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icle at a Glance
덴마크 훔레베크에는 연간 70만 명 이상이 찾는 스칸디나이바의 대표 미술관 ‘루이지애나 현대미술관’이 있다. 이름은 저택을 지은 지주 알렉산데르 브룬의 세 아내 이름인 ‘루이즈’에서 따왔다. 이곳을 사들여 1958년 미술관으로 바꾼 유제품 사업가 크누드 W. 옌센은 낡은 저택이 아닌 광활한 정원에 주목했다. 그래서 나무보다 낮게 설계한 전시동 3개로 정원과 주변 경치의 아름다움을 살리는 데 집중했고 이후 7번의 증축 과정에서도 그 원칙을 유지했다. 오래된 나무와 너른 잔디, 그 너머 외레순 해협과 스웨덴 해안의 풍광은 자연의 아름다움을 한껏 즐길 수 있게 한다. 여기에 다양한 야외 조각이 어우러지며 매력적인 정원이 완성됐다. 정원은 미술관에 사람이 끊이지 않게 했고 연간 회원권 수익에 기반해 안정적인 운영을 가능케 했다. 창립자 옌센은 이 미술관에 자기 이름이나 가문이 아니라 루이즈라는 이름을 그대로 남겼다.
출처 : https://louisiana.dk/planlaeg-dit-besog/abningstider/
세 명의 루이즈가 남긴 이름 덴마크 코펜하겐 중앙역에서 기차를 타고 북쪽으로 40분 정도 가면 훔레베크라는 역에 도착한다. 탑승객 대부분은 이곳에서 내려 약속이나 한듯 같은 방향으로 걸어간다. 남들보다 조금 더 빨리 가려고 종종걸음으로 걷는 사람도 있고,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따라가는 사람도 있다. 무리의 뒤를 따라 10여 분을 걸으면 1855년에 지어진 저택의 조그마한 입구에 도착한다. 연간 70만 명 이상이 찾는 스칸디나비아의 대표적인 미술관, 루이지애나 현대미술관(Louisiana Museum of Modern Art)이다.
입구는 소박하다. 그러나 낮은 복도를 지나 안으로 들어서면 풍경이 달라진다. 바다를 향해 기울어진 잔디밭이 펼쳐지고 오래된 나무와 조각, 외레순 해협의 수평선이 한 장면 안에 들어온다.
미술관에 정원이 딸린 것은 특별할 게 없다. 눈여겨볼 것은 둘의 순서다. 대개의 미술관은 건물을 먼저 세우고 남는 자리에 정원을 둔다. 여기서는 정원이 먼저였고, 건물이 그 사이로 들어왔다. 이 미술관은 건물보다 건물이 비켜선 자리를 봐야 이해할 수 있다.
그 자리에는 100년 된 이름과 나무가 먼저 있었다. 먼저 이름부터 보자. 미국 루이지애나주와는 아무 관련이 없다. 1855년 이 저택을 지은 지주 알렉산데르 브룬은 평생 세 번 결혼했는데 공교롭게도 세 아내의 이름이 모두 루이즈였다. 첫 번째 부인과는 1849년 결혼했지만 같은 해 헤어졌다. 두 번째 루이즈와는 1852년 결혼했고, 1855년 8㏊(헥타르)의 대지에 저택을 지어 ‘루이지애나’라고 이름 붙였다. 당시에는 저택을 지으면 별도의 이름을 붙이는 것이 관례였다.
두 번째 부인은 그해 세상을 떠났다. 브룬은 1858년 세 번째 결혼을 했는데 새 아내의 이름도 루이즈였다. 저택의 이름을 바꿀 필요가 없었다. 세 명의 루이즈가 한 집에 함께 산 것은 아니지만 세 사람의 이름은 루이지애나라는 뜻밖의 방식으로 남았다.
100년 뒤 이 집을 산 사람도 그 이름을 지우지 않았다.
예술에 관심이 생긴 치즈 사업가
그 사람이 크누드 W. 옌센이다. 1916년 코펜하겐 인근 프레데릭스베르의 유제품 상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독일과 스위스, 프랑스, 영국 등에서 언어와 무역 실무를 익힌 뒤 1939년 아버지가 운영하던 치즈 도매회사 ‘페테르 옌센’에 들어갔다. 1944년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 채 서른이 되기 전에 회사를 물려받았다. 전쟁이 끝난 뒤 덴마크의 소비가 살아나면서 회사의 매출과 직원 수는 불과 몇 년 만에 다섯 배로 늘어났다.
옌센은 미술사학자도 건축가도 아니었다. 미술과의 인연도 거창하지 않았다. 그는 회사의 사무실과 창고에 그림을 걸었다. 삭막하던 벽에 작품이 들어오자 공간의 분위기가 달라졌고 직원들도 그림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옌센은 이 경험을 회사 밖으로 넓혔다. 여러 기업이 젊은 작가의 작품을 공동으로 구입한 뒤 사무실과 구내식당을 돌며 전시하는 ‘직장의 예술’ 운동을 시작했다. 사람이 미술관을 찾아오기를 기다릴 게 아니라 미술이 사람이 일하고 생활하는 곳으로 찾아가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이후 덴마크의 대표 출판사 길덴달의 경영에도 참여하면서 작가와 예술가를 가까이 만났다. 미술은 취미를 넘어 그의 사업과 일상 속으로 들어왔다.
옌센이 추구한 현대미술관의 모습 그러다 보니 눈에 거슬리는 것이 생겼다. 기존 미술관이었다. 그가 보기에 당시 미술관은 사람을 주눅 들게 하는 곳이었다. 그는 덴마크 국립미술관을 그 전형으로 꼽았다. 웅장한 건축이 오히려 현대미술과 관람객 사이를 가로막는다고 봤다.
옌센이 원한 것은 그림을 보다가 정원을 걷고, 바다를 바라보다가 다시 전시실로 들어가고, 아이를 데려와도 눈치 보이지 않는 미술관이었다. 배가 고프면 밥을 먹고, 좋은 술도 한잔할 수 있어야 했다. 미술관 안에 식당을 두겠다고 하자 반대가 나왔지만 답은 간단했다.
“좋은 음식과 술은 예술을 경험하는 데 매우 중요하다.”
그는 현대미술을 바꾸려 하지 않았다. 사람들이 현대미술에 다가가는 환경을 바꾸려 했다. 처음엔 코펜하겐에서 조금 더 가까운 룽스테드룬드 인근에 미술관을 세우려 했다. 그러나 토지 소유자가 현대미술을 못마땅하게 여겨 매각을 거절했다고 전해진다. 이후 더 북쪽 훔레베크에서 루이지애나 저택을 만났다.
1955년 그가 사들인 것은 방치된 저택과 외레순 해협이 내려다보이는 약 8㏊, 약 7만9338㎡ 규모 정원이었다. 저택은 낡았지만 정원에는 수령이 오래된 거목이 남아 있었고 잔디밭은 바다 쪽으로 완만하게 기울었다. 맑은 날에는 해협 건너 스웨덴 해안까지 보였다. 사실상 저택이 아닌 정원을 산 셈이었다.
젊은 건축가들과 정원이 돋보이는 미술관을 열다 정원은 이미 있다. 이제 전시관만 지으면 된다. 옌센이 처음 설계를 부탁한 사람은 건축가 예른 웃손이었다. 그러나 웃손은 시드니 오페라하우스 작업으로 바빠 제안을 받아들이지 못했고 기회는 젊은 건축가 예르겐 보와 빌헬름 볼레르트에게 돌아갔다.
옌센과 볼레르트 두 사람은 바로 도면부터 그리지 않았다. 몇 달 동안 부지를 걸어 다녔다. 어느 나무를 남길지, 어디서 바다가 가장 잘 보이는지, 땅의 높낮이가 어떻게 변하는지를 살폈다. 건물을 어디에 세울지보다 사람들이 정원을 어떻게 걸을지를 먼저 정했다.
3년이 흐른 1958년 미술관이 문을 열었다. 거대한 본관 대신 낮은 전시동 세 개를 짓고 유리 복도로 연결했다. 복도를 걸으면 한쪽에는 작품이, 다른 쪽에는 정원이 보인다. 건물은 수평으로 길게 뻗고, 나무보다 높이 솟지 않는다.
미술관의 이름을 무엇이라 지을까. 지역 이름을 붙일 수도, 창립자 자신의 이름을 내세울 수도 있었다. 옌센은 저택의 이름을 그대로 썼다. 훗날 그는 회고록에 이렇게 적었다.
“훔레베크 현대미술관이나 옌센 미술관이라고 부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사람들이 웃다 쓰러졌을 것이다.”
개관 이듬해, 방향을 틀다 루이지애나가 처음부터 국제미술관이었던 것은 아니다. 옌센의 애초 구상은 덴마크 현대미술을 소개하는 공간이었다. 그런데 1959년 독일 카셀에서 5년마다 열리는 국제미술전 도쿠멘타를 찾은 그는 자코메티, 칼더, 헨리 무어의 작품 앞에서 충격을 받았다. 훗날 그는 이를 ‘도쿠멘타 쇼크’라고 불렀다. 덴마크 작가만으로는 동시대 미술의 흐름을 보여줄 수 없다는 판단이 섰다.
그는 이사회의 반대를 무릅쓰고 방향을 국제 미술로 돌렸다. 문을 연 지 1년 만에 설립 취지를 수정한 셈이다. 창업자는 대개 자신의 첫 계획에 애착을 갖는다. 계획을 바꾸는 것은 첫 판단이 틀렸다고 인정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첫해 성과도 좋았다. 당초 관람객 4만 명을 예상했지만 실제로는 20만 명 이상이 찾아왔다. 지금도 잘되는데 굳이 노선을 바꿀 필요가 있느냐는 만류는 당연했다.
허나 첫해의 흥행은 노선을 고수할 이유가 되지 못했다. 잘되지 않을 때 방향을 바꾸는 것은 비교적 쉽다. 잘되고 있을 때 스스로 기준을 높이는 일은 어렵다. 정원에 건물을 맞춘 사람이니 처음 세운 계획보다 동시대 미술을 앞세우는 것도 그다웠다. 그는 덴마크 관객이 세계 미술의 흐름과 직접 만나기를 바랐다. 그 선택으로 훔레베크의 작은 사립 미술관은 유럽 현대미술의 주요 무대가 됐다.
일곱 차례 증축하다 루이지애나는 한 번에 완성된 미술관이 아니다. 관람객과 작품이 늘 때마다 조금씩 몸집을 키웠다. 1966년과 1971년에는 서관을, 1976년에는 음악과 강연을 위한 콘서트홀을 지었다. 1982년에는 대형 작품을 위한 남관을, 1991년에는 전체를 하나의 순환 동선으로 잇는 동관을 완성했다. 이후 어린이관과 상점, 편의시설도 차례로 더했다.
흥미로운 것은 규모를 키우면서도 건물의 존재감은 오히려 감췄다는 점이다. 큰 전시관은 경사지와 지하에 묻고, 새 건물은 나무 사이에 낮게 앉혔다. 증축 때마다 다른 건축가를 불러 개성을 뽐내게 하지도 않았다. 처음 설계한 건축가들이 오랫동안 확장을 맡아 전체의 일관성을 지켰다. 2000년 이후에는 넓히기보다 냉난방과 습도, 보안과 전시 시설을 현대화하는 데 집중했다. 60여 년간 증축과 개조를 거쳤지만 여전히 작은 미술관처럼 보인다. 건물을 위해 정원을 줄인 것이 아니라 정원을 지키기 위해 건물을 숨겼다.
정원이 관람의 리듬을 만든다 보통의 미술관에서 창은 골칫거리다. 자연광은 작품을 상하게 하고, 바깥 풍경은 집중을 흐린다. 그래서 대부분의 미술관은 외부를 차단한 흰 벽 안에 작품을 가둔다. 루이지애나는 거꾸로 갔다. 전시실에서 고개를 돌리면 거목이 보이고, 유리 복도를 걸으면 잔디밭이 따라온다.
사람은 수십 점의 작품에 연속해서 집중하지 못한다. 아무리 좋은 작품도 계속 보면 피로해진다. 루이지애나에서는 그 피로가 쌓이기 전에 정원이 끼어든다. 작품을 보고, 나무를 보고, 다시 작품을 본다. 정원을 걷는 것이 작품 관람의 일부다. 아니, 작품을 보는 것이 정원 관람의 일부다.
이곳의 정원은 정교한 화단이나 희귀 식물로 승부하지 않는다. 오래된 나무와 넓은 잔디, 완만한 경사, 바다의 수평선이 전부다. 정원 끝에서 바라보는 외레순 해협은 미술관 소유가 아니지만 시각적으로는 정원 안에 들어와 있다. 일본 정원에서는 멀리 있는 산이나 숲을 정원의 일부처럼 끌어들이는 기법을 차경(借景)이라 부른다. 루이지애나가 빌린 경치는 해협과 그 너머 스웨덴 해안이다. 옌센이 돈을 주고 산 땅은 8㏊지만 미술관 안으로 끌어들인 풍경은 외레순 전체다.
정원과 전시가 섞이니 야외 조각이 많아진 것은 자연스럽다. 조각공원에는 헨리 무어, 알렉산더 칼더, 장 아르프, 막스 에른스트, 호안 미로의 작품이 흩어져 있다. 무어의 청동 조각에는 구멍이 많다. 실내에서는 그저 형태의 일부인 구멍으로, 이곳에서는 바다가 들어온다. 칼더의 모빌은 실내에서는 공기의 미세한 흐름에 흔들리는 조각이지만 해안 정원에서는 바람의 방향과 세기를 그대로 보여준다.
여름과 겨울, 맑은 날과 흐린 날의 작품이 다르다. 그래서 대표작이 무엇이냐는 질문에는 답하기 어렵다. 방문객이 가장 오래 기억하는 것은 작품 한 점이 아니라 작품과 바다와 나무가 함께 있던 장면이기 때문이다.
정원을 걷다 발견한 ‘루이지애나 공원의 나무 안내도’는 필자의 기억에 오래 남았다. 미술관은 일본 단풍과 향나무, 소나무를 비롯해 28종의 나무가 어디에 있는지를 별도의 지도에 표시해뒀다. 작품 옆에 붙은 작가 설명처럼 나무에도 이름과 자리를 부여했다. 조각뿐 아니라 수목과 정원도 컬렉션의 일부로 관리한다는 뜻이다. 전시가 끝나면 빌려온 작품은 돌려보낼 수 있다. 그러나 나무는 한 번 베면 되돌릴 수 없다. 증축 때 어느 나무를 남길지부터 고민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정원이 만든 회원제 이 미술관의 가격표에도 정원이 포함돼 있다. 2026년 기준 성인 입장료는 145크로네, 약 3만 원이다. 학생은 130크로네, 18세 미만은 무료다. 2024년 관람객은 약 71만6000명이었다. 한국 기준으론 싸지 않지만 코펜하겐에서는 점심 한 끼 값이다. 2026년부터 일부 유럽 역외 방문객에게 32유로를 받는 루브르와 비교해도 상당히 저렴하다.
눈여겨볼 것은 회원제다. 1인 연회원권이 490크로네. 입장료가 145크로네이니 네 번이면 본전이다. 본인과 손님 한 명이 함께 입장하는 회원권은 595크로네. 두 사람이 두 번 방문하면 정상 입장료가 580크로네이니 두 번이면 회원권 값에 거의 닿는다. 회원에게는 카페와 숍 10% 할인, 전시 개막 초대, 제휴 미술관 혜택도 따라온다.
입장료에 견줘 연회비가 유난히 싸다. 여기에도 정원이 작동한다. 다른 미술관이라면 다시 찾는 계기가 대개 새 전시다. 그러나 정원은 그것이 바뀌지 않아도 계절마다 다시 올 이유를 만든다. 회원은 봄이 오면 오고, 새 전시가 열리면 오고, 날씨가 좋으면 정원을 걸으러 온다. 올 때마다 바다가 보이는 카페에서 밥을 먹고 숍에서 디자인 상품을 산다. 그러다 보니 카페도 관람 뒤 마지못해 들르는 곳이 아니라 사람들이 이 미술관을 찾는 이유의 하나가 됐다.
입장료 수입만 따지면 회원이 자주 올수록 손해다. 그러나 옌센은 입장권보다 다시 오고 싶은 하루를 팔았다. 정원이 없었다면 이 계산은 성립하지 않는다. 루이지애나는 정부의 운영 지원을 받는 독립 비영리기관이지만 재원의 대부분은 입장료와 회원비, 카페와 숍, 민간 재단 후원에서 나온다. 국제전의 운송비와 보험료, 바닷바람을 맞는 건물과 8㏊ 정원의 관리비를 감당하면서도 안정적으로 운영된다. 입장료 하나에 기대지 않고 사람들이 오래 머물고 다시 돌아오는 구조를 만든 덕이다.
자신의 이름보다
세 명의 루이즈를 남긴 자산가 자산가가 미술관을 짓는 이유는 다양하다. 수집품을 보존하려고, 가문의 이름을 남기려고, 기업 브랜드를 높이려고 짓는다. 옌센은 미술관에 자기 이름을 붙이지 않았다. 가문의 사업으로 만들지도 않았다. 1958년부터 1993년까지 35년간 직접 이끈 뒤 물러났고 관장직은 훗날 테이트 모던 초대 관장이 되는 라르스 니트베 등 전문 경영자에게 넘어갔다.
건축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새 주인이 됐다고 오래된 저택과 나무를 지우지 않았다. 돈으로 땅은 살 수 있지만 장소에 쌓인 시간은 살 수 없다. 이름도 그랬다. 옌센과는 아무 상관도 없는 세 명의 루이즈가 남긴 이름을 지우고 자기 이름을 새길 수 있었지만 그러지 않았다. 건물을 나무보다 낮춘 것도, 있던 이름을 그대로 둔 것도 같은 마음에서 나왔다. 자기를 앞세우는 대신 이미 있던 것에 자리를 내주는 마음이다.
그가 정원 곳곳에 남긴 원칙은 단순하다. 건물은 나무보다 높지 않아야 하고, 작품과 작품 사이에는 자연이 있어야 하며, 아이도 환영받아야 하고, 미술관은 한 번 보고 떠나는 곳이 아니라 다시 돌아오는 곳이어야 한다. 좋은 정원은 주인의 부가 아니라 주인이 세상을 보는 눈을 보여준다. 옌센이 치즈와 출판으로 모은 자산으로 남긴 가장 큰 유산은 4000여 점의 미술품이 아니라 사람들이 예술과 자연 사이에서 반나절을 보내는 방식이다. 그리고 루이지애나에는 옌센의 이름 대신 세 명의 루이즈가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