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략으로 다시 읽는 역사

성장 발목을 잡은 ‘再造之恩’의 망령

344호 (2022년 05월 Issue 1)

Article at a Glance

임진왜란 때 명나라가 조선에 군대를 파병한 것은 일본군이 중국 땅에 들어오는 것을 막기 위한 실리적인 선택이었다. 이를 두고 선조가 ‘재조지은’을 강조하며 명나라에 대한 충성을 맹세한 이유는 전란 극복의 공을 관민이 아닌 자신에게 돌리기 위한 궤변에 가까웠다. 하지만 이후에도 끈질기게 살아남은 ‘재조지은’의 망령은 병자호란과 상해임시정부의 항일 무력투쟁 등에 영향을 미치며 전략적 사고를 방해했다. 기업도 과거의 잘못된 어젠다가 현재 성장의 발목을 잡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볼 필요가 있다.



2017년 12월, 문재인 대통령의 비서실장을 지낸 노영민 주중국 대사가 신임장을 제정하는 자리에서 베이징 인민공회당의 방명록에 적은 ‘만절필동 공창미래(萬折必東 共創未來)’가 굴욕외교를 자청했다는 논란을 빚었다. 왜 이런 논란이 벌어졌을까?

충청북도 괴산군 화양동 서원에는 만동묘(萬東廟)가 있다. 만동묘는 임진왜란 때 조선 파병을 결정한 명나라 황제 신종 만력제(神宗 萬曆帝)와 마지막 황제 의종 숭정제(毅宗 崇楨帝)를 기리는 사당이다. 만동묘란 이름은 만절필동에서 두 글자를 따 온 것이라 사실은 만절필동묘를 의미한다. 만절필동은 중국의 장강(長江)이 굽이굽이 방향을 바꾸며 흐르지만 결국 동쪽에 다다른다는 뜻으로 모든 일이 순리대로 된다, 즉 사필귀정(事必歸正)을 의미한다. 그러나 조선의 선조가 임진왜란이 끝난 후 “만절필동 재조번방(萬折必東 再造蕃邦)”이라는 글을 쓴 이후 만절필동은 제후국 조선이 천자국 명나라에 바치는 변함없는 충절을 의미하게 됐다. 여기서 선조가 조선을 나라(國)가 아닌 번(蕃)으로 낮춰 지칭한 점이 눈에 띈다. 이는 임진왜란 때 명이 천자의 군대를 조선에 보내 일본군을 저지하고 멸망의 위기에 처했던 조선을 구함으로써 결국 나라를 다시 세워 준 은혜(재조지은, 再造之恩)를 잊지 않겠다는 충성의 맹세였다. 이후 중화주의에 입각한 재조지은의 망령은 선조 이래 조선의 정신을 지배하는 근본이 돼 정치, 국방, 외교, 경제, 문화에 결정적 영향을 미쳤고, 결과적으로 조선의 시야를 좁히면서 몰락의 길로 이끌었다. 또 상해임시정부의 항일 무력 투쟁의 전략에 이어 현재의 외교 관계에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다. 다음에서 재조지은이 왜 망령인지 그 이유와 그것이 오랜 기간 역사에 미친 영향을 비판적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조선은 과연 ‘재조지은’을 입었을까?

선조는 명나라 황제가 있는 곳을 향해 등을 돌리고 앉지도 않을 정도로 명나라의 파병 은혜를 고마워했다. 하지만 과연 명나라가 임진왜란에서 조선을 도운 게 맞을까? 맞는다고 치더라도 아무런 이해타산 없이 도왔을까?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국가 간에는 영원한 적도, 영원한 친구도 없다. 외교는 실리에 입각해 이뤄지는 것이다. 당시 임진왜란을 일으킨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최종 목표는 명나라였다. 그는 명나라 정벌에 앞서 당시 최강국인 스페인과 포르투갈에 자신의 명나라 정벌 계획을 통보했으며1 조선에 보낸 국서에도 분명히 목표가 명나라임을 밝혔다. 그는 선조에게 보내는 국서에 “정명향도 가도입명(征明嚮導 假道入明)”이라고 적었다. “조선은 신하로서 명나라 정벌 길을 앞장서 인도하라. 조선의 길을 빌려 명나라에 쳐들어가고자 한다”는 뜻이다. 국서 전달 역할을 맡은 대마도주 소 요시토시(宗 義智)는 조선을 일본의 신하로 하대한 내용이 그대로 조선 조정에 전달되면 목이 달아날까 두려워 “정명가도(征明假道)”로 축약해 개작했다. 명나라는 임진왜란 참전을 통해 명나라에 침입하려는 일본군을 조선 땅에서 맞이해 싸우고 조선군의 협력뿐 아니라 식량과 물자를 얻었다. 명군은 전투에서 항상 조선군을 앞세우는 한편, 후선에서 대포나 쏘아대다가 세가 불리하면 먼저 철수해 버렸다. 제2차 진주성 전투가 벌어진 1593년 일본과 강화협상을 하던 심유경(沈惟敬)은 일본군이 진주성을 공격한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명나라 군대에 피하라고 통보했다. 결국 고립된 조선군과 조선 백성이 몰살됐지만 명나라 군대는 이를 방관했다. 명나라 군대를 온전히 보존하고 조선군이 앞장서 싸우게 하는 것이 명나라의 의도였던 것이다. 수세에 몰려 남해안에 웅거하고 있는 일본군을 공격해 조선에서 몰아낼 생각도 없었고, 오히려 전쟁을 끝내는 조건으로 일본에 조선의 하삼도(경상, 전라, 충청)를 떼어줄 생각까지 했다. 이는 명나라가 조선의 강토와 백성을 보호하기는커녕 자국의 안위만 생각했다는 명백한 증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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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일본군은 얼레빗이고 명군은 참빗”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명군의 조선 백성 수탈은 심각한 수준이었고 횡포가 극심했다. 경주성을 탈환하는 전공을 세운 병조참판 박진 장군은 명군 장수 누승선(婁承先)에게 구타를 당해 입은 갈비뼈 골절상의 후유증으로 사망했다. 명군 장수들은 조선의 대신과 장수들을 무릎 꿇리고 구타하는 만행을 서슴지 않았다. 명나라 입장에서는 군사전술 측면에서 일본군이 중국 땅에 들어오기 전에 막는 것, 즉 일본군을 조선 땅에 묶어두는 것이 최선의 선택이었다. 일본군을 격파해 조선 땅에서 몰아내는 것도 명나라 입장에서 보면 하책이었다. 조선에서 일본군이 패퇴하면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격노해 산동이나 광동으로 직접 일본군을 상륙시킬 가능성도 감안해야 했기 때문이다. 냉정하게 보면 이순신 장군이 이끈 세계 최강의 수군과 조선 육군이 운용한 세계 최첨단 화약 무기인 화차, 비격진천뢰가 명나라를 구한 것이다. 즉, 명나라가 조선을 구한 것이 아니다.

선조는 왜 재조지은을 내세웠을까?

명군은 전투 의지가 소극적이었고 조선의 3개 도를 일본에 할양하는 방안을 고려했다. 이를 감안하면 명나라가 조선을 도운 것이 아니라 조선이 오히려 명나라 본토가 위험에 빠지지 않도록 안전판 역할을 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선조가 재조지은을 내세운 이유는 무엇일까?

두 가지 이유를 생각해볼 수 있다. 첫째, 조선 조정이 임진왜란을 예측하고 대비하지 못해 명나라 조정에 근심을 끼쳤으므로 그 책임을 선조에게 물을 가능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임진왜란 기간 중 명나라 조정 일각에서 선조 폐위가 거론된 적이 있었다. 따라서 명나라 조정에 대한 무한한 충성심을 공개적으로 표명해 왕위를 지키려는 절실한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선조는 앞서 명나라 조정의 눈치를 보는 데서 받는 스트레스를 여러 차례의 선위 파동으로 표출했으며 세자인 광해와 신료들에게 자신의 입지를 확인하려는 치졸한 행동을 했다.

둘째, 백성에 대한 권위 손상을 최소화함으로써 왕권을 지키고자 한 얄팍한 술수라고도 볼 수 있다. 백성과 궁궐을 버리고 명나라로 도주하려 했던 왕에게 조선 백성은 분노하고 있었다. 왕궁을 약탈하고 불을 지른 백성들의 반감을 선조 또한 잘 알고 있었고 내심 크게 경계했다. 이순신 장군을 야박하게 대하며 목숨을 빼앗으려 한 것이나 의병장들을 오히려 잔인하게 탄압하면서 단 한 명의 의병장도 공신 목록에 올리지 않은 치졸함을 보인 이유이기도 하다. 선조는 재조지은을 강조하면서 전란을 극복하는 데 조선 군민이 세운 공은 없으며 천자의 군대를 보낸 명나라 황제의 은혜로 나라를 구한 것이라고 강변한 것은 아닐까. 또 이를 통해 전란 극복의 공이 명나라 원군을 불러들인 자신에게 있다는 궤변적 논리를 편 것은 아닐까.2 선조가 전란에 공을 세운 군인에게 수여한 선무공신은 18명에 불과한 데 반해 선조를 의주까지 모신 공로를 인정받은 호성공신은 86명, 이 중 내시가 선무공신보다 많은 24명이나 됐다. 재조지은에 입각한 임진왜란 논공행상은 조선군 관민의 국가에 대한 신뢰와 충성심을 뿌리부터 흔들어 놓았다. 적을 피해 도망간 이가 적과 싸우다 죽은 자의 땅까지 빼앗아 먹는 것과 다름없는 논공행상을 보며 나라를 위해 충성하고 목숨 바쳐 적과 싸울 백성이 어디에 있을까? 병자호란이 일어났을 때 정규군 장수들이 눈치를 보며 청군과의 대규모 전투를 회피한 것이나 제대로 대오를 갖춘 의병이 일어나 싸운 기록이 없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귀결이었다. 재조지은은 선조의 신념이나 철학이라기보다 그저 바람막이이자 합리화를 위한 억지에 불과했다. 재조지은을 합리화하기 위해 조선 관민의 투쟁을 폄하한 선조의 임진왜란 논공행상은 조선 신민의 통합 정신을 와해하며 왕조 몰락의 시작을 알리는 불길한 서곡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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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조지은의 망령, 병자호란을 부르다

민족사 최대 치욕 중 하나인 병자호란은 겪지 않아도 될 전쟁으로 복잡하게 얽힌 조선 지배 계층의 이해관계가 불러들인 재앙이었다. 그 재앙을 부른 게 재조지은의 망령이다. 대북이 장악한 광해군 조정에서 소외된 서인은 광해군이 영창대군을 죽이고 명목상 모친인 인목대비를 폐한 것을 계기로 반정을 일으켰다. 광해군의 실리 외교, 즉 명나라와 만주족 사이에서 중립을 지키고자 한 것이 명나라가 베푼 재조지은을 저버리는 것이라는 명분도 내세웠다.

반정 이후 등극한 인조와 서인 세력은 대륙의 세력 판도와 추이를 무시했다. 반정의 명분인 재조지은에 입각해 친명배금을 분명히 하고 만주족을 향해 날을 날카롭게 세워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을 불러들였다. 형제의 맹을 맺고 마무리된 정묘호란은 비교적 소규모인 만주군 3만 명이 침입하고 평안도 이남으로 내려오지 않아서 큰 피해가 없었다. 하지만 병자호란은 만주철갑기병대 팔기군의 주력이 남하해 한양까지 점령했으며 약 50만 명의 조선 백성이 포로로 잡혀가는 비극을 초래했다. 병자호란이라는 비극을 감수하면서까지 인조가 친명배금을 고수한 이유는 재조지은에 집착했기 때문이다. 명나라를 배척하고 만주족에 다가가는 것은 반정 세력 스스로 본인들의 정치적 입지를 부정하는 것이었다. 청 태종 홍타이지의 황제 즉위를 알리려 입국한 청나라 사신들을 내쫓은 뒤 인조가 백성들에게 내린 유시 내용이 그 고뇌의 흔적을 남긴다.

“…이에 강약과 존망을 헤아리지 않고 의로운 결단을 내려… 서울 사람들은 전쟁의 참화가 눈앞에 박두했음을 알면서도 오히려 오랑캐를 배척하고 거절한 일을 통쾌하게 여기고 있다. …충의로운 선비는 각자의 책략을 다하고 용감한 사람은 종군을 자원해.…”

백성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해야 할 국정 책임자가 한 이야기치고는 무책임의 극치가 아닐 수 없다. 결국 본인들의 집권 명분인 재조지은을 고수해 반정으로 얻은 지위를 지키겠으며 그 결과 만주 군대의 침입으로 발생할 백성의 피해는 백성들이 알아서 감당하라는 황당한 논리를 펴면서 ‘존망을 헤아리지 않는 의로운 결단’이라고 포장하고 있다. ‘존망을 헤아리지 않는 의로운 결단’이 허용되는 정치 체제는 없다. 절대군주라 해도 백성의 생명과 재산을 마음대로 내던지는 순간 권위를 잃고 자리에서 쫓겨나는 것이 역사의 상식이다. 그런데도 조선 조정은 어떻게 명맥을 이어갔는지 신기할 따름이다.3

근대화 의식의 형성을 가로막은 소중화론

병자호란이 끝난 후 청나라가 산해관을 넘어 북경을 점령하고 명나라가 멸망하자 조선 사대부들은 한족 문명, 즉 중화(中華)가 명의 제후국이자 재조지은의 은혜를 입은 조선에 유일하게 존재한다고 생각했다. 명나라가 망한 지 60년이 지난 1704년(숙종 30년)에 송시열의 유지를 받든 제자 권상하가 주축이 돼 화양동 서원에 만동묘(萬東廟)를 짓고 조선 파병을 결정한 신종 만력제와 마지막 황제 의종 숭정제를 기린다.4 또 창덕궁 안에 대보단(大報壇)을 쌓고 신종과 의종, 초대 황제 태조 홍무제(太祖 洪武帝)에게 제사를 올렸다. 조선이 중화의 전통을 지킨다는 소중화론(小中華論)은 조선 사대부들의 선민의식과 우월감을 고취해 청나라와 일본의 문물을 오랑캐의 문화라고 백안시하는 오류를 범하게 했다. 소중화론이 어느 정도로 팽배했는지를 알려주는 사례가 연암 박지원의 『열하일기(熱河日記)』이다. 『열하일기』는 일종의 불온서적 취급을 받으며 조선 사대부들의 비난을 받았는데 그 이유가 바로 열하일기에 명나라의 마지막 연호 숭정을 쓰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조선은 청나라 연호를 쓰지 않고 ‘숭정 ○○년’ 식으로 표기했는데 연암은 『열하일기』에서 ‘전란이 끝난 후 ○○년’ 식으로 표현했다. 1700년대는 대항해시대가 끝나고 국제무역이 활발히 이뤄지며 산업혁명이 태동하기 시작한 때였다. 중국과 남미, 유럽을 잇는 삼각무역도 활발해 유럽의 발달한 문명이 청나라로 흘러들어 왔고 일본도 나름대로 네덜란드 상인을 앞세워 세계 교역의 한 축을 담당하며 유럽과 소통하고 있었다. 해금 정책을 고수한 조선에서 청나라와의 조공 무역과 일본에 보낸 조선통신사는 18세기 산업 기술의 흐름을 감지할 수 있는 유일한 통로였다. 하지만 사절단을 이끈 조선 사대부의 중화의식5 은 청나라의 문물은 명나라의 것이 아니라고 배척하고 일본의 문물은 아예 쳐다보지도 않았다. 19세기 중반 세계 최대 도시는 도쿠가와 막부의 수도인 에도(지금의 도쿄)였지만 조선 사대부는 번성한 에도가 산업, 기술, 무역 차원에서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이해하려고 하지 않았다는 게 더 정확할지 모른다. 18세기 중반 조선 통신사를 따라간 조선 의원 남두민과 일본 의원 기타야마 쇼우 간의 대화는 문제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잘 말해준다. 일본 의원이 당시 일본에서 관심을 끌었던 인체 해부에 관해 조선 의원의 의견을 묻자 “갈라 보지 않고 알아야 진정한 의술”이라고 꾸짖는다. 틀린 얘기는 아니지만 모든 의사가 신들린 명의가 될 수는 없는 노릇이니 필요하면 갈라 봐야 하는 것 아닌가? 조선은 그렇게 자기만의 관념적 세계에 갇혀 지내며 산업, 기술, 무역의 차원에서 세계의 중심에서 점점 멀어지고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된다. 중화주의 세계관의 종말을 가져온 아편전쟁(제1차 1840년, 제2차 1856년)이 끝난 후 일본은 유럽과 미국에 문호를 개방하며 탈아시아 정책(소위 脫亞入歐)을 추진해 중국 중심의 아시아 질서를 넘어서려는 노력을 했다.6 그러나 조선은 임오군란이 일어났을 때 청나라에 원병을 청하는 실책을 범해 청나라의 한족 출신 관료들에게 휘둘리며 청나라에 더욱 예속되는 잘못된 길7 을 택했으며 결국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하게 된다. 재조지은에 입각한 소중화론에 갇힌 조선 사대부의 안목이 중국을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임시정부가 전승국 지위를 받지 못한 이유

1920년 봉오동전투와 청산리전투에서 대대 내지 연대 규모의 전술적 승리를 거둔 독립군 세력은 그 이후 일본군의 대대적인 추격을 받으며 급격히 전세가 기울었다. 두 전투 이후로 중국과 러시아로 흩어진 독립군 세력은 독자적인 군사 작전을 하지 못했고 주로 중국 깃발 아래서 일본군과 싸웠다. 조선의 젊은이들이 장개석과 모택동의 군대에서 용감하게 싸우며 많은 피를 흘렸지만 태평양전쟁이 종료된 후에 상해임시정부는 전승국 지위를 얻지 못했다. 상해임시정부가 태평양전쟁이 시작되자 일본에 선전 포고를 하긴 했지만 임시정부의 깃발을 들고 전투에 참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당시 미국과 중국의 관계를 보면 미국이 압도적 우위에 있었다. 중국이 항일 무력투쟁을 하는데 있어 물자와 장비를 미국에 의존했고 특히 공군 전력을 많이 의존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상해임시정부가 미국 당국에 중국 군대 내부의 조선인의 존재를 알려 이들을 태평양 전선으로 차출하고, 상해 임시정부 깃발 아래 군대를 편성해 미군과 함께 싸우도록 할 방법은 없었을까?

드골의 자유프랑스(La France Libre)는 북아프리카 프랑스 식민지의 청년들을 설득해 5만 명 규모의 자유프랑스 군대를 편성했다. 미군의 물자와 장비로 무장한 북아프리카 자유프랑스군은 아프리카, 이탈리아, 프랑스에서 싸웠다. 자유프랑스군은 파리 해방 기념 전승 퍼레이드에서 연합군의 맨 앞에 서서 개선문을 통과해 전승국으로서의 지위를 인정받고, 프랑스는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전후 체제 수립 과정에서 UN 안전보장이사회의 상임이사국이 됐다. 이와 비교했을 때 상해임시정부는 마땅히 해야 할 일을 소홀히 한 것은 아닌지 아쉬움이 남는다. 당시 미군은 태평양의 섬에서 전원 옥쇄의 각오로 끝까지 대들며 미군의 최대 출혈을 강요하던 일본군에 시달리고 있었다. 만일 상해임시정부가 조선의 젊은이들을 장개석과 모택동으로부터 차출해 태평양 전선으로 돌리겠다고 제안했다면 미군이 환영하고 협조했을 가능성이 높다.

그렇다면 상해임시정부는 왜 이런 아이디어를 내지 못했을까? 구한말 유림들의 의식 내면을 지배하던 재조지은과 중화의식 때문으로 보인다. 유학자인 유인석 의병장은 수화종신(守華終身)8 을 의병 활동의 목표로 내세웠다고 알려져 있다. 이처럼 존화양이(尊華攘夷)에 입각한 항일 무력 투쟁은 조선을 일제로부터 해방시킨다는 개념보다 일본 오랑캐에게 빼앗긴 소중화를 되찾고 지키는 개념이 우선이었다. 이에 따르면 조선 젊은이들은 중국 깃발 아래서 일본군과 싸우는 것을 낯설지 않게 느꼈을 것이다. 조선 젊은이들이 흘리는 피가 국제 관계에서 어떤 의미를 갖는지 눈여겨보지 못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 것이다. 16세기 말과 17세기 초 두 차례의 큰 전란을 치르는 과정에서 비뚤어진 군주들과 그 신하들이 자신들의 지위를 공고히 하고자 날조한 재조지은과 소중화론이 조선의 수많은 생명을 빼앗고 조선의 부활까지 가로막은 암적인 존재가 된 것은 아닌지 아쉬움을 금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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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의 망령에서 벗어나려면

언론에 비춰진 우리의 자화상을 보면 대체로 중국에 관대하고 일본에 엄격하다. 왜 그럴까? 일제강점기의 아픈 추억 때문이라면 19세기 후반 한족 후예인 감국대신 원세개 치하에서 신음하던 청나라 식민지 조선은 왜 언급하지 않는지 모르겠다. 지난 2000년 동안 중국이 한반도에서 행한 갑질의 총량이 같은 기간 일본이 한반도에서 행한 갑질의 총량보다 훨씬 크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있는가?9 문재인 대통령이 중국을 방문했을 때 우리 수행 기자단이 중국 공안 요원들에게 폭행을 당했는데 왜 공식 항의조차 제대로 못하고 사건을 축소하기 바빴을까? 만약 일본을 방문하는 자리에서 유사한 사고가 발생했다면 광화문 거리에 인파가 쏟아져 나올 때까지 비분강개한 언어로 가득 찬 비난 기사가 넘쳐나지 않았을까?

외교도 마찬가지다. 중국이 예를 갖추지 않는 것은 대국의 풍모로 이해하는 반면 일본은 조그만 외교적 실수도 절대로 용납하지 못한다. 구한말 열강이 한반도에 출몰하고 일본이 조선의 주권을 위협할 때 유림이 내세운 존화척왜(尊華斥倭) 구호에서 한 발짝도 나아가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안타깝다. 재조지은의 망령은 현재까지도 우리 주변에서 서성거리면서 왜곡된 영향을 미치고 있다.

17세기 초에 잘못 설정된 재조지은의 어젠다가 조선을 갉아먹고 21세기인 지금까지도 우리 주변에서 서성거리며 폐를 끼치고 있음을 보면 한 번 설정된 어젠다, 그것도 최고 권력자가 설정한 어젠다가 갖는 위력과 지속성은 상상을 초월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기업도 마찬가지다. 창업주가 설정한 어젠다가 절대적 권위를 발하며 대를 이어 계승되고 있는 경우가 많다. 수십 년, 수백 년을 관통할 만한 어젠다라면 다행이다. 하지만 시대를 넘어설 수 없는 어젠다가 시대를 넘어 계승된다면 기업 성장의 발목을 붙잡고 있는 것은 아닌지 되물어볼 필요가 있다. 창업주의 어젠다를 계승하며 신줏단지처럼 모시는 미덕이 반드시 바람직한 것이 될 수는 없다. 그러기에 기업들은 창업주가 세운 어젠다가 시의성이 있는지 한번쯤 진지하게 고민해야 한다. 월급쟁이 사장은 감히 입 밖에도 내지 못할 수 있다. 따라서 이는 오로지 경영을 승계한 그룹 총수만이 할 수 있는 역사적 과업일 듯하다.


최중경 한미협회장 choijk1956@hanmail.net
필자는 33년간 고위 관료와 외교관을 지냈고 동국대 석좌교수, 고려대 석좌교수, 미국 Heritage 재단 방문연구원, 한국공인회계사 회장을 역임했다. 현재 한미 협력을 증진하는 민간단체인 한미협회의 회장과 자선단체 평가 업무를 수행하는 NGO인 한국가이드스타 이사장을 맡고 있다. 서울대에서 경영학 석사를, 미국 하와이대에서 경제학 박사를 받았다. 저서로는 『청개구리 성공신화』 『워싱턴에서는 한국이 보이지 않는다』 『역사가 당신을 강하게 만든다』가 있다.
동아비즈니스리뷰 351호 Diversity in Talent Management 2022년 08월 Issue 2 목차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