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icle at a Glance기업합병은 왜 종종 무산되는 걸까. 합병에 반대하는 주주들이 주주총회에 참석해 반대표를 던지기도 하고, 가까스로 표 대결에서 이겼지만 반대 주주들의 주식매수청구권 행사에 발목을 잡히기도 하기 때문이다. 또한 주식매수청구권 행사를 신청한 주주들이 너무 많으면 기업의 보유 현금에 비해 행사 신청 금액이 감당 가능한 수준을 넘어설 수도 있다. 이 경우 기업은 주식을 다 매입할 수 없어 합병을 포기하게 된다. 이런 복잡한 제도들이 있는 까닭은 합병이 주주들의 부에 큰 영향을 미치는 중요한 경영 활동이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무사히 합병을 성사하려면 소액주주들의 마음을 얻는 게 중요하다. 두 회사의 통합으로 시너지가 발생해 회사의 미래 가치가 더 높아질 것이라는 점을 설득해야 한다. 이왕이면 업황이 부진해 주가가 하락할 때보다는 주가가 상승할 때 합병을 추진하는 것이 좋다.
2015년 5월26일, 삼성그룹은 계열사인 제일모직이 삼성물산을 흡수 합병한다는 뉴스를 발표했다. 병석에 있는 이건희 회장의 건강 때문에 상속과 함께 그룹의 미래 성장을 위한 지배구조 개편 작업이 진행 중이라고 알려진 가운데 나온 소식이었다. 합병이 실시되는 날은 2015년 9월1일로 정해졌다. 합병 후 소멸 회사인 삼성물산 주식 1주당 존속회사 제일모직의 주식 0.35주를 제일모직이 신규 발행해 삼성물산 주주들에게 교부하는 형식이었다. 합병비율은 법률에 따라 합병 선언 직전 및 그 이전 여러 달 동안의 두 회사 주가 비율에 따라 결정됐다. 단 존속회사의 사명은 제일모직이 아닌 삼성물산으로 남기기로 했다. 삼성그룹의 정체성을 고려해 삼성물산이라는 명칭을 사용하기로 한 것이다.
합병 이후 삼성물산은 삼성그룹의 실질적인 지주회사가 됐다. 합병 이전에는 제일모직이 삼성생명을 지배하고 있었고, 삼성생명은 삼성전자의 지분 7.2%를 보유하고 있었다. 그런데 합병 이후 이 7.2%와 삼성물산이 보유하고 있던 지분 4.1%, 대주주 일가가 보유하던 지분 3.4%이 합쳐지면서 총 14.7%의 지분으로 삼성전자를 지배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삼성전자는 삼성SDS를 지배하고 있기 때문에 이 합병으로 사실상 삼성그룹의 핵심 계열사 거의 대부분이 통합 삼성물산의 직간접 통제하에 들어오게 됐다.
대규모 기업 집단들이 지주회사 체제로 전환하는 이유합병 이후 제일모직(명칭 변경 후 삼성물산)의 최대 주주는 16.5%의 지분을 보유한 이재용 부회장이다. 이부진 사장과 이서현 사장 및 이건희 회장을 포함한 대주주 일가의 지분 비율은 30.4%가 된다. 기타 다른 삼성 계열사들이 약 10%의 지분을 보유하고 있으므로 합병 이후 대주주의 지분율이 합병 전보다 조금 낮아지긴 하지만 경영권의 위협을 받을 정도는 아니다. 합병 이후 삼성그룹의 1대 주주는 이건희 회장에서 이재용 부회장으로 변한다. 이병철-이건희-이재용 회장으로 내려오는 3세 경영 시대가 시작된 것이다. 이재용 부회장은 통합 삼성물산을 제외한 삼성의 다른 계열사 지분은 많이 갖고 있지 않다. 그러나 통합 삼성물산이 삼성그룹 계열사들의 지주회사 역할을 할 정도로 다른 계열사 지분을 상당히 보유하고 있기 때문에 이 부회장은 삼성물산을 통해 다른 계열사들을 지배할 수 있다.
최근 많은 국내 기업이 지주회사를 통한 지배구조로 전환하고 있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대주주가 모든 그룹 계열사 각각을 지배할 필요 없이 지주회사 하나만 지배하면 그룹 전체에 대한 경영권을 행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지주회사가 나서서 다른 계열사 주식의 경영권을 확보할 만큼 취득하면 된다. 따라서 지주회사 체제로 재편하면서 대주주는 각 계열사에 대한 보유주식을 팔아 현금화하고, 이 돈으로 지주회사의 주식을 인수해 지주회사에 대한 지배권을 확립한다. 삼성의 경우는 지분을 사고파는 대신 계열사 합병을 통해 지주회사를 탄생시킨 경우다. 따라서 상대적으로 단기간에 지주회사 체제로 전환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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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에서 설명한 보유 주식의 판매나 합병 대신 주식 교환의 방법으로 대주주가 지주회사에 대한 지분 비율을 늘리는 경우도 있다. 대주주가 A회사의 주식(A주식)과 B회사의 주식(B주식)을 모두 보유하고 있는 경우, B회사 주주들에게 주식 교환을 통해 새로 발행한 A주식을 배분하고, 그 대신 A회사가 주주들로부터 B주식을 넘겨받는 방식이다. 그렇다면 A회사가 B주식을 다수 보유하게 돼 A회사가 모회사, B회사가 자회사가 된다. 그리고 이 주식 교환에 응한 주주들은 B회사의 주주가 아니라 A회사의 주주가 된다. 대주주는 이 방법으로 B주식을 A주식으로 교환한 뒤 원래 보유하고 있던 A주식과 합쳐 A회사 경영권을 충분히 확보할 수 있다. 이것만으로 경영권을 확보하기에 충분치 않다면 대주주의 현금으로 A주식을 더 매입하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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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그룹의 지배구조 변동과 관련한 최근의 사건들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의 합병은 삼성그룹의 지배구조 개편과 관련해 가장 중요한 사건으로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삼성그룹의 지배구조와 관련된 사건들은 지난 몇 년에 걸쳐 지속적으로 일어났다. 그중 중요한 것들만 요약해 소개한다.
2013년 하반기 삼성에버랜드가 제일모직의 패션사업 부문을 인수하고, 급식과 식자재사업부, 건물관리사업부 등을 분사한다. 이전까지만 해도 삼성에버랜드는 리조트나 골프장 운영, 단체 급식 사업 등을 하는 회사였다. 그러다 삼성그룹의 뿌리라고 할 수 있는 제일모직의 핵심 사업을 인수하면서 중요하지 않은 부속 사업들을 별도의 작은 회사로 떼어냈다. 이때까지 삼성에버랜드는 비상장회사로 남아 있었다.
2014년 들어 삼성에버랜드는 회사의 사명을 제일모직으로 변경한 후 12월18일 주식시장에 상장했다. 제일모직의 주가는 상장 직후부터 급등했다. 다수의 언론은 제일모직이 새 삼성그룹의 지주사가 돼 삼성그룹 지배구조 개편의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할 것이라고 예측했다. 당시 삼성그룹의 지배구조를 보면 제일모직이 삼성생명을 지배하고, 삼성생명이 삼성전자의 주식을 다수 보유하고 있었다. 따라서 대주주가 제일모직을 지배하면 삼성생명을 지배하게 될 뿐만 아니라 삼성생명을 통해 삼성전자에도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게 되는 구조였다. 그 결과 상장 시점부터 제일모직과 삼성물산의 합병 발표 시점까지 약 2.5배 정도 주가가 상승했다. 상장 이후의 경영 성과도 매우 우수했다.
이외에도 삼성그룹은 유사한 사업을 영위하는 여러 회사를 정리하고 사업구조를 재편하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2015년 초 삼성테크윈, 삼성탈레스, 삼성종합화학, 삼성토탈 등의 방위산업 및 석유화학 분야 계열사들을 한화그룹에 매각했다. 매각 대금을 받아서 지배구조 개편에 필요한 자금을 마련하는 목적으로 알려졌다. 반대로 이들 회사를 매입한 한화그룹은 이미 기존에 방위산업과 석유화학 계열사들을 거느리고 있었기 때문에 유사 업종의 회사들을 통합해 시너지 효과를 기대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이와 비슷하게 삼성그룹은 2015년 말 삼성정밀화학 등 3개 화학 분야 계열사도 롯데케미칼에 넘겼다.
또한 2014년 삼성중공업(조선 및 해양플랜트 업체)과 삼성엔지니어링(플랜트 엔지니어링 업체)의 합병 소식도 발표됐다. 한화그룹의 경우처럼 비슷한 업종의 두 회사를 합병해서 기업 규모를 키우고 시너지 효과를 얻으려는 목표였을 것이다. 그런데 이 계획은 틀어지게 됐다. 소액주주들이 합병에 반대하고 주식매수청구권을 행사하겠다고 신청했기 때문이다.
주식매수청구권 행사주주들이 주식매수청구권 행사를 신청하면 회사는 사전에 정해진 가격대로 그 주식을 매입해야 한다. 그런데 너무 많은 주주가 청구권을 행사하겠다고 나서면서 회사 입장에서 감당할 수 없는 수준의 막대한 자금이 필요해 졌다. 결국 삼성그룹은 합병을 포기했다. 주식매수청구권과 관련된 이 내용은 너무 복잡하기 때문에 뒤에서 다시 자세히 설명하겠다.
법률에 따르면 기업들이 합병할 때 합병에 반대하는 주주는 주주총회에 참석해 반대 의사를 표시할 수 있다. 만약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주총회에서 합병이 가결된다면 이에 반대하는 주주들은 주식매수청구권을 행사할 수 있다. 주식매수청구권의 행사 가격은 합병회사의 이사회에서 합병 발표 당시의 주가에 따라 사전에 결정한다. 즉, 회사는 합병을 선언하는 것과 동시에 합병에 반대하는 주주들의 주식을 특정 가격에 구매하겠다고 공표하는 것이다.
만약 청구권 행사 가격이 현재 주가보다 상당히 높다면 주주 입장에서는 합병한 후 회사의 성장을 바라면서 주식을 계속 보유하기보다는 현재 시점에서 주식매수청구권을 행사해 현금을 받는 것이 더 유리하다고 판단할 가능성이 높다. 반대로 행사 가격이 현재 주가보다 낮다면 주주들 입장에서는 청구권을 행사하면 손해를 보게 된다. 청구권 행사를 통해 받는 돈이 그 주식을 주식시장에서 매각해 벌 수 있는 돈보다 낮기 때문이다. 따라서 많은 주주가 합병에 동의할 것이다. 주식매수청구권 행사 가격은 법률에 따라 합병 발표 이전 몇 개월 동안의 평균 주가로 결정된다. 상장 주식이 아니라면 가치 평가 과정을 거쳐 가격이 결정된다. 즉, 객관적으로 볼 때 합리적인 수준에서 행사가액이 결정되는 것이다.
주식매수청구권이라는 복잡한 제도를 만들어 놓은 이유는 합병이 회사의 가치, 즉 주주들의 부(富)에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중요한 경영 활동이기 때문이다. 대주주가 소액주주의 의사를 무시하고 합병을 강행할 경우 소액주주들의 권리를 보호하기 위해 이런 보호장치를 마련해 놓은 것이다.
공정하지 않은 합병 비율이 결정됐다고 판단하는 소액주주들은 합병에 반대하는 것 이외에도 회사나 경영진을 상대로 업무상 배임 소송을 제기할 수 있다. 다만, 이 경우 합병 비율이 공정하지 않다는 증거를 제시해야 한다. 글 후반부에서 설명하겠지만 헤지펀드 엘리엇이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의 합병에 반대해 소송을 제기한 것이 이런 예다.
삼성중공업과 삼성엔지니어링의 합병을 시도할 때 대주주가 합병으로 이익을 보겠다는 불순한 의도를 가졌을 가능성은 높지 않다. 일단 대주주가 두 회사의 지분을 보유하고 있지 않고, 그룹 지배구조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하는 회사들도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의도적인 부정이 개입했을 가능성은 상대적으로 낮다고 볼 수 있다.
삼성중공업과 삼성엔지니어링 합병안의 부결문제는 합병 발표 이후에 발생했다. 2013년까지 두 회사의 경영 현황이 모두 좋지 않은 상태였는데 2014년 합병 발표 시점이나 2015년 이후에도 경영 성과가 개선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합병 발표 이전에도 주가가 계속 하락하는 추세였다. 두 회사뿐만 아니라 두 회사가 속한 조선업이나 플랜트/건설업종 거의 대부분의 회사 주가가 계속 하락하고 있었다. 이런 이유에서 삼성그룹 측에서는 플랜트라는 사업 부문이 겹치는 두 회사를 합병해 시너지 효과가 발생하기를 바랐을 것으로 보인다.
합병 선언 이후 2014년도 경영 성과가 좋지 않다는 소식이 알려지면서 두 회사의 주가는 계속 하락했다. 회사가 나서서 자사주 매입 등의 방법을 동원해 주가를 끌어올리려고 노력했지만 대세를 막을 수 없었다. 그 결과 주가가 주식매수청구권의 행사 가격 밑으로 떨어졌다. 행사 가격이 삼성중공업 2만7003원, 삼성엔지니어링 6만5439원인데, 주식매수청구권 신청 마감일에 이르렀을 때의 시가는 삼성중공업이 2만4000원대, 삼성엔지니어링이 5만7000원대였다. 합병 발표 시점인 2014년 9월1일의 주가가 삼성중공업이 2만9000원대, 삼성엔지니어링이 7만2000원대였음을 고려하면 두 회사 모두 20% 정도 주가가 하락한 셈이었다.
결국 대부분의 소액주주가 볼 때 주식을 계속 보유하는 것보다 주식매수청구권을 행사해서 회사에 주식을 사달라고 요청하는 것이 유리하게 됐다. 따라서 주식매수청구권을 행사한다는 신청이 쇄도했다. 상당한 지분을 보유하고 있던 국민연금도 마찬가지였다. 신청 마감일이 경과된 후 신청 금액을 종합하니 삼성중공업은 9236억 원, 삼성엔지니어링은 7063억 원에 달했다. 합병 선언 당시 주식매수청구권 행사 신청 금액이 삼성중공업 최대 9500억 원, 삼성엔지니어링 최대 4100억 원 이상이면 합병을 무효화하겠다고 발표했는데 삼성엔지니어링의 경우 이 금액을 월등히 초과하는 주식매수청구권 행사가 신청된 것이다. 따라서 두 회사는 어쩔 수 없이 합병 무효를 선언했다.
이 사건을 보면 주식매수청구권의 행사 가격이 주식의 현재 시가보다 높다면 청구권을 행사하는 것이 유리하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렇지만 꼭 그런 것은 아니다. 현재 시가가 주식매수청구권 가격보다 낮더라도 앞으로 합병이 성사된 뒤 시너지 효과가 발생해서 이익이 대폭 늘어날 것이라고 예측한다면 회사의 장래 발전 가능성을 믿고 청구권 행사를 신청하지 않을 수도 있다. 이처럼 주식매수청구권의 행사 여부는 회사의 미래 가치에 대한 판단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이 사건의 경우 합병이 부결되자 두 회사의 주가는 모두 크게 폭락했다. 합병을 하면 중복되는 부분이 통폐합돼 시너지 효과가 나고 이익이 증가할 것으로 기대하는 주주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동안 이 기대감 덕분에 열악한 경영 성과에 비해 주가가 상대적으로 높았는데 합병이 실패로 끝나자 회사 상황이 단기간에 개선될 전망이 보이지 않는다는 실망감에 주가가 폭락한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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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식매수청구권 행사 신청이 옳은 결정일까?그 결과 주식매수청구권 행사를 신청해 합병에 반대한 주주들의 경우 청구권을 행사해 현금을 받지도 못하고, 보유 주식 가격만 과거보다 더 하락하게 됐다. 작은 이익을 보려다 더 큰 손해를 본 셈이다. 그러니 청구권 행사가 꼭 더 좋다고 볼 수도 없다. 청구권 행사를 신청해서 합병 무산에 큰 역할을 했던 국민연금에도 상당한 비난이 쏟아졌다. 국민연금이 청구권 행사를 한다고 하니 잘 모르면서 따라 했던 많은 소액주주가 국민연금에 불만을 쏟아낸 것이다.
이처럼 주식매수청구권의 행사 신청 금액 때문에 합병이 무산되는 경우는 종종 발생한다. 2010년 이후 국내에서 이 문제 때문에 합병 계획이 취소된 사례만 봐도 대신증권그로쓰스팩과 썬택과의 합병(2010년), 웅진씽크빅과 웅진패스원의 합병(2012년), 네오위즈게임즈와 네오위즈인터넷의 합병(2012년), 한솔제지와 한솔로지스틱스의 합병(2013년), 원익IPS와 원익테라세미콘의 합병(2016년), 대한해운과 한진해운 사이의 영업양수도(2017년), 휴젤과 동양에이치씨 합병(2018년), 제넥신과 툴젠의 합병(2019년) 등으로 적지 않다.
합병이 불발됐다가 다시 추진해 성사된 사례도 있다. 호남석유화학은 2004년 KP케미칼의 지분 54%를 인수해 자회사로 편입했다. 그 후 석유화학업계의 업황이 점차 악화되고 주가가 하락하는 상황에서 KP케미칼의 잔여 지분을 인수해 합병하려고 했다. 그러나 이 시도는 실패로 끝났다. 2009년 글로벌 금융위기로 주가가 대폭 하락하면서 주식매수청구권 행사 가격이 당시 시가보다 월등히 높아졌기 때문이다. 그 결과 주식매수청구권 행사 신청 금액이 7000억 원에 달했고, 합병을 할 수가 없었다. 절치부심한 롯데그룹은 2012년 호남석유화학, 롯데대산유화, KP케미칼의 세 회사를 합병해 사명을 롯데케미칼로 바꿨다. 이때도 일부 주주가 여전히 반대를 하고 주식매수청구권을 행사했지만 그 금액이 크지 않아 합병은 무사히 진행됐다. 원익IPS와 원익테라세미콘의 합병도 2016년 1차 시도에는 실패했지만 2018년 2차 시도에 성공했다.
합병하는 회사들이 행사 요청 금액을 모두 받아들여 주식을 매입하면 된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하지만 회사가 보유한 현금이나 기타 현금성 자산 금액을 월등히 초과하는 수준까지 행사 요청 금액이 발생하면 회사에서 이를 모두 매입할 능력이 없을 수 있다. 따라서 사전에 ‘우리 회사는 최대 ×××원까지만 주식매수청구권 신청을 받아들이고, 이보다 많은 금액이 신청될 경우 합병을 취소한다’ 또는 ‘합병을 취소할 수 있다’라는 내용을 합병 선언과 동시에 발표하는 것이다.
삼성그룹 입장에서는 유사 업종인 삼성중공업과 삼성엔지니어링을 통합할 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으므로 얼마쯤 기다리다가 시장 상황이 개선되면 다시 합병을 추진할 수 있을 것이다. 다만 많은 주주가 미래에 회사의 가치가 쉽게 증가할 것이라고 판단하지 않아서 주식매수청구권 행사를 신청한 것인 만큼 현재의 업황을 보면 회사의 실적이 뚜렷하게 개선될 때까지는 좀 시간이 필요할 것 같다.
이제 다시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의 합병 건으로 돌아가 보자. 2015년 5월26일 발표된 합병 선언문에는 주식매수청구권 행사액이 약 1조5000억 원이 넘으면 합병 계약을 해제할 수 있다고 명시돼 있었다. 주식매수청구권 행사 가격은 제일모직 15만6493원, 삼성물산은 5만7234원이었다. 당시 주가는 제일모직이 약 18만 원, 삼성물산이 약 6만 원이었으므로 주식매수청구권 행사 가격보다 시가가 높았다. 따라서 소액주주들이 합병에 반대해 주식매수청구권을 행사할 가능성은 낮았다. 주식시장에서 팔면 더 비싼 값을 받을 수 있는데 손해를 보면서 주식매수청구권을 행사할 주주는 드물 것이기 때문이다.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의 합병을 둘러싼 삼성과 엘리엇의 대결양사 합병 발표 후 약 1주일이 지난 2015년 6월4일, 미국계 헤지펀드인 엘리엇매너지먼트(이하 엘리엇)가 5% 이상의 삼성물산 지분을 확보했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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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정 회사 주식 5% 이상의 지분을 보유한 개인이나 단체는 보유하게 된 지 5일 이내에 이를 공시해야 한다는 규정에 따른 것이었다. 합병에 대한 이사회 결정 이전인 2015년 2월 초 4.95%의 주식을 취득해서 보유하고 있었는데 그 이후 5월 말부터 추가로 2.17%를 매수해 7.12%를 보유하게 됐다는 내용이었다. 주식 취득에 사용된 총투자 금액은 7065억 원이었다. 약 6만3000원대 가격에 삼성물산 주식을 매집한 것이다. 그리고 엘리엇은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의 합병에 반대한다는 의사를 발표했다. 주가에 따라 결정된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의 합병 비율은 1대0.35인데, 이 비율이 삼성물산 측에 불리하게 결정돼 삼성물산이 손해를 보는 거래라는 주장이었다. 또한 자신들이 직접 분석해본 결과 공정한 합병 비율은 1대1.6 정도가 된다고 언급했다. 삼성물산의 주식 가격이 5배쯤 올라야 한다는 것이었다.
경영권 분쟁의 시작이 알려지자 외국인 주주들이 삼성물산의 주식을 매수하기 시작했고 주가가 상당히 올랐다. 이후 엘리엇과 삼성은 서로 자신의 주장이 옳다면서 국내 소액주주들을 대상으로 설득 작업에 들어갔다. 삼성 측은 소액주주들의 지지를 얻기 위해 ‘앞으로 주주들과의 소통을 강화하고, 지배구조를 개선하고, 소액주주 보호에 힘쓰겠다’는 등 여러 약속을 했다. 삼성 측에서는 계열사 직원들을 총동원해 소액주주들을 찾아다닌다는 소식도 들려왔다.
당시 국내 모든 언론이 애국심에 호소하면서 삼성 편에 섰다. 엘리엇이 여러 나라에서 어떤 투자를 했으며, 그 과정에서 해당 국가기관이나 기업들에 얼마나 많은 불협화음을 불러일으켰는지 자세히 보도했다. 평상시 삼성에 대해 거부감을 보이고 사사건건 비판하던 몇몇 언론사까지도 이 당시 삼성 편에 섰다는 것은 상당히 재미있는 일이다. 언론들은 대부분 기업의 장기 경영에는 관심이 없이 단기 이익을 본 후 재빨리 주식을 매각하고 철수하는 외국 투기 자금의 폐해를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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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 자금의 공격에 대항할 수 있도록 국내 기업의 경영권을 강화하기 위해 (국회에서 몇 년째 발이 묶여 있는) 몇몇 법안을 허용해줘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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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주총회에서의 치열한 표 대결
엘리엇을 지지한다는 견해를 밝힌 것은 삼성물산 주식을 보유한 한화증권과 일성신약, 그리고 몇몇 시민단체였다. 일부 소액주주는 인터넷을 통해 합병 반대 세력 규합을 위해 노력하기도 했다. 물론 합병에 찬성하는 소액주주들도 상당했는데, 이들은 인터넷 등에서 치열한 논쟁을 벌였다. 이런 논쟁이 한창이던 중 삼성물산은 보유하던 자사주를 우호 세력인 KCC에 매각했다. 회사가 보유 중인 자사주는 투표권이 없지만 자사주를 외부에 매각하면 투표권이 살아나기 때문이다. 주주총회에서 우위를 점하기 위한 행동이었다.
그러자 엘리엇은 주주총회 개최를 금지시켜 달라는 소송과 삼성물산이 자사주를 KCC에 매각하지 못하게 해달라는 소송을 각각 제기했다. 그러나 이들 소송이 법원에서 기각되면서 엘리엇의 예상과는 달리 삼성 측에 유리한 사태가 전개됐다.
2015년 7월17일 열린 주주총회에서 소액주주들이 압도적으로 삼성 측을 지지함으로써 엘리엇은 표 대결에서 완패했다. 법률 규정에 따라 유효 투표 중 3분의 1만 얻으면 합병을 부결할 수 있는데 주주총회에서 전체 주주 중 84%가 참여했다. 따라서 엘리엇은 84%의 3분의 1인 28%만 얻으면 합병을 저지할 수 있었다. 그런데 투표 결과 엘리엇 지지표가 약 25%, 삼성 지지표가 59% 나왔다. 이 정도 삼성 측 지지표가 나왔다는 것은 국내 개인투자자들의 절대다수 외에도 총 34%의 지분을 보유하고 있던 외국인 기관투자가 중 상당수가 삼성 측을 지지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엘리엇 지지를 밝힌 국내 주주들에 추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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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인 주주들 중 3분의 2만 엘리엇을 지지했다면 엘리엇이 여유 있게 승리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엘리엇의 주장에 다른 외국인 주주들 중 절반도 채 동의하지 않은 것이다.
언론 보도를 보면 외국인 주주 중 엘리엇 다음으로 삼성물산의 주식을 많이 보유한 블랙록(3.12% 보유)과 4번째로 많이 보유한 싱가포르투자청(1.47% 보유)이 삼성 측을 지지했다. 이에 반해 네덜란드연기금(0.61% 보유)과 캐나다연기금(0.2% 보유)은 엘리엇을 지지했다. 물론 삼성이 승리할 수 있었던 이유는 다수의 소액주주와 KCC(5.96%)뿐만 아니라 국민연금(11%)이 찬성편에 섰기 때문이다. 국민연금의 이 결정이 청와대의 압력을 받고 부당하게 내려진 것인지를 두고 나중에 논란이 벌어지게 된다.
삼성의 승리와 통합 삼성물산의 출범주주총회가 끝나자 그동안 삼성물산의 주식을 매집했던 일부 외국인 주주가 대거 주식을 매각하기 시작했다. 매각 물량이 쏟아져 나오자 주가는 하락했다. 8월 초에는 주식매수청구권 행사 가격인 5만7234원 이하인 5만5000원 정도까지 주가가 떨어졌다. 단기적으로 보면 주식을 계속 보유해서 제일모직과의 합병을 기다리는 것보다 주식매수청구권을 행사해서 현금을 받는 것이 더 유리한 상황이 된 것이다. 반대표를 던졌던 주주들이 그대로 주식매수청구권 행사를 신청한다면 합병이 부결될 수도 있게 된 것이다.
그러나 신청 마감일인 8월7일까지의 신청액은 6700억 원 정도에 그쳤다. 엘리엇이 보유했던 지분 중 일부와 주주총회에서 엘리엇을 지지했던 일성신약 보유 지분(2.37%) 등이 신청을 한 것으로, 신청한 지분은 8%도 안 됐다. 합병 발표 시 회사가 밝힌 1조5000억 원의 최대 주식매수 금액에 훨씬 못 미치므로 합병은 예정대로 진행됐다. 그리고 2015년 9월1일을 기점으로 통합 제일모직(통합 후 삼성물산으로 개명)이 출범하게 됐다.
주주총회에서 25%의 주주들이 반대표를 던졌는데 이들 중 불과 8% 지분도 안 되는 주주만이 주식매수청구권 행사를 신청했다는 것은 놀랄 만한 수치다. 엘리엇이 7%가 넘는 주식을, 일성신약이 2.37%의 주식을 가지고 있었으니 결국 엘리엇과 일성신약 외에는 주식매수청구권을 행사한 개인이나 집단이 거의 없었던 셈이다. 더군다나 엘리엇은 보유하고 있던 주식 중 4.95%에 대해서만 주식매수청구권을 행사했다.
만약 엘리엇의 주장처럼 ‘삼성물산의 주식 가격이 불합리하게 낮은 시점에서 합병을 해 합병비율이 불리하게 산정된 결과 삼성물산 주주들이 손해를 보게 됐다’면 손해를 보지 않기 위해서는 당연히 주식매수청구권을 행사해야 한다. 또한 이 시점에는 앞에서 설명한 것처럼 주식매수청구권 행사 가격이 당시 시가보다 높았다. 삼성중공업과 삼성엔지니어링 합병의 경우 주가가 주식매수청구권 행사 가격보다 내려가자 주주들 다수가 주식매수청구권 행사를 신청해 합병이 부결된 바 있다. 즉, 반대표를 던진 주주들의 입장에서는 당시 주식매수청구권을 행사하는 것이 어떤 기준에서 봐도 합리적인 행동이다. 그런데 다른 주주도 아니고 엘리엇이 보유 주식 중 일부에 대해서만 주식매수청구권을 행사했다는 것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이다. 이런 엘리엇의 이상한 행동을 보면 엘리엇의 행동에는 무엇인가 숨겨진 이유가 있을 수 있다. 주식매수청구권을 행사한 4.95%를 제외한 나머지 지분은 주주총회 참석자가 결정되는 주주명부 폐쇄 시점이 지나자마자 팔아버려서 더 이상 보유하고 있지 않을 가능성이 있다. 최소의 돈으로 최대의 의결권을 확보하기 위해 잠깐 동안만 주식을 구입했다가 매각한 것이리라.
주주들이 주식매수청구권을 행사하지 않은 이유는?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주주총회에서 반대표를 던진 기타 주주들 중 거의 대부분이 청구권 행사를 신청하지 않았을까. 이에 대해서는 두 가지 가설을 생각해볼 수 있다. 첫째, 반대표를 던진 대다수는 외국인 주주였는데 이들 외국인 주주의 표는 엘리엇이 총수익스와프(TRS, Total Return Swap) 거래를 이용해서 투표권을 사온 것일 가능성이 있다. 돈에 여유가 있는 다른 금융사에 주식을 주주총회 직전 구입하도록 하고, 엘리엇은 이들 금융사의 주식 보유 기간 동안 주가 변동에서 발생하는 손익을 정산해주면서 추가적인 수수료를 지급하는 대가로 투표권을 사온 것일 수 있다는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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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도 이런 계약은 며칠짜리 단기로, 주주들에게 주주총회 참여 권한이 주어지는 주주명부 폐쇄 시점이나 주주총회일이 지나면 종료되는 조건으로 맺어졌을 것이다. 즉, 경제적 실질을 보면 엘리엇이 금융사들의 돈을 빌려 차명으로 제일모직 주식을 잠깐 매입해 주주총회에서 투표권을 행사했다가 계약이 종료되면서 더 이상 그 주식에 대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어 주식매수청구권 행사를 할 수가 없었을 것이라는 추정이다.
이런 추측을 뒷받침하는 증거로는 세 가지가 있다. 첫째, 엘리엇이 삼성물산의 주식을 매입하는 과정에서 약 2%의 주식을 TRS를 이용해서 매입한 것이 2016년 적발돼 금융위원회가 검찰에 수사를 의뢰했다는 점이다. 정권 교체 이후 이 사건 수사가 거의 진행되지 않다가 종결됐지만 적발된 것보다 더 많은 주식을 엘리엇이 유사한 방법으로 취득했을 가능성이 있다. 이런 사항은 수사를 통해서도 진실을 밝혀내기가 힘들다. 외국에서 거래가 이뤄져 국내에는 아무런 증거 자료가 없기 때문이다. 또 다른 증거는 주주총회가 끝나자마자 상당수의 외국인 주주가 삼성물산 주식을 내다 팔았다는 점이다. 이들 주주는 처음부터 주가 변동 등에는 관심 없이 단기간 엘리엇과 TRS 거래를 해서 수수료 수익을 올릴 목적으로 주식을 매수했던 것으로 해석할 수 없다. 계약이 끝나니 바로 필요 없게 된 주식을 팔아버린 것이다.
둘째, 반대표를 던진 주주들 중 상당수는 겉으로만 반대할 뿐 속으로는 합병 때문에 자신들이 손해를 본다고 생각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있다. 손해를 본다고 생각하지 않더라도 전략적으로 행동해 합병안을 주주총회에서 부결하면 자신들에게 좀 더 유리한 방향으로 합병 비율이 조정될 것이라고 기대했을 수 있다. 그래서 투표에서는 반대표를 던졌지만 막상 합병이 가결되니 합병 비율이 실제로는 자신들에게 불리하지 않다고 생각해 청구권 행사를 신청하지 않았다는 가정이다. 즉, 주식을 계속 보유하는 것이 청구권을 행사하는 것보다 유리하다고 생각한 것이다. 또는 앞에서 이미 설명한 한화증권 사례처럼 합병 비율이 불리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정치적인 이유에서 반대표를 던졌을 수도 있다.
이런 사례로는 2015년 발생했던 SKC&C와 SK㈜의 합병을 들 수 있다. 국민연금은 이 합병 계획이 발표된 뒤 계속해서 해당 회사의 주식을 매수했으면서 막상 합병을 의결하는 주주총회에서는 반대표를 던졌다. 합병 계획 발표 이후 주식을 매수한다는 것은 합병 후 미래 전망을 좋게 본다는 뜻인데 주주총회에서는 그 반대로 행동한 것이다. 더욱 재미있는 사실은 합병이 주주총회에서 승인된 뒤에는 주식매수청구권을 행사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이 같은 결정을 보면 당시 국민연금이 경제적으로는 합병이 성사되는 게 더 좋다고 판단했지만 다른 이유에서 주주총회에서 반대표를 던졌을 가능성이 높다는 점을 알 수 있다. 당시 언론 보도를 보면 국민연금이 반대한다 해도 다른 주주들의 압도적 찬성으로 합병이 가결될 것이 명백했다. 따라서 반대표를 경제적이 아니라 정치적인 이유에서 행사했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 일부 시민단체는 합병이 대주주 일가의 경영권 강화를 위한 것이라며 반대하고 있었다. 이를 의식한 국민연금이 소극적인 입장에서 시민단체나 일부 정치권의 비난을 피하려 면피성 투표를 했거나, 또는 적극적으로 나서서 정치적 행동을 했을 가능성이 높다.
물론 모든 주주가 이렇게 합리적으로 여러 가능한 대안을 치밀히 분석해 행동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외국인 기관투자가는 이런 판단을 내리고 전략적으로 행동할 만한 충분한 지식을 가지고 있다. 그렇지만 국내 개인투자자의 대다수는 이런 전략적인 판단을 하지 못했을 것이다. 어쨌든 국내 개인투자자들 중 엘리엇 편에 서서 투표한 사람은 거의 없으므로, 이런 이유에 해당하는 사람들은 많지 않을 것이다. 즉, 이 두 번째 가능성에 해당하는 사람들도 대부분 외국인 투자자로 보인다.
누가 합병 때문에 이익 또는 손해를 봤을까?2017년 하반기 이후 정권이 바뀌자 두 회사의 합병 과정에 정부의 부당한 개입이 있었다거나 합병이 한쪽 주주들에게 일방적으로 유리/불리하다는 등의 논쟁이 다시 불거졌다. 이와 관련된 소송도 국내에서 벌어지고 있는 중이다. 특히 엘리엇은 약 7100억 원의 피해를 봤다면서 투자자-국가 간 소송(ISD)을 제기했다. 정권 고위 인사들이 나서서 이미 합병이 삼성물산 주주들에게 불합리하게 이뤄졌다고 수차례 발표를 했기 때문에 이 소송에서 우리나라가 이기려면 많은 난관이 있을 것이다. 엘리엇의 소송을 지켜보면서 다른 외국인 투자가들도 소송을 제기할 테니 아마 소송가액은 7100억 원보다 훨씬 더 클 것이다.
앞에서 설명한 것처럼 청구권 행사 내역을 살펴보면 주주총회에서 반대표를 던진 외국인 투자가들 대다수의 행동은 겉으로 내세운 주장과 달랐다. 삼성물산 쪽에 불리하게 합병이 이뤄졌다는 엘리엇의 주장에 쉽게 동의할 수 없는 증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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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 합병을 통해 제일모직과 삼성물산의 주주들 중 누가 상대적으로 얼마만큼 이익이나 손해를 봤는지는 몇몇 언론이나 권력기관에서 이야기하는 것과 달리 그렇게 명확하지 않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더라도 이 거래를 통해 분명히 이익을 본 사람이 있다. 바로 삼성그룹의 이재용 부회장이다. 왜 그럴까 생각해 보자.
이재용 부회장은 제일모직의 경영권을 가지고 있다. 제일모직은 삼성생명의 지분을 충분히 보유하여 통제하고 있는데 삼성생명은 삼성전자의 지분을 7.2% 보유하고 있다. 즉, 이재용 부회장은 제일모직과 삼성생명을 통제할 수 있다. 그러나 삼성그룹의 핵심 계열사인 삼성전자를 7.2%의 보유 지분만으로 지배할 수는 없다. 따라서 합병을 통해 삼성전자의 지분 4.1%를 보유하고 있는 삼성물산을 이재용 부회장이 지배하게 되면 7.2%와 4.1%, 가족이 별도로 보유하고 있는 삼성전자 지분 3.4%를 합해 총 14.7%의 지분으로 삼성전자를 지배할 수 있게 된다. 14.7%의 지분비율이 완벽히 삼성전자를 지배하기에는 약간 부족하지만 통합 삼성물산이나 삼성생명 등이 이용 가능한 현금을 이용해 삼성전자 지분을 약간 더 매입하면 부족한 부분을 보충할 수 있다. 이런 이유에서 두 회사를 합병시킬 것이라는 전망은 수년 전부터 널리 알려져 있는 상태였다.
만약 이 합병안이 부결됐다면 삼성그룹이 삼성전자에 대한 지배권을 명확히 하기 위해서 취할 수 있는 방법은 다음과 같다. 우선, 제일모직과 이재용 회장이 각각 현금을 마련해 삼성물산의 주식을 사야 한다. 경영권을 행사할 수 있을 만큼 충분하려면 대략 최소 15% 정도는 돼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엄청난 자금과 시간이 필요하다. 이 정도의 대규모 자금을 어느 날 갑자기 마련할 수도 없고, 자금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 정도의 막대한 물량의 주식을 갑자기 주식시장에서 살 수도 없다. 그러니 이런 일을 모두 완료하는 데는 몇 년의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평상시라면 10년쯤 걸리더라도 이런 과정들을 차근차근 밟아갈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당시 이재용 부회장은 그렇게 기다릴 만한 시간적 여유가 없었다. 이건희 회장이 병석에 있었기 때문이다. 만약 안타깝게도 이건희 회장이 갑자기 사망한다면 회장의 재산(삼성그룹의 계열사 주식)은 이재용 회장에게 대부분 상속될 것이다. 그렇다면 막대한 상속세를 낼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상속받은 주식의 반쯤은 팔아야 한다. 이 경우 이재용 부회장이 삼성물산이나 삼성전자를 계속해서 지배할 수 없을 것이다. 아마도 삼성그룹은 해체되고 각각의 회사는 명확한 대주주가 없는 국내 여러 기업처럼 바뀌어 갈 것이다. 정권에 따라 CEO가 바뀌는 등 정부의 영향을 받게 될 확률도 있다. 따라서 삼성그룹은 빠른 시간 안에 그룹의 승계 문제를 마무리 짓기 위해 계열사 합병이라는 방법을 택했을 것으로 추론할 수 있다. 주주총회의 의결을 거쳐야 하지만 3개월 정도면 충분히 합병을 완료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삼성이 앞으로 해야 할 일은?이 합병을 통해 주주들이 손해를 본 것인지는 불확실할지 모른다. 그렇다 하더라도 삼성의 대주주 일가는 삼성그룹 경영권을 지킬 수 있게 됐으므로 상당한 이익을 얻은 것이 명백하다. 그렇다면 대주주 일가는 무엇을 해야 할까? 앞으로 최소한 이 이익의 일부라도 한국 사회에 환원하기를 바란다. 삼성그룹의 발전에 직원이나 국민도 기여한 것이 분명한 만큼 이들에게도 과실의 일부가 돌아가야 할 것이다. 삼성이 엘리엇과 분쟁을 벌이고 있던 중 주주들의 지지를 호소하는 과정에서 앞으로 주주들을 존중하며 사회에 더 많은 기여를 하겠다는 약속을 한 바 있다. 그 약속을 꼭 지켰으면 하는 바람이다.
학생들을 가르치는 교수인 필자 입장에서 볼 때 청년실업 문제는 매우 심각하다. 특히 최근 고용 상황이 급속히 악화되면서 이 문제가 더욱 심각해졌다. 실업 문제 해결을 위해 삼성이 고용을 창출할 수 있는 국내 시설 투자에 적극 나서줬으면 한다. 이런 여러 가지 노력이 꾸준히 진행돼야 일부 사람이 가진 반(反)삼성 정서도 점차 완화될 것이다.
삼성그룹은 최근 또 다른 문제에 직면해 있다. 현 정부가 금산분리 원칙을 강조하면서 삼성생명을 그룹에서 분리해 매각할 것을 강력하게 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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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를 강제하는 법률도 현재 국회에 제출돼 있다. 삼성생명을 독립 회사로 분리한다면 삼성생명이 보유하고 있는 삼성전자 주식을 어떻게 할지에 대한 문제가 발생한다. 삼성생명이 보유한 삼성전자 주식(2019년 말 현재 8.8%)이 엄청나기 때문에 이 주식을 살 만큼 많은 돈을 가진 다른 삼성그룹 계열사가 없다. 그렇다고 해서 그냥 삼성생명을 삼성그룹에서 떼어내 버린다면 삼성전자에 대한 지배권이 흔들릴 것이다. 대주주 일가와 삼성물산이 보유한 삼성전자 지분을 다 합쳐 봤자 2019년 말 현재 10.8%에 불과한데 상속세를 내고 나면 이 지분 비율이 크게 떨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만약 이런 일이 실제로 일어난다면 삼성전자의 1대 주주가 국민연금으로 바뀐다. 2019년 말 현재 국민연금이 삼성전자의 지분을 11% 보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몇몇 정치인이 적극적으로 금산분리 원칙을 강조하는 이유도 바로 이 점을 의도한 것이다. 그래서 삼성을 ‘국민기업’화하자는 소리가 나오는 것이다.
또한 삼성생명의 주식 중 삼성그룹이나 대주주 일가가 보유한 물량도 불특정 다수의 주주에게 분할 매각하게 된다면 매각 후 삼성생명의 1대 주주는 국민연금(2019년 말 현재 5.89%), 2대 주주는 이마트(2019년 말 현재 5.88%)가 된다. 정부가 삼성생명에 대해서도 큰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실제 정부의 영향력은 이 수치보다 훨씬 크다. 국민연금의 돈을 받아 운용하는 국내외 자산운용사들의 경우, 만약 정부가 국민연금을 이용해 삼성생명을 지배하겠다고 나선다면 당연히 국민연금이 원하는 대로 투표를 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물론 삼성의 대주주들이나 삼성물산은 삼성생명 주식 매각을 통해 마련한 돈으로 삼성전자의 지분을 취득해 삼성전자 경영권을 지키려고 노력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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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 둘 중 삼성생명은 포기해야 하며 돈을 모두 모은다 해도 삼성전자의 경영권을 지키기가 쉽지 않다.
이런 과정에는 엄청난 시간과 노력, 그리고 자금이 소요될 것이다. 그래서 현재 삼성물산이 ‘강남 사옥을 매각하는 등의 방법을 이용해서 현금을 마련해 차곡차곡 준비하는 것이 아닐까’ 하고 추측한다. 또한 대주주 일가도 2015년 이후 계속해서 조금씩이지만 삼성전자 주식을 사 모아서 지분 비율을 늘리고 있다. 어서 빨리 이런 과정을 완료하기를 바란다. 삼성그룹의 대표회사인 삼성전자의 경우 매출액 기준 90% 이상, 이익은 거의 100%가 수출로부터 창출되고 있다. 그만큼 삼성은 국민 생활과 직결돼 있는 기업이고 삼성전자가 없는 삼성그룹은 상상하기 힘들 정도다. 삼성이 앞으로 더욱 발전해서 더 많은 국부를 창출하고, 그렇게 창출된 국부가 국민들에게 더 많이 돌아갈 수 있게끔 노력하기를 바란다. 그래야 국민들의 사랑과 신뢰를 받는 기업으로 재탄생할 수 있고, 그 결과 일부 인사가 가진 반(反)삼성 정서도 완화할 수 있을 것이다. 필자의 개인적인 생각일 수도 있지만 정부가 삼성전자를 지배하면서 회사의 최고경영진을 임명한다면 삼성전자는 앞으로 어떻게 될까? 삼성전자의 미래뿐만 아니라 국가의 미래가 염려스럽다.
우리가 배울 수 있는 교훈모든 합병 시 주주들이 주식매수청구권을 보유하는 것은 아니다. 소규모 합병의 경우 이런 복잡한 과정 없이도 합병이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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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주총회를 별도로 열 필요도 없으며 이사회의 결의만으로 합병을 할 수 있다. 따라서 합병에 걸리는 시간을 절반 가까이 대폭 단축할 수 있다.
예를 들어, 2014년 동국제강은 자회사 유니온스틸을 합병했다. 유니온스틸의 주주들은 유니온스틸의 주식을 동국제강에 넘기고, 대신 동국제강이 발행하는 신주를 받았다. 이때 합병 결과 동국제강의 발행주식은 약 9000만 주가 됐는데 유니온스틸의 주주들에게 신규 발행되는 주식은 약 650만 주로 발행 주식 중 7%에 불과했다. 따라서 법률에서 정한 10% 기준 미만으로 소규모 합병에 해당됐다. 발행 주식 수가 이렇게 적었던 이유는 동국제강이 이미 유니온스틸 주식의 65%를 보유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나머지 지분 35%를 보유 중인 소액주주들에게만 신주를 발행해 배부하는 바람에 발행 주식 수가 7%에 불과했다.
동국제강의 사례를 보면, 주주총회를 열지 않고 간단히 합병을 성사하려면 합병 선언 전 꾸준히 회사의 주식을 사모아서 지분 비율을 높이면 된다는 점을 배울 수 있다. 소규모 합병의 사례를 검색해보니 KG동부제철의 동부인천스틸 합병(2020년), 삼성제약의 삼성제약헬스케어 합병(2019년), 롯데정보통신의 현대정보기술 합병(2019년), 포스코켐텍과 포스코ESM 합병(2019년), 삼양옵틱스와 옵트라움 합병(2017), NXC의 NXCL 합병(2017년), LG화학의 LG생명과학 합병(2016년) 등 다수가 발견된다.
또 한 가지 배울 수 있는 교훈은 합병 성공에 필요한 조건이다. 삼성중공업과 삼성엔지니어링의 합병이 무산된 것은 경영 환경이 악화돼 주가가 계속 하락했기 때문이다. 과거의 주가에 기초해 결정되는 주식매수청구권 행사가액이 상대적으로 현재 주가보다 상당히 높아서 발생한 일이다. 호남석유화학과 KP케미칼의 합병이 2009년 실패한 상황도 거의 똑같다. 현재 주가보다 신주인수권 행사 가격이 높으니 상당수의 주주가 불확실한 미래를 믿고 기다리기보다는 현재의 확실한 이익을 선택하는 의사결정을 한 것이다. 이를 보면 업황이 부진해 주가가 하락하는 상황에서 합병을 추진한다면 주주들의 동의를 얻기 어렵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다. 따라서 합병 기업과 피합병 기업 모두 주가가 하락하는 상황이 아니라 주가가 상승하는 상황에서 합병을 추진해야 성공 가능성이 높다.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의 합병이 큰 논란이 됐던 이유도 합병 당시 제일모직은 주가가 상승하는 상황이었지만 삼성물산은 주가가 하락하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이상에 걸쳐서 상당히 복잡한 내용들을 정리했다. 우리나라 기업들과 투자자들이 이 글을 통해 합병과 관련된 여러 가지 사항을 배우고 활용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국내 사례를 보면, 구조조정 목적의 합병은 불경기 때 실시되는 경우가 많다. 이 경우 앞서 설명한 것처럼 주가가 하락하는 상황에 합병이 실시되므로 주주총회에서 합병이 부결될 가능성이 높다. 따라서 불경기가 닥치기 전 미리미리 미래를 예상해 행동하는 지혜가 필요하다. 일이 발생한 후 대처하는 것은 대부분의 사람이 할 수 있다. 그러나 현명한 경영자라면 일이 발생하기 전에 미리 준비를 해놓거나 그런 일 자체가 일어나지 않도록 대비할 수 있어야 한다.
최종학 서울대 경영대학 교수 acchoi@snu.ac.kr필자는 서울대 경영대학 학사와 석사를 거쳐 미국 일리노이주립대에서 회계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홍콩 과기대 교수를 거쳐 서울대 경영대학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서울대에서 우수강의상과 우수연구상을 다수 수상하는 등 활발한 강의 및 연구 활동을 하고 있다. 저서로 『숫자로 경영하라』 시리즈 1,2,3,4권과 『재무제표 분석과 기업 가치평가』, 수필집 『잠시 멈추고 돌아보는 시간이 필요한 순간』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