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사람들이 단체여행을 가면 흔히 일어나는 풍경이 있다. 하루 일과가 끝나고 친한 사람들끼리 삼삼오오 호텔방에 모여 술 한 잔 나누는 일이다. 이때 호스트가 말한다. “○○분 후에 내 방으로 모이시죠.” 지금까지 필자도 여러 번 읊어본 대사이지만 어느 날 문득 이 말이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호텔에 ‘내 방’, 즉 ‘내 소유’의 방은 없기 때문이다. ‘내 방’은 집에나 있는 것이고, 호텔에 있는 방은 분명 내 방이 아니다. 다만 내가 묵는 기간 동안만 잠시 대가를 치르고 빌린 것일 뿐이다.
이 논리로 가만히 생각해보자. 집에 있는 내 방을 내 것이라고 할 수 있을까? 아니다. 내가 그 집에 사는 동안만 내 방일 뿐 내 소유가 될 수 없다. 가령 아이들이 커서 방을 내줘야 하거나 이사라도 하게 되면 그 방은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게 된다. 최대로 기한을 확장한다 해도 내가 그 방을 사용할 수 있는 기간은 살아 있는 동안뿐이다. 그렇다면 그것이 하룻밤을 묵는 호텔과 다를 게 무엇인가? 다만 사용하는 시간이 조금 더 길 뿐 내 것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다.
어디로 가지 않고 가만히 있는 방조차도 내 것이 될 수 없다면 세상에는 내가 ‘소유’할 수 있는 것은 어디에도 없다. ‘내’ 차라는 것도, ‘내’ 옷이라는 것도, ‘내’ 책이라는 것도 없다. 이렇게 보면 우리는 어떤 사물도 소유할 수는 없다. 단지 사물과의 관계만이 있을 뿐. 모든 사물은 나와 인연이 닿아서 한시적 관계를 맺다가 언젠가는 떠난다. 그가 떠나든, 아니면 내가 떠나든, 어째 됐든 내 소유로는 남지 않는다. “우리는 땅이 사람에게 속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땅에 속한다는 것을 안다”고 했던 아메리카 인디언 시애틀 추장의 말은 무소유의 정신을 잘 대변해준다.
모든 문제는 소유할 수 없는 것을 소유하고자 하는 데서 비롯된다고 할 수 있다. 사물을 소유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거나, 또는 그 진리를 거부하고 굳이 내 것으로 만들고자 하는 짓은 뜬구름은 그물로 낚아채고 하늘의 별을 따오려고 하는 것과 전혀 다를 바 없다. 내 것으로 삼으려는 욕심 대신 우리는 그 사물 자체의 가치를 인정하고 적절하게 그 사물의 도움을 받으면 된다. 내가 돈을 주고 산 물건이든, 누구에게서 받은 물건이든 그것을 내 것이라 생각하지 않고 나와 인연을 맺은 시간 동안 감사히 그것을 사용할 뿐이다.
무소유는 빈털터리가 돼야 함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무소유의 정신을 설파했던 법정스님조차도 옷을 입고 이불을 덮으며 생활에 필요한 도구를 곁에 두고 살았다. 다만 물건을 소유의 개념이 아닌 관계의 개념으로 바라보았기에 소유에의 집착에서 오는 고통에서 자유로울 수 있었던 것이다. 내가 사용하는 물건이 많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꼭 필요한 것이고 또 그것을 소유가 아닌 관계의 개념으로 바라볼 수 있다면, 그는 훌륭한 무소유의 삶을 살 수 있을 것이다.
소유하지 않는다고 해서 사물을 함부로 취급해도 된다는 말은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소유가 아닌 관계의 눈으로 사물을 보는 사람은 오히려 내 것이 아닌 그 사물에 더 감사하며 더 소중히 다루게 될 것이다. 역설적으로 내 것이 없을 때, 세상은 모두 그의 것이 된다. “아무것도 갖지 않을 때 비로소 온 세상을 갖게 될 것”이라는 법정스님의 말이 마음을 울린다.
이치억 성신여대 동양사상연구소 연구교수
필자는 퇴계 선생의 17대 종손(차종손)으로 전통적인 유교 집안에서 나고 자라면서 유교에 대한 반발심으로 유교철학에 입문했다가 현재는 유교철학의 매력에 푹 빠져 있다. 성균관대 유학과에서 박사 학위를 취득했고, 성신여대 동양사상연구소에서 연구 활동을, 성균관대·동인문화원 등에서 강의를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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