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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보다 할배

베테랑 ‘배우’ 아닌 이웃집 ‘할배’ 자연인 모습 그대로 시청자 사로잡다

이방실 | 143호 (2013년 12월 Issue 2)

 

 

편집자주

※이 기사의 제작에는 동아일보 미래전략연구소 인턴연구원 최윤영(Assumption University 국제경영학과 4학년) 씨가 참여했습니다.

 

2013년 한 해 동안 인구에 가장 많이 회자된 예능 프로그램을 꼽으라면 단연꽃보다 할배를 빼놓을 수 없다. 꽃보다 할배는 배우 이순재, 신구, 박근형, 백일섭 등 평균 연령 76세인할배연예인들이 유럽과 대만으로 배낭여행을 떠나면서 겪게 되는 좌충우돌 이야기를 카메라에 담은 리얼리티 예능 프로그램이다. 지난 75 tvN에서 처음으로 방송된 후 104일 종영되기까지 회당 평균 시청률(케이블 가입기구 기준) 5.7%에 달했다. 14번의 방송 중 6% 중후반대 시청률을 기록한 횟수만 따져 봐도 다섯 번이나 된다. 지상파 방송이 아닌 케이블 프로그램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매우 높은 수치다. 심지어 회당 최고 시청률을 따지면 10%에 육박한 적도 두 번이나 된다. (그림 1)

 

꽃보다 할배는 사실여행 버라이어티라는 장르만 놓고 보면 그다지 새로울 게 없는 프로그램이다. 여러 명의 연예인들이 어딘가로 단체 여행을 떠나 겪는 에피소드를 담아내는 류의 방식은 이미 대표적인 예능 프로그램의 장르로 구축된 지 오래다. 그러나 꽃보다 할배는 식상한 장르라는 비판을 상쇄할 만큼 독특한 콘텐츠와 차별화된 전달 방식을 통해 시청자들로부터 큰 호응을 이끌어내는 데 성공했다. DBR이 꽃보다 할배의 성공 요인에 대해 집중 분석했다.

 

 

 

 

50년 지기 친구들의 생애 첫추억 만들기여행

 

꽃보다 할배는 12일로 명성을 얻은 나영석 PD 2012년 말 KBS에서 CJ E&M 산하 케이블 채널인 tvN으로 이적한 후 처음으로 내놓는 작품이었다. 나영석 PD처음 프로그램 기획 회의를 할 때부터 ‘70∼80대가 떠나는 배낭여행콘셉트를 명확하게 잡았던 건 아니었다고 털어놨다. 경험 많은 PD, 베테랑 작가들과 몇 달 동안 끊임없이 회의하며 여러 아이디어 가운데 고르고 골라 발전시킨 결과물이라는 설명이다.

 

꽃보다 할배 제작팀이 올해 초 처음 기획 회의를 할 때에만 하더라도 오디션 프로그램 형식을 취할지, 게임 쇼 형태로 진행할지 등 어떤 장르를 선택할 것인가만 놓고도 상당한 고민을 했다고 한다. 그러다국내 여행 프로그램(12)은 한 번 해봤으니 해외 여행 프로그램을 진행해보는 건 어떻겠느냐는 아이디어가 나왔다. 그 후 논의는만약 해외로 여행을 간다면 어떤 여행이 가장 흥미로울까?” “누가 가면 제일 재미있을까등으로 이어졌다. 그 결과 배낭여행과는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70∼80대 노인들을 주인공으로 삼아 유럽으로 여행을 떠나 보는 게 어떻겠느냐는 쪽으로 의견이 모아졌다. 전혀 이질적인 요소들 간의 조합이 안겨줄 웃음과 재미에 기대보자는 취지였다.

 

큰 방향이 정해진 후 제작진은 좀 더 구체적으로 프로그램 기획에 들어갔다. 이 과정에서 단순히 나이만 많은노인들이 떠나는 배낭여행이 아니라 한번도 여행을 같이 가 본적이 없는 ‘50년 지기 친구들끼리 떠나는 추억 만들기 여행이라는 시각에서 접근하기로 결정했다. 인생의 황혼기에 접어든 노인들에게 친구들과 같이 떠나는 여행은, 여행을 직접 떠나는 출연진에게나 그 모습을 간접적으로 지켜보게 될 시청자들에게나 모두 특별한 의미로 다가올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어쩌면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오랜 벗들과의 추억 만들기 과정을 진정성 있게 담아낸다면 재미는 물론 감동까지 선사할 수 있는 리얼리티 예능이 될 수 있을 것이라는 게 제작진의 판단이었다. 출연 제의를 받는 원로 배우 입장에서도 단순한 예능 프로그램이라고 하면 거부감을 가질 수도 있지만 호형호제(呼兄呼弟)할 만큼 각별하게 지내는 친구들끼리의 여행 프로그램이라면 긍정적으로 검토할 것이라는 계산도 한몫했다.

 

대략적인 기획안이 서자 제작진은 본격적인 섭외에 들어갔다. 우선, 원로 배우 가운데 가장 활발한 활동을 펼치고 있는 이순재 씨를 핵심 인물로 잡고 그가 아끼는 후배 연기자나 친한 동료 연기자 중심으로 출연진을 구성한다는 계획을 세웠다. 처음 이순재 씨에게 꽃보다 할배 출연 의사를 타진했을 때 그는재미는 있을 것 같은데 스케줄이 너무 많아서 난 힘들고 아마 다른 사람들도 그럴 것이라며 확답을 피했다고 한다. 이후 제작진은 이순재 씨와 각별한 사이인 신구 씨를 찾아갔다. 열심히 프로그램 기획 의도에 대해 설명하는 나영석 PD에게 신구 씨는그러니까 됐고, 요는 순재 형이랑 같이 여행을 다녀오라는 거 아니냐우리 같은 사람한테 그런 추억을 만들어 준다는데 어떻게 마다하겠느냐며 흔쾌히 제안을 수락했다고 한다. 이순재 씨도 친한 동생인 신구 씨가 출연하기로 했다는 소식에 스케줄을 적극적으로 조정하며 출연 결정을 내렸고, 이후 백일섭 씨도 합류했다. 박근형 씨의 경우 드라마 촬영 등으로 일정 조정이 어려워 막판까지 출연 여부가 불투명했다. 그러나 박 씨 스스로언제 이런 기회가 다시 오겠냐며 출연 의지를 강력하게 불태워 뒤늦게 합류를 결정했다. 출연진의 평균 연령만 76세에 달하는꽃할배 4인방’, 이른바 ‘H4’의 탄생이었다. 20∼30대 아이돌이나 스타 연예인이 판치는 여타 예능과는 전혀 다른 출발이었다.

 

 

철저한 사전 준비와 빠른 의사결정, 신속한 커뮤니케이션 통해 돌발상황 대처

 

꽃보다 할배가 다른 여행 버라이어티와 구별되는 또 다른 특징은 프로그램의 세부 일정을 제작진이 아닌 출연진 스스로 짜도록 했다는 점이다. 제작진이 출연진에게 정해준 규칙은프랑스 파리에서 시작해 스위스 취리히에서 끝내라는 것 하나뿐이었다. 말도 잘 통하지 않는 타국에서의 여행 일정 일체를 출연자들끼리 이야기하면서 스스로 결정하도록 했다. 친구들끼리 떠나는 자유로운 배낭여행이라는 프로그램 취지를 최대한 살리기 위해서였다.

 

문제는 이렇게 제작진이 아닌 출연진 주도로 이뤄지는 여행 방식이 프로그램을 제작하는 입장에선 상당한 부담으로 작용한다는 점이다. 제작진이 미리 짜 놓은 틀 안에서 배우들이 움직이는 게 아니라 배우들이 짜 놓은 판에 맞춰 제작진이 따라 가야 하기 때문이다. 하루 이틀도 아니고 무려 열흘 동안 출연진의 결정에 따라 PD, 작가, VJ 등 전체 스태프가 이동해야 하는 구조였다. 나영석 PD의 말처럼돌발상황이 벌어지지 않는다면 오히려 그게 더 이상한 상황을 스스로 만든 셈이다. 가령 파리에서 근교로 여행을 간다고 하더라도 베르사유궁전, 퐁텐블로성, 지베르니 등 이름 있는 여행지만 예닐곱 군데가 넘는다. 프랑스에서 스위스로 국경을 넘어가는 방법도 한두 가지가 아니다. 예를 들어, 유명 관광명소 중 하나인 노트르담대성당 관람 여부에 따라 파리(프랑스)에서 베른(스위스)으로 직접 넘어갈 수도 있고 성당이 있는 스트라스부르(프랑스)를 거쳐 스위스로 입국할 수도 있다. 이 모든 변수들을 프랑스 현지에 도착해 그때그때 할배들이 내리는 결정에 따라 대처해 나가야 했다.

 

돌발 변수로 인한 위험 부담이 상대적으로 컸던 꽃보다 할배의 효율적 제작을 위해 나영석 PD는 현지 스태프 인원을 최소화했다. 그의 전작인 12일의 경우 한 번 움직일 때 70∼80명에 달하는 대규모 인원이 함께 했지만 꽃보다 할배의 경우엔 수년간 호흡을 맞춰 온 25∼30명의 핵심 인원만 투입했다. 돌발상황이 발생할 때는 신속한 대처와 기민한 대응이 생명인데 인원이 많아질수록 스피드가 떨어질 것이라는 판단에서였다. 나영석 PD리얼 버라이어티 프로그램 제작에서 가장 중요한 건 신속한 의사결정이라며어떤 이슈가 터지면 핵심 스태프 두세 명이 모여 5분 안에 결정을 내리고 그 즉시 팀원들에게 내용을 공유해야 프로그램을 무리 없이 진행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이어조직 규모가 커질수록 정보를 공유하는 데 시간이 걸리고 정보가 전달되는 과정에서 오해를 낳기도 한다돌발 변수가 많을 게 불을 보듯 뻔했기 때문에 힘은 들더라도 손발이 척척 맞는 소규모 인원으로 팀을 꾸리는 편이 적합하다고 판단했다”고 덧붙였다.

 

제작팀은 또한 사전 답사에 만전을 기했다. 첫 배낭여행지인 유럽 여행의 경우 PD, 작가 등 핵심 스태프 8명이 4월 말경 직접 현지에 가서 열흘간 가능한 여행 경로를 시나리오별로 구성한 후 각자 흩어져 답사를 진행했다. 여행지 간 거리는 얼마나 되는지, 이동을 위한 교통편은 무엇이 있는지, 차로 가면 얼마나 걸리고 기차를 타면 얼마나 걸리는지, 지하철 역이 복잡하지는 않은지, 버스 정류장과 실제 여행지 간 거리는 어느 정도인지 등 시시콜콜한 사항까지 모두 체크했다. 현지에서 코디네이터 역할을 해 줄 인력 및 업체에 대한 정보도 꼼꼼하게 모았다. 실제 촬영에 들어가서는 30명이 넘는 대규모 인원이 한꺼번에 이동해야 하는 만큼 기차표 예약을 할 수 없을 경우에 대비한 차량 대여 서비스 업체 정보까지 확보했다.

 

철저한 사전 준비는 실제 꽃할배들이 파리에서 스트라스부르로 이동할 때 빛을 발했다. 할배들은 파리 시내 및 근교 관광을 마친 후 노트르담성당에 들르기로 결정했다. 파리에서 성당이 있는 스트라스부르로 가기 위해선 보통 프랑스 고속철도인 테제베(TGV)를 타고 간다. 차로는 7시간 넘게 걸리는 거리를 2시간30분 정도면 갈 수 있기 때문이다. 일반 열차가 아니라 고속열차인 만큼 기차표 예약은 필수다. 바로 여기서 문제가 터졌다. 실제 스트라스부르로 출발하기 하루 전에 할배들이 최종 일정을 결정한 통에 제작진 중 일부는 표를 구할 수가 없었던 것.

 

제작팀은 기차표가 부족하다는 말을 듣는 순간 곧바로 버스 두 대와 봉고차 한 대를 섭외해 당일 새벽에 떠날 수 있도록 교통편을 확정 지었다. 이런 돌발상황이 벌어질 것에 대비해 미리 연락처를 확보해 둔 덕에 무리 없이 대응할 수 있었다. 스트라스부르행()이 결정된 직후 제작진 중 2명을 그 즉시 스트라스부르로 보낸 건 물론이다. 다른 도시로 이동하는 일정인 만큼 현지 상황을 하루라도 앞서 전달해 줄 연락책을 심어두기 위해서였다. 나영석 PD스트라스부르는 사전답사를 할 때 잠깐 들르긴 했지만 시간상 제약으로 꼼꼼히 탐색하진 못했다출연진과 전체 스태프가 도착하기 전에 스트라스부르에 대한 정보를 조금이라도 더 수집하기 위해 선발대를 보냈다고 설명했다. 이어돌발상황이 발생했을 때 관건은 대처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는 것이라며철저한 사전준비는 그래서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예능’ 촬영을다큐스럽게과도한 끼어들기보다 조용하게 관찰하기

 

“프로그램도 프로그램이지만 이분들을모시고안전하게 여행을 다녀와야겠다는 생각이 컸다는 나영석 PD의 말처럼 꽃보다 할배는 촬영 방식에서도어른 공경모드를 탑재했다. 파리에 도착한 첫날잠은 편하게 자야지. 방에서 카메라 치워!”라는 백일섭 씨의 호통에 제작진이 별다른 대꾸 없이 한발 물러선 게 대표적 예다. 출연진의 모습을 하나라도 더 담기 위해 세면실, 샤워장까지 따라 들어가던 전작(12)의 공격적 촬영 방식과 비교하면 180도 달라진 접근이었다.

 

꽃보다 할배 제작진의 초기 촬영 원칙은 ‘10m 거리에서 표 안 나게 핸디캠으로 찍기였다. 예능 장르가 생소했기 때문인지 H4 출연진은 방송 촬영 초기엔 카메라가 가까이 다가오면 자신들도 모르게 경직된 모습을 보였다고 한다. 카메라가 아무리 가깝게 다가와도 금세 적응을 하는 여느 아이돌 스타나 예능 프로 전문 연예인들과는 사뭇 다른 현상이었던 것. 이를 간파한 제작진은 최대한 자연스러운 할배들의 모습이 나올 수 있도록 마치 다큐멘터리 촬영을 하듯이 접근했다. 예를 들어, 10m 정도 거리를 두고 촬영을 함으로써 출연진이 카메라를 의식하지 않도록 최대한 신경을 썼다. 이렇게 자연스러운 분위기를 연출한 탓에 제작진은 샹젤리제 거리를 걸으며이번 기회가 마지막이라고 생각한다” “죽어가면서도 이런 모양이 잔상으로 남을 것 같다는 노배우들의 대화를 진실되게 담아낼 수 있었다.

 

지상파가 아닌 케이블TV라는 채널 특성도 배우가 아닌 자연인으로서의 할배들의 모습을 여과 없이 표현하는 데 도움이 됐다. 파리에서 에펠탑 관광을 마친 후 개선문까지 걸어가느냐 마느냐를 놓고 멤버들 간 이견이 일었을 때 백일섭 씨가 담배를 꺼내 피우는 장면을 예로 들 수 있다. 상황은 이랬다. 프로그램 1회 방송 때부터직진 순재라는 별명을 얻은맏형이순재 씨는당연히 걸어가야지라는 반응이었지만 다리가 불편해심통을 부리기 일쑤였던 막내 백일섭 씨는 가지 않겠다고 하면서 갈등이 벌어졌다. 이 과정에서 백일섭 씨가난 안 갈 거라는데 (순재 형은) 왜 자꾸 저러는 거냐고 짜증을 내며 담배를 꺼내 피워 물었다. 나영석 PD흡연 장면이긴 하지만 극적인 스토리 안에서는 굉장히 중요한 부분이라서 방송을 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표현 수위에 제약이 많은 공영방송이었다면 이 부분이 편집됐을 가능성도 있다는 설명이다. 나영석 PD공영방송에서는 흡연이나 음주 등의 장면을 방송에서 내보낼 때 어느 선까지 표현할 것인가가 중요한 문제라며그러다 보니 실제 촬영이나 편집을 할 때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스스로 제약을 두는 경우가 생기는 것 같다고 말했다. 하지만 꽃할배들은 고된 여행 일과를 마친 후 밤에 숙소에 와서 술 한 잔씩 걸치는 일이 부지기수였고 고스톱도 즐겨 했다. 일반 성인에게 음주나 흡연, 고스톱이 자연스러운 오락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할배들의 이 같은 행동은 너무나 리얼한 모습이다. 나영석 PD단지 음주나 흡연이라는 이유로 표현에 제약을 가했다면 리얼리티 프로그램의 취지를 100% 살리기 힘들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이서진.

나이, 42. 직업, 배우. 주로 맡아 온 배역, 임금/장군/조직폭력배 두목.

 

그동안 대중에게 무겁고 강인한 이미지로 각인됐던 이서진 씨를 H4짐꾼으로 섭외한 건 꽃보다 할배 제작팀의신의 한 수로 꼽힌다. 사실, 짐꾼 역할을 할 멤버를 추가로 섭외할 계획은 프로그램 원안에는 없었다. 할배들이 떠나는 여행이 기본 콘셉트인 만큼 원래 취지에 맞게 원로 배우들만 가는 게 옳다고 생각했다. 나영석 PD는 그러나박근형 씨를 제외한 나머지 세 분의 출연이 확정됐을 즈음에 생각을 바꿨다고 말했다. 도저히 이분들만 모시고 갔다 와서는 큰일 나겠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첫 번째, 출연진이 겪게 될 육체적 부담이 걱정됐다. 촬영에 앞서 제작팀이 직접 열흘간 유럽에 현지 답사를 다녀와 보니 숙식 해결부터 도시 간 이동까지 모든 걸 스스로 알아서 해야 하는 배낭여행이 30∼40대인 본인들에게도 힘들었던 것. 당연히 70∼80대가 감당하기엔 너무 버겁겠다는 판단이 섰다. 말 그대로 누군가 짐이라도 들어 줄 사람이 있어야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보다 더 중요한 두 번째 이유가 있었다. 바로 할아버지들과 젊은 시청자들의 사이에서 원활한 커뮤니케이션을 도와 줄 연결 고리가 필요하다고 봤다. 나영석 PD출연진과 사전 미팅을 하면 할수록 솔직히 이분들이 왜 이런 이야기를 하고, 왜 그렇게 행동하시는지를 이해하기가 힘들었다고 털어놨다. 노인들은 그들 나름대로의 독특한 커뮤니케이션 방식이 있다. 그 뒤에 숨어 있는 속마음을 잘 모르면 노인들의 행동을 이해하기도 힘들뿐더러 자칫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도 있는 부분이 있다는 것. 나영석 PD출연진의 나이는 많아도 타깃은 젊은 시청자인데 자칫하다간 출연진과 제작진 모두 고생만 하고 정작 시청자와는 소통할 수 없는 프로그램이 될 수도 있겠다는 걱정이 들었다고 말했다. 원로 배우들과 젊은 시청자 사이에서 윤활유 역할을 해 줄 제3의 인물을 찾기 시작한 건 바로 이 때문이었다.

 

제작진은 출연이 확정된 노배우들과 개인적 친분이 있어서 그들의 마음을 간접적으로나마 헤아릴 수 있으면서 동시에 어른들을 잘 공경하는 연기자가 누구인지를 물색했다. 그 과정에서 이순재 씨 매니저로부터 이서진 씨를 추천받았다. 제작진은 곧바로 이서진 씨 소속사에 연락했고이서진 씨에게는 아이돌 후배 가수들과 유럽으로 여행을 가는 프로그램이라고 말하자며 농담처럼 던졌던 안()을 실제로 추진했다.

 

소속사와 제작진에게속아서출연하게 된 이서진 씨는 제작진의 기대에 120% 부응하며 프로그램의 인기를 한층 끌어올리는 데 큰 공헌을 했다. 실제로 이서진 씨는 프로그램 중간중간 직간접적으로 할배들의이상한행동에 대한 이유를 설명해줬다. 예를 들어, H4 중 막내인 백일섭 씨가 여행 첫날 파리 지하철 역에서 부인이 정성껏 싸 준 장조림통을 발로 걷어차 버리는 장면을 꼽을 수 있다. 시청자들에게 큰 웃음을 주긴 했지만 한편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이기도 했다. ‘불편한 다리 때문에 무거운 여행 가방이 부담스러웠던 건 알겠지만 그 정도로 힘들었으면 다른 사람에게 부탁하면 되지 않나라는 생각을 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이서진 씨는 그러나다들 왕년에는 워낙 대단한 인기를 누리셨던 분들이라 자존심이 세시다” “본인 짐은 반드시 본인이 들어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계신 것 같다등의 말을 통해 백일섭 씨의 돌발행동에 대한해설가역할을 자청했다.

자칫 어렵고 멀게만 느껴질 수 있는 노인들과의 소통도 지혜롭게 풀어나갔다. 프랑스 스트라스부르의 한 호텔에서 할배들의 짐을 대신 옮겨놓을 때 특히 그랬다. 차량에 실려 있던 할배들의 가방을 호텔 방 앞까지 본인이 직접 들고 올라와서는(이서진)가 들고 온 걸 알면 (할배들이) 미안해 하실 테니 네(VJ)가 들고 들어가라던 그의 모습은 존경해 마지 않는 선배 연기자들의 자존심을 해치지 않으면서도 어르신에 대한 공경심을 잃지 않는 자세를 보여줬다. 또한 이서진 씨는 윗사람들을 모실 때 아랫사람으로서 겪게 되는 긴장과 부담감을 여과 없이 보여줌으로써 시청자들로부터폭풍 공감을 이끌어냈다. 출연진의 건강 상태를 우려해 제작진과 함께 동행했던 의사가 이서진 씨의 혈압을 점검한 결과 오히려 할배들의 상태보다도 높게 나온 것. 속아서 끌려오다시피 한 타국 여행길에서 어른들을 모시고 다닌다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온 몸으로 보여 준 그의 모습에 시청자들은 크게 공감했고 40대 짐꾼에게 감정이입을 하며 프로그램에 한층 몰입할 수 있었다.

 

 

 

제작 및 마케팅 부서 간 적극적 협력 통한 사전 마케팅

 

꽃보다 할배의 성공 뒤에는 프로그램 시작 전부터입소문을 내기 위해 힘쓴 마케팅팀의 숨은 노력도 컸다. CJ E&M에서 꽃보다 할배 마케팅을 담당한 tvN 본부의 이승준 애널리스트는할배들이 떠나는 배낭여행이라는 콘셉트에 대해재미있을 것이라는 의견도 많았지만할아버지들이 나오는 콘텐츠를 과연 tvN의 타깃 연령층인 20∼49세들이 볼까라는 우려도 있었던 게 사실이라며방송이 시작되기 전부터 낯설고 멀게만 느껴지는 노배우들을 친근한할배’로 만들어주는 사전 작업이 필요하다고 봤다고 말했다.

 

이를 위해 tvN 본부 마케팅팀은 꽃보다 할배 프로그램의 준비 단계 때부터 페이스북 등 소셜미디어를 적극 활용해 젊은 대중들과의 소통에 나섰다. 우선, 5월 말 경 나영석 PD H4 출연진 중 신구 씨를 만나 프로그램의 시작을 알리는 메시지를 소개하며 페이스북을 개설했다. 이후 꽃보다 할배 프로그램 진행 상황과 관련한 일들을 빠짐없이 페이스북에 올리며 젊은이들과 소통에 나섰다. 홈페이지도 70∼80대 노인들을 위한 가상의 배낭여행 전문회사할배 투어를 소개하는 콘셉트의 티저(teaser) 페이지 형태로 오픈했다. 실제 프로그램 촬영에 앞서 시청자들의 호기심을 최대한 자극하기 위해서였다.

 

티저 동영상을 통한 바이럴 마케팅(virul marketing)에도 주력했다. 제작진이 할배들을 모시고 프랑스로 떠난 62일 공항 출국 직후, 꽃보다 할배 공식 페이스북에일섭 다방티저 동영상을 공개한 것. 출국 전 꽃할배 멤버들과의 사전 미팅 당시 제작팀이 미리 촬영해 놓았던 영상 중 일부로 H4 중 가장 막내라는 이유 때문에 백일섭 씨가 형님들에게 대령할 커피를 손수 타는처량한(?)’ 장면이 담겨 있었다. 나이 70에 커피를 타다 바치는 모습은 보는 이들로부터 큰 웃음을 자아냈고 자연스레 입소문이 퍼져갔다. 여기에 꽃할배들의 공식짐꾼으로 이서진 씨가 합류했다는 뉴스까지 전해지면서 프로그램에 대한 관심은 급격하게 높아졌다. 이후로도 마케팅팀은 사전 미팅 당시 할배들과 나영석 PD가 나누는 대화를 몰래 카메라 형식으로 담아 편집한 짧은 티저 동영상들을 순차적으로 페이스북에 올리며 프로그램에 대한 기대감을 계속해서 높여갔다.

 

첫 방송일(75)보다 일주일 앞서 진행한 제작발표회(628) 역시 남달랐다. 우선, 촌스러운 할아버지들이 아니라 꽃할배 이름에 어울리는 세련미를 보여주기 위해 출연진 전원에게 턱시도를 입혔다. 발표회 현장에는 레드 카펫을 깔아 놓고 엄청난 양의 꽃으로 주변을 장식했다. 제작발표회 진행 방식도 차별화했다. 언론사와 출연진/제작진 간 질의응답(Q&A) 형식이 아니라 토크쇼 형식을 도입, 여행지에서 제작팀이 찍어 온 사진들을 공개하며 출연진과 제작진이 자연스럽게 현지 에피소드를 전달하도록 했다. 특히, 시청자들과의 실시간 소통을 위해 제작발표회 현장도 네이버로 생중계했다.

 

꽃보다 할배 방송 4일 전인 71일에는 tvN의 또 다른 예능 프로그램인현장토크쇼 TAXI’를 통해 프로그램 홍보에 나섰다. 628일 제작발표회를 위해 턱시도를 차려 입은 꽃할배 4인방을 게스트로 초청해 여행과 관련된 에피소드를 미리 소개한 것. 이승준 애널리스트는통상 현장토크쇼 TAXI는 최소한 1주일 정도 여유를 잡고 제작하지만 꽃보다 할배의 사전 홍보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 제작발표회 모습을 담고 싶었다촬영 후 불과 3일 만에 방송을 내보내야 하는 빠듯한 일정이었음에도 불구하고 TAXI 제작진이 적극적으로 협조해 줘 (꽃보다 할배) 홍보 효과를 높일 수 있었다고 말했다. 이처럼 다각도로 사전 마케팅에 힘쓴 덕택에 꽃보다 할배는 첫 방송 시청률부터 4%가 넘으며 초반부터 큰 호응을 이끌어내는 데 성공했다.

 

 

 

 

성공 요인

 

혁신 기업의 대명사인 IDEO의 파트너인 톰 켈리는 그의 저서 <이노베이터의 10가지 얼굴>에서 혁신의 유형을 인간의 얼굴에 빗대어 크게 10가지로 구분했다. 꽃보다 할배는 이 가운데 4가지 혁신의 면모를 보인다. 바로 1) 위험을 두려워하지 않는 도전적인 실험자(Experimenter)이자 2) 이질적인 아이디어를 적극적으로 결합해 나가는 타화수분자(Cross-pollinator)이며 3) 팀워크의 가치를 소중히 여기는 협력자(Collaborator)인 동시에 4) 진실된 이야기로 감동을 선사하는 스토리텔러(Storyteller)의 얼굴이다.

 

① 실험자(Experimenter): 치밀한 계산하에 적극적으로 돌발상황에 대처

 

꽃보다 할배는 프로그램의 주도권이 제작진이 아닌 출연진에게 있었다는 점에서 일종의모험이었다. 이는 제작진이 미리 정해놓은 틀이 아니라 출연진이 직접 여행 일정을 정하게 함으로써 프로그램이 어디로 튈지 모르는 상황을 제작진 스스로 만들어가자는 것이었다. 프로그램의 리얼리티를 극대화하기 위한 선택이었지만 그만큼 위험 부담이 컸다.

 

제작진은 그러나 다가올 위험이 무서워 리얼리티를 포기하기보다는 철저한 사전 준비를 통해 돌발상황에 대한 대처 능력을 끌어올리기로 했다. 파리취리히 간 여행 경로에 대한 경우의 수를 빠짐없이 고려한 후 실제 촬영에 앞서 꼼꼼하게 현지 답사에 나섰다. 향후 발생할 수 있는 돌발 사태(: 기차표 부족)에 즉각적으로 대처할 수 있도록 사전 계획도 철저히 세웠다. 그때그때 일이 터질 때마다 신속하게 의사결정을 하고 정보를 공유할 수 있도록 제작 인원도 최소화했다.

 

이처럼 만반의 준비를 한 덕택에 제작진은 여행 기간 중 위기 상황이 발생했을 때마다 신속하게 대처할 수 있었고 리얼리티를 극대화한 프로그램을 만들어낼 수 있었다. 치밀한 계산하에 이뤄진 위험 감수 행위(calculated risk-taking)가 얼마나 혁신적인 결과를 이끌어낼 수 있는지를 보여준 모범 사례라 할 수 있다.

 

② 타화수분자(Cross-pollinator): 예상을 깨는 이질적 요소 간 조합 통해 참신한 재미 선사

 

타화수분(他花受粉)이란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아이디어와 콘셉트를 함께 엮어 새롭고 더 좋은 것을 만들어내는 행위다. 톰 켈리는 “IDEO의 역사는 타화수분의 역사라고 말한다. 그만큼 혁신을 일궈내기 위해선 이종교배가 중요하다는 이야기다.

 

꽃보다 할배도 타화수분의 공식을 따라 기존 예능의 식상함을 깨뜨렸다. 고리타분할 것 같은 노년층을 아이돌 스타들이 판치는 예능 프로그램으로 끌어들였다. 편안하게 효도관광을 받아도 모자랄 이들에게 팔팔한 20대도 고생스러운 배낭여행을 떠나도록 했다. 근엄한 왕이나 장군 역할을 주로 맡아 온 40대 배우 이서진을길이나 찾고, 표나 끊고, 식당이나 수소문하는 짐꾼으로 전락시켰다. 이처럼 전혀 예상치 못한 조합들을 한데 엮어 놓은 결과 꽃보다 할배는세상에서 가장 어른스러운 예능이라는 차별화된 콘텐츠로 자리매김할 수 있었다.

 

③ 협력자(Collaborator): 제작 및 마케팅 부서 간 긴밀한 협력하에 사전 마케팅 집중

 

나영석 PD는 자타가 공인하는스타’ PD. 12일에서 보여 준 탁월한 기획력과 편집능력은 이미 정평이 나 있다. 번거롭게사전 마케팅같은 데 신경 쓰지 않아도 프로그램만 잘만들면된다고 생각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나영석 PD는 그런 생각을 버렸다. 처음 프로그램을 기획하는 단계에서부터 마케팅팀과 콘셉트를 공유했고 사전 마케팅 활동에도 적극 협조했다. 타깃 시청자층을 공략하기 위해 사전 준비 단계에서 오픈한 페이스북의 첫 메시지를 나영석 PD가 던졌다는 게 대표적 예다.

 

이후에도 꽃보다 할배 제작팀은 촬영 준비로 빠듯한 일정 중에서도일섭 다방같은 티저 동영상을 편집해 마케팅팀과 공유했다. 사실 이런 동영상은 마케팅팀에서 아무리 요구한다 한들 제작팀에서 만들어주지 않으면 어떻게 할 도리가 없는 부분이다. 제품(프로그램)은 잘 만드는 것도 중요하지만 잘 포장해 홍보하는 것도 중요하다는 점을 잘 알고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첫 방송을 4일 앞둔 시점에서 현장토크쇼 TAXI 프로그램에 꽃보다 할배 출연진을 소개해 막판 홍보에 힘을 더해준 것도 눈여겨볼 만한 협력 사례다. 특히 TAXI 제작진은 꽃보다 할배 제작발표회 현장 모습까지 방송에 내보내기 위해 빠듯한 제작 일정을 감수하고도 흔쾌히 촬영에 나섰다. 이처럼 tvN 각 프로그램의 제작부서 간, 또 마케팅팀과의 끈끈한 팀워크에 힘입어 꽃보다 할배는 방송 시작 전부터 많은 관심을 이끌어낼 수 있었다.

 

④ 스토리텔러(Storyteller): 출연진 구성부터 촬영 방식에 이르기까지 진정성에 집중

 

예능에선 보기 드물게 진정성 넘치는 이야기를 풀어냈다는 점은 꽃보다 할배만의 강점이다. 우선 출연진을 섭외하는 과정에서부터 남달랐다. 대개 아이돌 스타들이 많이 등장하는 다른 예능 프로그램의 경우, 프로그램을 통해 처음으로 안면을 트는 경우도 허다하다. 지극히 계산적인 목적에서 각자의 필요에 의해 출연을 결정하기 때문에 연예인끼리의 사적 친분은 결정적 고려 사항이 아니다. 그러나 꽃보다 할배 제작진은 출연진 간의 개인적 인간관계에 집중했다. , 단순히 직업적 필요에 의해 멤버를 구성하려 한 게 아니라 진정한 친구들 중심으로 섭외에 나섰다. 그냥 노인들이 아니라 수십 년간 알아온 친구들끼리 즐거운 여행을 떠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이런 면에서 이순재 씨를 구심점으로 삼아 그가 수십 년간 쌓아 온 개인적인 관계망(personal relationship network)에 집중한 제작진의 전략은 주목할 만하다. 평생 드라마, 영화 등을 통해 정통 연기만을 고집해 온 노()배우들에게 사실 예능은 안 해도 그만인 장르였다. 그런데도 이들은 적극적으로 스케줄을 조정해 가며 참여 의지를 밝혀 왔다. 오랜 시간 같은 길을 걸어 온절친끼리의 조합을 꾀하지 않았다면 쉽사리 얻어 내기 힘든 결과였을 게 분명하다.

 

H4는 오랜 세월 연기자의 길을 함께 걸으며 우정을 쌓아 온 끈끈한 선후배이자 막역한 동료 사이였다. 그 덕택에 이 할배 연예인들은 첫 방송부터직진 순재’ ‘미소천사 구야형’ ‘로맨틱 근형’ ‘심통 일섭등 실제 자신들의 성격이 그대로 묻어나는 캐릭터를 드러내며 그들만의 진솔한 이야기를 만들어갈 수 있었다. 여행 첫날부터 지하철 역에서 장조림통을 걷어차는 거침없는 행동이 나올 수 있었던 건, 나를 이해하는 친구들과의 여행길이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고 봐야 한다.

 

자연인으로서의 모습을 가감 없이 드러낸 할배들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아 낸 제작 방식도 돋보인다. ‘복불복게임 같은 작위적 미션은 애당초 존재하지 않았다. 대신 배낭여행이라는 취지에 걸맞게 출연진 스스로 제한된 예산 안에서 자유롭게 여행 계획을 짜 가면서 자연스레 추억을 쌓아가도록 했다. “다큐멘터리를 찍는다는 기분으로 촬영에 임했다고 한 제작진의 방침은 적중했고, 그 결과 진정한 리얼리티, 감동을 주는 예능 프로그램을 만들어 낼 수 있었다.

 

이방실 기자 smile@donga.com

 

  • 이방실 이방실 | - (현) 동아일보 미래전략연구소 기자 (MBA/공학박사)
    - 전 올리버와이만 컨설턴트 (어소시에이트)
    - 전 한국경제신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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