마치 그녀 몸의 일부인 것처럼 몸을 감싸고 있기도 하다. 그녀를 감싸는 나뭇가지는 리베라처럼 자신을 지탱해주는 지지이면서 동시에 몸을 옥죄는 감옥의 창살과도 같다. 그녀의 몸은 뜻하지 않는 사고뿐만 아니라 맹수 같은 남자들이 득실거리는 원시림 속에서 처절하게 망가지고만 것이다.

 

 

칼로의 그림은 그 어떤 여성 작가의 그림보다도 강렬하게 페미니즘의 요소를 상징적으로 드러내고 있는 듯하다. ‘부러진 척추에서 그녀는 상반신을 적나라하게 노출할 뿐만 아니라 성적 판타지를 자극하는 흰색 코르셋을 걸치고 있지만 드러난 척추와 강렬한 얼굴의 이미지는 남성의 관음적 시선을 직접적으로 거부할뿐더러 조롱하기까지 한다. 남성 관객이 그 그림 속에서 마주하는 것은 관음적 욕구를 충족시킬 수 있는 아름다운 여성이 아니다. 그림 속에서 발견할 수 있는 것은 남성 못지않은 전투적인 눈빛과 몸짓을 취하고 있는 파괴된 여성의 형상이다. 이 그림은 여성을 관음적 대상으로 바라보는 남성의 시선 자체를 풍자하고 있다. 행여 이 그림에서 성적 판타지를 좇는다면 오히려 남성 관객이 발견할 수 있는 것은 수포로 돌아갈 수밖에 없는 자신의 관음적 시선 그 자체일 뿐이다.

 

여성에게 남성이라는 타자는 곧 자신의 일부이지만 남성에게 여성은 절대적인 소유물이다.

 

그러나 필자가 보기에 자화상 속의 칼로는 결코 우리가 알고 있는 전투적인 페미니스트의 모습이 아니다. 칼로의 그림을 페미니즘의 상징처럼 보는 것은 어쩌면 매우 위험한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마저 든다. 물론 나약한 여성이라기보다는 전사의 모습을 띤 그녀는 마치 우리에게 박혀 있는 강한 페미니스트의 상징처럼 보일 수도 있다. 특히 남성적 시선에 대한 강한 저항의 모습이나 부서진 신체의 과장된 표현은 이 그림이 남성중심주의에 저항하려는 전투적 상징처럼 보이는 데 일조한다. 그러나 필자가 이 그림 속에서 마주치는 인물은 고통받는 한 여성이 아니라 고통받는 한 인간이다. 물론 그림 속의 이 인물을 가장 괴롭히는 요소 중의 하나는 남성임에 틀림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성인 필자가 이 그림 속에서 공감을 하는 것은 가해자로서의 반성이나 남성이라는 기득권 계급으로서의 자책감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다. 이런 반성적 태도야말로노블리스 오블리주같은 위선처럼 느껴진다. 동정이나 책임감은 타자를 대상으로 바라볼 뿐 타자와의 진정한 공감에 바탕을 둔 것이 아니다.

 

남성인 필자마자도 이 그림에 공감을 할 수 있다면 그것은 바로 이 그림 속의 여인이 남성인 필자 자신과도 다르지 않다는 일체감 때문이다. 남성인 나 역시도 칼로만큼은 아니지만 내 수준에서는 감당하기 어려운 대형 참사를 겪었으며 강렬한 소유욕과 좌절감을 동시에 느끼며 고통을 받는다. 어떤 집단에 나를 정착시키고 그 속에서 안주하고 싶지만 항상 외부인으로 밀려나버리고 극복할 수 없는 고독을 느끼기도 한다. 때론 직장에서도 소외되며 가족들 내에서도 처절한 소외감과 고립을 느낀다. 이들 거대한 조직이 권력자처럼 나를 짓누르기도 한다. 이 그림 속에서 내가 마주치게 되는 대상은 이중성을 지닌 바로 나 자신이다. 그런 점에서 보자면 나 역시 칼로와 같은 여성이다. 나는 이 그림 속에서 여성인 프리다 칼로가 아닌 여성인 나 자신을 만나는 것이다.

 

배타적인 동일성의 논리야말로 권력과 남성성의 실체

여성에 대한 혐오감을 서슴지 않는일베의 반대급부라고 할 수 있는 남성혐오 사이트인메갈리아가 얼마 전 크게 이슈화됐다. 부동액을 불특정 남성에게 먹여서 복수하는 방법 및 실행 여부와 관련된 글을 올려 경찰 수사까지 받고 있는 이 사이트는 여성들에게마저도 절대적인 지지를 받고 있지 못하다. 어휘나 내용이 지나치게 과격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일베와 같은 극단적인 여성 혐오 사이트가 존재하며 아직도 남성우월주의가 눈에 보이지 않게 지배하는 현실에서 메갈리아의 존재를 쉽게 기형적인 것이라고 비난할 수만은 없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현실 논리를 내세우는 이 사이트의 명분 자체가 완전히 틀린 것이라고 할 수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메갈리아의 논리를 받아들일 수 없는 분명한 이유는 존재한다. 이들의 입장은 이들이 그토록 혐오하는 남성의 논리를 그대로 답습하고 있기 때문이다. 남성이 여성을 자신의 타자로 간주해 배타적인 차별성의 논리를 들이대는 것과 마찬가지로 메갈리아는 남성의 자리에 여성을 대체해 남성을 타자로 간주하는 것이다.

 

성차별이 존재하는 사회에서 남성의 논리는 동일성과 배타적 차별의 논리이다. 프랑스의 정신분석학자 자크 라캉(Jacques Lacan)에게 여성이란 단순히 남성과 생물학적으로 다른 존재를 뜻하지 않는다. 여성이란 완전하게 주체화되지 못한 존재를 의미한다. 이때 완전하게 주체화되지 못했다는 말은 결코 여성을 폄하하는 말이 아니다. 여성이 온전한 주체가 아니라는 말은 여성이 근본적으로 결여를 포함하며 타자성을 지닌다는 뜻이다. 얼핏 이런 주장은 여성 폄하처럼 느껴질 수 있다. 그러나 결여 혹은 타자성은 여성이 지닌 절대적인 미덕이다. 자신을 어느 일정한 주체로 고정시키는 것은 타자에 대한 철저한 배제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나 자신을 경상도 사람으로 확고하게 고정시켜 경상도 사람답게, 경상도 사투리를 쓰면서 경상도 사람으로 행동하는 하는 것은 그 밑바탕에 다른 지역사람들에 대한 배타적인 감정을 전제로 하는 것이다. 나는 경상도 사람이므로 결코 전라도 사람이 아니며, 전라도 사람과는 절대적으로 다르다는 배타적인 주체가 된다. 이것이야말로 전형적인 남성 주체 혹은 마초의 일반적인 메커니즘이다.

 

 

이에 반해서 여성성은 어떤 하나의 기호에 자신을 고정시킬 수 없으므로 얼마든지 타자성이 개입할 여지가 있다. 여성이 남성에 비해서 다른 사람들과 소통하거나 정서적으로 공감할 수 있는 것도 이러한 이유에서다. 여성 자신이 바로 타자가 되는 것이다. 그러니 라캉이 말하는 남성의 주체와 여성의 결여된 주체가 의미하는 바는 명확하다. 남성적 주체란 배타적인 동일시에 바탕을 둔 고정된 주체라면 여성의 결여된 주체는 타자의존적인, 따라서 그 자체가 타자화할 수 있는 주체인 것이다. 이는 남성과 여성의 일반적인 관계에서도 잘 드러난다. 남성은 여성을 자신과 철저하게 다른 배타적인 소유물로 마주한다. 이에 반해서 여성은 남성은 자신의 결여를 채울 존재로 여긴다. 여성에게 남성이라는 타자는 곧 자신의 일부이지만 남성에게 여성은 절대적인 소유물이다. 남성의 이러한 배타적인 동일시가 바로 권력의 요체인 것이다. 권력이 절대적인 타자, 즉 피권력자를 전제로 해서만 성립되는 것이라면 권력의 구조와 남성성의 구조는 동일한 것이다.

 

 

물론 프로이트의 충실한 계승자를 자처했던 라캉은 남성성과 여성성의 이런 특징을 생물학적 구조와 연결시켰다. 그러나 이것이 곧 남성성과 여성성이 생물학적 차이로부터 유래한다는 뜻은 아니다. 오히려 정반대이다. 남자 아이는 남근을 지니므로 자신과 아버지를 동일시해 배타적인 동일시를 하는 반면 여자 아이는 남근이 결여됨으로써 오히려 아버지를 타자화하며 자신을 결여된 존재로 여긴다는 점에서 남자아이와 여자아이의 성 차가 발생하게 된다. 이는 왜 생물학적 차이 때문에 대부분의 아이들이 남성성과 여성성을 갖게 되는가를 설명하는 기제일 따름이지 절대적인 기준은 아니다. 라캉이 말하고 싶은 것은 생물학적인 차이가 성 차를 발생시키는 것이 아니라 생물학적 차이에서 비롯된 특징이차이의 경향을 만들어낸다는 것이다. 뒤집어 말하면 생물학적 차이와 남성성, 여성성의 차이는 절대적인 인과관계가 없다는 것이다. 상식적으로도 여성성을 이루는 특징들, 가령 복종 수동성, 이타성, 질투 등은 여성의 생식기와 절대적인 관련이 없다. 이는 당연히 남성성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남성과 여성의 생물학적인 구분이 현실적으로 존재한다고 하더라도-논란의 여지가 있겠지만 그 외의 성도 존재할 수 있을 것이다-남성성과 여성성은 명백히 만들어진 허구적인 개념임에 틀림없다. 물론 우리 모두는 이 허구적인 개념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다. 그런 점에서 허구 자체도 우리의 현실일지 모른다. 실체적 가치에 전혀 상응하지 않는 화폐의 경우 화폐에 적힌 가치는 하나의 허구에 불과하지만 그 허구적 존재는 현실의 일부이다. 말하자면 허구적인 것이라고 해서 다 틀린 것은 아니다. 허구를 허구가 아닌 현실 자체로 착각할 경우 화폐에 대한 숭배가 물신주의를 만들 듯이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성차를 현실로 착각할 수 있다.

 

허구적인 남성성이 현실적으로 얼마나 지배적인 것이었나에 대해서는 어렵지 않게 많은 사례들을 찾을 수 있다. 위대한 음악가 베토벤 역시 자신이 지닌 남성성을 음악적으로 유감없이 표현한 인물이었다. 원래 고전주의 음악을 대표하는 소나타 형식 자체가 그러한 특징을 지니기도 했지만 소나타 형식이 지닌 남성성을 베토벤만큼이나 명료하고도 극적으로 표현한 사람은 없을 것이다. 소나타 형식은 주로 제1주제와 제2주제의 대립과 조화를 통해서 전개된다. 베토벤은 제1주제와 제2주제를 극단적으로 대립시키며 제2주제는 제1주제의 종속된 역할을 한다. 1주제가 주인공으로서 남성의 역할을 하고 있다면 제2주제는 제1주제와 연관성을 보이면서도-가령 장조와 단조의 관계 혹은 4도 내지 5도라는 관계조의 형태-극단적인 대립 후에 제1주제로 통합된다. 2주제는 제1주제에 대해서 장조에 대한 단조의 관계 혹은 4, 5도의 종속적인 관계를 지님으로써 제1주제를 돋보이게 하는 부속물의 역할을 한다. 말하자면 남성에 대한 철저한 타자로서 여성의 역할과 일치한다. 이런 음악적 형태는 제1주제와 제2주제가 베토벤처럼 극명하게 대립되지 않는 낭만주의 음악에서도 여전히 지속된다. 이러한 음악적 전개를 자연의 섭리로 여긴 것은 남성과 여성의 주어진 역할을 자연의 섭리로 여겼던 것과 일치한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베토벤의 음악이 결코 폄하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다만 이는 허구적으로 만들어진 성 차가 얼마나 현실적인 것으로 간주되고 지배적이었는가를 보여주는 한 사례일 뿐이다.

 

남성은 존재하지 않는다, 고로 모든 사람은 여성이다

20세기 미술사에서 가장 많은 문제의식을 제기한 다다이스트 화가 마르셀 뒤샹(Marcel Duchamp, 1887∼1968)은 어느 날 당대 최고의 사진가 중 한 사람인 만 레이(Man Ray, 1890∼1976)에게 자신의 사진을 찍어달라고 요청한다. 그 사진은 다름 아닌 뒤샹 자신의 초상사진이었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뒤샹은 여성의 모자를 쓰고 화장을 한 채 여성의 모습으로 촬영에 임했다. 그는 자신의 초상을 담은 이 사진의 제목을 자신의 이름이 아닌 익명의 여성 이름, 로즈 셀라비’(Rose Sélavy)로 지었다. 여기서 로즈는 장미의 뜻을 지닌 여성명사이며, 셀라비는 “C'est la vie(이것이 인생이다)”를 소리 나는 대로 한 단어로 표기한 것이다. 여성의 분장을 한 남성처럼 보이는 이 이상한 사진은 남성인 뒤샹이 여성의 치장을 하고 찍은 것이다. 독자들 중에는 혹시 뒤샹이 동성연애자나 게이가 아니었는지 의문을 가질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뒤샹은 동성연애자나 게이가 아닌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작품에서 필자의 흥미를 끄는 것은 사진에 나타난 뒤샹의 모습이나 뒤샹이 말장난투로 붙인 제목이 아니다. 뒤샹은 이 작품을 찍기 위해 여성의 치장을 하면서 왠지 모를 편안함과 해방감을 느꼈다고 진술했다. 그가 느꼈던 감정의 실체는 무엇이었을까? 뒤샹은 순간 여자가 됐던 것이다. 그런데 이때 뒤샹이 여자가 됐다는 것은 남성인 뒤샹이 갑작스럽게 여성으로 전환했다는 뜻이 아니다. 뒤샹이 카메라 앞에 앉은 순간 느낀 어떤 편안함은 그가 다른 누군가가 된 것이 아닌 바로 그 자신이 됐음을 나타내는 징표이다. 뒤샹은 카메라 앞에 앉은 순간 여성으로서의 모습이 더 편안함을 느꼈는데 이는 곧 뒤샹의 밑바닥에는 여성이 자리 잡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물론 뒤샹은 다시 일상의 현실로 돌아왔으며 여성의 치장을 하고 다니지 않았다. 뒤샹이 우리가 흔히 말하는 게이나 동성연애자가 아님은 분명하다.

 

 

 

뒤샹은 왜 자신이 여성이 됨으로써 편안함을 느꼈을까? 그것은 일종의 해방감 때문일 것이다. 현실에서 남성이란 하나의 허구적 가면이다. 직장이나 공적인 장소에서는 직위나 직함이라는 가면을 써야 한다. 그러한 가면과 자신을 동일시하지 않을 수 없다. 어쩌면 가정 역시 그러한 직함의 가면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공간일지도 모른다. 가정에서도 남편, 아들, , 혹은 손자라는 다른 가면을 쓸 뿐 여전히 가면을 쓰고 살아야 하기 때문이다. 어쩌면 여성이라는 것 자체가 또 하나의 가면일지도 모른다. 뒤샹이 여성으로 치장을 한 것 역시 뒤샹 자신의 온전한 모습이라고 볼 수는 없을 테니 말이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뒤샹이 여성의 가면에서 느낀 편안함을 느낀 이유는 현실에서 뒤샹의 본모습으로 간주되는 남성이라는 가면보다 이것이 훨씬 더 뒤샹의 본래에 가깝기 때문일 것이다.

 

남성이 된다는 것은 남성이라는 가면과 자신을 절대적으로 동일시하고 타자를 억압하는 배타적인 권력의 관계에 바탕을 둔다. 자신이 쓴 가면과 자신의 내면에 불일치가 생길 경우 그러한 불일치를 피하기 위해서 내면의 욕구를 스스로 억압해야 한다. 경상도 사람은 경상도 사람으로 자신을 내면화하며, 전라도 사람은 전라도 사람으로 자신을 내면화한다. 사람은 경상도나 전라도에서 태어날 수 있지만 경상도 사람이나 전라도 사람으로 태어나지 않는다. 사람은 생물학적으로 남성의 생식기나 여성의 생식기 혹은 다른 형태의 생식기를 가지고 태어날 수 있으나 여성이나 남성으로 태어나지 않는다. 생물학적인 차이를 넘어선 남성과 여성의 구분은 만들어진 것이다. 남성성은 절대적인 권력을 상징하며 여성성은 권력이 행사되는 권력의 결여를 의미한다. 그런데 권력은 배타적인 편 가르기, 즉 권력자와 피권력자의 편 가르기에 의해서 만들어진 허구에 불과하다.

 

남성이 된다는 것은 남성이라는 가면과 자신을 절대적으로 동일시하고 타자를

억압하는 배타적인 권력의 관계에 바탕을 둔다.

 

 

남성인 내가 프리다 칼로의 자화상에서 나와 다른 성을 지닌 억압받는 한 여성이 아닌 바로 나 자신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는 것은 바로 내 자신이 프리다 칼로와 다를 바 없는 하나의 인격체, 즉 여성이기 때문이다. 뒤샹이 여성의 가면을 썼을 때 느끼는 해방감 또한 남성이라는 권력의 가면으로부터 벗어나서 온전하지 않은 결여된 주체, 즉 여성으로서의 자신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모든 인간은 근본적으로 여성이다. 말하자면 권력의 핵심에 있는 사람들조차도 권력이라는 허구가 주는 상처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결여된 존재인 것이다. 페미니즘이 남성혐오주의가 아닌 인간 해방이 돼야 하는 것도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이다.

 

이러한 인간 해방은 우리의 삶 속에서 반드시 실행돼야 한다. 권력의 문제만 하더라도 그러하다. 권력이 없이도 유기적인 체계를 갖추고 합리적으로 통제되는 사회가 존재할 수 있다면 좋겠지만 그것은 공상에 가까운 일이다. 그렇다면 권력은 더 이상 남성성을 지향하는 권력이 아닌 여성 권력의 형태로 존재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물론 이는 여성이 주도하는 권력을 의미하지 않는다. 한국에서는 이미 여성 대통령이 탄생했고 미국에서는 최초의 여성 대통령이 탄생할 가능성도 있다. 현재 여성 대통령이 통치하는 우리 사회의 권력은 여성 권력과는 무관할뿐더러 과거의 권력에 비해서 남성성이 더 강하다. 동일한 역사의식을 강조하며 동일한 정치적 비전을 강요한다는 점만 보더라도 이는 결코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21세기 이후 기업이든, 사회든 최고의 자산은 화폐나 재무구조, 설비나 부동산이 아닌 무형의 자산, 즉 수평적 인간관계에 바탕을 둔 유연한 신뢰의 체계라는 사실은 굳이 프란시스 후쿠야마를 언급하지 않더라도 상식이 됐다. 남성적인 연대나 동일성의 논리로 신뢰를 구축할 수 있는 시대는 이미 지났다. 광기가 아니고서는 그러한 동일성과 연대는 불가능하며 지속적인 것이 될 수도 없다. 여성으로서 인간은 근본적으로 결여된 주체이며 강요된 연대 속에서 일탈과 불안, 소외감을 겪을 수밖에 없다. 막강한 자산이 될 수 있는 21세기의 유연한 신뢰체계는 이러한 균열과 일탈 자체를 억지로 막지 않고 여유의 공간을 부여할 경우에만 성공적으로 구축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회뿐만 아니라 기업 역시 여성 기업이 돼야 마땅하다.

 

 

이는 소비전략에서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오늘날 기업은 여성을 주요 소비층으로 삼는다. 여성이 주요 소비주체로 등장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성을 소비주체로 정식화하는 밑바탕에는 여성은 자신의 결여된 욕망을 소비로 채운다는 인식이 깔려 있다. 특히 소비재 상품은 전적으로 여성 소비 주체를 겨냥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심지어 남성의류조차도 상품을 최종적으로 선택하고 구매하는 상당수가 여성이다. 여성을 소비하는 동물로 보는 것이 현상적으로 볼 때 과장이 아닌 듯하다. 그러나 이러한 전략은 아직까지 효과적일 수 있지만 결코 미래지향적인 것은 아니다. 여성을 특정 브랜드나 유행을 좇는 수동적 주체로 보는 것은 남성 권력적인 시각에서 비롯된 것이다. 유행에 동참하지 않으면 뒤처지며 권력으로부터 멀어진다는 소비심리의 자극은 바람직하지도 않을뿐더러 어쩌면 이미 시효를 상실한 전략일지도 모른다.

 

소비란 동일한 브랜드나 상품을 소비함으로써 동질감을 느끼는 권력에의 동참이 아니다. 이러한 마초적인 패러다임은 소비활동을 권력의 재생산이라는 소모적인 활동으로 전락시킨다. 오히려 소비란 그러한 권력의 재생산으로부터 벗어나는 해방의 창조적 활동이 돼야 한다. 가령 스티브 잡스가 새로운 기기를 세상에 공개했을 때 그의 바람은 단지 앨런 튜링의 사과(애플 로고)가 박힌 그 기기를 마치 새로운 핸드백인 양 모두가 들고 다니는 것이 아니었다. 소비란 그것을 구매하는 순간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구매한 상품을 자신의 목적에 맞춰 실현하는 순간에 이뤄지는 것이다. 실내장식용 소품을 수시로 이곳저곳 옮겨 배치함으로써 고정된 자리가 아닌 새로운 실내광경을 만들어내는 여성적인 창조적 활동인 것이다.

 

 

 

박영욱 숙명여대 교양학부 교수 imago1031@hanmail.net

고려대 철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박사 학위를 받은 박영욱 숙명여대 교양학부 교수는 현대음악과 미술, 미디어아트, 건축디자인 등 구체화된 예술 형식에 주목해 철학 사상을 풀어내는 데 주력해왔다. 저서로는 <보고 듣고 만지는 현대사상> <철학으로 대중문화 읽기>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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