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과 경영
편집자주
전쟁은 역사가 만들어낸 비극입니다. 그러나 전쟁은 인간의 극한 능력과 지혜를 시험하며 조직과 기술 발전을 가져온 원동력이기도 합니다. 전쟁과 한국사를 연구해온 임용한 박사가 전쟁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교훈을 연재하고 있습니다. 이 코너를 통해 리더십과 조직 운영, 인사 관리, 전략 등과 관련한 생생한 역사의 지혜를 만나기 바랍니다.
몽골 초원의 밤, 자신의 파오에 있던 주치라는 청년은 자신의 가축을 훔쳐가기 위해 일단의 무리들이 다가오고 있음을 발견했다. 그는 용감하게 가축 속으로 들어가 동물들 사이에 숨었다. 그리고 적이 다가오자 화살을 날려 한 명을 죽였다. 약탈자는 도주했다. 이 사건으로 그와 죽은 사람의 친척은 원수가 됐다. 그 숙원은 대를 이었다. 훗날 주치의 후손은 칭기즈칸의 부하가, 죽은 자의 친척은 칭기즈칸의 숙적이 됐다.
혈연이 아닌 생존에 기반한 친족 공동체
간단한 사례지만 이것이 몽골의 현실이었다. 몽골이 엄청난 군사적 잠재력을 지니고도 수천 년 동안 분열할 수밖에 없었던 원인이었다. 몽골의 부족은 기본적으로 친족집단을 주축으로 한다. 다른 친족 끼리는 의형제라고 할 수 있는 안다라는 특수한 관계를 맺는다. 현대인들은 이런 집단을 공동체라고 한다. 그러나 몽골 공동체는 현대인이 상상하는 것처럼 내부가 아름답고 강인하지 않았다. 몽골 공동체를 공동체로 결속시키는 요인은 아름다운 의리나 혈연의 정이 아니라 생존이라는 원초적 필요였다. 몽골 초원은 강한 자가 약한 자를 약탈하는 걸 당연시하는 약육강식의 세계였다. 칭기즈칸의 모친도 부친 에스게이가 약탈해서 얻은 여인이었다. 이런 사회에서 구성원을 보호하고 결속시키기 위해 그들은 자신에게 해를 입힌 사람에 대해서는 철저한 복수를 한다. 이 복수의 끈은 친척의 친척, 안다의 안다로 연결되면서 대를 이어 계승된다. 그러니 몽골 부족은 끊임없이 싸우고 대립한다.
혈연과 의리도 믿을 수 없다. 최소한의 생존욕구가 해결되면 권력, 지위, 재산을 두고 이 집단은 쉽게 분열한다. 젊은 칭기즈칸은 테무친이라고 불리던 소년 시절에 이미 그 사실을 뼈저리게 체험했다. 아버지 에스게이는 몇 개의 친족집단을 거느린 용사였다. 그는 탁월한 무용으로 여러 번의 전쟁 혹은 약탈전에서 친족집단과 주변 부족을 이끌었다. 그러나 그 약탈의 대가로 타타르족에게 암살을 당했다. 평소 그의 권력을 부러워하던 친척들이 바로 배신했다. 그러자 테무친의 부족들마저 동요했다. 일부는 테무친의 캠프를 이탈해 다른 부족에게 향했다. 이때 테무친은 8∼9세 또는 13세 소년에 불과했다. 그러자 여걸이었던 모친이 전투 깃발을 올리고 도망자를 추격했다. 어제까지 같은 부족이었던 도망자와 추격자는 초원에서 전투를 벌였고 모친은 일부 부족원을 되찾아 데리고 돌아왔다. 그러나 다른 친인척의 배신과 세력 약화는 막을 수 없었다. 마침내 테무친가와 사촌 간이던 타치우드족이 쳐들어와 테무친을 사로잡았고 꽤 긴 세월을 붙잡아 구금했다.
강한 신념, 냉정한 성찰, 임기응변의 조직력
극적으로 탈출에 성공한 테무친은 세 가지 무기를 가슴에 품고 방랑생활을 시작했다. 첫째, ‘좌절은 없다’는 강한 신념이다. 남북전쟁 당시 콜드 리버 전투에서 북군 사령관 그랜트는 무리한 작전으로 병사 수십만 명을 희생시킨다. 사령부가 아연질색해서 넋이 나가 있을 때 그랜트는 이렇게 말한다. “내일 할 일을 생각하자.” 테무친도 그랬다. 탈출 이후로도 여러 번의 패배와 실패를 겪었지만 항상 그 상태에서 할 수 있는 일을 생각했고 과거보다 한 발자국 더 나가기 위해 필요한 것을 시작하는 태도를 고수했다.
둘째, 몽골 공동체의 약점, 즉 인간들의 욕망과 행동방식에 대한 냉정한 성찰이다. 몽골인이라면 몽골인의 사고와 행동방식에 대해 다 잘 알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다. 끈끈한 혈연의 정에 혜택을 입은 사람은 그것을 찬양하고 약육강식의 세계에서 피해를 입은 사람은 원망한다. 하지만 테무친은 포로생활 중에 분노하거나 좌절하는 대신 성찰을 얻었다. 그는 몽골의 인간과 사회관계를 구성하는 끈의 연결방식과 문제점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그것을 자신의 절대무기로 만들었다. 테무친은 적의 집단에서 불만이 있는 사람, 배신이 가능한 인물을 찾아내고 이용하는 데 천재였다. 그리고 그것을 자신의 정복과 통합에 적극 활용했다. 이것은 단순히 적의 내부에서 배신자를 만들어 내고 이용하는 수준이 아니다. 칭기즈칸은 그 불만자에게 새로운 이상을 제공하고 자기에게 귀순해 절대적 충성을 다하는 지지자로 탈바꿈시켰다.
마지막으로 그는 첫 번째와 두 번째 무기를 조합해서 세 번째 무기를 창출했다. 임기응변의 조직력이다. 자신이 기댈 친족집단이 없고 친족집단의 한계도 너무나 잘 알았던 테무친은 신분과 인맥을 가리지 않고 인재를 모았다.
오늘날 우리는 지연, 혈연, 학연을 배제한 인사를 찬양하고 이상으로 삼는다. 그리고 리더가 결단해서 그런 인사를 시행하면 모든 것이 해결될 것으로 믿는 사람이 의외로 많다. 정말 그럴까? 유리 천장을 배제한 인사만 시행되면 조직의 능력은 최고로 올라설 수 있을까? 아니다. 그런 인사가 이상적이라는 이야기는 실은 역사상에 국가가 처음 생길 때부터 해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만 년이 넘는 기간 동안 그것이 시행되지 않는 이유는 뭘까. 단지 리더의 이기심 때문만이 아니다. 그런 이상을 구현할 제도와 방법을 만들어 낼 수가 없었다. 가게를 운영한다고 할 때 자녀나 형제보다도 믿고 그들을 대신해서 카운터를 맡길 사람을 쉽게 찾아낼 수 있을까? 조직의 비밀, 마음속의 불만을 아내나 오랜 친구 외에 털어놓고 이야기할 구성원을 찾아낼 수 있을까?
혈연, 지연, 오너십도 다 긍정적 기능을 하는 부분이 있다. 인재를 양성하기 위해서는 공정한 인사도 필요하지만 어린 시절부터 너는 장래의 지도자, 임원이라고 확신을 주고 자부심과 책임감을 키워야 할 필요도 있다. 세상은 결코 한 가지 원리로 포용할 수도 없고 작동하지도 않는다.
칭기즈칸은 인간관계의 모든 요소를 배려해서 독특한 인재등용법과 배치법을 만들었다. 혈연관계의 특권을 인정하고 과거의 은인에게 보답을 하는 인사였지만 인원을 제한했고 중요한 자리에는 능력이 바탕이 되지 않으면 채용하지 않았다. 그렇게 충성을 유지하면서 귀천을 가리지 않고 숨은 인재도 찾아 등용했다. 칭기즈칸 휘하의 명장 제베는 시베리아 변방에서 방랑하던 몰락한 부족 출신이다. 제베와 함께 칭기즈칸의 4선봉(四先鋒)으로 불리며 러시아와 동유럽 정복을 성사시킨 최고의 장군 수부타이는 미천한 신분이었다.
세상에 없던 군대
13세기 초반 칭기즈칸 군대의 첫 번째 공격 목표는 지금의 우즈베키스탄 일대에 있던 호레즘(Khorezm) 왕국이었다. 당시 호레즘은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었고 국왕 모하메드는 이란과 사라센 왕국 정복까지 구상하고 있었다. 그러나 동쪽에서 갑자기 몽골군이 쇄도했다.
호레즘도 주력군은 터키계의 유목 기병부대여서 몽골군의 전술을 잘 알았고 전술능력도 몽골군과 비등했다. 그것이 오히려 화근이 됐다. 칭기즈칸과 그의 유능한 장수들은 몽골군을 그들이 알던 이상으로 훈련시켰다.
몽골기병이 넓은 평원에서는 강하지만 강과 산이 있는 좁고 장애물이 있는 지역에서의 전투, 공성전과 같은 요새공격에 취약하다고 판단한 호레즘은 동쪽 국경의 강변을 따라 강력한 요새지대를 설치하고 수비대를 배치했다. 호레즘군은 20만 명, 몽골군은 15만 명 정도로 병력에서는 호레즘이 우위였다. 그러나 호레즘군은 분산됐으므로 몽골군이 병력을 집중해서 강타하면 각개격파될 수 있다. 이를 예상한 호레즘은 강력한 기동타격대를 예비대로 편성했다. 몽골군이 습격하면 요새를 이용해서 버틴다. 그 사이에 주력군이 도달해 몽골군을 타격한다는 전술이었다. 이 전술은 성공했다. 몽골군은 국경 여기저기를 찔러봤지만 호레즘 주력이 나타나면 전투를 포기하고 철수했다.
화가 난 몽골군이 요새 주변 촌락을 약탈하고 불을 질러 산하를 초토화시켜 버렸다. 그 정도 피해는 감수할 수밖에 없었다. 호레즘군이 안도할 즈음 몽골군이 총공격을 시작했다.
호레즘은 완전히 폐허가 돼 식량을 조달하기 어려운 북부 지역으로는 몽골군이 진출하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몽골군은 놀라운 자생능력과 이동능력을 바탕으로 10만 대군을 진출시켰다. 호레즘 남부 역시 마찬가지였다. 통과가 불가능하다고 믿었던 파미르고원을 몽골군은 보란 듯이 넘었다. 남북으로 몽골군이 침공하자 호레즘은 중앙으로 병력을 모았다. 양쪽이 합류해서 중앙으로 진출할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전술의 원칙을 깨다
그러나 몽골군은 여기서 진짜로 전술의 원칙을 깬다. 호레즘의 동부군을 무시한 채 남쪽과 북쪽에서 크게 우회해 호레즘의 후방인 서부지역으로 침공했다. 후미에 적의 대군을 남겨둔 채 적의 후방으로 침투한 것이다. 침투한 후에는 총 5개의 부대로 부챗살처럼 갈라져서 호레즘 서부 전 지역을 유린했다. 즉, 적의 대군 앞에서 병력을 집중하기는커녕 병력을 더 분산시켜 허를 찔렀다. 서부 지역은 30만의 군대를 낼 수 있는 지역이었지만 호레즘이 징병을 시행하기도 전에 몽고군이 짓밟아 버렸다.
그 후 5개의 부대는 호레즘의 수도 사마르칸트로 집결해 허겁지겁 수도로 돌아온 호레즘군을 격파했다. 수도를 지키던 호레즘의 주력 기병은 성 밖으로 나가 용감하게 몽골군과 정면대결을 벌였다. 양측의 전술은 같아서 공중전을 하듯 서로 꼬리 물기 싸움을 벌였다. 하지만 몽골군은 세상의 어떤 유목기병보다도 더 빠르고 강했다. 그 후 몽골군은 아프가니스탄을 단숨에 정복하고 나폴레옹과 히틀러의 탱크부대도 성공하지 못한 러시아정복을 단 2년 만에 해치우고 유럽으로 쇄도했다.
몽골의 전술은 유목기병의 전통적 전술을 발전시킨 것으로 새로운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 누구보다도 강하고, 빠르고 대단위로 수행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 능력을 바탕으로 호레즘을 후방 침투하는, 지금껏 누구도 시도하지 못한 새로운 전술을 구사할 수 있었다. 그것은 훈련이 아니라 칭기즈칸의 새로운 인간 경영과 임기응변의 조직력이 만들어낸 결과였다.
임용한 한국역사고전연구소장 yhkmyy@hanmail.net
필자는 연세대 사학과를 졸업하고 경희대에서 한국사 전공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조선국왕 이야기> <전쟁과 역사> <조선전기 관리등용제도 연구> <조선전기 수령제와 지방통치> 등 다수의 책과 논문을 저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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