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umanitas & Managing Yourself
편집자주
많은 사람들은 마키아벨리를 ‘권모술수의 대가’로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는 억울하게 살고 있는 약자들에게 “더 이상 당하지 마라”고 조언했던 인물입니다. 메디치가문의 창조 경영 리더십과 마키아벨리 연재로 많은 사랑을 받았던 김상근 연세대 교수가 <군주론>을 연재합니다. 글을 읽는 재미를 위해서 김 교수가 일부 허구적인 내용도 가미했습니다. 시대를 뛰어넘는 통찰력을 주는 마키아벨리의 이야기에서 깊은 지혜와 통찰을 얻으시기 바랍니다.
귀차르디니, 나의 친구여. 이 험난한 시대가 끝나고 우리 이탈리아에 평화가 찾아온다면, 제발 내 부탁 하나만 들어주게나. 그래야만 내가 지하세계에서 편히 눈을 감을 수 있을 것 같네. 자네에게 남기는 마지막 부탁은 내가 쓴 <군주론>을 모두 찾아 불태워달라는 것이네. <군주론>은 분서(焚書)가 되거나 최소한 장서(藏書)가 돼야 마땅한 책이지. 불태워 버리거나(焚) 남의 시선을 끌지 않게 감춰버려야(藏) 마땅한 책이라네. 내 젊은 시절의 허장성세(虛張聲勢)가 빗어낸 보잘 것 없는 책이기 때문에 나는 가능하다면 지금이라도 내 책을 거둬들이고 싶네. <군주론>은 1513년에 집필됐는데 시중에는 내 <군주론>의 필사본이 <공국(公國)에 대하여 De Principatibus>란 제목으로 떠돌아다닌다는 얘길 들었네. 그래도 이 책이 정식으로 출간되지 않은 것은 그나마 다행이라고 생각하네.1
내 책이 시중에서 <공국(公國)에 대하여>라는 제목으로 유통되고 있다는 것이 재미있지 않나? 공국이란 대공(Grand Duke)이 통치하는 나라를 말하고, 보통 대공들은 왕자(Prince)들이니 결국 이 책은 <공국에 대하여>에서 <왕자에 대하여>로 바뀌었다가 결국 <군주론>이란 제목으로 세상에 알려지게 되겠지? 그러나 나의 친구 귀차르디니여, 내가 왜 이런 책을 썼겠나? 알다시피 나는 뼛속 깊이 공화정, 즉 시민이 권력의 주인이 되는 공화주의를 신봉하던 피렌체 공화국의 국가 공무원 아니었던가. 나는 군주제를 반대하는 사람이라네. 눈에 흙이 들어와도 나는 왕이란 존재를 인정할 수 없네. 우리가 태어나고 자란 이 위대한 피렌체란 국가는 군주제를 결사적으로 반대하는 사람들의 집단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 않은가? 언제 우리나라에서 군주가 시민들의 자유를 억압하거나 통제한 적이 있었나? 간혹 귀족들이 권력을 잡고 제1 시민, 즉 프린켑스를 참칭하면 우리 피렌체 시민들은 절대로 가만히 당하지만 않았지. 군주가 득세할 조짐이 보이면 우리 피렌체 사람들은 헛간에 있던 삽자루라도 들고 나와 싸우지 않았던가? 시민의 권리를 상징하는 팔라초 베키오의 높은 종탑에서 바카(Bacca) 종이 울리면 우리 피렌체 시민들은 사력을 다해 군주가 되려는 사람을 무찌르곤 했지.
또 자네도 알다시피 난 공화국의 고위공무원이었다네. 프랑스나 에스파냐와 같은 군주국의 막강한 군사력에 감탄하긴 했지만 그래도 난 결코 군주제 자체를 지지해 본 적이 없다네. 그런 내가 왜 <군주론>이란 책을 썼겠나? 내가 누차 자네에게 변명한 바 있지만 내가 <군주론>을 쓴 이유는 먹고 살아야 했기 때문이라네. 목구멍이 포도청이라고 그 책을 쓸 당시에 난 정말 인생의 밑바닥에 있었네. 1512년, 메디치 가문이 피렌체로 복귀해 권토중래(捲土重來)했을 때 내 인생은 이미 끝이 난 것이지. 나는 14년 동안 피렌체 공화국의 제2 서기장이었을 뿐 아니라 메디치 가문의 복귀를 막기 위해 결성된 피렌체 민병대의 군사위원회 위원장이기도 했다네. 피렌체로 돌아온 메디치 가문은 날 공직에서 쫓아냈고 내게 모진 고문을 가했지. 1512년 겨울, 나의 모든 것은 산산조각 나 버렸다네.
차디찬 바르젤로감옥에서 겨우 석방된 나는 산탄드레아의 시골집에서 유폐생활을 하면서 끼니 걱정을 할 정도로 힘겨운 생활을 하고 있었다네. 그래서 쓴 책이 바로 <군주론>이야. 메디치 가문에 그 책을 바친 이유를 뭐라고 생각하나. 내 책을 읽고 나를 다시 공직으로 불러 달라고 메디치 가문 사람들에게 하소연한 것이지. 그건 책이 아니라 눈물 젖은 내 이력서였다네. 맹세컨대 난 그 작은 책이 사람들의 관심을 끌 것이라고 예상하지 않았네. 난 그저 눈물의 이력서를 메디치 가문에 바쳐 내 재능과 경력을 알리고 싶었을 뿐이라네.
<군주론>이 독창적인 책이라고 생각하는가?
후대의 사람들은 나의 책 <군주론>을 읽고 근대적 의미의 정치과학을 탄생시킨 책이라고 평가하겠지? 아니면, 중세 스콜라철학에서 말하던 이상적인 국가와 지도자에 대한 개념을 현실주의적 입장에서 재해석한 인문학의 고전이라고 하려나? 자네에게만 솔직히 말하지만 모두 헛소리에 불과하다네. 그런 소릴 하는 작자들은 기본적인 독서량이 부족하다는 것을 스스로 드러내는 거야. 얼마나 책을, 특별히 고전을 읽지 않으면 <군주론>과 같은 얄팍한 책을 보고 ‘근대 정치철학의 탄생’이니 ‘인문학의 고전’이란 망발을 해대겠나? 내 책에 대한 과장된 평가는 시간이 지날수록 대중의 무식과 결합해서 엉뚱한 책으로 평가될 것이 뻔해. 세월이 흘러갈수록 대중들은 고전과 점점 더 멀어질 것이고 그럼 자네나 내가 읽고 있는 그리스와 로마 시대의 고전을 후대의 사람들은 알지 못하게 될 걸세. 그러니 <군주론>과 같은 얄팍한 책을 읽고도 ‘근대 철학의 탄생’이니 ‘인문학의 고전’이라는 과대평가를 하게 되겠지. 세월이 흐르면 인류의 무식이 고전의 지혜를 집어삼키게 되리라고 짐작되네.
내 친구, 귀차르디니여, 고백하거니와 내가 쓴 <군주론>은 고전의 패러디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네. 말이 패러디지 사실은 표절이라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니야. 내가 읽었던 수많은 고전들 중에서 도움이 될 만한 것이라면 나는 아무런 주저함 없이 여기저기서 주워 담았네. 내가 전에 키케로의 <의무론>에서 많은 내용과 개념을 차용했다고 말해 주었지?2 더 솔직하게 말해볼까? 사실은 말이야, 난 <군주론>을 쓰면서 산탄드레아 시골집의 서재에 꽂혀 있던 크세노폰(Xenophon)의 <키루스의 교육>이란 책을 적극적으로 활용했다네. 자네도 이 유명한 고전을 읽었겠지?3
아이쿠, 친구여, 부디 용서하시게. 스페인 대사로 활동했으며 교황군의 사령관을 지낸 자네가 공무에 늘 바빴다는 것을 깜빡했다네. 크세노폰의 <키루스의 교육>은 정말 읽어내기가 쉽지 않은 책이지. 자네가 그 책을 읽지 못했다는 것을 충분히 이해하네. 그러니 내가 여기서 공무에 바빠 공부할 시간을 내기 힘든 자네를 위해 크세노폰과 그의 책을 잠깐 소개해 주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으이.
크세노폰이 쓴 <키루스의 교육>이란 책은 사실 플라톤의 <국가론>에 버금가는 대작이라네. <국가론>을 쓴 플라톤이 스파르타를 이상적인 국가의 모델로 삼았다면 크세노폰은 페르시아 제국의 창시자인 키루스 대왕(Cyrus the Great)을 이상적인 군주의 모델로 삼았지. 존경할 만한 군주의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나라를 다스리는 사람들에게 통치의 교훈을 주는 책을 우리 시대에는 ‘왕자들의 거울(Mirror for the Princes)’이라고 부르지 않나. 그래서 나도 내 책의 이름을 이탈리아어로로 붙였는데 이 책의 제목이 결국 <군주론>이 된 것이라네. 사실 이런 <군주론>을 쓴 사람은 나 외에도 많이 있다네. 가장 고전적인 모델이 바로 그리스 시대의 크세노폰이고 우리 시대에도 많았지. 예를 들면 나폴리의 아라곤 왕국의 대신이었던 조반니 폰타노(Giovanni Pontano, 1426∼1503)가 쓴와라는 책도 그런 내용이고 곤자가(Gonzaga) 가문의 왕자들을 가르쳤고 바티칸도서관을 설립했던 바르톨로메오 사치(Bartolomeo Sacci, 1421∼1481)도 비슷한 종류의 <군주론>을 썼으며 15세기의 우리 고향 피렌체를 빛냈던 사상가 레온 바티스타 알베르티(Leon Battista Alberti)도 이런 종류의 책을 썼지. 발다사레 카스틸리오네(Baldassare Castilione)는 또 어떤가? 그가 쓴 <궁정론>은 아마 내 책 <군주론>과 더불어 장차 고전의 자리를 차지할 것이 분명해. 참, 몇 년 전에는 네덜란드의 인문학자 에라스무스(Erasmus)도 이런 책을 썼다지?4
다시 말하자면, 나 니콜로 마키아벨리만 <군주론>을 쓰지 않았다는 말이네. 이런 종류의 책은 이미 고대 그리스 시대부터 많이 출간됐고 소크라테스와 플라톤 시대에 활동했던 크세노폰의 <키루스의 교육>이 가장 대표적인 책이었다는 말이지. 이미 오래 전부터 키루스 대왕은 위대한 군주의 모범으로 간주돼 왔다네. 심지어 선민(選民)임을 자처하면서 타 민족을 배타시하는 유대인들조차 키루스 대왕을 ‘하느님의 대리인’이라고 평가할 정도니 대단한 인물임에는 틀림없는 것 같네. 구약성서의 <이사야서> 45장에는 이런 표현까지 나오지.
“나 주가 기름 부어 세운 키루스(한국 성서에서는 고레스로 번역됨)에게 말한다. 내가 너의 오른손을 굳게 잡아 열방을 네 앞에 굴복시키고 왕들의 허리띠를 풀어 놓겠다. 네가 가는 곳마다 한번 열린 성문은 닫히지 않게 하겠다. 키루스는 들어라! 내가 너보다 앞서 가서 산들을 평지로 만들고, 놋쇠 성문을 부며, 쇠빗장을 부러뜨리겠다. 안 보이는 곳에 간직된 보화와 감춰둔 보물을 너에게 주겠다. 그때에 너는, 내가 주인인 줄을 알게 될 것이고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너를 지명하여 불렀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어떤가? 대단하지 않은가? 이런 키루스 대왕의 행적을 추적하면서 이상적인 군주의 모습을 고찰했던 책이 바로 크세노폰의 <키루스의 교육>이라네. 사람들은 소크라테스의 제자가 플라톤 한 사람이라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크세노폰이라는 독특한 제자도 있었지. 크세노폰은 아테네에서 태어나서 소크라테스의 제자로 활동했지만 특이하게도 페르시아 군대의 장교로 활동했던 인물이었네. 일종의 용병대장이라고 보면 되겠지. 결국 크세노폰은 아테네에서 추방을 당하는데 적국으로 간주되던 페르시아와 스파르타의 용병대장으로 활동했다는 혐의도 있었지만 사실은 소크라테스의 제자였기 때문에 그런 불행을 겪었다네. 어때? 그자의 운명이 피렌체 공직에서 추방돼 14년 동안이나 모진 세월을 견뎌야 했던 내 신세와 비슷하지 않나? 아테네에서 쫓겨난 크세노폰은 플라톤의 <국가론>에 버금가는 책을 쓰기로 결심하고 자신이 참전했던 페르시아의 왕 키루스의 통치술을 분석하게 된다네. 피렌체로부터 추방당했던 내가 <군주론>을 썼다면 아테네로부터 추방당했던 크세노폰은 <키루스의 교육>이란 책을 썼지. 그런데 말이야, 자네에게만 솔직히 고백하건데 난 <군주론>을 쓰면서 크세노폰의 책을 수도 없이 참고했다네. 후대 사람들이 ‘마키아벨리적’이라고 표현할 통치술을 내가 어디서 배웠겠나? 크세노폰의 책으로부터라네. 해 아래 새 것이 없다는 말은 진실이라네. 우린 고대 그리스와 로마라는 지혜의 샘에서 새로운 지식을 길어 올렸지만 사실은 그 샘물은 모두 옛 현자들의 것이었지. 난, 자네 앞에서 솔직해 지고 싶네. <군주론>은 <키루스의 교육>에서 나온 것이라고 말이야. 나의 <군주론>은 독창적인 책이 아니라네. 내 책이 그래도 조금이라도 가치가 있다면 내가 염두에 둔 독자가 달랐다는 점이지. 정말 솔직하게 고백하거니와 내가 <군주론>을 쓰면서 고려했던 독자는 ‘군주’가 아니었다네. 내 책을 읽어야 할 사람들은 ‘군주’가 아니라 ‘지금까지 군주의 지배를 받아 온 사람’이라네. 나는 그 평범한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해주고 싶다네. “군주의 지배를 받아 온 사람들이여, 이제 그 군주의 속박에서 벗어나시오. 내가 그 방법을 가르쳐 주겠으니, 부디 정신 차리고 내 말을 경청하시오. 당신이 바로 군주란 사실을 우선 명심하시오. 지금까지 당신은 군주의 지배와 지시를 받으며 살아왔지 않소? 이제부터는 자유인으로 사시오. 아니, 당신이 스스로 군주가 돼 세상을 주인처럼 사시오. 내가 그 방법을 가르쳐 드리겠소이다!” 이런 중요한 포인트의 의미는 앞으로 쓸 편지에서 차차 설명하도록 하겠네.
어떤 지도자가 존경을 받을 자격이 있는가?
나의 친구, 귀차르디니여, 자네가 비록 메디치 가문의 후광을 입고 있는 사람이지만 솔직하게 말하는 날 용서하시게. 내가 <군주론>을 헌정했던 메디치 가문의 지도자 ‘우르비노의 공작’ 로렌초 데 메디치는 솔직히 내 책을 읽을 수 있는 능력을 가지지도 못했고 설령 내 책을 읽었다고 해도 아무런 도움을 받지 못했을 것이 분명하다네. 솔직히 우리끼리 얘기지만 그는 존경할 가치가 없는 지도자였지 않나?
알다시피 나는 <군주론>을 1513년 8월부터 쓰기 시작해서 이듬해 1월에 탈고를 했다네. 산탄드레아 시골집에 유배를 당한 처지에서 나는 필사적으로 <군주론> 집필에 매달렸다네. 조반니 데 메디치(1475∼1521)가 교황으로 선출돼 로마로 떠나고 그의 동생이었던 줄리아노 데 메디치(1479-1516)가 피렌체의 실질적인 군주 노릇을 시작하던 때였지. 나는 줄리아노 데 메디치를 정말 존경했다네. 철저한 공화주의자인 나는 피렌체에 ‘군주’가 등장하는 것을 결사코 반대하는 입장이지만 만약 불가피하게 군주가 피렌체를 통치해야 한다면 줄리아노 데 메디치가 제격의 후보자야.
줄리아노 데 메디치! 그는 정말 군주의 자질과 가능성을 갖춘 인물이었지. 만약 그가 조금만 더 몸이 건강해서 피렌체의 군주가 되고 내 책의 가르침을 충실히 따랐다면 아마 그는 이탈리아 역사를 빛내는 위대한 지도자가 됐을 것이네. 하지만 이 33살의 젊은 지도자는 1516년에 갑자기 임종하고 말았지. 우리 피렌체로서는 안타까운 일이었네. 나는 정말 줄리아노에게 내 책 <군주론>을 헌정하고 싶었다네. 그러나 그런 기회를 놓치고 말았지. 결국 나는 내가 탐탁하게 여기지 않던 ‘우르비노의 공작’ 로렌초 데 메디치(1492∼1519)에게 <군주론>을 헌정할 수밖에 없었다네. 지금 생각하면 참 부끄러운 일이었네. 그는 존경할 만한 가치가 없는 지도자였는데 말이야.
친구여, 나는 문득 어떤 사람이 훌륭한 지도자인지 궁금할 때가 있네. 왜 같은 메디치 가문의 피를 타고 났는데 줄리아노는 존경할 만한 인물이었으나 로렌초는 그렇지 못했을까? 이 두 사람의 차이는 무엇일까 곰곰이 생각해 보게 된다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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