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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움이라는 강박증

강신주 | 44호 (2009년 11월 Issue 1)
‘모던(modern)’이라는 말은 낡은 분위기를 풍긴다. ‘포스트모던(postmodern)’이라는 말이 주로 1990년대에 사용된 단어이므로, 모던이라는 단어가 우리에게 진부한 느낌을 주는 것은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모던은 ‘근대’ 혹은 ‘현대’라고 번역된다. 그런데 이런 번역어로는 모던이 가진 혁명적 뉘앙스를 읽기 힘들다. 모던이라는 말은 라틴어 ‘모데르나(moderna)’에서 유래했다. 과거 서양에서 모데르나라는 말은 ‘새로운’이라는 뜻의 형용사로 쓰였다. 서양 중세철학 문헌들을 살펴보면 ‘비아 모데르나(via moderna)’ 또는 ‘비아 안티쿠아(via antiqua)’라는 표현이 자주 나온다. ‘비아 모데르나’는 ‘새로운 길’을 뜻하는 반면 ‘비아 안티쿠아’는 ‘낡은 길’을 뜻하는 말로 쓰였다. 젊은 학자들은 나이 든 학자들의 사유를 ‘낡은 길’로, 자신들의 사유를 ‘새로운 길’로 묘사했다.

 
‘모던’은 새로움의 표현
우리는 근대사회(modern society)를 새로운 사회라고 이해하기보다는 현대사회(contemporary society)보다 낡은 사회라고 이해한다. 근대사회라는 용어가 서양에서는 19세기, 우리나라에서는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반에 주로 사용된 말이기 때문이다. 과거 사람들은 자신이 맞이한 새로운 사회를 ‘모던한 사회’라고 지칭했기 때문에, 현재 우리들은 모던한 사회, 즉 근대사회를 낡은 사회라고 보는 셈이다.
 
하지만 당시 사람들에게 근대사회란, 자신이 살고 있는 사회가 과거 어느 때와도 비교할 수 없이 ‘새롭다’는 강한 자부심과 경이로움을 담은 말이었다. 만약 21세기의 현대사회가 100년 전보다 더 새롭다고 생각한다면, 우리는 새로운 사회에 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 점에서 현대사회도 ‘모던한 사회’라고 할 수 있다.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모던’이라는 말은 특정 시대만을 가리키는 특수 용어가 아니라, 자신의 삶이 과거보다 새로울 때 언제든지 다시 사용할 수 있는 개념이라는 점이다. 그렇다면 ‘모던하다’, 즉 ‘새롭다’는 것은 우리 삶에 어떤 의미를 지닐까?
 
리오타르의 ‘모던’과 산업자본주의
‘모던’, 나아가 ‘포스트모던’이라는 표현을 철학적으로 깊이 숙고했던 장 프랑수아 리오타르(Jean-François Lyotard, 1924∼1998)의 이야기를 경청하면 이런 의문에 대한 답이 나온다. 그는 19세기 서양에서 무슨 일이 있었기에 당시 사람들이 새로운 사회에 살고 있다는 강한 자부심을 갖게 되었는지를 명쾌하게 분석한 프랑스 철학자다. 리오타르의 주요 저서는 그에게 세계적 명성을 가져다준 <포스트모던 조건(La Condition Postmoderne)>이다. 1979년 프랑스어로 출간된 이 책은 1984년 영어로 번역됐다. 영어로 번역되면서 <포스트모더니즘이란 무엇인가(What is Postmodernism?)>라는 리오타르의 논문 한 편이 덧붙여졌다. 다음 구절은 영어 번역본에만 실려 있는 내용이다.
 
어떤 산업도 협동조합주의, 상업주의, 그리고 중농주의를 반박하지 않고는 가능하지 않다. 어느 시대에 등장하든 간에, 모더니티는 기존의 믿음을 산산이 부수지 않고서는 그리고 ‘실재의 결여’를 발견하지 않고서는 존재할 수가 없었다. 동시에 모더니티는 다른 실재들을 발명하면서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
- <포스트모던 조건>
‘포스트모더니즘이란 무엇인가?’
 
리오타르는 ‘모던’이 산업자본과 분리할 수 없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산업자본은 기본적으로 시간적 차이, 즉 유행을 만들면서 이윤을 얻는 체계라 할 수 있다. 이 점에서 산업자본은 미리 주어진 공간적 차이를 이용하여 이윤을 얻으려는 상업자본과는 질적으로 다른 논리로 움직인다.
 
상업자본은 공간의 차이를 이용해서, 다시 말해 가격 차이가 나는 서로 다른 두 공간을 바탕으로 이윤을 얻는다. 가령 동대문 패션타운의 옷값과 춘천 의류 매장의 옷값 사이에 차이가 난다면 상업자본은 이윤을 남길 수 있다. 동대문에서 5만 원을 주고 옷을 사서 춘천에 가서 7만 원에 팔면 2만 원의 이윤을 남길 수 있으니 말이다. 그러니까 상업자본이 이용한다는 공간적 차이는 단순한 공간적 차이라기보다 가격 차이가 나는 공간적 차이인 셈이다.
 
반면 산업자본은 시간의 차이를 이용해서 이윤을 남기려 한다. 가령 휴대전화를 만드는 산업자본은 계속 새로운 제품을 만들어내서 기존 제품들이 유행에 뒤떨어졌음을 보여줘야 한다. 그래야 소비자들이 기존 제품을 버리고 계속 새로운 제품을 사도록 유혹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산업자본은 상업자본보다 더 탁월한 이윤 획득의 논리를 갖고 있다. 상업자본은 이미 존재하는 공간적 차이를 이용할 뿐이지만, 산업자본은 스스로 유행을 만들어 시간적 차이를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논리적으로 상업자본의 이윤 추구에는 한계가 있다. 만약 가격 차이가 나는 공간들이 사라진다면 상업자본의 이윤 추구는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반면 산업자본의 이윤 추구는 논리적으로 한계가 없다. 새로운 유행, 혹은 시간 차이를 만드는 주체가 바로 자기 자신이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소비자들이 집단적으로 특정 스타일을 선호하고 선택함으로써 유행이 생긴다고 믿는다. 그러나 이는 원인과 결과를 거꾸로 보는 생각일 뿐이다. 유행은 소비자들이 만드는 게 아니라 산업자본이 만들기 때문이다. 리오타르가 보았던 것도 바로 이러한 산업자본의 생리였다. ‘새로운’ 상품을 만들어 기존 상품을 낡은 것으로 만들면서, 소비자로 하여금 새로운 상품을 구매하도록 유혹하는 메커니즘을 산업자본이 갖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산업자본은 기존 가치나 통념을 해체하고, 새로운 세계를 만들어낼 수밖에 없다. 산업자본주의시대에 이르러 우리 인간은 드디어 ‘새로움’ 혹은 ‘낡음’과 관련된 시간의식을 갖게 된 셈이다. 리오타르는 모던이라는 말의 의미를 숙고하면서 바로 이 점을 성찰했다.
 
새로움을 강요하는 사회
리오타르는 ‘포스트모던’을 ‘모던’ ‘뒤에(post)’ 오는 시대라고 보는 통념을 거부했다. 포스트모던이 기존의 모던을 낡게 만든 뒤에 도래하는 것이라고들 하지만, 사실상 포스트모던 역시 모던의 핵심, 즉 무한한 새로움을 지향하는 강박증적 운동을 전제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포스트모던’이라는 말에서 중요한 것은 ‘모던’이 아니라 ‘포스트’라고 할 수 있다. 자기 자신마저 낡은 것으로 뒤로 보내야만 ‘새로움’이 진정 새로울 수 있기 때문이다.
 
어떤 작품도 우선 포스트모던해야만 모던하게 될 수 있다. 이렇게 이해된 포스트모더니즘은 곤경에 빠진 모더니즘이 아니라 발생 중에 있는 모더니즘이고, 이런 상태는 불변하는 것이다.
- <포스트모던 조건>
‘포스트모더니즘이란 무엇인가?’
 
산업자본과 소비사회가 추구하는 새로움은 역설적인 성격을 갖는다. 새롭다고 평가되는 어떤 상품도 자신의 존재를 계속 고집할 수 없다. 그렇게 하는 순간 그것은 더 이상 새로운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새로움은 부단히 자신을 극복해야만 새로움으로서의 정체성을 유지할 수 있는 법이다. 새로움을 일종의 강박증(obsession)으로 봐야 하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이제 우리는 리오타르가 왜 “어떤 작품도 우선 포스트모던해야만 모던할 수 있다”고 이야기했는지 이해할 수 있다. 그것은 “어떤 작품도 부단히 새로워야만 진정으로 새로울 수 있다”는 의미를 표현한 것이다. 리오타르의 지적이 옳다면 우리는 새로움을 강요받는 사회에서 살고 있다. 하지만 삶은 유한하다. 우리는 도대체 언제까지 새로움의 뒤를 쫓을 수 있을까? 어쩌면 새로움을 강박적으로 추구하다가 지금 더 소중한 것을 잃고 있는 것은 아닐까? 가끔은 뒤돌아보는 시간을 가질 필요가 있다. 우리는 생각보다 그렇게 오래 살진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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