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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ssons from Classic - 바흐와 헨델 上

천재성 부족한 바흐, 집중력으로 돌파하다

김혜옥 | 100호 (2012년 3월 Issue 1)
 
 
 
바흐는 ‘가치 창출(Value Creation)’이라는 관점에서 철저하게 진정성(Authenticity)과 진지함 자체에 호소했던 사람이다. 자신의 작품이 충실하게 목적을 반영하게 하는 데 대부분의 관심을 기울였다. 다른 음악가들이 스타일과 트렌드에 맞게 작품을 작곡하고 관행대로 연주하는 과정에서 자신의 기교를 과시하는 것으로 가치를 입증해 나간 것에 비해 바흐는 자신의 음악은 오로지 ‘정격’ 음악, 즉 하나님의 의도를 구현할 수 있다고 믿어지는 최상의 선율이어야만 한다는 원칙을 고수했다. 또 그는 편집증에 가까울 만큼 완벽을 기하는 기질을 가지고 있었으며 작품의 정격성에 집중하기 위해 안정적 입지 구축에 따른 ‘겸업’ 의무를 거부하고 잦은 이사를 다니기도 했다. 얼핏 보면 꽉 막힌 완벽주의 예술가 같지만 한편으로는 자신에게 오는 기회를 절대로 마다하지 않았던 감각 있는 장인이 바로 바흐였다.
 
‘음악의 아버지’ 바흐와 ‘음악의 어머니’ 헨델, 두 사람의 만남은 항상 엇갈렸다. 첫 번째 조우 기회는 당대 북독일 최고의 오르가니스트인 북스테후데가 자신의 후계자를 뽑기 위해 주최한 오디션장에서였다. 두 사람은 나란히 결선에 올랐지만 주최자가 내건 우승자에 대한 혜택이었던 ‘딸과의 결혼’이 그다지 매력적이지 못한 옵션이라 판단하게 되면서 중도에 오디션을 포기하고는 각자의 갈 길을 가게 됐다. 수년 후 두 사람은 서로가 같은 시점에 런던에 있다는 사실을 알았지만 전화도, e메일도 없던 시절이라 연락할 방법이 없어 두 번째 기회 역시 날리게 된다. 평생 한번도 만나지 못하던 두 사람은 결국 인생 말년이 돼서야 겨우 접점을 찾았다. 두 사람 모두에게 좋은 친구였던 북독일 작곡가 마테존(Johann Matheson)이 서신으로 서로를 중개했다. 그러나 이때 두 사람은 하필 같은 돌팔이 의사에게 눈 수술을 받고 둘 다 눈이 먼 상태였다.
 
바흐와 헨델은 많은 점에서 비슷했고, 또 달랐다. 우선 다양한 지적 배경과 경력을 지닌 작곡가라는 점이 비슷했다. 바흐와 헨델은 각각 라틴어 전문학교와 할레대 법학부에서 공부했다. 이는 당시 유럽의 음악인들이 전반적으로 이전의 작곡가들과 달리 음악뿐만 아니라 다방면에 대한 관심이 많았던 분위기에 따른 측면도 있다. 두 사람과 ‘호형호제’ 하면서 지냈던 게오르그 필립 텔레만도 아버지의 등쌀에 못 이긴 진학이긴 했지만 라이프치히대 법학부에서 변호사 시험을 준비했었고 많은 이탈리아의 음악인들은 교황청이 만든 신학대에서 종교학과 문헌학을 공부하거나 당대 최고의 시인들을 찾아 다니며 협업 작업을 하는 과정에서 문학을 배우기도 했다. 그러나 두 사람의 사상적 다양성(Diversity)은 이전까지 종교 중심이었던 음악에 인간의 마음과 미세한 행위 동기를 담는 역할을 했고 사람들이 가사뿐만 아니라 음과 선율을 통한 개성 표현에도 관심을 갖게 하는 데 크게 공헌했다는 점에서 그 의미가 특별하다.
 
하지만 두 사람이 세상을 살아나가는 방식은 상이했다. 바흐가 지나치리만큼 진지했다면 헨델은 상당히 발랄하게 거침없이 자신의 코드를 과시하면서 살았다. 바흐는 각지에 흩어져 있었던 음악인들의 표현 방식과 개성을 새로운 방법으로 재해석해 백과사전식으로 작품을 써 나갔다. 따라서 스스로의 완벽주의로 인해 심한 스트레스를 받는 편이었다. 반면 헨델은 작품 자체의 완결성 못지 않게 사업적 흥행에도 큰 관심을 갖곤 했다. 오페라, 콘서트, 궁정 음악회 등 모든 장르에서 활약했던 그는 반드시 성공이 보장되는 경우에만 작업했다.
 
우리는 이 두 거장들이 살았던 바로크 시대 음악계가 ‘창조 산업(Creative Industry)’을 지향하는 오늘날의 경제 시스템과 많은 점에서 닮아 있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특히 매체를 통해 자신의 코드를 만들어 나가고 사람들에게 이해시키는 방식에서 크게 3가지의 접점을 찾을 수 있다.
 
첫째, 이 시절의 음악인들은 고객(Customer) 또는 사용자(User)를 만나는 인터페이스(Interface)를 직접 설계하고 개발하고 보급까지 했다.한마디로 모든 가치사슬(Value Chain)에 포괄적으로 개입하면서 창조적인 제품이 갖고 있는 특수성을 잃지 않기 위해 세심하게 공정 관리를 했던 셈이다. 지금 표현으로 말하자면 스마트폰의 부품을 생산하는 단계에서부터 서비스를 기획하고 UX(User Experience) 테스트를 통한 사용자의 관점에 대한 충분한 이해를 바탕으로 한 마케팅까지 감당한 것과 같다.
 
둘째, 이들은 자신만의 역량 모델(Competence Model)을 만들고 꾸준히 자기 관리를 해 나갔다.요즘 사람들이 전문가의 평전이나 경영자의 자서전을 통해 한 인물의 역량모델을 이해하는 것처럼 이 시절 작곡가들이 다양한 이해관계자들과 소통하면서 주장했던 여러 사상들, 제자들이 남겼던 기록이나 레슨의 흔적 등을 통해 이들의 역량 모델을 도출할 수 있다.
 
셋째, 그들은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전략을 구사했다.
지금의 엔터테인먼트 산업이 그러한 것처럼 바로크 시대에는 항상 새로운 작품을 내놓아야 했다. 클래식(Classic)이라는 단어의 사전적 정의대로 과거의 작품을 되짚고 그를 통해 역사적 가치를 반추하기 시작한 것은 19세기 초반이 돼서야 정착됐던 관행이다. 당시의 작곡가들은 항상 ‘hot’한 아이템을 내놓아야 했고 프로젝트의 계약주가 원하는 성과를 올리기 위해 나름대로 자극적이면서도 고급스러운 제품을 계속 업데이트해야만 했다. 결국 작곡가 나름대로 시장을 해석하고 그에 대처하기 위한 전략을 수립하지 못하면 생존 경쟁에서 밀려나기 쉬운 시기였던 셈이다. 바흐와 헨델은 그들 나름대로 자신만의 가치를 만들어 내면서 독보적인 이미지를 구축하고 경쟁 구도에 가장 성공적으로 대처해 나갔기에 현대에 이르기까지 거장 반열로 추앙받고 있는 것이다. 2회의 연재를 통해 각각 바흐와 헨델의 삶을 살펴 보고 오늘날 우리에게 주는 시사점을 정리해 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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