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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EO를 위한 인문고전 강독

웃음: 생동감 가득한 혁명성

강신주 | 57호 (2010년 5월 Issue 2)

세계적인 인문학자인 움베르토 에코(Umberto Eco, 1932년 출생)는 <장미의 이름(Il nome della rosa)>이란 베스트셀러 소설 저자로도 유명하다. 이 소설은 중세의 한 수도원에서 수도사들에 대한 연쇄 살인 사건이 발생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프란시스코 수도사인 윌리엄이 살인 사건을 조사하기 위해 수도원으로 파견된다. 영민한 윌리엄은 살인 사건의 범인이 호르헤라는 늙은 맹인 수도사라는 것을 밝혀낸다. 수도사가 동료 수도사들을 차례대로 죽인 사건은 충격적일 수밖에 없다. 수도사란 원수마저도 사랑하라는 예수의 가르침을 따르겠다고 맹세한 사람들 아닌가. 도대체 호르헤가 예수도 경악할 만한 잔혹한 연쇄 살인을 저지른 이유는 무엇일까. 윌리엄은 그것이 수도원 도서관 장서였던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 BC 384322)의 <시학(Peri Poietikes)>과 관련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시학>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웃음이 지닌 가치를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있다.
 
기독교가 지배했던 중세시대는 신과 천국이 최상의 가치로 간주되던 시절이다. 신과 천국이 빛의 세상으로 여겨진 반면 인간과 현실 세계는 어둠의 세계로 이해됐다. 중세시대 사람들은 현실에서 이뤄지는 자신들의 삶이나 욕망을 긍정할 수 없었다. 신이 자신들의 삶을 감시하고 기록하여 사후에 심판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중세시대 사람들의 삶이 금욕적이고 경건한 빛을 띠게 된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이런 자기 검열적인 상황에서 인간에게 ‘웃음’이란 과연 가능한 것일까? 심판받을 인간이 웃는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일 수밖에 없다. 웃음은 신을 모독하거나 아니면 그의 권위에 도전하는 행위로 간주되었기 때문이다. 신의 충실한 종으로서 호르헤는 아리스토텔레스를 통해 웃음의 가치를 알게 된 배신자들을 처단하려고 했던 것이다. 아니 정확히 말해 더 이상 신에게 불경죄를 저지르지 않도록 자신의 동료들이 아예 웃지 못하도록 만들었다. 물론 그러기 위해서 호르헤는 그들을 죽여야만 했다.
 
<장미의 이름>으로 에코가 진정 말하고자 했던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웃음이 불가능할 때 인간은 무엇인가에 의해 억압되어 살아가게 된다는 통찰이다. 그의 통찰로부터 우리는 자유로운 사회란 웃음이 허용된 사회라는 사실을 배우게 된다. 여기서 우리는 프랑스 철학자 베르그송(Henri Bergson, 18591941)의 <웃음(Le rire)>이란 책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이 작은 책보다 웃음이 가진 혁명적 성격을 간파했던 책도 없었기 때문이다. 우선 베르그송은 우리가 언제 웃게 되는지, 정확히 말해 어떤 상황이 희극적인지를 흥미로운 사례로 이야기한다.

벌써 몇 해 전의 일이지만 디에프 근해에 여객선이 난파당한 기사를 읽은 적이 있다. 몇몇의 여행객이 소형 구명보트에 올라 천신만고 끝에 구조되었다. 그런데 그들의 구조에 용감하게 나섰던 세관원은 다음과 같은 첫 마디로 자신의 작업을 시작했다. “혹시 뭐 신고하실 것이 없습니까?”- <웃음(Le rire)>
 
여객선이 난파당해 여행객들이 위기에 빠졌던 일이 있었나보다. 이때 어느 세관원이 위기에 빠진 여행객을 헌신적으로 구조한다. 다행스럽게도 몇몇 여행객들은 세관원의 도움으로 목숨을 건졌다. 문제는 그 다음에 벌어진다. 물에 젖은 여행객에게 마찬가지로 물에 젖은 세관원은 이렇게 말한다. “혹시 뭐 신고하실 것이 없습니까?” 순간 베르그송만이 이 상황에서 웃음을 터뜨릴까?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은 마치 개그 프로그램을 보고 있는 듯 웃음을 지을 것이다. 세관원의 말에서 웃음이 터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상황에 어울리지 않은 세관원의 기계적인 행동과 말 때문이다. 현재 상황은 모든 사람이 죽음의 공포 속에서 벗어나 살았다는 기쁨에 취해 있는 순간이다. 세관원이 주변 상황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사람이었다면, 그의 첫 마디는 다음과 같은 종류였을 것이다. “이제 안심하세요. 저나 여러분은 이제 모두 안전합니다.” 그렇지만 세관원은 여객선이 난파당한 위기가 있었는지조차 망각한 것처럼 자신의 임무를 묵묵히 수행하려고 했다. 바로 이것이 우리에게 웃음을 자아내도록 만든 진정한 원인이었다. 그래서 베르그송은 웃음에 대해 다음과 같이 결론을 내렸다.
 
유연한 것, 끊임없이 변화하는 것, 생동적인 것에 반대되는 경직된 것, 기성적인 것 그리고 주의에 반대되는 방심, 요약하자면 자유스러운 활동성에 대립되는 자동주의, 이것이 결국 웃음이 강조하고 교정하려고 하는 결점이다.” - <웃음(Le rire)>
베르그송은 우주의 모든 것이 창조적 진화(L’évolution créatrice)라는 역동적인 과정에 있다고 보았던 철학자였다. 당연히 인간의 삶도 유동적이고 가변적이며 역동적일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이런 그에게 세관원의 기계적으로 반복되는 행동은 스스로 자신의 삶이 가진 자유스러운 활동성을 부정하는 것으로 이해되었을 것이다. 유연하고 생동하는 자신의 삶을 망각하고 기계적으로 습관적인 행동을 했기 때문에 세관원은 우리에게 웃음을 자아내게 했던 것이다. 이제야 알겠다. 찰리 채플린(Charles Chaplin, 18891977)의 모든 영화가 위대한 희극으로 기억되는 이유를 말이다. 채플린이 연기했던 다양한 주인공들은 모두 디에프의 어느 세관원처럼 주어진 상황에 역동적으로 대응하지 못하고, 자신이 익혔던 행동을 기계적으로 반복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채플린의 영화를 보고 웃음을 자아낼 수 있었다. 채플린의 천재성이 번뜩이는 대목이다. 그는 이미 베르그송이 통찰했던 웃음의 내적 논리를 직감적으로 알고 있었던 것이다.
 
채플린은 많은 영화로, 그리고 베르그송은 디에프의 세관원을 통해 무엇을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일까? 그것은 웃음이란 경직된 것과 기성적인 것, 그리고 한마디로 기계적으로 무반성적으로 이루어지는 행동들에 대한 우리 인간의 본능적인 저항이라는 점이다. 그래서 베르그송의 말대로 웃음은 기계처럼 맹목적으로 이루어지는 인간의 말과 행동을 교정하려는 힘을 갖고 있다. 웃음이 지향하는 것은 모든 인간이 유연하고 생생하고 자유롭게 살아가는 사회이기 때문이다. 너무나 소중한 일 아닌가. 기계적으로 반복되는 행동이 있는 곳을 비롯해 어느 곳에서나 웃음이 터져 나올 수 있다는 사실이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호르헤라는 수도사가 저지른 잘못을 반복해서는 안 된다. 누군가 우리의 행동을 보고 웃는다면, 분명 그것은 유쾌한 일은 아닌 것이다. 그렇지만 이때 우리는 자신의 삶이 기계적이고 무반성적으로 영위되고 있는지 반성해야만 한다. 상대방의 웃음을 통해 우리는 유연하고 활동적인 삶으로 회복할 수도 있으니까 말이다.
 
편집자주 21세기 초경쟁 시대에 인문학적 상상력이 경영의 새로운 돌파구를 제시해주고 있습니다. 동아비즈니스리뷰(DBR)가 ‘CEO를 위한 인문고전 강독’ 코너를 통해 동서고금의 고전에 담긴 핵심 아이디어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인류의 사상과 지혜의 뿌리가 된 인문학 분야의 고전을 통해 새로운 영감을 얻으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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