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계를 통해 본 세상
편집자주
최종학 서울대 교수가 딱딱하고 어렵게만 느껴지는 회계학을 쉽게 공부할 수 있도록 ‘회계를 통해 본 세상’ 시리즈를 연재하고 있습니다. 이 시리즈를 통해 독자들이 회계를 좀 더 친숙하게 받아들이고 비즈니스에 잘 활용할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독자 여러분의 많은 성원 바랍니다.
2012년 2월3일 금요일 저녁, 주식시장이 마감된 후 ㈜한화는 ‘김승연 회장 등 한화그룹 임원 5명이 지난 2011년 1월29일 한화S&C㈜의 주식을 저가에 매각하고 위장 계열사의 부채를 다른 계열사에 전가하는 등 전체적으로 회사에 약 899억 원의 손해를 입힌 혐의(배임)로 검찰에 기소됐다’는 내용을 공시했다. 무려 1년도 더 지난 내용을 갑자기 공시한 것이다.
이 공시는 주식시장에 상당한 파장을 가져왔다. 한국거래소 규정에 따르면 대기업이 자기자본금액 대비 2.5%(중소기업은 5%) 넘는 금액과 관련해 횡령 및 배임 혐의가 발생하면 이를 공시해야 한다. 공시 시점은 해당 사실이 확인된 때다. 이 사건은 횡령 및 배임 혐의 금액이 자기자본 대비 3.88%에 해당하므로 공시 대상이다. 그런데 검찰에 기소된 후 1년이 지나서야 공시가 나왔다. 심각한 규정 위반인 셈이다.
자발적인 공시도 아니었다. 이 사건에 대한 법원 판결이 조만간 내려질 것이라는 사실이 언론에 보도되면서 한국거래소 공시 담당자가 회사에 연락해 요구한 후에야 ㈜한화는 공시를 했다. 거래소 요청을 받고 곧바로 공시한 것도 아니다. 이후에도 시간을 상당히 지체하다가 주식시장이 문을 닫은 후에야 공시했다. 금요일 저녁부터 일요일까지는 주식이 거래되지 않는다. 이 점을 노려 금요일 저녁이라는 시간을 골라 늑장 공시를 한 것 아닌지 의심스럽다는 내용이 다수 언론에 보도됐다.
공시가 나오자마자 주식시장은 발칵 뒤집혔다. 횡령 및 배임 혐의 금액이 커서 상장폐지 실질심사 대상에 해당하는 수준이었기 때문이다. 만약 ㈜한화처럼 시가총액 3조 원 규모의 기업이 갑자기 상장폐지되면 한화 주식을 갖고 있는 수많은 소액주주들은 그야말로 마른하늘에 날벼락을 맞는 셈이다. 주가 폭락은 물론 보유 주식을 처분하는 자체가 아예 불가능할 수도 있다. 금요일 밤, 거래소는 일단 규정에 따라 월요일인 2월6일부터 상장폐지 실질심사 결론이 날 때까지 거래를 정지시킨다고 발표했다.
거래소는 2월5일 일요일 급하게 회의를 열었고 토론 결과 상장폐지 대상에 해당하지 않는다는 결론을 내렸다. 따라서 월요일인 2월6일 한화 주식은 거래정지 없이 거래됐다. 주식시장이 열리자마자 한화그룹 거의 전 계열사의 주가가 하락했다. 언론은 한화그룹의 경영리스크가 이 사건을 계기로 크게 부각됐다고 보도했다. 비슷한 상황의 다른 기업들은 더 오랜 기간 거래정지를 당했다가 상장폐지 여부가 결정된 데 반해 한화는 휴일인 일요일에 회의를 열어 결정을 내렸다는 점에서 대기업 봐주기가 아니냐는 비난도 거셌다.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은 이 사건이 벌어진 후 2012년 8월 중순, 배임행위에 대한 법원 판결에 따라 4년 징역 및 벌금 51억 원을 선고받고 구속 수감됐다. 검찰 수사가 진행되면서 배임 및 기타 혐의금액이 6400억 원으로 크게 불어났다. 엄청난 금액이다. 처음에는 9년 징역과 1500억 원의 벌금이 구형됐다가 상당 부분이 무혐의 처리되면서 최종 판결은 상당히 경감됐다. 김 회장 외에 한화그룹 고위 임원 2명 역시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한화 측에서 항소 의사를 밝혔으니 앞으로 재판은 상당히 오래 지속될 것으로 보인다.
과거 사례를 보면 대기업 회장들은 유죄 판결을 받더라도 대부분 집행유예 처분을 받아 판결 직후 석방되곤 했다. 수감되더라도 반년쯤 지나면 질병을 이유로 보석을 신청해 풀려났다. 하지만 최근 대기업에 대한 반감이 상당하기 때문에 이번에는 쉽게 끝날 것 같지 않다. 유죄판결 받은 내용을 과거 사건들과 비교하면 형량도 상당히 큰 편이다. 이 때문에 비슷한 배임 혐의로 재판을 기다리는 다른 대기업 회장들도 충격을 받았을 것이라는 보도가 나기도 했다. 수감됐던 김 회장은 생명이 위태로울 정도로 건강이 급속도로 악화되는 바람에 2013년 1월 초 구속 집행정지 결정이 내려져 감옥에서 풀려나 병원에 입원한 바 있다.
공시지연 이유와 상장폐지 실질심사
필자는 한화그룹이나 김승연 회장이 범한 배임 사건에 대해서는 자세한 내용을 알지 못하고 전문가도 아니다. 그 부분에 대해 보다 자세한 정보를 원한다면 판결문을 구해 읽어보면서 법률 공부를 해야 할 것이다. 다만 배임 혐의에 대해서는 무엇이 배임인지를 명확히 규정하는 방식으로 법률이 개정돼야 할 것이라는 개인적인 의견 정도 갖고 있을 뿐이다.
사실 과거 배임죄에 대한 재판 결과들을 검찰 기소 내용과 비교해 보면 검찰 기소는 상당히 부풀려져 있다. 결과적으로 배임죄는 무죄판결 받는 비율이 다른 죄와 비교할 때 상당히 높고 유죄판결을 받을 때 유죄로 인정되는 내용이 검찰이 기소에서 언급한 내용과 차이가 많아 보인다. 경영자가 경영상 판단으로 투자했더라도 실패하기만 하면 배임죄를 적용할 수 있을 정도로 법률이 애매모호하고 포괄적이기 때문에 발생하는 현상이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향후 법률 개정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 부분에 전문 지식을 갖고 있지는 않으므로 논의의 대상을 법률이 아닌 회계, 그중에서도 공시에 제한하도록 하겠다.
먼저 한화그룹이 공시를 1년 이상 하지 않은 이유가 무엇인지 보자. 한국거래소 상장규정에 따르면 경영상 중요한 사건은 공시 대상이다. 2011년 4월1일 이전까지는 대주주가 횡령이나 배임으로 판결된 시점에 공시를 해야 한다는 규정이 있었다. 그러다 4월1일자로 규정이 개정되면서 자기자본 대비 2.5% 이상의 횡령 또는 배임 혐의가 확인되면 상장폐지 실질심사를 받아야 한다고 규정이 강해졌다.
한화그룹은 공시를 1년 이상 하지 않은 이유를 규정에 대한 해석이 달랐다고 변명했다. 2011년 1월 검찰이 기소하기는 했지만 ‘횡령이나 배임 혐의가 확인된 시점’을 ‘법원의 확정 판결을 받았을 때’로 받아들였다는 주장이다. 또한 회사 입장에서는 검찰의 기소 금액이나 내용에 동의하지 않고 재판에서 승리할 것으로 판단했기 때문에 공시할 필요성을 느끼지 않았다고 설명했다. 또한 공시규정 개정에서 변경된 ‘확인된 시점’ 조항이 2011년 1월 벌어진 사건에 소급 적용된다는 점을 연결해서 인지하지 못했다는 내용도 덧붙였다. 2012년 2월 한화그룹에 대한 재판이 임박했다는 소식이 언론에 보도됐고 거래소에서 공시해야 한다는 점을 알려온 후에야 ‘확인된 시점’의 해석을 잘못했고 본 사건도 소급해서 해당된다는 것을 깨달았다는 것이다. 규정이 바뀐 것을 실수로 몰랐다고 하더라도 규정이 바뀌기 전에 벌어진 일에 소급 적용하는 것은 부당하다는 반론도 제기했다.
필자는 이 주장의 진위 여부를 알지 못한다. 다만 ‘기계가 아닌 사람이 하는 일이니 그런 실수를 하거나 규정에 대한 해석상 차이가 있을 수도 있겠다’는 점은 이해한다. 또한 한 회사만 관련된 것이 아니라 그룹의 여러 계열사가 동시에 관련된 일인 만큼 어느 주체가 공시를 해야 하는지 명확하지 않을 수 있었을 것이라고도 본다. 하지만 중소기업이 아닌 대기업에서, 일반 임원이 아니고 회장과 관련된 일에 이렇게 중대한 실수가 있었다는 점은 한화그룹이 공시 인력과 조직을 대폭 보완해서 앞으로는 이런 일을 되풀이하지 말아야 한다는 교훈을 준다. 한화 말고 다른 대기업에서, 특히 대주주와 관련된 일로 이렇게 큰 공시 관련 사건이 벌어진 사례는 본 적이 없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언론에서 이 사건을 접한 사람들 상당수가 한화의 설명을 믿지 않는다.
어쨌든 검찰에서 최초 기소한 금액 899억 원은 자기자본금액 대비 2.5% 이상인 3.88%에 해당하기 때문에 공시 대상이 될 뿐 아니라 상장폐지 실질심사 대상에 해당됐다. 상장폐지 여부가 최종 결정될 때까지 거래가 정지되기 때문에 한화는 2월6일 월요일부터 거래정지가 될 예정이었다. 상장폐지 실질심사 제도는 상장폐지 여부를 결정하는 심사가 아니다. 상장폐지 여부를 결정할 심사가 필요한지 살펴보는 1차 심사다. 몇 가지 내용을 간단히 조사해서 상장폐지할 정도가 아니라면 거래가 신속하게 재개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제도다. 그렇지 않다면 좀 더 자세한 내용을 2차로 심사해서 상장폐지 여부를 결정한다. 따라서 상장폐지 실질심사를 통해 상장폐지 심사를 하기로 결정했다고 해서 반드시 상장폐지되는 것은 아니다. 이 제도가 만들어진 2009년 이후 한화 사건이 벌어진 2012년 초까지 상장폐지 실질심사를 받은 기업 중 실제로 상장폐지된 기업은 50% 정도라고 한다. 한화처럼 상장폐지 실질심사 대상이 아니라는 결정을 받은 기업도 상당하기 때문에 실제로는 1차 심사를 받은 기업 중 약 3분의 1 정도가 상장폐지까지 이르는 셈이다.
한화 사건의 파장이 커진 것은 ‘상장폐지 실질심사 대상에 해당하는지 판단한다’는 보도내용 자체가 상당한 혼란을 가져왔기 때문이다. 자세한 절차를 알지 못하는 필자도 처음에는 상장폐지 여부를 결정하는 심사가 진행될 것이며 심사를 받으면 상당수 기업이 상장폐지될 수 있는 것으로 오해했다. 실제 상장폐지가 결정되면 개인 소액 투자자들이 주식을 거래할 수 없기 때문에 엄청난 타격을 받게 된다. 한화 사건에서도 많은 소액 투자자들이 곧바로 상장폐지되는 것으로 알고 놀라서 민감하게 반응했을 것이다. 이 일 이후 거래소는 혼란을 줄이기 위해 이 제도의 이름을 ‘상장 적격성 실질심사’로 바꾸겠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상장폐지’라는 용어를 ‘상장 적격성’으로 바꾼다고 해서 투자자들의 인식이 크게 바뀔 것 같지는 않다. 이런 일이 되풀이된다면 오해를 불러일으키지 않을 만큼 제도를 자세히 소개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어쨌든 2013년 5월부터 제도의 명칭이 변경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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