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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 앞의 야만인' 사모펀드, 와튼에서 새로운 길 선언

윤성원 | 55호 (2010년 4월 Issue 2)
월스트리트저널(WSJ) 기자였던 브라이언 버로와 존 헤일러가 쓴 <문 앞의 야만인들>이라는 책이 있다. 미국 사모펀드 콜버그 크래비스 로버츠(KKR)가 1988년 식품업체 RJR 나비스코를 310억 달러에 인수하는 과정을 생생하게 담은 책이다. 310억 달러는 지금도 큰 돈이지만 20년 전에는 100억 달러가 넘는 인수합병(M&A)도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엄청난 규모였다. 저자들은 인수전이 치열하게 벌어지던 6주 동안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는 양측의 공방을 생생하게 담아냈다. 이 책은 지금도 세계 MBA 스쿨에서 20년이 넘게 읽히고 있다. 2007년 영국 파이낸셜타임스(FT)가 선정한 최고 경제 경영 도서에 애덤 스미스의 <국부론>에 이어 2위에 올랐을 정도다.
 
1976년 제롬 콜버그, 헨리 크래비스, 조지 로버츠가 설립한 KKR는 차입 매수(LBO) 방식으로 업종을 가리지 않고 공격적인 M&A를 단행하는 사모펀드로 이름이 높았다. 기업 사냥꾼의 이미지가 강했기 때문에 저자들 또한 KKR을 ‘문 앞의 야만인’으로 묘사했다. 일부 피인수 기업 관계자들은 KKR을 극단적인 백인종 우월주의 단체인 큐 클럭스 클랜(KKK)에 비유할 정도였다.
 
얼마 전 KKR의 운영 담당자인 페리 괼킨이 와튼 스쿨을 찾았다. 와튼은 컬럼비아대, 시카고대 등과 함께 재무(Finance) 분야의 커리큘럼이 우수한 학교로 손꼽힌다. 투자은행, 사모펀드, 헤지펀드 등 다양한 금융 분야에서 이미 경력을 쌓고 온 학생들의 비중도 높고, 교수진도 WSJ나 FT 등에 심심찮게 등장하는 유명한 학자들이 대부분이다. 극도로 베일에 가려져 있는 사모펀드 업계 관계자들이 학교에서 특강을 하는 이유도 이와 무관치 않다.
 
KKR에 대한 오해
괼킨은 세간의 인식과 달리 KKR이 무지막지한 기업 사냥꾼이 아니라는 점을 거듭 강조했다. “KKR은 어떤 기업을 인수한 후 해당 기업을 조각내 알짜배기 사업부만 팔아버리고 금방 차익을 챙겨 떠나지 않습니다. M&A 거래를 통해 창출하는 가치 중 60%가 순수한 운영 개선을 통해 이뤄지죠. 세계적으로 거의 동일한 시간에 동일한 정보를 공유할 수 있는 현 시점에서 기업 가치 분석(Valuation)이나 인수 금융 구조(Deal Struc-ture)를 통한 차별화는 이미 특수성을 잃은 지 오래입니다. KKR 역시, 운영 개선 분야에 강점을 가진 경영 컨설턴트 및 산업별 전문가들의 영입과 관리에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그는 KKR이 2005년 인수했던 미국 완구업체 토이저러스를 예로 들었다. 당시 토이저러스는 취약한 재고 및 수익 관리, 토이저러스와 전혀 다른 사업 모델을 지닌 월마트와의 무리한 가격 인하 전쟁 등으로 심각한 재정난에 직면해 있었다. KKR은 토이저러스 인수 후 대대적인 운영 구조 변화에 나섰다. 미국, 유럽, 일본의 소매 시장 전문가로 구성된 운영 개선 팀을 만들고, 인터넷 소매 시장 전문가도 대거 영입했다.
 
그는 “기업 분석이나 M&A 거래를 완료시키는 일은 상대적으로 쉬운 편입니다. 정말로 중요하고 어려운 과제는 인수 회사의 가치를 어떻게 높이느냐는 거죠. 최소 3년간 해당 회사의 가치를 어떻게 높일지에 대한 매우 명확하고 구체적인 계획을 세우고, 이를 실행할 수 있는 역량과 전문성을 갖춰야 합니다.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아무리 싼값에 좋은 기업을 사들인다 해도 높은 수익을 기대하기 어렵습니다. 이게 바로 사모펀드 업계의 투자 기준입니다”라고 강조했다.
 
KKR의 새로운 길
실제 KKR은 상당한 변화를 모색하고 있다. 과거 KKR은 LBO 방식을 가장 먼저 도입하고, 이를 잘 활용한 최초의 사모펀드였다. 소액의 자기 자본에다 막대한 차입금을 더해 기업을 닥치는 대로 사들여 기업 가치가 오르면 해당 회사를 되파는 작업을 반복했다. 다른 사모펀드들도 너나 할 것 없이 같은 기법을 사용하면서 수익 창출이 어려워지자, KKR은 오퍼레이션을 통한 가치 창출로 방향을 선회했다. KKR은 어떠한 사모펀드보다도 재빠르게 운영 개선 전문 조직인 KKR 캡스톤을 설립했다. 다수의 기업 턴어라운드 및 실적 향상 전문가들을 고용함으로써 기업 가치 증진을 통해 수익을 창출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변화를 모방하는 회사들이 많아진 데다 글로벌 금융위기까지 겹치자 KKR은 또다시 새로운 시도를 하고 있다.
첫째, 투자은행 영역으로의 확장이다. KKR는 내부에 투자은행 부문을 만들어 자신들이 투자한 기업의 기업 공개(IPO)를 담당하는 등 새로운 수익 모델을 만들고 있다. 지난해 KKR은 자신들이 인수했던 할인점 체인 달러 제너럴의 IPO를 직접 진행했다. M&A 과정에서 발생하는 유가 증권 인수 업무(Underwriting), 재융자(Refinancing) 등도 2007년 신규 설립한 KKR 파이낸셜 홀딩스라는 회사를 통해 자체 수행하고 있다.
 
둘째, 뉴욕증권거래소(NYSE) 상장을 통한 본격적인 공개 기업으로의 변신이다. KKR은 최근 NYSE에 상장할 계획을 밝혔다. 금융위기 이후 예전처럼 몇몇 투자자들로부터 엄청난 액수의 돈을 모아 펀드를 조성하거나, 은행에서 돈을 빌리는 일이 쉽지 않아졌다. 때문에 과거 소수의 투자자들로부터 돈을 모아 극도의 보안 속에서 업무를 진행해왔던 사모펀드 업계 또한 자신들의 관행을 폐지할 수밖에 없어졌다. 주식 시장 상장으로 직면해야 할 규제는 늘어나지만 다양한 투자자들을 확보할 수 있기 때문에 안정적인 사업 추진이 가능하다.
 
세계 사모펀드 업계의 변화
괼킨이 와튼을 찾기 전인 지난 2월에도 사모펀드에 관한 흥미로운 컨퍼런스가 있었다. 와튼 사모펀드 컨퍼런스에 참석한 연사들은 선진국의 사모펀드 업계는 이제 완연한 성숙기에 접어들었으며, 금융위기와 맞물려 업계 전체의 수익성이 점점 낮아질 거라고 전망했다. 또한 사모펀드 업체들의 구조조정 및 양극화도 뚜렷해질 것이라 예상했다. 세계 자금 시장이 안정을 되찾고 있지만, 금융위기 때문에 이제 더 이상 적은 자기 자본과 엄청난 차입금을 통해 기업을 인수할 기회가 줄어들고 있다는 것. 사모펀드 업계의 비싼 운영 수수료에 대한 투자자들의 가격 인하 요구도 점점 늘어날 것이며, 각국 정부 또한 사모펀드 업계에 많은 세금을 부과할 가능성이 높아 업계 수익이 더욱 하락할 수밖에 없다고 진단했다.
 
특히, 한 연사는 “현재 존재하는 사모펀드 중 25% 이상은 향후 4년 내에 사라질 가능성이 높다. 금융위기로 업계 전체의 차입 능력이 감소한 상황에서 다음 펀드를 조성하지 못하는 사모펀드부터 문을 닫을 것이다. 그 결과, 소수의 차입금만으로 특정 산업 및 분야의 소규모 거래에서 전문성을 키운 일부 소형 특화 사모펀드, 상대적으로 긴 역사와 뛰어난 운영 역량을 강점으로 지속적인 차입 여력을 유지한 소수의 대형 사모펀드들로 시장이 양분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다른 전문가들은 세계 각국 국부펀드나 특정 지역 및 국가에 강점을 지닌 로컬 사모펀드들의 비중이 더욱 커질 거라고 예상했다. 국부펀드들은 엄청난 자금을 바탕으로, 매우 다양한 방식의 투자를 단행할 수 있다. 또한 운용 인력 또한 세계적 사모펀드 수준 이상으로 확보하고 있다. 국부펀드 규모가 크기로 유명한 몇몇 아시아 및 중동 국가들은 금융위기 와중에도 잇따라 세계 유명 기업들을 사들이며 M&A 시장의 큰손으로 부상했다. 이들의 거래가 세계 주요 산업의 추세 변화를 가져오고 있다. 실제 몇몇 중동 국부펀드들은 와튼 학생들을 데려가기 위해 학교에 찾아오기도 했다.
 
지역 전문성에 기반한 로컬 사모펀드들의 성장 역시 눈여겨봐야 할 부분이다. 컨퍼런스에 참가했던 KKR 출신의 한 투자 분석가는 “한국, 호주, 남미의 일부 로컬 사모펀드들은 현지에서 선진국 사모펀드와 견줄 수 있는 역량을 갖췄다”고 평가했다. 글로벌 사모펀드인 베인 캐피탈의 아시아 투자 전문가 역시 “한국 사모펀드 시장을 주의 깊게 관찰해오고 있으며, 로컬에서 경쟁할 수 있는 역량과 전문성을 구축하지 못해 공격적 진입을 주저해왔다”고 말했다.
 
글로벌 사모펀드 시장 및 주요 업체들의 변화 속에, 아직 운영 효율성 개선을 통한 수익 창출 단계에도 진입하지 못한 태동기의 한국 사모펀드 시장이 어떻게 변화할지를 주목해야 한다. 운영 개선을 통한 수익 창출의 모범 사례인 KKR은 과연 최근 인수한 OB 맥주를 어떻게 변화시킬까. 이를 지켜보는 일이 점점 흥미로워지는 이유다.
 
편집자주 동아비즈니스리뷰(DBR)가 세계 톱 경영대학원의 생생한 현지 소식을 전하는 ‘MBA 통신’ 코너를 연재하고 있습니다. 미국 하버드대 경영대학원, 펜실베이니아대 와튼스쿨, 스탠퍼드대 경영대학원, 매사추세츠공대(MIT) 슬론 스쿨, 영국 런던비즈니스스쿨(LBS), 중국 유럽국제공상학원(CEIBS) 등에서 공부하고 있는 젊고 유능한 DBR 통신원들이 따끈따끈한 소식을 전해드립니다. 통신원들은 세계적 석학이나 유명 기업인들의 명강연, 현지 산업계와 학교 소식을 전합니다. 독자 여러분의 많은 성원 바랍니다.
  • 윤성원 | - (현) 펜실베니아대 와튼 MBA CLASS OF 2011
    - 베인&컴퍼니 컨설턴트
    - 금융, M&A, 항공, 산업재 부문 컨설팅 프로젝트 수행
    sungwony@wharton.upenn.ed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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