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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대학생들은 미래에 대한 불안과 걱정을 많이 가지고 있다. 이렇게 장래가 불투명한 학창 시절이 있었던가? 대학생들에게 우리는 인생 선배로서 어떤 이야기를 들려줘야 할까? 시골 소년에서 GE코리아 회장과 GE헬스케어 아시아 성장시장 총괄사장, 인천국제공항공사 사장을 지내고 2013년 현재 ㈜CJ의 대표이사가 된 이채욱 부회장은 대학생들에게 어떤 이야기를 들려줄까? 이 부회장은 저서 <행운아 마인드 : 있는 그대로의 긍정, 다시 시작하는 힘, 해라, 2013>에서 행운아 마인드를 가지라고 조언한다. 그는 미국 하버드대 강연에서 공자의 말을 인용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아는 자는 좋아하는 자만 못하고, 좋아하는 자는 즐기는 자만 못하다.” <논어(論語)>의 ‘옹야편(雍也篇)’에 나오는 “지지자 불여호지자, 호지자 불여락지자(知之者 不如好知者, 好之者 不如樂之者)”라는 문장을 풀어서 하버드대 학생들에게 들려준 것이다.
그런데 이 부회장은 논어의 구절에다 “즐기는 자는 행운아 마인드를 가진 자만 못하다”는 자신의 구절을 하나 더 추가했다. 이 구절의 뜻은 무엇일까? 그 누구도 행운아 마인드를 가진 사람은 이기지 못한다는 것이다. 행운아 마인드가 예기치 못한 기회와 운수, 선순환 등 인생을 성공의 길로 이끄는 거대한 물길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자신이 바로 행운을 가진 사람이라고 생각하면 자신의 미래가 그대로 만들어질 수 있다는 설명이다. 이 부회장이 우리에게 행운아 마인드를 가지라고 조언하는 것은 사실 그가 행운아 마인드를 가지고 오늘날 그의 성공을 이뤄냈기 때문이다. 이 책에서 이 부회장은 행운아 마인드를 가졌을 때 자신에게 닥친 갖가지 어려움들이 이후에는 오히려 작은 성공으로 이어졌다고 들려주고 있다. 그의 인생을 잠시 살펴보자.
행운아 마인드를 가지다
행운아 마인드: 있는 그대로의 긍정, 다시 시작하는 힘
이채욱 지음, 해라, 2013
이 부회장은 일본의 식민지 지배가 끝나고 1년 뒤인 1946년 태어났다. 그에게 가난은 숙명이었다. 강토는 과거 식민지였던 까닭에 피폐해 있었고, 그의 나이 다섯 살 때는 전쟁이 발생해서 그나마 온전하게 남은 것마저 사라졌다. 5남2녀인 형제자매는 단칸방에서 북적북적 모여 살았다. 초가집에 방이 딱 두 개였다. 낮에는 밭에 가서 채소를 뽑아야 했고 학교에 가려면 10㎞를 걸어야 했다. 학교가 끝나면 집에 와서 밭일을 해야 했다. 그는 똥지게를 지는 것이 가장 힘들었다고 회고한다. 똥물이 튈까봐 늘 조심조심 걷던 때가 아직도 눈에 선하다고 했다. 그는 중학교를 졸업할 즈음 읍내의 철공소에 다니려고 했다. 철공소에서 기술을 배우면 밥벌이를 할 수 있고 조금이나마 집안사정에 보탬이 되기 때문이었다. 고등학교에 진학하는 것은 공상에 불과했다. 그런데 뜻밖의 일이 벌어졌다. 어느 고등학교에서 그의 입학시험 성적이 좋다며 장학생으로 선정했다. ‘내가 고등학교에 갈 수 있다니!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그는 이때부터 스스로 행운아라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이 부회장은 장차 자신의 진로로 이과 분야의 직업을 갖고 싶어 했다. 하지만 그는 색약 판정을 받아 이과를 포기할 수밖에 없었고 이후 장학생 시험에도 떨어져서 고등학교를 그만둬야 할 처지에 몰렸다. 정말 간절히 공부하고 싶어 했기에 실망감은 더 컸다.
그는 등록금을 낼 수 없어서 학교에 가는 대신 밭으로 나갔다. 하지만 밭고랑에 잠시 앉아 쉬는 시간에도 검정고시 도전을 떠올릴 정도로 배움에 대한 아쉬움이 컸다. 그런데 이번에도 행운이 기다리고 있었다. “이채욱, 읍내 적십자병원 원장님 댁에서 과외를 맡을 학생을 찾는다고 해서, 널 추천했다. 입주 가정교사 자리인데 할 수 있겠나?” “예! 그런데 선생님, 어째서 저를…?”
그는 너무도 감사했지만 뜻밖의 행운에 어안이 벙벙했다. 선생님은 성실한 학생에게 배울 수 있는 기회가 꺾이는 것을 안타까워했고 마침 과외자리가 생겨서 추천했을 뿐이라고 말했다. 그는 입주 가정교사로 고등학교를 무사히 마친 뒤 영남대에서 4년 전액 장학생을 모집한다는 공고를 알려준 담임선생님 덕분에 법학과에 응시했다. 철공소에서 일하려던 이 부회장이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면사무소 서기를 준비하다 영남대 법대 장학생까지 된 것이다. 그는 고등학교를 다닐 때까지도 옆집 아저씨처럼 면서기가 되고 싶었다. 공무원 시험에 합격해서 와이셔츠를 입고 면사무소에 출근하는 것이 그가 알았던 가장 출세한 사람의 모습이었다. 그에게 대학은 생각하지도 않았던 일이다. 행운이 아니면 도저히 일어날 수 없는 일이었다.
이 부회장은 영남대 법대에 합격한 뒤에는 하숙비와 생활비를 벌어야 했다. 이때도 가정교사 자리를 찾았는데 다른 사람들보다는 일자리를 찾기가 훨씬 쉬웠다. 과거 가정교사 경력이 유리하게 작용했던 것이다. 그는 당시에도 이런 상황이 그저 행운이라고만 여겼다. 그는 대학을 다니다 학비를 벌기 위해 입대했다. 당시 월남전에 지원하면 가정교사를 하지 않아도 남은 학기의 학비를 채울 수 있을 정도로 돈을 벌 수 있을 것 같았다. 월남전에 참가한 육군 병장은 한 달에 54달러(1만6200원 정도)를 받았다. 당시 하숙비가 2000∼3000원 정도였으니 병장의 월급은 꽤 큰돈이었다. 그가 행운아 마인드를 가지지 않았다면 학비 때문에 전쟁터까지 가야 하는 상황을 한탄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는 그저 이후에 공부에만 전념할 시간을 벌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여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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