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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성’의 원천을 찾아서: 최태지 국립발레단장

“나는 완벽주의자, 적당한 공연은 싫다. 당장 세계 최고를 노려야 창조가 가능하다”

신동엽 | 143호 (2013년 12월 Issue 2)

 

 

 

편집자주

모두가창조를 말하는 시대지만 정작 정확한 개념 정의도, 진정한 의미파악도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습니다. ‘창조성에 대해 10여 년 전부터 연구해 온 신동엽 연세대 교수가 여러 학자들과 함께 진행한 각종 인터뷰와 연구결과 등을 토대로 ‘21세기 시대정신, ‘창조성의 원천을 찾아서를 연재합니다.

 

 

2010 10, ·러 수교 20주년을 기념하기 위한 국립발레단의라이몬다공연이 예술의 전당 무대에 올랐다. 볼쇼이발레단의 살아 있는 전설, 안무가 유리 그리가로비치의스파르타쿠스’ ‘백조의 호수’ ‘호두까기인형’ ‘로미오와 줄리엣에 이어라이몬다를 공연함으로써 국립발레단은 러시아 발레의 5대 레퍼토리를 완성했다. 이 공연은 발레 팬들이 한국발레의 놀라운 발전을 직접 느낄 수 있는 기회였을 뿐 아니라 볼쇼이발레단과의 협연을 통해 한국 발레의 새로운 지평을 연 중요한 사건이었다. 특히라이몬다는 무용수의 역량에 자신 없는 발레단은 올릴 수 없는 작품으로 정평이 나있다. 주역을 누가 맡는가가 전체 극의 성패를 좌우할 정도로라이몬다는 여주인공의 절대적 기량에 의존하고 있다. ‘라이몬다라는 새로운 레퍼토리를 성공적으로 극장에 올릴 수 있었던 국립발레단의 역량, 공연장을 가득 채운 관객들, 러시아 발레의 정상인 볼쇼이 발레의 주역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는 한국 발레의 발전은 과연 어디로부터 생겨난 것일까? 공연계 관계자들은 한국 발레계의 괄목할 만한 성장을 이끈 인물로 주저 없이 최태지 국립발레단장을 꼽는다.

 

창조적 예술을 만들어내는데도 리더십이 필요한가? 만일 리더십이 필요하다면 창조적 리더가 수행해야 할 가장 중요한 역할은 무엇일까? 창조성이나 예술은 기본적으로 타고난 재능을 가진 소수 천재들의 개인적인 역량과 열정이 핵심이지 리더십은 크게 영향을 미칠 여지가 없는 분야 아닐까? 불과 10여 년만에 세계 발레계의 변방에서 단숨에 세계 최정상급으로 숨가쁘게 성장한 국립발레단과 한국 발레의 스토리를 들으면 얘기가 달라진다. 국립발레단은 현재 공연의 질적 수준, 무용수들의 기량, 레퍼토리의 다양성 등 모든 면에서 세계 최고 수준이라는 데 논란의 여지가 없을 정도다. 지난 10여 년간의 비약적 발전은 최태지 국립발레단장 없이는 상상도 할 수 없다는 게 전문가들의 중론이다. 지난 25년간 프리마1 발레리나로, 국립발레단장2 으로 한국 발레계의 중심에 있어왔던 인물인 최태지 국립발레단장을 만나 예술에서 창조적 혁신의 원천에 대해 들어봤다.

 

불만족이 창조를 낳는다!

 

 

개인이나 조직, 국가를 막론하고 비전과 목표를 세우고 또 그 성과를 평가할 때 기준이 되는 나름대로의 잣대, 즉 눈높이를 가지고 있다. 스탠더드, 눈높이, 잣대 등으로 불리는 목표설정과 성과평가의 기준을 학술용어로는 열망수준(aspiration level)이라고 부른다. 열망수준은 어떤 목표나 성과에 대해 만족-불만족 여부를 구분하는 기준이다. 따라서 열망수준이 매우 높으면 대다수가 만족할 만한 높은 성과에도 불만족을 느끼게 되며, 반대로 열망수준이 낮으면 웬만하면 다 만족하게 된다. IMF 관리체제 이후 우리나라에 급속히 퍼진 화두인글로벌 스탠더드는 일반적으로 생각하듯 팀제, 성과주의 연봉제, 유연 고용제도 등 구체적 제도의 채택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조직경영의 성과와 프로세스 모두에서 글로벌 최고 수준을 지향하자는 뜻이다.

 

그렇다면 어느 정도의 열망수준이 바람직할까? 크게 보면 자기 실력에 부합하는 열망수준이 바람직하다는 주장과 열망수준은 높을수록 좋다는 두 가지의 상반된 입장이 있는 것 같다. 물론 눈높이가 낮을수록 좋다는 의견은 없으나 도전적이기는 하지만 과도하게 높지는 않은 적정 수준의 열망이 바람직하다는 입장이 절대적 다수인 것 같다. 이런 입장의 논리는 자기 실력에 비해 과도하게 높은 눈높이는 과욕(hubris)과 무리수(overshooting)를 불러일으켜 결과적으로 실패의 덫(failure trap)에서 헤어나지 못하게 만들 위험이 높다는 것이다. 경영 컨설턴트의 대부격인 피터 드러커(Peter Drucker) 등이 주창했고 경영현장에서도 자주 활용되는 MBO(Management by Objective)의 핵심 원칙 또한어렵지만 달성 가능한(difficult but achievable)’ 적정 난이도 수준의 목표를 수립하는 것이다.

 

이와 반대로 소수 의견이기는 하지만 열망수준은 높으면 높을수록 좋다는 전혀 다른 입장도 존재한다. 이런 주장은 대부분 창조적 혁신을 강조하는 사람들에 의해 제기됐다. 창조적 혁신은 기존 방식에 대한 문제의식과 불만족을 가지는 데서 시작되기 때문이다. 스티브 잡스의 유명한 경구항상 갈망하라!(Stay Hungry!)”는 열망수준을 극단적으로 높여서 결코 현재에 만족하지 말라는 뜻으로 해석하는 게 정확할 것이다. 이런 주장은 최근 우리나라에서 유행하는 힐링 관련 책이나 강좌에서 흔히 접하는현재에 만족하는 삶이 행복하다는 일반적 메시지와는 정반대 입장이다. 물론 만족이 행복을 가져다 줄 수는 있겠지만 결코 창조적 혁신을 낳을 수는 없다. 이런 의미에서 필자는 혁신에 대해 강의할 때 항상불만족이 혁신을 낳는다! 만족하면 더 이상의 혁신은 없다!”고 강조한다.

 

스티브 잡스가 충고하듯이 현실에 만족하지 않으려면 눈높이, 즉 열망수준을 자기의 현 상황과 상관없이 항상 극단적으로 높이 설정해야 한다. 대부분 사람들이 볼 때는 현실적으로 달성 불가능하며 거의 과대망상 수준인 극단적인 눈높이에서 출발해 끊임없이 창조적 혁신을 추구하는 대표적 집단이 바로 예술가들이다.예술의 본질은 기존 작품의 모방이 아닌 끊임없는 창조적 혁신이기 때문이다. 창조적이기 위해서는 기존에 그 누구도 선보이지 않은 작품을 최초로 시도하는 것이 필요조건이다. 따라서 현재 최첨단을 달리고 있는 선두의 눈높이를 넘어서는 노력이 필요하고 이를 위해서는 극단적으로 높은 눈높이를 가져야 한다. 최고의 거장 중 하나인 미켈란젤로는진짜 위험한 것은 높은 목표에 도전했다가 실패하는 것이 아니라 낮은 목표의 달성에 계속 성공하는 것이라고 주장하며 극단적으로 높은 눈높이로 창조적 혁신을 계속할 것을 주문했다.

 

우리나라 문화예술계에서 세계 최고의 눈높이를 발판으로 단숨에 세계적 수준의 예술을 만들어낸 대표적 인물이 바로 최태지 국립발레단장이다. 최태지가 세계 발레계의 변방이던 한국 발레를 단숨에 세계 정상급으로 성장시킨 원동력은 점진적으로만 가능한 자생적 발전을 기다리지 않고 곧장 세계 발레계의 최첨단, 최정상의 창조적 리더들과 직접 교류한 것이다. 그전까지 그 어떤 발레 지도자도 엄두를 내지 못했던 당대 세계 최고 발레단 및 안무가들과의 적극적 교류는 한국 발레의 예술적 수준을 단 10년 만에 그들과 대등하게 협업할 수 있는 단계로까지 발전시켰다. 또 최태지는 소수 전문가와 애호가들만의 예술이던 발레를 대중화시키기 위해 모든 금기를 깨고해설이 있는 발레와 같은 현장과의 소통도 적극적으로 시도했다. 이제 한국 발레는 세계적 예술성을 자랑하면서 동시에 모든 공연이 매진될 정도로 대중들에게 사랑받는 장르가 됐다.

 

최태지는 일본 교토 출신으로 일본과 미국, 프랑스에서 발레를 공부했고 1983세헤라자데공연의 객원무용수로 한국 국립발레단과 첫 인연을 맺었다. 1987년 국립발레단 프리마 발레리나로 특별 채용되며 고국 무대에서 본격적 활동을 시작했다. 1996년부터 2001년까지 국립발레단 제3대 예술감독을 지냈고, 2004년부터 2007년까지 정동극장의 극장장을 맡았으며, 2008년부터 다시 국립발레단 대표 및 예술감독으로 일하고 있다. 우리나라 발레가 세계적 수준으로 발돋움하기 시작한 건 1990년대 중·후반이다. 그 중심에 국립발레단이 있었다. 1997년에는 당시 새로 취임한 최태지 단장의 리더십하에 이집트와 이스라엘에서 최초로 해외 공연을 했으며해설이 있는 발레프로그램을 신설해 발레의 대중화를 도모했다. 또한 라이선스 개념을 국내 발레계에 정착시켰다. 선진 예술계에서는 공식적으로 작품의 라이선스를 지급하고 작품을 무대에 올리는 관행이 당연시되고 있었지만 국내 발레계에서는 제도에 대한 지식이 전무한 관계로 해외 단체들의 공연을 필름이나 실황 등을 통해 본 다음 적당히 흉내내 마음대로 무대에 올리곤 했다. 2000년대에 들어서며 국립발레단은 그런 관행을 과감하게 탈피하고 공식적으로 원 안무가와 제작자에게 정당한 라이선스 대금을 지급하고 원작 그대로의 정밀한 안무, 무대, 의상 등을 들여오고 실제 안무가로부터 지도를 받으며 본격적인 공연을 하기 시작했다. ‘레퍼토리의 개념이 처음으로 도입된 것이다. 그 결과 공연의 질적 수준이 그 이전과는 비교할 수도 없을 만큼 발전했고 이를 계기로 국립발레단은 세계적 기준에서 봐도 공식 레퍼토리를 많이 가진 단체 중 하나로 급성장하기 시작했다. 2000년대에는 전막3  발레 공연 상연이 더욱 활발해지고 발레단의 레퍼토리가 더욱 확충됐으며 애호가 층이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2010년대에 들어서면서부터는 우리나라 문화예술계의 가장 뜨거운 화두로서 발레 열풍이 거론될 만큼 많은 사랑을 받는 장르로 각광받았다.

 

 

어디든 관객을 찾아가 최고의 작품을 보여주는 것이

예술가의 소명

 

프리마 발레리나, 지도위원, 단장 및 예술감독 등 국립발레단의 다양한 위치에서 춤추고 경영해 온 최태지는 예술가는 관객을 위해 존재한다는 신념을 가지고 발레에 임해왔다. 따라서 자신이 예술감독을 맡고 있는국립발레단의 정체성도 관객을 위해 최고의 작품을 선보인다는공공성에서 찾는다. 1996년부터 2001년까지, 그리고 2008년부터 2013년까지 단장 및 예술감독으로서 국립발레단을 이끌어 온 그녀의 행보는 예술가와 예술 단체가 가져야 할 사명이 무엇인지를 뚜렷이 보여주고 있다. 최태지는 국립 예술 단체로서 국립발레단은 더 많은 국민들이 세계 최고 수준의 발레를 충분히 향유할 수 있는 다양한 기회와 이에 필요한 지식을 제공해주고 무용수와 안무가를 포함한 예술가들에게 최고의 무대를 만들 수 있는 여건을 확보해 줌으로써 발레 분야 예술성과 창조성을 최단 기간 내에 세계 최고 수준으로 높이는 역할을 해야 한다고 믿는다.

 

그녀는 관객들과 괴리돼 자기만의 세계에 빠진, 현학적인 상아탑형 예술을 강하게 비판한다. 예술가는 항상 관객과 소통할 수 있어야 하고, 또 관객들로부터 끊임없이 창조적 영감을 받아야 한다는 게 최태지의 지론이다. 그녀는 무대나 장치, 공연 환경에 대해 까다롭게 굴며 오직 완벽한 조건이 갖춰진 공연장에서 소수의 특권층 관객들을 위해서만 공연하는 일부 순수 예술가들의 관행에서 과감하게 벗어나 관객들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예술가들이 스스로 기꺼이 찾아가야 한다고 믿는다. 그렇다고 공연의 질적 수준을 타협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 생각한다. 따라서 최태지는 관객이 있는 곳은 어디든 찾아가서 최악의 조건에서도 세계 최고 수준의 공연을 보여주는 것이 진정한 예술가의 사회적 소명이라고 강하게 주장한다. 그녀가 1990년대 중반 처음 국립발레단장이 됐을 때부터 시작해 우리나라 발레의 르네상스를 일으키는 기폭제가 됐던해설이 있는 발레찾아가는 발레는 바로 이런 그녀의 예술관을 상징하는 대표적 활동이다.

 

자신의 현실과 상관 없이 세계 최고를 지향해야

창조가 가능하다!

 

최태지는 자신이 국립발레단의 공공성을 고민하고 현실적인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옳다고 믿는 방향으로 전진할 수 있는 힘을 갖고 있다. 이는 그녀의 개인적 배경에서 나온 것으로 보인다. 재일교포였던 그녀는 10세 무렵, 어머니, 언니와 함께 찾아간 발레 연구소에서 선생님의 아름다운 모습에 반해 발레를 시작하게 된다. 1980년까지 일본 가이타니 발레아카데미에서 무용수로 활약하다가 일본 정부 국비장학생으로 선발됐으나 국적이 한국이라는 이유로 취소되면서 정체성 문제를 고민하게 된다. 부모님의 교육열로 일본에서도 좋은 환경에서 훌륭한 교육을 받았고 일본 사람보다도 좋은 대우를 받으며 지내던 최태지에게는 충격적인 일이었다. 그러던 중 당시 한국에는 일본엔 없는 국립발레단이라는 것이 있다는 스승의 소개로 국립발레단과 첫 인연을 맺게 된다.

 

“재일교포로 일본에서 살 때 저희 부모님께서는 차별받으시면서도 흉 잡히지 않을 정도로 열심히 일하셨고 온갖 좋은 교육은 다 시켜주셨어요. 열심히 일해서 돈이 좀 생기니까 일본 사람보다 더 좋은 것을 가르치고 싶어 하셨어요. 그래서 여러 가지 많이 가르치셨죠. 저는 막내라서 항상 부모님 관심을 받고 싶어 하는 편이었어요. 피아노를 배워도 안 되고, 플루트도 안 되고. 그러다가 무용에 관심이 생겼어요. 일본 무용을 언니랑 같이 배웠는데 제가 칭찬을 너무 많이 받았어요. 언니를 이길 수 있는 유일한 분야였죠. 그래서 발레가 너무 좋았어요. 그러던 어느 날 어머니께서 갑자기 발레 연구소가 있다고 가보자고 하셔서 언니랑 따라 갔는데, 갔더니 선생님이 너무 아름다우셨어요. 그래서 발레를 본 적도 없었는데! 선생님 때문에 이거 해야겠다고 생각했죠.

 

그렇게 만난 가이타니 야오코 선생님께서는 정말 좋은 분이셨는데발레만 알면 안 된다. 공부도 해라. 교양이 있어야 한다고 하셨어요. 또 제가 로잔느 콩쿠르도 나가고 싶었지만 그때 선생님께서너무 일찍 콩쿠르 타면 네 인생이 거기서 끝난다고 하셨어요. 발레는 인생을 이야기하는 예술이라고 가르치시는 선생님이셨죠.

 

열심히 무용해서 일자리가 내정이 됐는데 한국 사람이기 때문에 안 된다고 하니까 제가 무너지더라고요. 사실 일본에서 일본 사람보다 좋은 교육받았고 일본 사람보다 대우받고 살았기 때문에 처음으로 정체성이라는 것을 생각하게 된 거죠. 그때 선생님께서한국에 가봐라. 일본에 없는 국립발레단이 있다고 소개해줬어요. 그렇게 왔기 때문에 1987년에 한국에 단원으로 온 이후에는 개인적 일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고, 공공성이 있는 일만 열심히 했어요. 저는 처음 한국에 올 때 정말 무용하고 싶어서 가방 하나만 가지고 국립발레단에 온 사람이었어요. 그런데 그 후 단장 임명도 되고 결혼도 했죠. 국립발레단과 저를 초대해주신 초대 국립발레단장 임성남 선생님이 아니었다면 오늘의 저는 없을 거예요. 그게 너무 고마워서 초심을 잃을 수가 없더라고요. 국가에서 하는 예술 관련 일에 봉사한다는 마음으로 일해 왔어요. 제 개인적으로 이익이 생기는 것도 아니고 때론 외롭게 살지만 나라를 위해서 이 일을 해요. 문화가 살면 국력이 생기는 거죠.”

 

최태지가 예술의 공공적 소명을 강조하면서 동시에 세계 최고 수준을 고집하는 데는 그녀의 독특한 경험이 상당 부분 영향을 미쳤다. 세계적 발레단들이 자주 공연하며 우리보다 월등하게 높은 수준의 발레계가 있는 일본에서 성장하며 발레를 배웠고, 또 세계 발레계의 중심인 프랑스에서 발레를 공부했다. 따라서 그녀의 눈높이가 국내 발레계가 아니라 항상 세계로 향해 있는 것은 당연하다고 볼 수 있다.

 

재일교포로서 정체성을 고민하던 차에 한국의 국립발레단에서 수석무용수로 춤을 출 수 있는 기회를 얻었기에 최태지에게국립발레단이 갖는 의미는 남달랐다. 뿐만 아니라 일본에서 자라고 프랑스에서 공부해 국내에 기반이 없었기 때문에 학연으로 모든 무용수와 학계, 평단이 얽히고설킨 국내 발레계에서 비교적 운신의 폭이 넓었던 점은 최태지가 자신의 비전을 현실화하는 데 오히려 도움이 됐는지도 모른다. 재일교포라는 그녀의 배경은 약점이 되기보다는 오히려 한국 발레를 단숨에 세계 수준으로 성장시키는 데 도움이 됐다.

 

‘해설이 있는 발레’,

관객과 자주 만날수록 창조의 가능성도 높아진다

 

일반적으로훌륭한 예술을 생각할 때 우리는 예술가의 천부적 재능, 극적인 성공, 스타로 완성되는 스토리를 떠올린다. 그러나 모든 예술적 성공이 극적일 수도 없고 그럴 필요도 없다. 최태지는 창조적 예술의 생산에 기반이 되는 시스템을 구축해 발레 예술의 창조와 소비 영역을 동시에 발전시키겠다는 장기적인 비전을 품고 있다. 물론 시스템이 만들어진다고 창조적 예술이 자동적으로 만들어지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시스템의 뒷받침이 없는 창조적 예술의 지속적 생산은 불가능하다. 특히 새로운 예술적 시도, 창조적 파괴는 기존 시스템을 끊임없이 넘어서려는 시도에서 만들어진다. 시스템의 구축과 확장은 이를 기반으로 한 새로운 예술의 탄생과 생존 가능성을 높인다.최태지의 비전이 설득력 있는 이유는 그 구호가옳은 방향을 가리키고 있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녀의 비전은 본인이 현장에서 몸소 경험한 문제점들을 해결하기 위한 구체적인 실천 방안과 잘 연계돼 있고 이를 현실화해 시스템을 구축하고 있기 때문에 빛을 발한다.

 

최태지가 국립발레단 제3대 예술감독으로 일하던 당시 새롭게 도입한 혁신적 프로그램인해설이 있는 발레는 어렵고 생소하게만 느껴지던 서양 예술인 발레에 친절한 해설을 곁들여 보여줌으로써 발레의 대중화를 이끌었다고 평가되고 있지만 사실 이 프로그램은 현장 경험에서 우러나온 최태지의 고민에서 시작됐다. 공연 예술의 발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공연하는 기회를 많이 가지는 것이다. 공연을 기획하고, 준비하고, 무대에 서는 경험을 통해 새로운 창조적 시도가 생겨난다. 최태지는 국립발레단이라는 조직을 이끄는 리더로서 후배 무용수들을 위해 해야 할 중요한 일 중 하나가 공연할 기회를 많이 만들어주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프리마 발레리나로 무대에 서던 시절, 공연 기회가 별로 없던 후배들이 자신을 부러워하던 모습을 상기했다. 후배들, 어린 무용수들도 기회만 있으면 충분히 역량을 발휘할 수 있을 것이고, 또 무대 경험을 통해서 기량도 훨씬 좋아질 것이라고 믿었다. 또한 최태지가 처음 단장으로 임명됐던 1996년 무렵은 러시아 유학을 마친 훌륭한 무용수들이 국내 무대에 수혈되던 시기였다. 러시아와 국교 수교가 된 후, 1990년대 초에 세계적 발레교육기관인 볼쇼이 발레학교와 바가노바 발레학교로 유학을 떠났던 김주원과 김지영이 대표적 예다. 최태지는 1997년 김지영을, 1998년 김주원을 수석무용수로 영입했다. 뛰어난 기본기를 갖춘 어린 무용수들이 경험을 쌓으며 자신의 예술 세계를 구축해 갈 수 있도록 디딤돌 역할을 한 것이 바로해설이 있는 발레였다.

 

1997년에해설이 있는 발레를 처음 시도했는데 사실 발레 대중화를 목적으로 만든 것은 아니었어요. 김지영이라고 하는 무용수가 러시아에서 학교를 마치고 18세에 돌아왔어요. 그 친구 어린 시절에 너무 예쁘게 봤는데 성장해서 돌아온 거예요. 그 당시 김지영의 어머님이 돌아가셔서 정신적으로 힘든 상태였는데, 열여덟 처음 들어오던 해에 스무두세 살 선배 언니들이 있으니까 발레단 안에서 눈치도 봐야 했던 거죠. 그래서해설이 있는 발레라는 걸 만들어서 뛰어난 재능을 가진 어린 무용수들을 단숨에 스타로 키우자는 목적에서 만든 거예요.”

 

어린 무용수를 지도하는 최태지 단장

 

당시는 국립발레단이 재단법인화되기 전이어서 국립극장 소극장 무대를 무료로 이용할 수 있었기에 무료 공연을 했다.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반응이 너무 폭발적이어서 공연장 안은 물론이고 로비까지 관객이 들어찼다. 2회 공연 때는 공연장에 들어가지 못한 관객을 위해서 로비에 모니터를 설치해야 할 정도였다. 지금은 공연 향유 저변을 확대한 매우 획기적이고 효과적인 시도였으며 공연계의 다양한 대중화 프로그램의 시초라고 평가받는해설이 있는 발레도 초창기에는 공연계로부터 많은 비판을 받았다. 그렇지만 최태지는 무용수에게는 풍부한 공연 경험을 쌓을 기회를 주고 관객들에게는 발레라는 생소한 장르와 친해질 기회를 제공하는 이 프로그램이 필요하다고 확신했다.발레 공연이 자신들의 전통 문화인 유럽의 경우에는 작품도, 공연장 분위기도, 공연장을 찾는 것 자체도 관객들에게 너무나 자연스럽지만 발레라는 서양 예술의 한 장르가 수입된 지 불과 50여 년밖에 되지 않은 한국에서는 관객들에게 이 장르가 어떤 것이며 얼마나 아름다운지를 알리는 과정이 필요했다.

 

“사실 유럽에서 안무가들이 오면해설이 있는 발레를 두고 이건 무슨 프로그램이냐고 묻는 경우가 많아요. 거기서는 극장에 가는 게 생활화돼 있잖아요. 그렇지만 우리에게는 아직 (발레가 소개된 지) 50년밖에 안 돼서 관객에게 알려야 하는 부분이 있죠. 어떤 사람들은 제가 해설이 있는 발레를 처음 만들 때이건 무슨 슈퍼마켓이냐고 했어요. 그런 비판을 많이 받았어요. ‘클래식 발레의 격은 유지를 하되 대중화하는 방법이다, 작품의 격을 떨어뜨리는 것은 아니다, 믿어달라고 설득해야 했죠. 너무 혼났어요. 국립극장장님한테 너무 혼났어요. 야외 무대 할 때도, 발레를 어떻게 야외에 올리냐고 하셨죠. 그런데 그때 여러 가지 후기를 보면아기를 맡길 수가 없어서 그동안 공연장에 갈 수가 없었고 결혼 생활에 흥미도 없어지고 너무 힘들었는데 (해설이 있는 발레를 야외 공연으로 보는) 그 순간 자기 자신을 봤다는 그런 이야기들 하나하나가 너무 힘이 되는 거예요. 이렇게 (관객과 함께) 호흡하는 게 필요하죠.”

 

‘해설이 있는 발레와 함께 군부대, 장애아동, 다문화가정 등 문화 소외계층을 위한찾아가는 발레공연을 꾸준히 진행해 왔고 2000년에는 아마추어 발레 팬들이 본격적으로 발레를 배울 수 있는 국립발레단 부설 발레아카데미를 운영하기 시작했다. 대중과 함께 호흡하는 프로그램뿐만 아니라 공연 티켓 가격을 대폭 인하한 것 역시 발레 향유 인구를 늘리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티켓 가격을 5단계에서 7단계로 세분화하고 최저 가격 역시 3만 원에서 5000원으로 대폭 인하했다. 혈세로 운영되는 국립발레단은 국민들이 문화 예술을 많이 접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데 일조해야 한다는 최태지의 철학에서 비롯된 결정이었다.

 

대중에게 발레를 소개하고 발레를 접해보지 못한 계층을 직접 찾아가는 활동을 통해서 단원과 관객이 함께 성장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 온 최태지와 국립발레단의 노력은 발레 팬 층의 확대를 가져왔다. 발레가 대중화되기 전, 발레 공연장을 찾는 관객의 90%가 무용 관계자의 가족이거나 지인이었다면 지금은 관객의 99%가 직접 표를 사서 관람하는 일반인들이다. 발레 향유 계층의 양적 성장뿐만 아니라 질적 성장도 괄목할 만하다. 향상된 관객 수준에 발맞춰해설이 있는 발레는 대중들이 친근하게 느낄 만한 작품들을 짤막하게 선보이며 해설을 곁들여주는 형식에서 벗어나 2011년에는코펠리아전막 공연을 올리기도 했다.

 

단원들의 기량 또한 괄목상대할 정도로 좋아졌다. ‘해설이 있는 발레공연 도입 이후로 국립발레단원들은 매달 공연을 하게 됐다. 현재는 정기공연과 해설 발레, 찾아가는 발레 등을 통해 단원들이 연간 110개 정도의 공연을 소화하고 있다. 그 결과 기량이 급속히 향상됐다.

 

“저는 무용수는 공연 현장에서 배워야 하고 현장의 맛을 봐야 한다고 생각해요. 단원들이 관객들 앞에 서면 긴장을 하게 돼 몸이 얇아져요. 살쪘으니 5㎏ 빼라고 한다고 해서 되는 게 아니잖아요. 또 발레 테크닉을 이미 배운 사람에게지금 다리를 올려라, 여기서 웃어라고 지시한다고 해서 되는 게 아니죠. 창조적 연기력 역시도 현장에서 나올 수 있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해설이 있는 발레를 한 건데 그게 발레 대중화를 이끌게 된 거예요. 소위윈윈이었죠.

 

최태지는 단원들이 행복해야 좋은 작품이 나온다고 믿는다. 그러나 최태지가 말하는 예술가의 행복이란 개인적 안위나 쾌락이 아니다. 그녀는 무용수들에게 무대에 설 기회를 많이 제공함으로써 기량을 늘리고 연기력을 쌓을 수 있도록 하는 일은 단원들이 무용수로 살아가는 행복을 가장 강하게 느낄 수 있게 하는 중요한 요소라고 말한다. , 실력을 쌓기 좋은 환경에서 춤추도록 함으로써 단원들을 행복하게 해 주는 동시에 발레단 전체의 실력을 높여 더욱 높은 수준의 창조적 예술을 폭넓은 관객에게 선보임으로써 예술단체의 사회적 역할을 수행할 수 있다. 지난 15년간 관객들이 쉽게 접근하고 이해할 수 있지만 세계 최고 수준의 공연과 프로그램을 선보여 온 국립발레단은 국공립 예술단체로서 무용수, 관객, 발레단, 한국 발레계 전체의 공동 발전을 이끌어 왔다.

 

창조적 예술을 위한 창조적 하부구조를 구축하라

 

미켈란젤로나 다빈치, 모차르트, 니진스키 같은 천재적 개인들이 단기필마로 창조적 예술을 만들어냈을 것이라는 일반적 인식과 달리 창조적 예술은 창조적 하부구조가 갖춰질 때 탄생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현대 사회에서는 공공 부문에서 순수예술 분야에 대한 이런 하부구조를 정책적으로 상당 부분 책임지는 경우가 많다. 문화예술 단체를 국가가 직접 혹은 보조금을 주며 간접 운영하는 주된 이유는 순수 문화 예술이 공공재의 성격을 지니기 때문에 시장 논리에 내몰리면 높은 수준의 예술성을 유지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이 이야기를 뒤집어보면 국가가 관여하는 문화 예술 단체는 그 나라 예술계의 예술성의 수준을 규정하고 발전 방향의 이정표를 제시하는 역할을 해야 한다. 최태지는 예술단체의 수장으로서 발레단 조직의 각종 시스템을 정비해 예술가들이 더 좋은 무대를 선보이는 데 집중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고 매니지먼트 시스템의 모범을 보였다고 할 수 있다. 그 예로 대표적인 무용 공연들을 레퍼토리화하고, 무용수의 처우를 개선했으며, 운영과 홍보 등 기능조직을 개편하고자 하는 시도 등을 들 수 있다.

 

그녀의 혁신적인 시도는 2000년 국립발레단의 재단법인화와 시기적으로 맞아떨어지면서 탄력을 받았다. 순수예술 분야에서지원은 하되 간섭은 하지 않는다는 기조하에통제 위주에서 진흥 위주의 정책을 폈던 김대중 정권은 국립발레단, 합창단, 오페라단 등의 국공립예술단체를 재단법인화하고, 세종문화회관과 예술의 전당 역시 법인화했으며, 국립중앙극장은 책임운영기관으로 지정했다. 국가에 소속된 조직에서 국고 예산을 따와야 하는 재단법인으로의 변화는 제로베이스에서 예산을 짜고 정부기관을 설득하는 등 단체장들에게 어려움을 가져다주기도 했지만자율성의 증대라는 기회로 작용하기도 했다.

 

최태지가 국립발레단을 통해 한국 발레계에 가져 온 중요한 변화 중 하나는 레퍼토리 정립이다. 레퍼토리는 발레단의 성격이나 수준 등을 보여주는 하나의 지표다. 최태지는 라이선스 계약을 통해 작품을 무대에 올리는 관행을 정착시키는 데 성공했다. 2000, 유리 그리가로비치에게 부탁해호두까기인형백조의 호수등 레퍼토리를 처음 정식으로 얻었다. 그로부터 10년 후인 2010년엔라이몬다공연을 통해 유리 그리가로비치의 5대 작품을 모두 올렸다. 고전 발레뿐 아니라 모나코 몬테카를로 발레단의 안무가인 장-크리스토프 마이요의로미오와 줄리엣등 모던 발레 작품까지 정규 레퍼토리화했다. 2011년 처음으로 국내 무대에 올린신데렐라의 경우 프랑스 발레의 감성을 잘 표현해 낸 무대였다.

 

이처럼 국립발레단은 러시아 고전 발레 작품들을 고루 갖추는 동시에 프랑스와 미국 등의 모던 작품도 선보이는 발레단으로 정체성을 구체화해 가고 있다. 뿐만 아니라국립발레단 50년 역사의 숙원사업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창작 발레 작품왕자 호동을 국제 무대에 선보이기에 손색이 없을 만큼 훌륭한 작품으로 다듬어가고 있다.

 

최태지의 또 다른 업적 중 하나는 무용수의 가치를 인정해주는 시스템을 구축하기 위해 노력해왔다는 것이다. 단원 처우 현실화는 공연 기회 확대와 마찬가지로 최태지 본인이 현역에서 춤 추면서 느꼈던 문제점을 개선하기 위한 것이었다. 1990년대까지 국립발레단 무용수의 보상체계는 호봉제였다. 경력이 쌓인 주역무용수보다 대학원 학위를 가진 신참 무용수가 더 많은 호봉을 받았다. 최태지는 2000년 국립발레단이 재단법인이 될 때 호봉제를 연봉제로 수정했다.

 

단원들이 춤추기 좋은 환경을 만들어주기 위한 최태지의 노력은 계속되고 있다. 2008년 다시 국립발레단 단장으로 취임하면서 공연수당 제도를 마련했다.이전까지는 공연 한 편당 수당은 5만원에 불과했고 수석무용수부터 코르 드 발레4 까지 모두 동일한 액수를 지급받았다. 토슈즈 한 켤레도 해결할 수 없는 적은 금액이었다. 최태지는 수당을 대폭 올리고 공연에서 활약도와 무용수의 등급에 따라서 차등 지급하기로 결정했다. 2010년 말 현재 10만 원에서 50만 원까지 공연수당을 지급하고 있다. 2010년에는 토슈즈 예산도 14000만여 원가량 확보했다. 이전까지는 토슈즈 예산이 적어 단원들이 사비로 토슈즈를 사야 했다. 국립발레단 예산은 2008 25억 원 정도였으나 2010년에는 국가보조금 75억 원을 합쳐 총 100억 원이 됐다.

 

최태지는 더 나은 발레단 매니지먼트를 위해 기획력 제고와 분업화를 이루고자 한다. 다양한 예술가들과의 공연을 기획하고 홍보를 다각화하는 공연 기획팀의 능력이 지금보다 훨씬 강화돼야 한다고 주장한다. 또 현재는 예술감독으로서 본인이 모두 수행하는 역할을 쪼개 더 전문적인 지식을 가진 적임자에게 음악감독 등의 직책을 맡겨야 할 것이라고 전망한다.

 

“공연 기획팀에서 임원이나 인턴들이 훨씬 더 다양한 아이디어를 줬으면 좋겠어요. 외부와 교류도 많이 하고 저에게 외부 사람들의 이야기, 그들의 생각이 어떤지를 들려줬으면 해요. 홍보도 트위터 같은 신매체를 활용해서 더 적극적으로 했으면 하고요. 재단법인이기 때문에 75억 원 국고보조금 예산이 있으면 30억 원 정도는 저희 사업으로 벌어야 하거든요. 좋은 아이템으로 개발할 수 있는 것들이 많다고 생각하는데 그걸 구체화하고 알리는 부분이 아직은 부족한 것 같아요. 평가를 해서 인센티브를 주는 방식도 생각하고 있고요. 프로젝트 단위로 태스크포스(task force)를 운영할 생각도 있어요.”

 

 

최태지 단장이 세계적 안무가 유리 그리가로비치(가운데)와 함께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국립발레단이 공연의 양뿐 아니라 질까지 업그레이드 될 수 있었던 건 1996년부터 2001년까지, 그리고 2008년부터 2013년까지 총 2번 단장에 임명되고 2번 유임된 최태지의 단원 중심 매니지먼트의 공이 컸다. 최태지의 발레단 운영은 훌륭한 인재를 영입하는 것만큼 그들을 제대로 대우해 주고 다른 걱정 없이 마음껏 예술적 능력을 갈고 닦아 관객에게 선보일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주는 것 역시 매우 중요하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연봉제 도입, 공연 수당 제도 개편, 토슈즈 예산 확보 등 최태지의 운영체제 혁신 방안들은 2000년 국공립예술단체 재단법인화로 인해 단체의 자율권이 확대된 시대적 조류를 만나 실현될 수 있었다. 국립발레단과 최태지는 무용수들이 최고의 무대를 관객들에게 선보이고 한국 발레계의 예술적 수준을 견인하는 데 매진할 수 있도록 더 나은 창작 환경을 만들기 위해 애쓰고 있다.

 

최고와의 교류를 통해 세계 최고 수준의 눈높이를 갖추라

 

최태지가 짧은 기간 내에 우리나라 발레의 수준을 세계 최고 수준으로 향상시킬 수 있었던데는 과감하게 세계 최고의 발레 예술가들과 교류하며 이들의 최신작들과 시스템을 끊임없이 받아들였던 개방적 태도가 크게 기여했다. 이를 위해 최태지는 발레단 내부의 매니지먼트 시스템을 개혁했을 뿐만 아니라 발레단 밖과의 관계 구축에도 힘써왔다. 특히 발레 선진국들의 대표적 예술가들이나 다른 장르 예술가들과의 교류를 활성화하는 데 주력했다. 외부에 있는 훌륭한 인재 및 단체들과 협력해 작품을 올리는 것이 발레단의 위상을 높일 뿐만 아니라 단기간에 예술적 창조성을 끌어올릴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라고 믿고 있기 때문이다. 그녀는 해외 발레계와의 연결, 국내 타 장르 예술가들과의 협력을 이끌어 냈다.

 

본격적으로 해외 발레계의 인물들과 일하게 된 것은 러시아 볼쇼이 발레단의 전설적 안무가 유리 그리가로비치의 작품들을 라이선스로 들여오면서부터라고 할 수 있다. 2000, 재단법인이 되면서 발레단의 무대 세트 제작, 의상 등을 외국의 단체와 함께 만들 수 있게 됐다. ‘유리 그리가로비치는 세계 발레계의 거물이지만 국내에서는 인지도가 거의 없었다. 정식 라이선스비를 지급해가면서 그의 작품을 세 작품이나 올리고 마이요 등의 안무가들의 작품도 들여오기 시작하자 최태지에 대한 비난이 쏟아지기도 했다.

 

“유리 그리가로비치는 1970년대부터 세계적인 존경을 받던 사람이니까 그분 작품을 올리는 것에 대해 자신이 있었어요. 그래서 제가 고생 끝에 겨우 설득해서 그분을 모셨어요. 그렇게백조의 호수’ ‘호두까기인형’ ‘스파르타쿠스세 작품을 올리고 나니 춤 전문 잡지에최태지, 국고 낭비라고 나더군요. 나이 든 할아버지를 데려와서 국고를 낭비한다면서요. 중견 안무가 중 현재 세계 최고인 마이요와 작업할 때는아무도 모르는 사람을 데려왔다고 하더라고요. 언론에서 비판이 나오니 문화부에서도 혼났죠. 그래도 저는 제 주관대로 밀고 나갔습니다. 끝나고 나서 관객에게 평가받겠다고 했죠. 글 쓴 사람들도 언젠가는 그런 협업이 매우 가치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거라고 생각했어요.”

 

해외의 안무가와 함께 작업하면서 관객들은 세계적 수준의 작품을 접할 수 있게 됐다. 무용수들의 경우 원작자와 직접 연습하면서 작품에 대한 이해도를 높이고 본인 자신의 창조성을 개발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됐다. 특히 김주원은 유리 그리가로비치와의 작업에서 본인의 해석을 안무에 녹여내며 자신만의 예술적 스타일을 보여주기도 했다.

 

최태지는 안무, 무대미술, 의상 팀을 해외에서 데려오는 것에 그치지 않고 해외 무용수들을 초청해 작업하거나 국립발레단 무용수를 해외 무대에 세우는 데에도 적극적이었다. 2010년 볼쇼이발레단의로미오와 줄리엣공연에 김지영, 김주원, 이동훈, 김현웅 등이 초청돼 주역을 맡았고 같은 해 국립발레단의라이몬다에는 러시아 주역 무용수들이 출연했다. 2012년 말에는 국립발레단의 김지영과 이동훈이 듀엣으로 볼쇼이극장의 초청을 받아 볼쇼이 발레단 정기공연 ‘스파르타쿠스’에서 주역을 맡았다.

 

2000년 유리 그리가로비치의 작품을 국립발레단에서 선보이기 시작한 지 꼭 10년 만에 볼쇼이극장의 초청을 받은 거죠. 볼쇼이발레단의 군무 속에서 솔리스트로 서는 건 획기적인 일이었죠. 국립발레단의 수준을 러시아에서도 인정한 거죠. 테크닉이나 실력으로 최고를 자랑하는 한국의 무용수들이 세계 유수의 발레학원을 졸업하고 콩쿠르를 휩쓰는 것을 보면서 본고장인 프랑스, 이탈리아 등의 무용수들과 실력을 겨뤄도 손색이 없다는 것을 느낍니다. 작년에 모스크바 콩쿠르, 발레 올림픽이라고 하는 세계 최고의 유명한 콩쿠르에서 국립발레단의 이동훈, 김리회가 실버메달을 수상했죠. 그때 심사를 맡은 러시아의 유명한 예술인이러시아의 발레가 이제 한국에 있는 것 같다며 칭찬을 아끼지 않더군요.”

 

다른 예술 분야들과의 협력은 창조적 예술의 지름길이다

 

최태지는 지리적으로 떨어져 있는 해외 예술계와의 연결뿐만 아니라 다른 예술 장르와의 교류에도 적극적이다. 대표적인 예로 2011년에 서울시립교향악단과 협연한로미오와 줄리엣을 들 수 있다. 정명훈이 지휘를 맡았고 국립발레단 주역 무용수들이 무대에 올랐다. 예매율이 98%에 달했다. 2012년 국립발레단 50주년을 기념해 선보인 신작포이즈아름다운 조우는 패션, 국악 등 예술적 경계를 넘어선 협업을 통해 창작됐다.

 

‘포이즈’는 현대무용가 안성수가 안무를 맡고 디자이너 정구호가 의상 및 무대 연출을 맡았다. 안성수가 이끄는 현대무용단안성수픽업그룹의 무용수 4명도 함께 무대에 서서 국립발레단 무용수들과 조화를 이뤘다. 한편아름다운 조우는 가야금 명장 황병기의 기존 곡에 파리 발레단 출신 무용수 니콜라 폴, 국립발레단 발레 마스터 박 일, 중요무형문화재 태평무 이수가 정혜진 등 3명이 각자 안무를 붙인 작품이다. 명장 황병기가 타는 가야금 선율에 맞춰 안무가 3인의 색깔이 묻어나는 춤을 국립발레단 단원들이 소화했다.

 

최태지가 장르를 넘나드는 교류를 촉진하게 된 데는 정동극장장 시절의 경험이 큰 역할을 했다. 2001년 국립발레단 단장 임기가 끝난 후 그녀는 복합예술공연장인 정동극장의 극장장에 임명된다. 이때 다른 예술 분야의 사람들을 많이 만나고 발레계를 위한 조언을 많이 들었던 경험이 큰 도움이 됐다.

 

“사실 정동극장이 어떤 곳인지 잘 몰랐어요. 가서 보니 여러 장르의 작품을 했으면 좋겠다 싶었어요. ‘아트프론티어라는 기획 프로그램을 만들었죠. 국악, 뮤지컬, 연극, 재즈음악, 발레 등을 올렸습니다. 그때 만난 사람들과 참 좋은 추억이 많아요. 정동극장에 가서 다른 분야에 계신 분들 뵙고 밖에서 보는 발레에 대한 조언도 많이 들었어요. 가야금도 들어보니 너무 아름답고 좋은 거예요. 그때 만났던 분들께서 발레도 다 같은 예술인데 왜 같이 작품을 할 수 없겠냐는 이야기를 해 주셨어요.”

 

모스크바 국제 발레 콩쿠르 심사위원으로 참석한 최태지 (왼쪽에서 두번째) 단장

 

역사적으로도 문화예술의 폭발적 성장은 다른 예술계와의 공동 진화가 이뤄졌을 때 나타났다. 문화예술계 연결의 전형적인 예가 문학, 음악, 미술 등을 아우르며 르네상스를 주도한 메디치가(). 현대 무용 역시 미술의 잭슨 폴락이나 음악의 존 케이지 등의 등장과 함께 발전했다. 최태지는 국내와 해외의 발레계 간, 그리고 예술 장르 간의 교류를 촉진해 예술 창조성을 끌어올릴 수 있는 조건을 만드는 것이 본인이 완수해야 할 사명이라고 믿는다.

 

“과거에 훌륭한 예술가들이 발레와 관계를 많이 맺었어요. 대단한 건축가였던 르노아르 패밀리, 피카소, 코코샤넬도요. 이렇게 최고의 사람들이 만나서 최고를 만드는 거죠. 좋은 사람들이 만나서 좋은 작품 만들도록 조직하는 것이 제가 하는 일이고, 국립발레단이 돈도 버는 길이에요. 러시아에서 발레가 발전했던 이유는 훌륭한 예술가들이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 모든 것들을 관리했던 행정가 디아길레프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죠. 앞으로는 더 훌륭한 아티스트들과 일하고 싶어요.”

 

최태지는 앞으로도 현대무용이나 전통무용, 대중무용 등 무용의 다양한 분야들은 물론 음악, 미술, 연극, 영화 등 다른 예술 분야에서 세계적 역량을 가진 예술가들과 적극적으로 협력해 국립발레단의 수준을 또다시 한 단계 더 향상시키겠다는 포부다.

 

선진 추세 수용과 동시에 자신만의 고유한 예술을 계속 시도하라

 

최태지가 해외에서 세계적 안무가들의 작품 도입만을 통해 우리나라 발레를 세계적 수준으로 성장시키려 했던 건 아니다. 2008년 두 번째로 단장직을 맡아 국립발레단으로 돌아왔을 때 그녀에게는 창작 레퍼토리를 개발하겠다는 목표가 있었다. 최태지는 국립발레단의 창작 작품인왕자 호동의 완성도를 높여 해외 무대에 선보이는 일에 매진하고 있다. 2011년에는 이탈리아 나폴리 산카를로극장에 올려 호평을 받았고 2014 11월에는 러시아 볼쇼이극장에서의 공연도 예정돼 있다.

 

‘왕자 호동은 초대 국립발레단장이었던 임성남이 안무했던 작품을 2009년 현재의 국립발레단 부예술감독 문병남이 안무를 맡아 재탄생시키고 전 국립무용단 예술감독이자 한국무용 안무가 국수호가 연출을 맡아 초연했다. ‘왕자 호동은 발레와 한국무용 안무가의 만남으로 예술 간의 경계를 넘어 창작됐을 뿐만 아니라 제롬 카플랑 의상팀과의 협업으로 지리적 경계를 넘어서 한국의 콘텐츠를 고전 발레 형식으로 재탄생시킨 사례다.

 

“세계적인 명작도 무대에 올리고 있지만 새로운 것을 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창작발레를 하려는데 궁극적으로는 세계적으로 나갈 수 있는 작품을 해야 해요. 우리는 너무 현대적인 것만 좋아하고 전통적인 걸 좋아하지 않아요. 사실은 전통의 현대적 해석이 훌륭한 것인데 말이죠. 옛날 이야기들을 해석하고 한국의 정서가 살아 있도록 해야 해요.”

 

‘왕자 호동이외에도 앞에서 말한포이즈아름다운 조우등 새로운 창작 발레를 위한 최태지의 과감한 리더십과 투자는 처음에는 세계 무대에 통할 수 없는 작품에 아까운 자원을 낭비하고 있다는 비난도 받았으나 이제는 국립발레단의 가장 중요한 레퍼토리로 관객들과 평단의 극찬을 받고 있으며 해외 발레계에서도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이와 같이 최태지는 국립발레단의 행정을 맡으며 국가의 보조를 받는 예술단체가 가야 할 길에 대한 명확한 비전을 제시하고 로드맵을 구상했다. 또 국립발레단이 공공예술단체로서 문화예술 창작과 소비의 공공성을 증진하는 데 앞장선다는 목표에 걸림돌이 되는 현장의 문제들을 해결하고 단원들의 실력, 예술성, 창조성과 발레단 전체의 위상을 높이기 위해 해외 예술계 및 국내 타 장르 예술인들과의 교류를 활성화했다. 예산 문제, 협업을 성사하기 위해 이해관계자들을 설득하는 문제, 또 혁신적 행보에 대한 비판 등을 모두 이겨내고 현재 국립발레단의 모습을 만들어낼 수 있었던 것은 현장 경험을 통해 알게 된 근본적 문제들을 해결해 후배들에게 좋은 환경을 만들어주겠다는 신념과 사리사욕이나 외압에 흔들리지 않고 목표를 꾸준히 견지한 올곧은 마음 덕분에 가능했다.

 

항상 더 높은 곳을 향해 끊임없이 변화와 혁신을 꿈꾼다

 

최태지는 뛰어난 발레 무용수에서 탁월한 행정가로 완벽하게 변신했다. 개인적으로도 변신이라는 것 자체를 좋아한다. 발레리나로서 다양한 역할로 변신할 수 있었던 것이 행복했다고 회상한다. 단원들에게도 작품 속에서 늘 변신할 것을 주문한다. 같은 역할은 되도록 다른 사람에게 맡기면서 늘 새롭게, 긴장감을 유지한다. 최태지는 국립발레단의 끝없는 변화와 혁신을 꿈꾸고 있는 것 같다.

 

최태지는 국립발레단이 최고 수준의 예술을 더 많은 국민에게 선보인다는 국립예술단체로서의 사명을 다할 수 있도록 예술가들에게는 더 좋은 창작환경을, 관객들에게는 다채롭고 수준 높지만 문턱은 낮은 공연을 제공하기 위해 노력한다. 세계 발레의 변방에서 불과 10여 년 만에 단숨에 세계 정상급으로 도약한 국립발레단과 최태지의 스토리는 창조적 예술의 개화에 세계 최고를 지향하는 높은 눈높이와 불가능해 보이는 미래를 꿈꾸는 비전, 그리고 불꽃 같은 열정을 가진 리더십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생생하게 보여준다. 한국 문화예술계의 진화를 위해 최태지와 같이 창작자, 소비자, 매니지먼트 시스템, 후원문화, 사회적 인식의 발전을 위해 사심 없이 고민하고, 시스템을 디자인하고, 연결고리를 만들어가며 항상 세계 최고를 지향하는 창조적인 리더들이 많이 등장하기를 염원한다.

 

 

필자 주

이 글은 기초 자료 조사와 작가와의 인터뷰 녹취록 정리 등을 담당한 김맑음 미국 예일대 경영대 박사과정생(조직이론)의 도움으로 집필됐습니다. 귀한 시간을 아낌없이 인터뷰에 내어주신 최태지 단장께 깊이 감사드립니다.

 

신동엽 연세대 경영대 교수 dshin@yonsei.ac.kr

신동엽 교수는 미국 예일대에서 조직이론 전공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서울스프링국제실내악축제 조직위원장을 지냈고 국립발레단 등 여러 문화예술단체들을 자문해왔다. 조직이론 분야 최고 학술지인와 문화예술 분야 세계적 학술지인 등에 논문을 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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