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린턴 정권의 명재상으로 불렸던 로버트 루빈 전 미국 재무장관은 2009년 1월 말 한 토론회에 참석해 ‘시가평가(mark-to-market) 회계제도’에 대한 비판을 쏟아냈다. 루빈은 시가평가제도가 세계 금융위기를 야기한 원인 중 하나라고 주장했다. 특히 ‘자산 가격의 심각한 악순환(vicious circle of asset value)을 가져오기 때문에 시가평가제도를 당장 폐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많은 금융기관들도 시가평가제도를 유예하거나 폐지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들은 시가평가제도가 없었다면 이번 금융위기가 일어나지 않았거나, 일어났더라도 미풍에 그쳤을 것으로 확신하고 있다.
유럽연합(EU) 15개국 정상회의가 시가평가제도 개선을 촉구한 직후인 2008년 10월, 국제회계기준위원회(IASB)는 국제회계기준(IFRS)을 개정해 시가평가의 다른 이름인 공정가치(fair value) 회계처리 적용을 완화했다. 이후 열린 G20 정상회의에서도 복잡한 금융상품에 대한 가치평가 기준 개선 방안을 연구하기로 했다.
이 회의에 참석한 한국은 주도적으로 회계기준 변경에 대한 연구를 수행하겠다고 밝혔다. IASB 모임에도 더욱 적극적으로 참가해 한국의 입장을 향후 회계기준 개정에 반영하겠다고 덧붙였다. 심지어 자발적으로 각 참가국이 나눠서 지불하는 분담금 중 한국의 분량을 늘리겠다고도 공표했다. 국제사회에서 한국의 발언권을 높이려는 의도다.
한국은 현재 독자적 회계기준을 사용하고 있으나, 2012년부터는 국제회계기준을 그대로 사용할 예정이다. 하지만 시가평가제도 적용 완화에 관한 사안은 국제회계기준을 신속히 도입했다. 금융감독원은 2008년 결산부터 기업들이 시가평가 완화 제도를 사용할 수 있도록 허용했다. 일본도 마찬가지다.
미국 의회도 2008년 말 증권거래위원회(SEC)에 시가평가제도의 효과와 문제점에 대한 연구를 수행하도록 하고, 시가평가제도를 바꿀 수 있는 권한까지 부여했다. 이에 따라 재무회계기준위원회(Financial Accounting Standards Board·FASB)는 2009년 3월 말 시가평가제도 완화안을 발표했다.
금융기관들의 자산 투매 이유
그렇다면 도대체 왜 시가평가제도가 비난받는지 살펴보자. 사실 회계처리 방법이 금융위기의 원인이라는 주장은 상당한 과장이다. 필자는 금융위기의 주범으로 비난받는 월가 금융기관들이 다른 희생양을 찾기 위해 회계처리 방법을 언급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1997년 IMF 금융위기가 한국을 덮쳤을 때 가장 큰 책임을 져야 했던 여야 정치권이 기업들에 책임을 떠넘긴 사례와 마찬가지다. 필자가 생각하는 이번 금융위기의 주원인은 단기 성과에만 입각한 성과평가체계다.(DBR 26호 회계를 통해 본 세상 ‘눈앞의 이익만 본 평가가 위기 초래’ 참조)
물론 시가평가제도가 금융위기의 신속한 전파 및 악화에 중요한 역할을 하긴 했다. 금융위기가 시작되자 많은 금융기관들이 보유하고 있던 자산의 가치가 급락했다. 전통적 투자 수단인 주식 및 채권 가치뿐 아니라 자산유동화증권(ABS), 신용부도스와프(CDS) 등 파생상품 가치도 급전직하했다. 이 때문에 금융기관, 특히 상업은행이 아닌 투자은행 업계는 막대한 미(未)실현 평가 손실을 입었고, 그 결과 엄청난 당기 순손실을 기록하고 말았다.
이때 투매가 일어난 이유는 3가지다. 첫째, 은행들은 국제결제은행(BIS)이 정한 은행의 건전성 규제를 위한 자기자본비율(BIS 비율)을 최소 8% 이상으로 유지해야 한다. BIS 비율은 자본을 자산으로 나눈 비율이다. BIS 비율을 계산할 때는 전체 자산 금액을 분모로 사용하지 않고, 자산의 위험 정도에 따라 가중치를 부여해 계산한다. 즉 위험가중치 조정 자산 금액을 분모로 사용한다. 물론 자본도 대차대조표에 보고된 자본 수치가 아니라 약간의 조정이 포함된다.
그런데 이번 금융위기의 주범인 파생상품의 투자 위험은 매우 높기 때문에, BIS 비율 계산 시 거의 자산 가치를 인정받지 못한다. 즉 현금을 주고 파생상품을 구입할 때 BIS 비율을 계산하면, 현금을 그대로 보유했을 때보다 낮은 BIS 비율이 나온다. 따라서 BIS 비율을 일정 수준 이상 유지해야 하는 금융기관들은 파생상품의 매각을 원했다. 파생상품을 보유하면 할수록 은행은 손해를 보기 때문이다. 금융위기 전에는 파생상품의 위험이 이렇게 클 것으로 예상한 사람이 없었으므로, 투자 목적으로 보유했던 파생상품을 팔 이유가 거의 없었다.
둘째, 금융당국의 규제다. 금융기관은 신용등급이 일정 수준 이상인 증권만을 보유해야 한다. 일반적으로 신용등급 BBB+ 이상을 투자 적격 등급, 그 미만을 투자 부적격 등급이라고 평가한다. 금융위기 전 많은 금융기관들은 모기지 대출금을 담보로 발행한 주택담보부증권(MBS)을 보유하고 있었다. 금융기관은 보유 채권의 신용등급이 일정 수준 이하로 내려가면 무조건 해당 증권을 매각해야 한다. 금융위기 후 많은 증권, 특히 MBS의 가격이 폭락하고 신용등급도 떨어졌으므로 많은 금융기관들이 규정에 의해 보유했던 MBS를 매각할 수밖에 없었다.
셋째, 유동성 문제다. 금융기관의 경영 성과가 나빠지자 투자자들은 만기가 돌아온 상품을 재투자하지 않고 자금을 회수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현금이 부족해져 부도 위기에 몰린 금융기관들은 자산을 매각해 현금을 마련하려고 했다.
이 3가지 이유 때문에 금융기관들은 보유 중인 파생상품이나 채권을 매각할 수밖에 없었다. 문제는 갑자기 거의 모든 금융기관들이 자산을 매각하려고 나섰지만, 이를 사려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는 점이다. 사려는 사람이 없자 자산 가격이 정상보다 더욱 낮은 수준까지 떨어졌고, 자산 가격 하락의 악순환이 시작됐다.