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정기술에 주목해야 하는 이유

160호 (2014년 9월 Issue 1)

제프 킨들러 전 화이자 회장은 왼쪽 바지 주머니에 동전 10개를 넣고 다녔던 것으로 유명합니다. 상대의 이야기를 잘 경청했다고 생각하면 동전 한 개를 꺼내 오른쪽 주머니에 넣었다는군요. 10개의 동전을 하루에 다 옮겨야 만족했다고 하니 상대의 입장을 이해하려는 그의 노력은 정말 치열했던 것 같습니다.

 

적정기술(appropriate technology)은 전 세계 수십억 명에 달하는 저소득층의 삶의 질을 획기적으로 향상시켜줄 대안으로 여겨집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의 기대를 모았던 탁월한 아이디어나 기술이 사업적으로 실패하곤 합니다. 어린이용 회전목마를 펌프와 연결시켜 오지에 신선한 물을 공급한다는 놀라운 아이디어는 초기에 혁신의 아이콘으로 각광받았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아이들이 더 이상 놀이기구에 흥미를 갖지 않았고 결국 어른들이 힘겹게 회전목마를 돌리다가 이마저도 포기해 흉물로 전락했습니다.

 

이런 문제를 극복하는 대안은 무엇일까요. 바로 제프 킨들러 회장처럼 상대의 입장을 제대로 이해하려는 치열한 노력입니다. 실제 인도네시아에 쓰나미가 발생했을 때 국제구호단체는 신생아를 위한 인큐베이터를 기증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전기 공급이 불안정한데다 습기가 많은 인도네시아의 기후 때문에 모두 고장이 나서 방치되고 말았습니다. 문제를 인식한 구호단체는 현지에서 쉽게 조달할 수 있는 자동차 헤드라이트를 개조해 발열판을 만들고 자동차용 팬으로 통풍을 시키며 흔한 초인종을 알람으로 활용한 인큐베이터를 개발했습니다. 현지화한 인큐베이터는 고장도 잘 나지 않고, 고장이 나더라도 자동차 수리공만 있으면 얼마든지 고칠 수 있어 수많은 생명을 살리는 데 기여했다고 합니다.

 

이처럼 선진국 시장과 완전히 다른 개도국 시장에 대한 철저한 이해가 수반되지 않으면 아무리 좋은 뜻을 갖고 기술적으로 완벽한 제품을 개발했다 하더라도 현지 주민들의 삶의 질이나 소득을 높일 수 없습니다.

 

DBR은 이번 호에 적정기술을 스페셜 리포트로 다뤘습니다. 혹시 적정기술을 구호단체나 NGO, 사회적 기업의 이슈로만 생각하고 계신다면 이는 잘못입니다. 우선 적정기술은 글로벌화를 모색하는 기업들의 CSR 활동을 효율화할 수 있는 원천 아이디어를 제공합니다. 개발도상국 시장에서 지역 주민들의 신뢰를 얻고 공동체에 기여하기 위해서는 적정기술 분야에서 체득한 성공 원리와 노하우를 파악해야 합니다.

 

적정기술의 의미는 여기에 그치지 않습니다. 전 세계 경영학계에서 중국과 인도 현지 기업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습니다. 이들은 현지인들의 상황과 선호도를 정확히 이해하고 선진국 제품과 유사한 기능을 하지만 놀라울 만큼 저렴한 가격을 앞세워 시장을 장악하고 있습니다. 물론 지금까지는 개도국 시장에서만 통했지만 앞으로 선진국 시장에서도 통하지 말란 법이 없습니다.

 

대표적인 사례가 인도의 나라야나병원입니다. 미국에서 관상동맥우회술을 하려면 6만 달러 이상이 들어가지만 이 병원은 불과 2000달러에 해내고 있습니다. 최근 나라야나병원이 케이맨제도에 심장수술을 위한 병원을 열었습니다. 미국 마이애미와 가깝기 때문에 사실상 미국 시장을 겨냥한 도전입니다. 생명과 직결된 분야에서 인도식 혁신이 미국에서 통한다면 공산품이나 서비스 시장에서 개도국 혁신이 통할 확률도 높아집니다.

 

개도국 기업은 극한 환경에서 생활하는 현지인들에게 가치를 창출하는 놀라운 혁신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당장은 현지에서만 통하는 기법이고 저급한 기술이라고 폄하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클레이튼 크리스텐슨 하버드대 교수의 와해성 혁신(disruptive innovation)의 개념대로 저급한 기술이 개선을 거듭하다가 고급 기술이나 주류 시장을 한꺼번에 무너뜨릴 수도 있습니다. 중국 휴대전화 업체 샤오미가 전 세계 IT산업에 큰 충격파를 던지고 있는 이 시점에 적정기술 분야에서 체득한 생생한 경험과 노하우는 개도국 시장 공략에 골몰하고 있는 기업들에 큰 시사점을 제공합니다. 이번 스페셜 리포트가 이런 고민을 구체화하고 더 나은 대안을 모색하는 계기가 되기를 바랍니다.

 

김남국 편집장·국제경영학 박사 march@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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