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시나리오플래닝을 연구하는 모니터그룹의 자회사 GBN(Global Business Network)의 피터 슈워츠 회장은 미국 경제전문지 포춘(Fortune)으로부터 2054년 세계10대 기업을 미리 선정해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해마다 세계 500대 기업을 발표하는 포춘은 2004년 이 조사의 50주년을 맞았고, 2054년에는 100주년을 맞는다. 미리 향후 세계 경제를 주도할 기업들을 파악해놓아야 한다는 게 당시 포춘 측의 요구였다.
이를 바탕으로 포춘이 선정한 2054년 세계10대 기업 순위는 다음과 같다. 1.아마존베이 2.도요타 3.시노가존 4.시노바이오코프 5.인도소프트 6.IBM 7.파텔코 8.네슬레 9.나노보틱스 10.뉴스코프다. 이름에서 알 수 있듯 도요타, IBM, 네슬레, 뉴스코프를 제외한 나머지 6개 기업은 가상 기업이다.
2054년 세계 10대 기업 순위에서 드러나는 몇 가지 특징을 알아보자. 첫째, 글로벌 선두 기업의 순위 변화는 우리의 예상보다 훨씬 빠르고 급격하게 전개되고 있다. 2004년 당시 세계 10대 기업 순위에는 도요타 외에도 GM, 포드, 다임러 크라이슬러 등 자동차 업체가 무려 4개나 속해 있었다. 때문에 당시 포춘이 도요타를 제외한 나머지 3개 업체를 향후 세계 10대 기업 순위에 자리하지 못할 기업으로 뽑았다는 건 상당한 화제였다. 흥미로운 점은 포춘의 예상이 2054년 전에 이미 맞아떨어졌다는 사실이다. 2010년 포춘의 세계 기업 순위에서 도요타만이 5위를 차지해 톱10에 속했을 뿐, 나머지 3개 자동차업체는 10위권 밖으로 밀려났다. 포드(23위), 다임러 크라이슬러(30위), GM(38위)였다.
둘째, 중국과 인도를 중심으로 한 기업구도의 재편이다. 2010년 현재 세계 인구의 약 37%를 차지하는 두 나라가 각각 2개씩 총 4개의 기업을 2054년 세계 10대 기업에 올린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슈워츠는 아시아 기업이 성공하는 이유와 관련, 미국이나 유럽에 비해 규제가 덜 까다롭고 중국, 인도, 일본의 엄청난 노령 인구를 기반으로 새로운 거대 고객층을 형성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중국을 근거지로 하는 시노가존(Sinogazon)은 세계 최대 정유회사인 미국 엑손모빌과 러시아 가즈프롬이 합병한 후 중국의 가스회사 시노가즈를 인수해 탄생한 천연가스 회사다. 시노바이오코프(Sinobiocorp)는 분자생물학과 유전공학의 혁명을 상업화하는 데 성공해 세계적 대기업이 될 것이라고 슈워츠는 전망했다. 파텔코(Pattelco) 역시 인도를 기반으로 성장한 회사로 전화, TV, 인터넷, 무선전화 기능을 합친 서비스를 선보이고 있다. 그는 시스코와 같은 통신장비회사, 노키아와 같은 휴대전화 제조회사 모두 파텔코의 경쟁 상대나 협력회사가 될 것이라고 예상했다.
셋째, 유통시장의 일대 변혁이다. 미국을 기반으로 한 세계1위 기업 아마존베이(AmazonBay)는 아마존과 이베이가 합병해 탄생한 회사다. 아마존베이는 검색엔진 애스크지브스까지 인수해 일반 유통뿐 아니라 은행, 신용카드, 보험 등 금융 서비스도 망라한 대형업체로 거듭난다는 예상이다. 2004년 당시 애스크지브스는 아직 나스닥 시장에 입성하지도 못한 구글의 강력한 경쟁자로 부각되고 있었으나 파산하고 말았다. 2004년 하반기 나스닥에 입성한 구글은 이후 무서운 속도로 사세를 확장하며 IT 거인으로 거듭나고 있다. 슈워츠의 예상대로 아마존과 이베이가 통합해서 구글과 대적할지 알 수 없지만 온라인을 기반으로 한 유통시장의 변혁은 이미 시작됐다고 할 수 있다.
미래를 상상하는 일은 즐겁다. 하지만 아무리 세계적인 기업이라 해도 변화를 주도하지 못하거나, 변화에 적절하게 대응하지 못하면 언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질지 모른다. 세계 최대 자동차업체였던 GM이 불과 7년 만에 과거의 지위를 상실했다. GM의 뒤를 이어 세계 1위 업체가 된 도요타도 리콜 사태 이후 그 미래가 확실하지 않다.
향후 기업에 국가의 의미도 과거보다 많이 퇴색할 것이다. 산업의 주도권과 해당 기업의 이익을 위해 국적과 본거지를 바꾸는 기업이 늘어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기업 간 인수 합병도 더욱 치열하게 전개될 것이며 이 대열에 현명하게 합류하지 못한다면 역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질 것이다. 많은 한국 기업들이 미래 트렌드를 예측하고, 그에 맞춰 현재 자사의 사업 전략을 되돌아 보는 일을 당장 시작하기 바란다. 현재의 큰 성공이 미래에 아무 것도 담보해 줄 수 없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한만현 모니터그룹 서울사무소 공동 대표 mhan@monitor.com
한만현 대표는 서울대 계산통계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보스턴대에서 컴퓨터공학으로 석사 학위를 받았다. LG정보통신 연구원을 거쳐 2010년부터 모니터그룹 서울사무소 공동 대표로 재직하고 있다. 조직 리더십, 멀티미디어, 공공 분야 컨설팅 분야의 전문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