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K텔레콤 프리미엄 셋톱박스 B box

셋톱박스는 TV 부속품이라고? 백자 느낌에 조명까지… 독자 브랜드로 도전!

157호 (2014년 7월 Issue 2)

 

  

Article at a Glance – 혁신, 운영

국내 최대 무선통신사 SK텔레콤은 통신산업 성장 둔화로 인해 신시장 개척이 필요했다. 하지만 새로운 서비스와 하드웨어를 직접 기획하고 개발한 경험은 많지 않았다. 2012년부터 시작해 2014년 초 출시된 고급형 셋톱박스 비박스(B box)는 경험 부족의 우려를 떨쳐버리고 신성장 동력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자신감을 안겨줬다. 전통적으로 TV의 부속품이며 차별화가 불필요한 제품이라 여겨졌던 셋톱박스를 독자적인 브랜드 상품으로 바꾸기 위해 이 회사는 다음의 방법을 썼다. 

1) 매끈한 백자 도자기 느낌과 무드 조명 기능을 갖춰서 TV 장식장에 처박아두는 셋톱박스가 아니라 밖으로 꺼내놓고 싶은 셋톱박스를 만들었다. 리모콘의 고급화에도 신경 썼다. 

2) 홈모니터링(CCTV 기능)처럼 편리한 무료 부가기능을 넣되 TV의 기본인 채널 시청과 주문형 비

디오 서비스의 편의성을 최우선으로 놓고 화면 UI를 구성했다. 

3) 스마트폰 업체, 인터넷 포털업체 등에서 채용한 개발자들을 상품기획 단계서부터 참여시켜 제품의 개발 가능성을 높이고 제조원가를 맞췄다.

  
편집자주

지금까지 DBR Case Study는 성공 사례를 많이 다뤘습니다. 하지만 상업적 성공을 판단하기 이른 출시 초기 제품이라도 그 자체로 혁신성이 높다면 사례 연구 대상이 될 수 있다고 판단했습니다. 이 사례는 이런 관점에서 작성됐습니다. DBR 1∼2년 후 상업적 성과를 판단할 수 있는 시점에 다시 한번 사례연구를 통해 성공 혹은 실패요인을 분석해드리겠습니다. 상업적 성공까지 수많은 요인들이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현 단계에서 성공을 단언할 수 없지만 이 사례가 주는 문제의식, 제품 개발 과정 등은 가치가 있다고 판단합니다. 신제품 개발을 고민하는 많은 비즈니스 리더 여러분들께서 통찰을 얻어 가시기 바랍니다.

 

2012년 가을, 을지로 SK텔레콤 사옥 회의실에 모인 상품기획 1팀은 UX디자인업체 컨설턴트들과 함께 머리를 싸맸다. 이들은 집에서 보는 인터넷 TV용 셋톱박스를 만드는 프로젝트에 투입됐다. 인터넷 TV 사업은 원래 자회사인 SK브로드밴드의 영역이지만 유무선을 따지지 않고 새로운 관점에서 상품전략을 세우자는 취지에서 모회사인 SK텔레콤이 신형 셋톱박스의 개발 기획을 맡았다.

 

콘셉트 기획은 2012년 초부터 시작했다. 무선통신 사업이 거의 포화상태에 도달했고 유선 인터넷과 IPTV 사업, 인터넷 서비스 사업 역시 마찬가지라 회사엔 새로운 성장 동력이 필요했다. 상품기획자들은차세대 성장을 위한 상품기획을 하다 보니 다음 격전지는 홈(home)이 될 가능성이 높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집은 유선과 무선 서비스가 만나는 접점이다. 다행히 우리가 IPTV와 유무선 인프라를 모두 갖고 있으니을 공략할 수 있는 제품을 만들어보자고 했다.” 최정호 상품기획 1팀 매니저의 말이다.

 

유무선을 아우르고 가정의 커뮤니케이션/엔터테인먼트 허브 역할을 할 수 있는 제품을 개발하는 취지로 ‘H’프로젝트로 진행된 신제품 개발은 이후 SK브로드밴드의 브랜드 정책에 맞춰비박스(B box)’로 수정됐다.

 

가정에서 IT 허브 역할을 할 수 있는 기기는 항상 전원이 켜져 있고 인터넷에 연결할 수 있는 냉장고, 세탁기, TV를 들 수 있다. 상당수의 전자업체와 통신업체, 인터넷업체는 이 중 홈 허브로서 TV의 가능성을 개발하는 데 투자해왔다. 아직 뚜렷한 실적을 낸 업체는 없는 상황이었지만 SK텔레콤 역시 기존에 SK브로드밴드를 통해 사업을 영위하고 있는 인터넷 TV 셋톱박스에 주목했다.

 

여기까지는 어렵지 않았다. 문제는 어떻게 소비자들이 이 제품을 받아들이도록 만들 수 있냐였다. 혁신적인 기능이 있는 IT 제품을 만들어도 소비자가 그것을 특별히 구매할 필요를 느끼지 않아 사라지는 제품은 무수히 많다. 또 다른 문제는 인터넷 TV 사업의 구조적 특징이었다. 인터넷 TV 서비스와 셋톱박스를 최종 판매하는 건 SK텔레콤이 아닌 자회사 SK브로드밴드다. 월정액을 받는 인터넷 TV 서비스를 팔아야 하는 영업부서 입장에서 셋톱박스는 고정비용이다. 한국 시장의 특성상 소비자가 직접 셋톱박스를 구매하는 게 아니라 인터넷 TV 서비스를 계약할 때 실비 개념의 렌털비를 내고 사용기간 동안만 빌리는 개념이기 때문이다. 인터넷 TV 사업자는 셋톱박스 렌털이 아닌 인터넷 TV 서비스 요금에서 수익의 대부분을 만든다. 따라서 이들 입장에선 셋톱박스가 지나치게 고기능을 추구하면 가격이 높아져서 배보다 배꼽이 커지는 상황을 우려할 수밖에 없다. 간단히 말해 비박스에는 두 부류의 고객이 있었다. TV를 보는 최종 소비자의 편익도 생각해야 하는 한편, 서비스를 판매하는 SK브로드밴드의 수익성도 고려해야 했다.

 

그림 1 비박스 개발 타임라인

 

개발능력의 내재화

어려움은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프로젝트 콘셉트를 만드는 과정에서 가장 난감한 문제는 SK텔레콤이 이전까지 물리적 실체가 있는 소비재 제품의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 시스템을 기획하고 제조해 본 경험이 거의 없다는 점이었다. 통신회사로서 광통신망 같은 통신인프라를 구축하고 또 휴대폰과 스마트폰 서비스를 파는 일에서는 오랫동안 국내 1위를 지켜온 기업이지만 스스로가 휴대폰이나 스마트폰을 기획, 제작하는 일은 드물었다. 자회사 SK브로드밴드 역시 셋톱박스는 외주업체 OEM 형식으로 공급받는다. 복잡한 전자제품인 인터넷 TV 셋톱박스를 백지상태에서 개발하고 제작까지 이어지는 프로젝트를 진행한다는 건 어려운 일이었다. 프로젝트 경험도, 개발 인프라도 없이 의지만 있을 뿐이었다. 최정호 매니저도 이런 어려움을 인지했다. “이전까지 우리는 회사 내에 개발조직을 내재화해서 운영해본 경험이 거의 없었다. 우리는 네트워크 비즈니스를 하는 조직이었다. 스마트폰이나 안드로이드 같은 개방형 체제가 퍼지기 전까지는 통신사가, 특히 시장점유율이 높은 SK텔레콤이나 KT가 주도권을 쥐고 있는 상황이었다. ‘우리 규격에 따라 만들어달라고 외부업체에 주문하면 됐다. 그래도 누구나 우리와 일을 하고 싶어 했기 때문에 굳이 우리가 개발조직을 내부에 가지고 있지 않아도 되는 호시절이었다. 그러나 세상이 바뀌었다. 스마트폰이 오고 개방형 OS의 세상이 왔다. 인터넷 망도 개방됐다. 이제는 외부 소프트웨어 업체들이 특정 통신사만을 위한 제품을 만들어야 할 필요가 없게 됐다. 안드로이드 같은 공개 규격에 맞추면 하나만 만들어도 수많은 통신사와 서비스업체에 공급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외부업체들의 파워가 과거보다 커졌다. 반면 우리는 호시절을 지나면서 개발에 대한 기초체력이 떨어진 상태였다.”

 

다시 말해 예전의 SK텔레콤 기획자의 업무가 외부 업체가 가져온 기획서를 검토하는 일이었다면 앞으로의 기획 업무는 말 그대로 스스로 제품과 서비스 콘셉트는 물론 디자인과 제조 프로세스까지 관리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예전처럼 플랫폼만 제공해주면 앱 제작사들이 줄을 서서 달려드는 형편이 아니었다.

 

일례로 비박스에 게임 기능을 보강하기 위해 한 인기 모바일 게임을 TV 버전으로 만들어 달라고 제안했을 때 게임 업체는 사용자 수에 관계없이 월 1억 원의 사용료를 요구했다. 이는 셋톱박스 2만 대분 임대료에 해당하는 금액으로 SK텔레콤 측에선 수용하기 힘든 요구였다. 예전 같으면 자기 돈을 들여서라도 SK텔레콤의 플랫폼에 올려달라고 사정했어야 할 게임업체가 이제는 오히려 플랫폼업체에 큰소리를 치는 세상이 됐다.

 

‘기초 체력의 부족함을 절감한 상품기획팀은 내외부에서 적극적으로 인력을 보충했다. 위의석 부문장 지휘하에 우선 삼성전자 미주법인에서 스마트TV 기획을 했던 윤영란 매니저를 비롯해 사내 각 팀에서 30대 초중반의 젊은 인력을 보강했다. 또 마케팅 전략과 CRM을 담당했던 최정호 매니저를 데려와 PM 역할을 맡겼다. 이들은 무선통신이라는 기존 SK텔레콤의 사업 패러다임에서 비교적 자유로운 사고를 할 수 있는 사람들이었다. SK브로드밴드의 개발자와 매니저들도 이 팀에 합류했고 인터넷 포털업체와 스마트폰 제조사에서도 경력사원들이 채용됐다. 팬택에서 안드로이드 시스템 소프트웨어를 개발하던 조규형 매니저를 비롯한 개발자들은 제조업에 대한 기술적 지식이 부족한 SK텔레콤 기획자들을 보완하기 위해 기획단계서부터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상품기획팀에서 나오는 기획안들에 대해 각 단계마다 실현가능성(feasibility)을 검토해줬다. 그 덕분에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 개발이 동시다발적으로 이뤄지며 비교적 짧은 시간에 개발이 가능했다. (그림 1)

 

TV 장식장에서 벗어나라

이렇게 조직된 하이브리드팀은 2012년 가을부터홈 시장에 들어갈 수 있는 거점 디바이스라는 추상적인 콘셉트를 좀 더 구체화하는 작업에 돌입했다. 그동안 더디게 진행됐던 작업이었고 서둘러야 했다.

 

기존 시장에서 셋톱박스의 역할은 TV와 주문형 비디오(VOD)를 보여주는 것이 전부였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인터넷 기능이 되는 고가형 셋톱박스나 스마트TV를 사용하는 사람들도 거의 대부분의 시간은 TV 시청에 쓰고 부가기능을 사용하는 시간은 1%에도 안 된다. 대부분의 가정에서 셋톱박스는 눈에 띄지 않도록 TV 장식장 안에 들어가 채널 숫자만 보여주는 정도의 역할만 한다. 이런 상황에서 비싸고 기능이 많은 셋톱박스를 만들어봐야 반짝 관심을 끌 수 있을지 모르지만 소비자나 판매원은 달갑지 않다.

 

셋톱박스가 홈 허브로 기능하기 위해서는 우선 셋톱박스의 역할을 자연스럽게 재정립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야 했다. 셋톱박스가 TV의 부속품이 아닌 하나의 독자적인 브랜드 제품으로 부각되기 시작하면 그 다음부터는 유무선 통신망을 이용해 벌일 수 있는 사업 기회가 많아질 거라 생각했다. 역시나 모든 문제는 원점으로 돌아왔다. 어떻게 전통적인 셋톱박스의 이미지를 탈피할 것인가. 그나마 셋톱박스는 거의 모든 가정이 하나 이상 가지고 있는 제품이며, 또 인터넷 서비스 제공자를 바꿀 때마다 간접적인 재구매가 이뤄지는 상품이라는 점이 다행이었다.

 

2012년 가을, 기획 1팀은 소비자의 입장에서 다시 생각해보기로 했다. UX(user experience·사용자 경험) 디자인 전문 업체인 플러스엑스도 불러들였다. SK텔레콤의 상품기획자들과 플러스엑스의 컨설턴트들은 우선 사람들이 TV와 셋톱박스를 어떻게 인식하는지부터 파악하고자 했다. TV는 텔레비전(television)의 약자로 멀리(tele) 있는 것을 보기(vision) 위한 장치다. 또 셋톱박스(set-top box) TV 위에 설치된 상자라는 사전적 의미를 갖고 있다. 특히 셋톱박스는 미관상 지저분함에 대한 고객들의 불만족이 높은 제품이었다. 따라서 TV 장식장 안에 숨겨 놓거나 최대한 눈에 띄지 않도록 납작한 상자 형태의 셋톱박스가 국내 시장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회의 참석자들은 난상토론 끝에 SK텔레콤의홈 허브는 기존 셋톱박스와는 외관부터 달라야 한다는 결론을 냈다. 홈 허브는 말 그대로 한 가정의 중심이 되길 바랐다. ‘셋톱박스를 TV 장식장 밖으로 꺼내서 사용자들이 실체를 눈으로 확인할 수 있도록 하자가 참석자들이 내린 결론이었다.

 

이제 과제는 세 가지로 좁혀졌다. 첫째, TV 장식장 밖으로 꺼내 놓아도 예쁘고 어색하지 않은 디자인이 필요했다. 둘째, TV 시청에 불편이 없으면서도 TV 시청 외의 추가적인 기능도 제공해야 했다. 셋째, TV 시청과 부가기능 이용이 편안하고 효율적으로 이뤄지는 소프트웨어 UI가 구성돼야 했다.

 

 

리모콘은 건전지를 갈아 끼워야 하는 불편함을 없애기 위해 충전되도록 했다. 일반 TV 시청자들이 가장 많은 불안을 느끼는 것이 리모콘 배터리지만 너무 당연하게 여겨왔기에 불평도 잘하지 않았던 부분을 잡아냈다.

 

외관 디자인

컨설팅 업체는이라는 콘셉트에 맞게 다음의 네 가지 브랜드 키워드를 제시했다.

 

1) Rounded/Soft (유연하고 부드럽게 떨어지는)

2) Harmonious/Suitable (자연스럽게 어우러지는)

3) Connectable/Centric (중심에서 소통을 연결하는)

4) Minimal/Simple (군더더기 없는 깔끔함)

 

애초부터 TV 장식장을 염두에 두지 않았기 때문에 다양한 형태의 모양이 고려됐다. 최종 선택된 안은 한국의 전통 백자 도자기 느낌을 주는, 모서리가 둥근 박스 형태였다. 기존 검은색 셋톱박스와 차별되는 흰색을 택했으며 도자기 표면처럼 매끈하고 이음새 없는 디자인을 위해 플라스틱 사출 기법으로 케이스를 뽑아낼 수 있는 업체를 찾아냈다. 모서리는 부드럽게 처리했다. 모든 요소가()’이라는 단어가 주는 느낌과 어울리도록 고려됐다.

 

마지막으로 케이스 안쪽에 조명기능을 넣어 셋톱박스 자체가 간접 발광하도록 했다.

 

“겉모양을 예쁘게 만들어야 사용자들이 셋톱박스를 TV장에 처박아두지 않고 꺼내 놓고 쓸 거라고 생각했지만 단순히 예쁘다고 우겨서 될 일은 아니었다. 디자인도 개인 취향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간접 조명등, 무드등으로 쓸 수 있도록 해서 인테리어 소품처럼 느껴지도록 했다.” 윤영란 매니저의 말이다.

 

케이스 디자인보다 더 중요한 게 리모콘 디자인이었다. TV 시청자가 늘 접하는 건 사실 셋톱박스가 아니라 리모콘이다. 하루에도 몇 십 번씩 직접 손으로 접촉한다. 그래서 단가 상승을 무릅쓰고 고급스러운 느낌으로 마감된 흰색 플라스틱 재질을 사용했다. 또 일반적으로 리모콘에 들어가는 물컹물컹한 고무 버튼이 아닌 단단한 고급 플라스틱 버튼을 사출해서 조립했다. 중앙의 4방향키는 센서를 넣어 마치 노트북의 터치스크린처럼 손가락을 문질러 커서를 이동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리모콘은 건전지를 갈아 끼워야 하는 불편함을 없애기 위해 일반 스마트폰 충전 케이블을 통해 셋톱박스나 TV, 컴퓨터 등에 연결해 쉽게 충전되도록 했다. 일반 TV 시청자들이 가장 많은 불안을 느끼는 것이 리모콘 배터리지만 너무 당연하게 여겨왔기에 불평도 잘하지 않았던 부분을 잡아냈다.

 

그림 2 조명을 켠 상태의 B box 와 리모콘

 

부가 기능

2013년 초, 디자인 작업이 진행되면서 동시에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 기능 개발도 들어갔다. 소비자가 추가 비용을 부담스럽게 느끼지 않으려면 유용한 기능들을 제공해야 했다. 다른 업체의 인터넷 TV와 스마트TV에서 쓰이는 기능들을 추가하는 한편 향후 확장성을 위해 외부 업체들이 앱을 개발하기 쉬운 안드로이드 운영체제를 택했다.

 

기본이 되는 TV VOD 시청 외에 다음과 같은 기능들이 추가됐다.

 

● 홈모니터링: TV 위에 설치하는 화상 카메라를 통해 집안 상황을 모니터링하고 움직임을 감지. 집 밖에서도 스마트폰을 통해 실시간으로 확인 가능.

● 영상통화: 같은 카메라를 이용해 TV화면을 통한 HD급 화상 통화가 가능. 전화번호는 070 인터넷전화 번호를 그대로 사용. 비박스끼리, 또 비박스와 LTE 휴대폰 간 통화 가능.

● 인터넷: TV 화면에 최적화된 인터넷 브라우저.

● 패밀리보드: 가족 간 사진/동영상/일정을 공유할 수 있는 게시판 기능.

Zimly: PC에 저장된 미디어 콘텐츠를 무선으로 TV에서 볼 수 있게 하는 기능의 앱.

TV용 안드로이드 위젯과 앱 설치 가능.

 

이렇게 기획된 스펙을 실제 셋톱박스 제품으로 만들어줄 수 있는 제조 OEM사를 찾았다. 공장이 없는 SK텔레콤이 직접 생산까지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상품전략과 경쟁환경에 대한 다각적 검토를 한 끝에 국내에서 셋톱박스를 전문적으로 만드는 회사 중 영상통화 기능을 구현하는 데 더 많은 경험이 있었던 다산네트웍스를 제조사로 선정했다.

 

고급스러운 디자인, 추가된 부가 기능으로 인해 제조단가 상승은 불가피했다. 플라스틱과 하단부 알루미늄 테두리 외에 특별히 비싼 재료나 비싼 부품이 들어간 곳은 없었지만 전체적인 심미성을 양보하진 않았다. 비박스의 임대료는 현재 3년 약정 계약의 경우 월 5000원이다. 주문형 비디오 기능이 있는 기존의 디지털 셋톱박스 임대료보다 2000원 높다.

 

소프트웨어 디자인

하지만 추가 기능과 예쁜 모양만으로는 사용자들에게 월 2000원의 추가 비용을 들일 만한 가치가 있다고 설득하기 힘들 것이 분명했다. 삼성전자 같은 쟁쟁한 회사들이 내놓는 스마트TV도 엄청난 마케팅에도 불구하고 보급 속도가 느렸다. 구글, 애플이 내놓는 인터넷 기반 TV 상품들도 별 재미를 보지 못하는 마당이었다.

 

비박스 상품기획팀은 초심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부가기능을 뻐기듯 강요하기보단 소비자들의 기존 미디어 사용패턴을 존중해주고 그들이 가장 원하는 것을 먼저 들어주자고 생각했다. , 소비자가 TV에서 압도적으로 많이 사용하는 기능인 TV VOD 시청의 편의성을 높였다.

 

TV를 켜면 나오는 첫 화면은 스마트폰의위젯방식을 사용했다. 대부분의 스마트TV들을 켜면 여러 가지 복잡한 메뉴들이 나오고 TV 화면은 구석에 처박혀 있기 마련인데 비박스 초기화면의 정중앙에는 현재 선택된 채널의 TV 화면이 커다랗게 나온다. 또 작은 창으로 톱 20채널의 현재 방송을 한눈에 확인할 수 있도록 했다. 그 밖에 날씨, 뉴스처럼 각자 원하는 기능을 홈 화면에 띄워놓을 수 있도록 했다. 이는 스마트폰에서 쓰이는 안드로이드 OS 시스템의 특징이기도 하다.

 

그 다음으로 사용 빈도가 많은 VOD 기능은 콘텐츠를 쉽게 검색할 수 있도록 하는 데 중점을 뒀다. 기존 셋톱박스에서 원하는 프로그램을 골라 보려면 메뉴-채널-프로그램순으로 메뉴를 따라 찾아 들어가야 한다. 비박스는 사용자의 시선 이동 없이 선택된 메뉴가 항상 화면 중앙에 나타나는 중앙정렬(center-alignment) 방식을 택했다. (그림 3) 그 결과, 사용자가 메뉴를 쫓아가는 게 아니라 메뉴가 사용자를 따라오게 됐다. 또 리모콘의 터치센서를 이용해 손가락으로 리스트를 휘리릭 넘겨볼 수 있도록 만들었다. 또 리모콘과 셋톱박스 본체, 화면 UI의 테두리 곡률을 동일하게 만들어 일관된 스타일을 주고자 했다. (그림 4)

 

그림 3 중앙정렬된 VOD 선택화면

 

그림 4 동일한 곡률이 적용된 리모콘, 본체, 위젯. 본체는 시제품이며 실제 판매된 제품엔 B box 로고가 들어갔다.

 

제품 출시

비박스는 2014 123일 일반에 공개됐다. 비박스 출시로 SK브로드밴드는 세 종류의 셋톱박스 상품을 갖추게 됐다. 실시간 TV VOD 시청에 최적화된 임대료 월 2000(3년 약정 기준)의 기본형 셋톱박스, 구글TV 4.0을 채택한 월 3000원의 스마트 셋톱박스, 5000원의 고급형 비박스다. 비박스의 본격적인 프로모션과 유통은 3월부터 시작했다.

 

비박스는 출시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았기 때문에 아직 성공 여부를 판단하기는 불가능하다. 또 상업적 성공에 이르려면 마케팅 역량이나 전략, 운 등 많은 요인들이 작용하기 때문에 미래 성과를 예단하기는 매우 힘들다. 회사 측은 정확한 판매대수는 공개하지지 않지만 출시 3개월 만에 연간 목표량의 30%를 달성했다고 밝혔다. 아직 홍보가 충분히 되지 않은 상황에서 예상했던 추세보다 많이 팔리고 있다. 이를 감안해 회사는 올해 판매 목표랑을 초기 목표 대비 50% 상향 조정했다. 다만 리모콘과 관련한 고객 불만 접수가 기존 제품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잦은 것이 걱정이다. 기존 적외선 방식에 익숙한 사용자들이 새로운 블루투스 방식의 리모콘 사용에 적응하는 과정이라고 회사 측은 말한다. 개발 경험이 부족했기 때문에 겪게 된 문제며 OEM사와 함께 개선해나가고 있다.

 

비박스의 디자인은 일반인뿐 아니라 전문가 그룹에서도 좋은 평가를 받았다. 세계 3대 디자인어워드 중 2(iF product design award 2014, IDEA design award entertainment 부문)에서 본상을 수상했다. 윤영란 매니저는 “IDEA상은 보통 삼성, LG, 소니 같은 거대 제조기업에서 나온 제품들이 수상하고 이번에 같이 수상한 제품 중에는 400만 원을 호가하는 OLED 커브드TV도 있다. 나름의 성과라고 생각한다라고 말했다.

 

비박스가 시장에 안착하고 난 후 SK텔레콤은 비박스 관련 유무형 투자자산을 SK브로드밴드 측에 876000만 원에 매각했다. 개발과 출시가 무사히 끝났으니 이제 바통은 실제 영업을 하는 SK브로드밴드 측에 넘기게 된 것이다. 2013년 총매출이 166000억 원에 달했던 SK텔레콤 입장에서 보면 2년 넘게 투자된 프로젝트에서 번 87억 원은 무시할 수도 있는 금액이라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수익보다도 중요한 성과는 SK텔레콤이 새로운 성장 동력을 찾고 새로운 시장을 스스로 개척해나갈 수 있다는 자신감이었다.

 

윤영란 매니저는우리 회사는 눈에 보이는 실체가 아닌 눈에 보이지 않는 서비스를 만드는 회사였다. 우리도 이런 걸 잘할 수 있다는 걸 스스로에게 확인시켰다고 말했다. 프로젝트의 PM을 맡았던 최정호 매니저는 더 큰 가능성도 보고 있다. “지금까지는 보지도 않은 VOD 몇 만 편을 가지고 있느냐가 전통적인 셋톱박스 시장의 경쟁규칙이었다. 반면 비박스는 써보면 왜 좋은지 알 수 있는 셋톱박스를 지향했다. 시장의 경쟁 규칙이 VOD 편 수에서 실제 사용자 편의성 중심으로 옮겨갈 수 있는 계기라고 생각한다고 그는 말했다.

 

시사점

셋톱박스에 대한 새로운 접근

일반적으로 셋톱박스 시장은 최종 소비자의 선호가 다양하지 않은 시장으로 여겨진다. 유무선 공유기, TV, 전원 플러그와 유선으로 연결되기 때문에 지저분해 보일 뿐만 아니라 켜진 이후에는 채널을 바꾸는 역할밖에 하지 않기에잘 생길필요가 없었다. 게다가 소비자들은 원하는 TV 프로그램이 제공되는가에만 관심이 있기에 서비스로 차별화하기도 어려웠다. 즉 셋톱박스는 기기로서도, 서비스로서도 시장에서의 차별화가 필요 없는 상품이었다.

 

이처럼 시장에서 제품들 간 차별성이 적은 경우, 소비자들은 관성(inertia)이라는 습관에 의존해 동일한 제품을 재구매하거나, 또는 다양성 추구(variety seeking)라는 다른 습관에 의존해 여러 제품을 시도하기도 한다. 이와 같이 소비자들의 관여도가 낮은 제품들은 치약, 화장지 등의 소비재부터 프린터 용지, 토너 등 사무용품, 심지어는 은행, 자동차 보험 등 금융상품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한 시장을 이루고 있다. 이러한 시장에 속한 기획자들은 일반 대중의 밋밋한 습관에 부합하는 일상재(commodity)가 아니라 개별 소비자들의 까다로운 선호가 반영된톡 쏘는차별화된 제품을 만들어내기 위해 다양한 시도를 한다. 신규 상품임을 강조하거나, 기능을 단순화하거나, 이상적인 고객들이 구매한다고 광고하거나, 친환경 메시지를 전달하기도 한다.

 

비박스는 습관에 기반한 시장에서 차별화를 시도하는 색다른 사례를 보여주고 있다. 먼저 제품으로서의 차별화를 위해서 셋톱박스의 인테리어 기능이 강조됐다. 배선이 깔끔하게 처리되고, 형태와 색이 독특하고, 무드등이 켜지는 기능을 포함해서 외부에 드러낼 수 있는 소품 역할이 가능해졌다. 다음으로 서비스로서의 차별화를 위해서 TV 외에 다양한 기능이 추가됐다. 영상전화, 홈모니터링, 패밀리보드, 런처 등 홈 허브로서 필수적인 기능들이 컴퓨터나 모바일에 익숙한 방식으로 편리하게 조작(user interface)할 수 있도록 추가됐다. 즉 직관에 위배되는 제품, 확장 가능한 서비스를 기대하는 소비자의 선호에 부합하는 상품으로 기획됐다.

 

광범위한 협력

기존 셋톱박스 시장에서 제조사들은 소비자의 다양한 선호를 반영하지 못하며 단가 경쟁에 집중했고 개발자들은 기회가 더 큰 스마트폰 시장으로 옮겨갔다. 결국 의미 있는 차별화를 위해 혁신적인 셋톱박스를 기획한다 해도 실력이 우수한 제조사나 개발 인력이 확보되기 어렵기 때문에 개발비가 증가하고 최종 결과물의 품질이 보장되지 않는다는 문제점이 있었다.

 

이처럼 시장에서 차별화를 이루기 위한 공급 자원이 부족한 경우 한국의 대기업들은 보통 해외에서 인재를 찾는다. 실력이 우수한 인재를 확보하기 위해서 북미나 유럽의 특정 학교를 찾아가기도 하고(campus tour), 실력은 비슷하지만 인건비는 낮은 특화된 인력을 중국, 인도 등에서 찾기도 한다(sourcing). 하지만 최근에는 국내에서의 수준 높은 교육 프로그램 덕분에 국가 간 교육의 차이가 줄어들고 중국과 인도에서의 인건비가 증가했다. 경우에 따라서는 국내보다 해외에서 공급 자원을 찾는 일이 더 어려워졌다.

 

비박스 개발은 단순히 해외에서 양성된 전문 인력에 기대지 않고 국내의 기획자/개발자/디자이너/제조사들이 협력해(collaboration) 제품을 기획하고 개발하는 과정을 거쳤다는 특색이 있다. 예전에는 기획자가 작성한 기획서를 개발자가 판단한 뒤이것은 할 수 없다고 결론을 내리는 경우가 많았지만 비박스를 개발할 때는 개발자들이 기획에 많이 관여하면서이것은 이렇게 수정하면 할 수 있다고 도움을 주는 경우가 많았다. 내적으로는 기획과 개발의 협력이 효과적이었다면 외적으로는 기획과 외주 업체들과의 긴밀한 의사소통이 효과적이었다. 디자인 업체인 플러스엑스, 셋톱박스 제조사인 다산, 리모콘 제조사 등 서로 다른 목적과 문화를 가진 다양한 회사들과의 끊임없는 의사소통 덕분에 초반의 독특한 콘셉트가 유지되면서 다양한 기능이 탑재된 셋톱박스가 완성됐다. 이처럼 협력적인 관계는 조규형 개발팀 매니저의벤처처럼 일했다는 말과 일맥상통한다.

 

판매와 운영도 혁신적이어야

신제품은 콘셉트를 기획하기도 어렵지만 실제로 개발로 이어지도 어렵다. 또 이 모든 과정을 무사히 거치더라도 시장에서 성공할 확률이 1%에도 미치지 못한다는 연구가 있다(Cooper and Kleinschmidt 1987). 하지만 기업이 생존하기 위해서는 성공적인 신제품 출시가 필수적이기 때문에 신제품을 구매할 소비자와 신제품을 개발할 공급자에 관한 여러 주장이 존재한다. 하지만 대부분의 주장은 둘 중 한 쪽 부분에만 치우쳐져 있다. (1) 어떤 소비자가 신제품을 구매하는지, 언제 출시해야 소비자가 구매하는지, 출시 후 어떠한 마케팅 활동을 수행해야 하는지 등 소비자에 관한 이슈에 집중돼 있거나, 또는 (2) 개발팀을 어떻게 구성해야 하는지, 팀 간 의사소통을 어떻게 장려해야 하는지, 생산 공정을 어떻게 조정해야 하는지 등 공급자에 관한 이슈에 집중돼 있다(Hauser, Tellis, and Griffin 1996).

 

이에 비해 비박스 프로젝트는 소비자와 공급자를 동시에 흔들어 깨워야 하는 도전적인 프로젝트다. , 시장 수요를 예측하는 것도 불확실하고 개발비를 예측하는 것도 어려웠다. 결과적으로는내재적 불확실성(internal uncertainty)’이 매우 높은 프로젝트다. 이런 경우, 의사결정권자의 불확실성에 대한 태도와 최종 결과물에 대한 믿음은 소비자와 공급자를 동시에 자극할 수 있다. 다이슨 청소기를 만든 제임스 다이슨, 아이폰을 만든 스티브 잡스, 테슬라 전기자동차를 만든 엘런 머스크 등 비전을 가진 혁신가들의 제품은 출시 당시에는 소비자들이 스스로 원하는지도 몰랐고 개발 단계에서도 무수한 시행착오가 있었다. 셋톱박스에서 벗어나 홈 허브로서 기능하게 될 비박스는 기획과 개발단계에서의 불확실성을 극복했지만 판매와 운영에서도 다양한 불확실성을 다스릴 수 있는 혁신적인 관리 방안이 필요하다. 특히 소비자들의 행동 변화를 촉발할 수 있는 다양한 판매 마케팅 전략과 사후 서비스 체계가 요구된다.

 

주재우 국민대 경영대학 교수 designmarketinglab@gmail.com

주재우 교수는 서울대에서 인문학 학사와 경영학 석사를, University of Toronto Rotman School of Management에서 마케팅 박사 학위를 받았다. 행동적 의사결정 심리학을 바탕으로 디자인 마케팅, 신제품 개발, 소비자 행동에 관해서 주로 연구하고 있다.

 

조진서 기자 cjs@donga.com

 

동아비즈니스리뷰 330호 플라스틱 순환경제 2021년 10월 Issue 1 목차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