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과 경영

왜적 대병력 앞에서 군사 나눈 이성계 상식 깬 특공작전으로 승리를 낚다

161호 (2014년 9월 Issue 2)

Article at a Glance –인문학

 

 

 1380년 전라도 지리산 부근에서 벌어진 황산대첩은 왜구 토벌의 일대 전기를 마련한 전투였다. 백병력이 떨어졌던 조선군과 달리 왜구는 동북아 최고의 전투력을 지녔다. 당시 일본군의 돌격을 이겨내려면 병력에서 확고한 우위를 지니거나뭉쳐있는 게 상식이었다. 하지만 이성계는 군대를 반으로 나눴다. 예상되는 왜구 특공대의 공격에 맞서 작지만 확실한 승리부터 보여줘야 실제 주력부대와의 싸움에서 단결해 승리할 수 있다고 봤기 때문이다. 이성계의 판단은 적중했다. 특공대와의 전투에서 승리를 경험한 후 고려군은 하나로 똘똘 뭉쳐 맹렬하게 싸웠다. 학습의 결과, 고려군은 왜구와의 싸움에서 필연적으로 따를 충격과 공포를 성공적으로 극복할 수 있었고 단결력을 바탕으로 전투력을 신장시켜 나갈 수 있었다.

 

 

편집자주

전쟁은 역사가 만들어낸 비극입니다. 그러나 전쟁은 인간의 극한 능력과 지혜를 시험하며 조직과 기술 발전을 가져온 원동력이기도 합니다. 전쟁과 한국사를 연구해온 임용한 박사가 전쟁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교훈을 연재하고 있습니다. 이 코너를 통해 리더십과 조직 운영, 인사 관리, 전략 등과 관련한 생생한 역사의 지혜를 만나기 바랍니다.

 

1380년 남원에서 지리산 운봉으로 들어가는 고갯길로 군대가 행진하고 있었다. 이 군대는 3개의 다른 집단으로 구성돼 있었다. 고려의 정규군, 여진족 부대, 고려민과 여진족의 혼성 혹은 혼혈이 섞여 있는 이성계의 친군이었다. 병사들은 꽤나 조마조마했을 것이다. 이성계의 군대는 산전수전 다 겪은 군대였고 베테랑 병사들도 많았기 때문에 더욱 그랬다. 고참병들에겐 언제나 예감이라는 게 있다. 왜구는 늘 부담스런 상대였지만 이번 전투는 특별히 어려울 것 같았다. 실제로 그들을 기다리고 있던 황산전투는 이성계의 평생에 가장 위험한 전투였다. 이성계는 이 전투에서 목숨을 잃을 뻔했다. 동시에 그렇기 때문에 그에게 최고의 영예와 무용담을 안겨준 전투가 됐다.

 

병가의 상식을 깨다

고개를 넘자 평평한 고원 산지가 나왔다. 운봉에서 인월까지는 지리산 중턱이라는 위치가 믿기지 않는 나지막한 구릉이 놓여 있는 아담한 평원이다. 인월로 전진하는 데에는 2개의 길이 있는데 하나는 험하고 하나는 평이했다고 한다. 여기서 이성계는 병가의 상식을 깨고 군대를 둘로 나눈다. <조선왕조실록>에서는 아군이 왜구보다 더 적었다고 했는데 만약 그렇다면 이건 더 끔찍한 행동이다. 이 기사는 분명히 과장, 아니 축소 보도일 가능성이 농후하다. 이성계의 친군 병력만 따지면 왜구보다 적었을 수 있고, 혹은 어느 전투에서 막 조우했을 그 순간에 이성계의 병력이 더 적었을 수도 있는데 그 부분을 전체인 것처럼 묘사했을 가능성도 있다.

 

좌우간 이성계는 강적 앞에서 병력을 둘로 나누는 상식 밖의 행동을 한다. 하지만 명장은 상식을 따르지 않는 법이다. 상식을 맹종하는 것이 아니라 이용할 줄 아는 사람이 진정한 명장이다. 상식이란 측량에 사용하는 측량 막대와 같다. 상식이라는 잣대를 이용해서 상황을 판단하고 전술을 창조해야 한다. 그러나 상식을 이렇게 이용하는 사람은 언제나 극히 드물다.

 

차분히 따져보자. 병력을 나누면 안 되는 이유가 뭘까? 적 앞에서 힘을 분산해 아군의 전력을 약화시키지 말라는 의미다. 그러나 다음의 경우라면 어떨까? 1, 병력을 모아 놓으면 전투력이 더 떨어진다. 2, 적은 반격 의지가 전혀 없고 병력을 분산시켜 협공하면 더 큰 타격을 가할 수 있다. 3, 힘을 모아도 아군의 전투력은 적보다 절대 열세다. 이 세 가지 경우라면 병력을 분산시키는 편이 차라리 나을 수도 있다. 이성계의 경우는 1번이었다.

 

당시 고려군의 전투력은 이성계의 친군에 비해 확연히 열세에 있었다. 이때도 고려군 지휘관들은 싸우지 말고 장기 포위로 적을 고사시키자고 주장했는데 이성계가 우겨서 적을 찾아 사지로 들어온 것이었다.

 

사실 이곳은 사지였다. 이곳에 주둔한 왜구는 진포해전에서 격멸당한 왜구의 육상 공격부대였다. 이들은 왜구의 고려 침공 사상 최대 규모의 군대로 500(혹은 300척이라고 함)의 대선단을 이끌고 고려로 침공했다. 그러나 육상부대가 약탈하러 내려간 사이에 최무선이 만든 화포로 무장한 고려 함대가 몰려와 왜구 선단을 불태워버렸다.

 

진포해전에서 목숨을 구한 육상부대는 내륙에 고립되고 말았지만 여전히 강력했다. 그들은 경상도 일대를 유린하며 돌아다니다가 마치 14세기의남부군처럼 지리산으로 들어갔다. 일단 이곳에서 버텨 보면서 일본으로 탈출할 방법을 찾으려고 했을 것이다.

 

고려는 빨리 이들을 토벌해야 했다. 문제는 방법이었다. 왜구 혹은 일본군과 싸울 때 고려군은 언제나 병력을 모으는 경향이 있었다. 임진왜란을 경험한 유성룡은 <징비록>에서 왜군은 병력을 분산해서 탐지가 어렵고 다양한 공격을 하는데 우리는 언제나 병력을 한군데 모아놓고 웅크려 있어서 적에게 먼저 노출되고 습격을 당했다고 회고했다. 이 기록만 보면 일본군은 맹수 떼와 같고 조선군은 겁에 질려 뭉쳐 다니는 초식 동물 같은 인상을 준다. 그러나 조선군의 이런 행동에는 훈련과 전술능력 부족이라는 이유도 있지만 별도의 전술적 이유도 있다. 백병 능력이 떨어졌던 조선군과 달리 왜구는 동북아 최고의 전투력을 지녔다. 백병전에선 그들을 당할 군대가 없었다. 그러므로 일본군의 돌격을 이겨내려면 병력에서 확고한 우위를 지니거나 뭉쳐 있어야 했다. 솔직히 겁이 났다는 점도 부인할 수는 없을 것 같다.

 

그러나 대병력이 뭉쳐서 뒤뚱거린다고 전투력이 올라가는 것은 아니다. 그저 도망치기 어렵게 하고 감정적 위로가 될 뿐이다. 황산전투는 또 하나 고충이 있었는데 적이 산지에 웅거하고 있어 우리가 공격하는 입장이 됐다는 것이다. 사실 적이 공격하고 우리는 산성이나 산지에서 웅거하고 싸울 때 승리할 가능성이 높은데 황산전투에선 그 반대였다.

 

이성계가 군대를 반으로 나눈 진짜 이유

산비탈 위에 웅크린 호랑이 같은 적을 향해 다가가는 것은 결코 달갑지 않은 일이었다. 명나라의 명장 척계광은 왜구가 육지에서 명나라 군대를 만나면 항상 산위에 진을 치고 명나라군의 공격을 유도했다고 회고했다. 산비탈을 오르는 군대는 갈라지고 지친다. 이때 왜구가 칼날처럼 예리하게 치고 내려오면 명군은 쉽게 붕괴되곤 했다. 그래서 척계광은 산비탈 위의 왜구를 공격하는 짓은 가능한 하지 말라고 가르쳤다. 하지만 황산전투 때는 척계광이 태어나기도 전이었고, 고려군은 척계광도 걱정했던 바로 그 상황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

 

이때 이성계는 인월로 난 2개의 통로가 있는 것을 보고 왜구의 특공대가 험한 길을 따라올 것이라고 예상했다. 훈련이 안 되고 겁먹은 조선군이 왜구 정예 특공대의 공격을 받으면 어떻게 될까? 효율적인 방어를 하지 못하고 적에게 도륙 당하는 아군을 지켜보기 일쑤다. 반대로 적군은 물고기 떼 한가운데로 뛰어든 상어처럼 살육전을 벌이다가 달아난다. 이런 전투를 겪으면 10배나 많은 병력으로도 소수의 적을 이기지 못한다. ‘적의 주력과 만나면 어떻게 될까라는 공포가 전군을 휩쓸게 된다. 동시에 아군이 당하는 것을 보면서 옆에서 머뭇거리고 지켜만 보았던 아군 부대에 대한 불신도 깊어진다. 일단 공포와 불신에 물들면 계속 이어질 싸움에서 더 주눅이 들게 되고 분열하며 이기적이 된다. 소수의 정예부대를 보내 적군을 이런 공황 상태로 몰아넣는 방법은 롬멜도 좋아했고 유명한 장군들이 자주 써 먹는 전술이다. 그 효과는 아주 탁월하다.

 

이성계가 군대를 나눈 진짜 이유는 따로 있었다. 가뜩이나 고려군은 이질적인 군대로 구성돼 있는데 왜구와 이런 전투를 겪으면 이기나 지나 불신만 깊어질 게 불을 보듯 뻔했다. 반면 이성계 부대 단독으로 싸우면 남에게 도움을 구하려는 나약한 마음도 없어진다. 또 좋은 기회가 될 수 있다. 이성계를 포함한 고려군의 전술은 원래는 북방, 즉 만주의 여진족, 몽골, 한족 군대에 맞춰진 것이었다. 14세기의 왜구는 이전에는 별로 예상치 못했던 새롭고 낯선 적이었다. 낯선 적과의 전술은 몸으로 부딪히며 찾아가는 수밖에 없다. 용기와 희생 없이 얻을 수 있는 승리는 없다. 그래도 기왕이면 주력과 부딪히기 전에 이런 소규모 특공대와 싸워 보는 것이 낫다.

 

작지만 확실한 승리부터 보여줘라

협로로 들어서자 예상대로 왜구가 돌격해 왔다. 과장이 들어갔을 수도 있지만 이성계는 선두에 서서 물러나지 않고 돌격해 오는 왜구를 사살했다. 일본의 활은 유효 사거리가 25m. 일본군이 소위 만세돌격을 선호하는 이유는 이렇게 사거리가 짧고, 화살은 크고 길어서 속도가 느리기 때문이다. 그래도 막상 전투를 벌이면 일본군 간의 전투에서도 칼이나 창에 죽는 병사보다 활에 죽는 병사가 더 많다는 설도 있다. 그런데 고려군의 활은 표준 사거리가 140m. 이성계는 최소 그 2배는 쏘았다. 함성을 지르며 달려드는 왜구를 이성계가 거의 혼자 쏘아 죽였다고 기록돼 있는데 과장이 확실하지만 아주 터무니없는 주장은 아닐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이런 장면을 두고 장수가 솔선수범하거나 능력을 보여 병사들의 신뢰를 얻는다고 한다. 아니다. 병사들도 장군 혼자 싸워서는 전투를 이길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안다. 리더라면 먼저 작은, 그러나 확실한 성과를 보여줘 조직원의 신뢰를 얻을 필요가 있다. 이 사실은 대부분 잘 알지만 많은 리더들이 이 부분에서 자신의 능력만을 과시하는 과시욕과 자화자찬의 실수를 한다.

 

선두에서 싸우는 장군이 주는 확신의 효과는 전술, 경영전략 및 방법에 대한 확신과 신뢰다. 그 방법에 대해 리더가 확신하고 그 전술에 걸맞은 확고한 능력(활솜씨)과 책임감을 갖고 있음을 과시할 필요가 있다. 특히 리더가 새로운 전략, 변화와 혁신을 추구할 때일수록 그들의 개혁정신이 약하다거나 현실에 안주한다고 호통만 치지 말고 작은 성과라도 맛보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 작은 성과라고 해도 그것은 보통 사람의 상식과 예측을 뛰어넘도록 대단히 용의주도하게 계획하지 않으면 안 된다.

 

어차피 모든 계획은 실수와 시행착오를 반복하며 뚫고 나가는 것이다. 승리를 거두는 비결은 실수와 난관에 얼어붙지 않고 빨리 수습해서 대응해 나가는 능력을 갖추는 것이다.

 

곧이어 벌어진 왜구 주력 부대와의 전투는 격렬했다. 막상 전투가 벌어지자 왜구의 공세 앞에 여러 부대가 얼어붙었거나 공조가 잘 안 됐던 것 같다. 이성계가 왜구에 포위돼 고립됐다. 허벅지에 화살까지 맞았다. 절체절명의 순간에 중국인으로 이성계의 부하가 됐던 노장 처명이 이성계의 앞을 막고 결사적으로 싸워 활로를 뚫었다. 처명이 이날 전사했다는 기록은 없는데 그가 다시는 역사에 등장하지 않는 것으로 봐서 부상을 입고 나중에 사망했거나 은퇴했던 것 같다.

 

간신히 살아 나왔지만 이성계는 좌절하지 않고 다시 칼을 뽑고 적을 향해 돌격했다. 장수와 부장들이 감동을 받아 맹렬하게 싸우기 시작했다. 짧은 기록은 이 격전의 순간에도 고려군이 전투가 주는 충격과 공포를 극복하면서 단결력과 전투력을 신장시켜 간 것을 의미한다. 이것이 학습의 효과다. 만약 처음 왜구와의 전투에서 고려군이 뭉쳐서 싸우다가 사기가 꺾였더라면 격전의 현장에서 이런 반성과 자기계발은 없었을 것이다.

 

완벽한 계획이 있을 수 없듯이 완벽한 대응도 있을 수 없다. 어차피 모든 계획은 실수와 시행착오를 반복하며 뚫고 나가는 것이다. 승리를 거두는 비결은 실수와 난관에 얼어붙지 않고 빨리 수습해서 대응해 나가는 능력을 갖추는 것이다. 이 능력의 단점은 보이지 않는 능력이라는 것이다. 여전히 우리 사회는 무형의 능력보다는 계획서나 보고서같이 보이는 것을 좋아하고 중시하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는 실전에서 이길 수 없다. 실제로는 더 많은 피와 희생을 낳기도 한다. 보이는 것은 진실의 절반에 불과하다. 완벽은 유형과 무형의 합으로 이뤄진다.

 

임용한KJ&M 인문경영연구원 대표 yhkmyy@hanmail.net

필자는 연세대 사학과를 졸업하고 경희대에서 한국사 전공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조선국왕 이야기> <전쟁과 역사> <조선전기 관리등용제도 연구> <조선전기 수령제와 지방통치> 등 다수의 책과 논문을 저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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